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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156화 (156/605)

156화. 핸드 캐논

156화. 핸드 캐논

로벨은 말을 아꼈다. 저주받은 자, 버림받은 자, 옛 신의 실패작, 악마의 사생아 등등 수많은 별명을 가졌으며, 그중 무엇 하나 호의적이지 않았다. 로벨이 침묵하자 도너반 자작이 조소를 띄었다.

“그 심정을 이해하오. 성 밖의 괴물과 차이가 없으니 불쾌할 것이오.”

“그렇지 않소.”

로벨이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불쾌한 것이 아니오.”

로벨은 안 좋은 어휘력을 최대한 쥐어짜냈다.

“옛 신의 저주란 것도 믿지 않소. 옛 신이 이토록 잔인할 리 없으니. 경은 그저 운이 안 좋아 몹쓸 병에 걸렸을 뿐이오. 그 점이 안타깝고 또 안타깝소. 그리고 경의 고통을 온전히 알지 못한 본인이 위로하기도, 격려하기도 조심스러울 따름이오.”

도너반 자작이 웃었다. 철가면은 차갑지만 웃음은 따뜻했다.

“실로 고마운 말씀이오.”

로벨은 조그맣게 안도했다. 도너반 자작은 붕대를 고치고 소매를 내려서 짓무른 피부를 숨겼다.

“본인이 해야 할 일을 대신 해주었으니, 본인이 가져야 할 것을 내줘야겠지. 원하는 것이 있소?”

어린 집사나 리암 수사가 이 자리에 있었으면 기뻐서 춤을 췄을 것이다.

까마귀 성은 크지 않지만, 북부대로의 출발점이자 검은 숲으로 통하는 천혜의 요새였다. 이곳의 이권을 차지하면 교역 도시 하나를 가지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무재에 비해 상재가 부족한 로벨은 까마귀 성을 군사적 관점으로 볼 뿐 경제적 관점으로 보지 못했다.

“눈이 녹으면 왕의 군대가 올 것이오.”

도너반 자작이 두 손을 모아 쥐었다. 긴장, 그리고 공포가 엿보였다. 전쟁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사람’이 무서운 듯했다.

“그날을 대비해서 군사와 물자를 준비하시오.”

“...그것이 전부요?”

“응? 뭐가 또 있어야 하오?”

도너반 자작은 가면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소리 내어 ‘하하핫!’ 웃었다. 느릿느릿한 동작과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이가 꽤 많을 줄 알았는데, 웃음소리가 의외로 젊었다.

“그것도 아주 중요한 일이지. 하하하! 알겠소. 그리하겠소.”

로벨은 만족했다. 그러나 사람인지라, 아니, 기사인지라 작은 욕심이 남아있었다. 잠깐 머뭇거리다가 한 가지 더 부탁했다.

“그 아쿼버스란 것을 살펴봐도 되겠소?”

도너반 자작은 자신의 손에 들린 화승총을 한 번 보고 대수롭지 않게 건넸다.

“얼마든지.”

로벨은 새 장난감을 선물을 받은 꼬마처럼 좋아했다. 실제로 좋은 장난감이었다.

로벨은 심지를 용두(龍頭, Cock)에 꽂고 방아쇠를 움직여 보았다. 찰칵! 불과 화약이 있으면 즉시 발사되었을 것이다.

“화기에 관심이 많은 모양이오.”

“적은 수로 많은 적을 물리칠 수 있으니까.”

크로스보우맨을 우선으로 고용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도너반 자작이 조용히 물었다.

“시장을 조성한다고 들었소.”

로벨은 장난감에 정신이 팔려서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소.”

“항구를 하나 가지고 있지 않소?”

“아만다 항이라 하오.”

도너반 자작은 생각에 잠겼다. 로벨은 총구와 화문을 번갈아 살피다가 침묵에 겨우 반응했다.

“왜 그러시오?”

도너반 자작은 자세를 고치고 차분히 말했다.

“이후 멀지 않아 해양의 시대가 열릴 것이오.”

“바다는 지금도 주요한 경제 지역이 아니오.”

“오늘날보다 더욱 중요해질 것이오.”

도너반 자작은 바람 불지 않는 호수처럼 말했다.

“세계는 날이 갈수록 작아지고, 인간의 이지는 날이 갈수록 밝아지니, 이 작디작은 땅에 만족하지 못할 것이오. 세계의 끝을 넘어 또 다른 세계를 찾아갈 것이오. 그곳이 동쪽이 될지, 서쪽이 될지 알 수 없으나 분명 그리될 것이오.”

로벨은 절반밖에 알아듣지 못했다.

“본인에게는 마법사 친구가 하나 있소만, 자작이 더 마법사 같소.”

도너반 자작은 포근하게 웃었다.

“그런 소리 가끔 듣소.”

로벨은 얼굴을 살짝 붉혔다. 신비롭고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저 몹쓸 병이 아니었으면 인기가 대단했을 것이다.

“그 아쿼버스는 선물 받은 것이라 줄 수 없지만, 그 대신 조금 전 말씀하신 핸드 캐논을 선물로 드리겠소.”

로벨은 깜짝 놀라서 철가면을 마주했다.

“정말이오?”

“이곳에서는 쓸모가 없는 무기요. 그러나 백작에게는 꼭 필요할 듯하오.”

로벨은 정말 마법사 같다고 생각했지만, 혹여나 말을 바꿀까봐 두 번 거론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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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너반 자작은 통이 무척 큰 영주였다. 로벨은 핸드 캐논 1문 정도 선물할 거라 생각했는데, 무려 5문을 꺼내주었다. 청동 무게가 7.5파운드 정도라 팔코넷처럼 값비싼 대포는 아니지만, 그래도 다섯 문이면 만만치 않았다.

“어린 집사가 좋아하겠지?”

“화약값 어쩔 거냐고 화내지 않을까요?”

“녹여서 팔자고 할 것 같습니다요.”

로벨 일행은 수레에 핸드 캐논을 차곡차곡 싣고 떡갈나무 성을 향해 출발했다. 성문 수비병이 로벨과 울프 용병단을 알아보고 환호했다. 누가 보면 출전하는 아군부대를 응원하는 모습으로 오해할 것이다. 허풍쟁이 제이콥과 호른 경이 불만과 불안을 담아 경고했다.

“출전이라면 출전이지요. 떡갈나무 숲이 최악의 접전지 아닙니까요.”

“그곳까지 가는 것도 문제입니다. 어젯밤 격퇴한 오크 잔당이 근방에 흩어져 있을 겁니다. 그들 외에도 어떤 괴물이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로벨은 원리적인 해답을 주었다.

“경계를 강화해.”

허풍쟁이는 입술로 욕했고 호른 경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운이 좋았는지, 아니면 경계를 잘한 건지 여우강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전투도 없었다.

‘검은 숲’ 지방이라 통칭하지만, 실제 숲은 5분의 1이 되지 않고, 나머지는 산과 호수로 뒤덮여 있었다. 땅이 굴곡지고 수원이 풍부한 만큼 강폭은 좁지만 물살은 강한 강이 곳곳에 거미줄처럼 있었다. 여우강도 그중 하나였다.

“우리 마을 개울은 정말 개울이네요.”

콸콸콸...!

계곡에서 막 벗어난 강줄기가 성난 것처럼 회오리쳤다. 산비탈의 눈이 녹으며 수량이 늘어난 탓도 있었다. 허풍쟁이 제이콥이 침을 탁! 뱉고 투덜거렸다.

“이런 강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습니다요. 농사에 쓸 수도 없고, 고기잡이가 되는 것도 아니고요.”

“하지만 군사경계로 삼을 수 있어.”

로벨은 여우강 맞은편의 어두컴컴한 숲을 보았다. 행상인 정보에 따르면 몬스터가 점령한, 직설적으로 말하면 인간을 죄다 잡아먹은 지역이었다. 호른 경이 조심스레 제안했다.

“우회해서 지나가시지요.”

꼭 몬스터 때문이 아니어도, 강을 건너기 위해서 하류로 내려가야 했다.

로벨이 말머리를 돌리자 호른 경 및 울프 용병단이 안도하며 따라갔다.

강물을 따라, 산줄기를 따라, 숲 경계를 따라 바라보는 검은 숲의 풍광은 퍽 아름다웠다. 구릉과 평지가 많은 볼탄 반도와 전혀 달랐다. 흡사 외국에 와 있는 느낌이었다.

‘하긴, 300년 전만 해도 외국이었지.’

정복왕 샘 포클이 새삼 위대하게 느껴졌다. 산 넘고 물 건너서 광활한 땅을 정복한 위대한 왕...

“그거 좀 가만두쇼! 장난감이 아니잖소!”

허풍쟁이가 수레 뒤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소리쳤다. 마녀 키르케가 허벅지에 핸드 캐논을 끼우고 포탄과 화약을 쑤셔 넣고 있었다.

“그러다 폭발하면 어쩌려고!”

“거 무슨 섭섭한 말씀! 전 약제사에요!”

“그게 무슨 상관이오?”

“화약도 약이잖아요? 가루를 쓰는 것은 제가 전문이죠!”

“우리를 가루로 만드는 것도 전문이 될 것 같다고!”

로벨도 걱정이 되어서 마녀를 유심히 보았다. 그런데 의외로 능숙했다. 화약을 다지고, 포탄을 다지고, 종이를 뭉쳐서 내부를 막았다.

“어디서 배웠어?”

“히힛! 이안 선장님이 가르쳐 줄 때 같이 배웠어요.”

마녀는 핸드 캐논을 수레 난간에 올리고 이리저리 겨냥했다. 포구와 마주한 울프 용병단은 기겁해서 도망갔다.

“불을 붙여야 나가요! 안전하다고요!”

그 말을 믿은 사람은 이안 선장의 제자 중 하나이자, 울프 용병단의 단 여섯 명뿐인 포병 중 하나인 겁쟁이 데비뿐이었다.

“저렇게 쪼그만해서 쓸모가 있을까요?”

겁쟁이 데비는 구경이 1.5인치밖에 안 되는 핸드 캐논을 우습게 여겼다.

“그래도 대포잖아?”

로벨은 핸드 캐논을 믿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빨리 확인할 기회가 찾아왔다.

“키아아악!”

“히이잉-!”

나무껍질처럼 울퉁불퉁한 피부와 길이가 제각각 다른 송곳니와 해초처럼 늘어진 머리카락이 정체성을 증명했다. 고블린이었다.

고블린 10여 마리가 강가에 모여서 피투성이 고기를 씻고, 지저분한 가죽 포대에 물을 담고 있었다.

“전투준비!”

허풍쟁이가 마부석에서 뛰어내리며 소리쳤다. 울프 용병단은 크로스보우를 견착하고 고블린을 겨냥했다. 고블린은 갑자기 나타난 인간무장집단에 화들짝 놀라서 우왕좌왕했다. 울프 용병단은 잔인한 미소를 짓고 방아쇠에 네 손가락을 얹었다.

그때, 크로스보우맨보다 먼저 공격한 사람이 있었다. 마녀 키르케가 지팡이로 핸드 캐논을 때렸다.

“태양의 노래, 용암의 춤, 용의 잠꼬대, 살라만다의 한숨!”

콰과광-!

천둥소리에 전투마와 농마가 동시에 앞발을 치켜들었다. 로벨은 고삐를 한 바퀴 말아 쥐고 종아리에 힘을 주어 간신히 낙마를 모면했다. 그리고 벼락이 떨어진 곳을 보았다. 고블린 두 마리가 머리를 잃고 풀썩 쓰러졌다.

“우아앙!”

마녀 키르케는 자신이 한 짓에 자신이 겁을 먹었다. 살인과 폭력에 익숙한 볼탄 반도 아가씨지만, 그 일을 직접 행하는 것은 조금 달랐다. 로벨은 그런 마녀 키르케의 속마음을 모르고 우수한 포술을 칭찬했다.

“아주 잘했어!”

마녀는 눈물을 찔끔거리며 웃었다.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뽑아 패닉에 빠진 고블린을 가리켰다.

“크로스보우! 사격 개시!”

갑작스럽게 시작된 전투지만, 무기, 전술, 지형까지 압도적이었다. 강을 등진 고블린은 숨거나 피하지 못했다. 강에 뛰어들어 쓸려가거나 강변을 따라 도망치다가 쿼럴에 맞아 쓰러졌다. 백병전을 치를 것 없이 두 차례 사격으로 전멸했다. 그만큼 울프 용병단의 사격솜씨가 우수하기도 했다.

“이거 너무 쉽잖아? ”

“이것도 전투라고 해야 할지...”

코골이 바디가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전투 너머 전쟁을 바라보는 호른 경은 짐짓 심각했다.

“강을 넘어와 사냥할 정도면, 저 숲의 몬스터는 포화상태일 겁니다.”

“아마도.”

로벨도 그 점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강을 도하할 나루터를 찾았지만, 섣불리 넘어가지 못했다.

로벨은 뱃사공이 버리고 도망간 커다란 뗏목 앞에서 고민했다. 검은 숲의 털보가 한번 살펴보고 사용이 가능하다고 알렸으나 고개를 한 번 끄떡이고 말았다.

허풍쟁이 이하 울프 용병단이 때늦은 점심 식사를 끝내고 야영지를 세울지 말지 눈치를 볼 때, 로벨이 갑작스럽게 입을 열었다.

“핸드 캐논을 장전할 화약이 얼마나 돼?”

마녀 키르케는 숟가락을 입에 물고 화약 자루를 꺼내보였다.

“한번 씩 쏘고 조금 남을 정도 줬어요.”

“그럼 5문을 전부 장전할 수 있어?”

“아마도요?”

로벨은 마침내 결정했다.

“내일 아침 저 숲을 최고속도로 돌파해서 떡갈나무 성으로 진격할 거야. 그러니 만반의 준비를 갖추도록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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