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철가면
155화. 철가면
쿵! 쿵! 콰득!
오우거는 성문을 뜯어내고 성 안으로 한 걸음 들어왔다. 큼직한 주둥이에서 하얀 입김이 뭉게뭉게 피어나고, 어깨와 등에 꽂힌 화살에서 붉은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머리 높이와 어깨 넓이로 성벽이 작아 보였다.
“구오오오오!”
오우거는 인내심이 없었다. 성문을 깨는데 사용한 바위를 그대로 포환으로 사용했다. 울프 용병단과 까마귀 성 병사들은 질겁해서 땅바닥에 엎드렸다. 그러나 로벨은 칼을 꼿꼿이 세운 채 버텼다. 바위가 관자놀이를 스치고 바리게이트 하나를 박살내도 미동하지 않았다. 오우거의 보폭과 팔길이를 생각하면 빈틈을 보일 수 없었다.
‘...망할.’
바이저 안쪽은 하얗다 못해 파랗게 질렸지만,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인간들은 감탄했고, 오우거는 화를 냈다.
“쿠오! 쿠오옷!”
오우거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보폭이 넓어서 순식간에 다가왔다. 로벨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 무릎을 구부렸다. 오우거는 로벨을 걷어차기 위해 오른발을 높이 들었다. 로벨이 유도한 공격이었다.
‘걸렸어!’
오우거는 무기가 없었다. 공격을 시도하면 주먹질 아니면 발길질인데, 자신의 반도 안 되는 인간이 자세를 낮추면 주먹으로 때리기가 어려웠다. 자연히 발을 사용하는데, 그 순간이 기회였다. 로벨은 근 10년간 단련한 하체 근육으로 쏘아져 나갔다. 누가 봐도 ‘발사’된 모습이었다.
오우거의 오른발이 최고점에 이르렀을 때, 로벨의 아론다이트가 오우거의 왼쪽 정강이를 후려졌다. 깡-! 뼈소리가 쇳소리 같았다.
“구오오...?”
오우거는 한껏 치켜 올린 오른발을 어디로 뻗어야 할지 몰라 뒤뚱거렸다. 그 상태에서 왼발의 힘이 풀리자 그대로 주저앉았다.
“우와아아!”
“역시 기사 나리야!”
로벨은 아론다이트 손잡이를 가슴 안쪽으로 끌어당긴 후, 눈높이가 비슷해진 오우거 품으로 뛰어들었다. 로벨의 체중과 요정의 검이 합쳐져 오우거의 가슴을 1피트가량 꿰뚫었다. 치명상이었다.
“꾸르륵...”
그러나 오우거는 경이로운 몬스터였다. 심장이 터져도 바로 죽지 않았다. 피를 토하면서 로벨의 머리를 움켜잡았다.
“앗! 기사님!”
마녀 키르케가 겁을 상실하고 달려 나왔다. 허풍쟁이가 잡지 않았으면 오우거에게 달라붙어 울고 불며 몽둥이질을 했을 것이다.
로벨은 오우거의 손아귀 속에서도 놀랍도록 침착함을 유지했다. 시야가 가려지고, 아멧의 이음새가 끼릭- 끼리릭- 비명을 지르는데 움찔 한번 하지 않고 아론다이트 손잡이를 비틀었다.
“쿠오오오!”
오우거의 가슴이 주먹만하게 열렸다. 심장에서 맥박치는 피가 고스란히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로벨은 오우거의 악력이 약해지는 것을 느끼며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세 번째야.”
오우거는 힘이 빠진 듯 서서히 무너졌다. 로벨은 오우거의 손가락 틈새로 오우거의 죽어가는 두 눈을 마주했다.
“내가 이겼어.”
오우거가 쓰러졌다. 인간도, 오크도, 모두가 넋을 놓고 로벨을 보았다. 로벨은 숨을 크게 들이마신 후 아론다이트를 뽑았다. 천 년 묵은 고목 같은 오우거가 힘없이 기울어졌다. 쿵-! 오우거의 몸뚱이에서 흘러나온 피가 까마귀 성문을 뒤덮어갔다.
“해, 해치웠어?”
“진짜로 해치웠잖아!”
까마귀 성 병사가 웅성거렸다.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모르는 말투였다. 허풍쟁이가 방향을 제시해주었다.
“로벨 로드릭 만세! 그랜드 챔피언 만세!”
공황 중에 방향을 제시하면 맹목적으로 따르기 마련이다. 허풍쟁이의 함성이 열 명, 스무 명, 백 명, 이백 명으로 빠르게 증폭되었다. 고작 몇 초 만에 까마귀 성 전체가 함성으로 뒤덮였다. 이제 막 성문을 통과한 오크들은 기세에 눌려서 주춤했다. 하지만 후퇴할 수 없었다. 성문 밖에서 계속 밀려오니 떠밀려서 오우거 시체까지 접근했다. 로벨은 땅바닥에 처박힌 오우거의 머리를 밟고, 울퉁불퉁한 오우거 등에 올라가 아론다이트를 휘둘렀다. 그저 칼을 휘두르기 좋은 위치를 선점한 것이지만, 그 광경을 지켜보는 사람에게는 거대한 괴물을 정복한 신화 속 영웅처럼 보였다. 인간의 함성은 한층 커지고, 오크의 공포는 한층 깊어졌다.
“지금이다! 오크를 몰아내자!”
호른 경과 허풍쟁이가 로벨의 좌우로 나왔다. 오우거 슬레이어라도 수십 마리의 오크에게 포위당하면 죽은 목숨이었다. 어떻게든 보호해야 했다.
호른 경이 울프 용병단을 이끌고 뛰쳐나가자 까마귀 성의 기사가 성벽 위의 병사를 지휘했다.
“성 안에 들어온 오크를 사살하라! 아처! 사격 준비!”
오크들은 죽을 맛이었다. 철석같이 믿은 오우거는 성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죽어버리고, 강철을 두른 인간들이 제2의 성문처럼 가로 막은 데다, 머리 위에서 화살과 돌멩이가 비처럼 쏟아졌다. 더더욱 환장할 일은 도망갈 곳이 없었다.
까마귀 성의 기사와 병사도 용맹해지만, 볼탄 반도를 주름잡는 로벨 로드릭 군사만은 못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호른 경의 활약이 대단했다. 로벨과 볼프 후작의 명성에 가려져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자작나무 숲의 호른 경이라 하면 볼탄 반도 동부에서 최고로 통했다.
오크가 찌르는 글레이브를 비스듬히 비켜내는 동시에 목을 찔렀다. 쇠뿔이 달린 폴린으로 복부를 올려치고, 롱소드의 폼멜로 정수리를 내려쳤다. 오크가 휘두르는 조잡한 무기는 가문의 보물인 플레이트 아머를 뚫지 못하고 모조리 튕겨나갔다.
호른 경처럼 독보적이진 않아도, 허풍쟁이 이하 울프 용병단의 활약도 대단했다. 선두와 후미가 교대로 전진하는 파상공세로 일인당 오크 서너 마리씩을 처리했다. 펄프 대장이 보면 욕 먹어가며 훈련시킨 보람이 있다고 뿌듯해하고, 어린 집사가 보면 오랜만에 밥값 한다고 좋아할 것이다.
오크 시체가 성문 앞을 가득 채워서 마른 흙을 볼 수가 없을 때쯤, 오크도 성문 안쪽 상황을 깨닫고 몸을 사리기 시작했다. 한 마리가 내빼자 두 마리가 따라가고, 종래에는 수십, 수백 마리가 무기를 팽개치고 어둠 저편으로 도주했다. 까마귀 성의 승리였다. 인간의 승리였다.
“우와아아아아!”
“로벨 로드릭! 로벨 로드릭!”
“로벨 로드릭 백작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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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 밝을 때 피해 집계가 끝났다.
까마귀 성 수비대 전사자 7명, 부상자 11명, 울프 용병단 부상자 1명이었다. 반면, 오크 군단은 로벨이 해치운 오우거를 포함해 총 322마리가 죽었다. 부상자를 챙기는 미덕 같은 것은 없으니 전체 피해도 그 정도일 것이다.
“대승이야. 대승.”
오크 총병력을 1천으로 잡아도 30%가 넘는 피해였다. 전술적으로 괴멸이나 마찬가지였다.
“인간이라면 즉시 철수하겠지만, 오크라서 어찌 나올지 알 수 없군요.”
로벨 일행은 까마귀 마을의 영웅이 되어있었다. 그것은 가장 가까운 까마귀 여관주인의 태도로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대단한 분인 줄 모르고, 헤헤, 감사합니다요.”
로벨은 까마귀 여관에서 주인장과 상인, 그리고 아직 살만한 주민에게서 조촐한 감사를 받았다. 맥주 한잔, 과일주 한잔, 벌꿀주 한잔 돌리다가 까마귀 마을출신 병사들이 합세하면서 자연스럽게 마을 잔치가 되었다.
마녀 키르케는 벌꿀주 한잔에 취기가 올라서 발그레해지고, 허풍쟁이 제이콥은 호감을 표시하는 마을 처녀들 품에서 껄껄 웃었다. 그중에서 로벨이 가장 인기인이었다. 외지에서 온 미남 기사, 그것도 6개의 성을 가진 유망한 백작이니 욕심 많은 사람이나 호기심 많은 사람이나 가만두지 않았다.
“역시 그랜드 챔피언이라 남다르군요!”
“저, 백작님, 약소하지만 제 성의입니다.”
“오오! 아이란드 왕국에서 물 건너온 비단이 있는데, 한번 보시겠습니까요?”
로벨은 금은비단을 늘어놓는 상인들을 뜯어말렸다. 그러나 콧소리 내며 달라붙는 처녀들까지 막기는 힘들었다. 로벨은 용맹한 부하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시기와 질투만 받았다. 다행히 선(?)을 넘기 전에 로벨을 구원할 사람이 나타났다.
“로벨 경! 로드릭 경! 로벨 로드릭 백작!”
로벨을 애타게 찾는 손님이 나타났다. 성문 수비 때 병사를 지휘한 기사였다.
“이런! 여기 계셨구려! 도너반 자작님이 간절히 뵙자고 하시오!”
로벨은 두 눈을 껌벅이다가 까마귀 영주의 이름이 죠드 도너반이란 사실을 떠올렸다. 어째서인지 심기 불편한 호른 경이 종용했다.
“어젯밤 일도 있으니 만나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마녀 키르케가 혀 꼬인 목소리로 따졌다.
“고마우면 직접 찾아와야죠! 왜 오라 가라해요?”
“...그건 곤란하오.”
“왜요? 왜요? 왜 곤란해요?”
성문 기사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아랫사람이 말하기 곤란한 문제인 듯했다. 로벨은 어느덧 계곡 위로 떠오른 태양을 힐끔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사람과 내 말이 신세 졌으니 인사해야 도리겠지. 앞장서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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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귀 성은 유명세에 비해 상당히 작은 성이었다. 좁은 계곡 위에 지었으니 당연했다. 말 두 마리가 겨우 스쳐 지나갈 도개교를 넘으니 10피트 남짓한 자그마한 성문이 나타났다. 좌우의 성벽은 더 낮아서 8피트가 될까 말까 했다. 조금 큰 담장 느낌이었다.
“자작님은 후원에 계십니다.”
“와아! 후원까지 있어요? 아차! 죄송해요.”
마녀 키르케는 한 손으로 입을 막고 한 손으로 자기 머리를 때렸다. 술 때문에 본심이 술술 나왔다. 그러나 기사는 화내지 않았다.
“레이디가 생각하는 후원은 아닐 것이요.”
“아앗! 레이디 아니에요! 오호홋!”
웃음소리가 괴기한 것도 술 때문일 것이다. 로벨은 머리를 가로젓고 후원으로 찾아갔다.
까마귀 성의 후원은 초라하지만 장엄하였다. 사람의 손이 닿는 곳은 고작 열 걸음 내외로 산책은 고사하고 몸풀기에도 좁았다. 그러나 눈앞에 탁 트인 계곡 동쪽 풍경은 볼탄 반도의 어떤 성에서도 볼 수 없는 장관이었다.
“저분이 도너반 자작님입니다.”
로벨은 죠드 도너반 자작이 갑옷을 입었다고 생각했다. 쇠로 된 얼굴 때문이다. 그러나 품이 넓은 우플랑드로도 숨기지 못할 만큼 앙상한 팔과 땅바닥에 끌리는 스커트로 평복차림임을 깨달았다. 얼굴을 가린 밋밋한 가면만 쇳덩이였다.
“아쿼버스(Arquebus:화승총)라고 하오.”
로벨은 철가면 이름이 아쿼버스인가 생각하다가, 조금 늦게 도너반 자작 손에 들린 길쭉한 무기를 보았다. 아바레스트에서 활대를 제거하고 심지를 달아놓은 듯한 무기였다.
“동방대륙의 상인이 가져온 물건이오. 기본 원리는 청동대포하고 같은데, 작고 가벼워서 이렇게 손에 들고 쏠 수 있다오.”
도너반 자작이 계곡 저편을 향해 시범을 보여주었다. 방아쇠 장치를 따라 심지가 움직였다. 포탄도, 불도 없지만, 한눈에 작동원리가 이해되었다.
“핸드 캐논(Hand Cannon)을 홀로 다룰 수 있게 만든 무기요?”
로벨은 자연스럽게 동방대륙 신무기에 호기심을 보였다. 얼마 전까지 대포 타령한 만큼 화기에 관심이 많았다.
“본인은 몸이 부실해서 칼과 갑옷을 가지지 못하니, 이런 것에 자꾸 손이 가오.”
로벨은 화승총을 뚫어져라 살피느라 ‘부실한 몸’에 집중하지 못했다. 부실한 도너반 자작은 소리죽여 웃었다.
“소문대로 순수한 무골이시오.”
“아... 결례를 범했군. 미안하오.”
로벨은 서둘러 사과했다. 도너반 자작은 여자처럼, 아니, 여자보다 가느다란 손을 한번 휘저었다.
“괘념치 마시오. 결례는 본인이 저지르고 있으니.”
그리고 우플랑드의 소매를 살짝 걷었다. 칭칭 감긴 붕대 사이로 새까맣게 죽은 피부가 보였다.
‘화상을 입었나?’
처음에는 그리 생각했다. 그러나 어떻게 봐도 화상자국이 아니었다.
그것은 로벨에게 생소한 질병이었다. 그래서 상대방이 무안해할 때쯤에야 간신히 이름을 떠올렸다.
“문둥병?”
도너반 자작의 철가면은 표정이 없었다. 그러나 목소리와 몸동작이 구슬프게 느껴졌다.
“그렇소. 본인은 옛 신의 저주를 받은 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