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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145화 (145/605)

145화. 옛 신

145화. 옛 신

로벨은 오우거를 향해 뛰어갔다. 체격 차이가 어른과 아이를 넘어서 황소와 병아리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로벨은 평범한 병아리와 달리 2.5피트짜리 쇠바늘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제법 잘 다뤘다.

“하앗!”

오우거의 주먹이 닿기 직전 슬라이딩해서 사타구니 사이로 빠져나갔다. 돌뿌리와 나무뿌리로 울퉁불퉁하지만 컴포지트 아머 덕분에 몸이 상하지 않았다. 로벨은 머리 위로 스치는 주먹과 신전 기둥 같은 두 다리와 남사스러운 남자의 상징물을 차례로 보고 몸을 비틀었다. 허리가 돌고, 어깨가 돌고, 마지막으로 양손에 들린 흐룬팅이 돌면서 오우거의 아킬레스건을 베었다. 쇠가죽보다 질긴 오우거 가죽이지만 흐룬팅을 막을 정도는 아니었다.

“구오오오오! 구오오오!”

오우거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로벨은 흐룬팅을 빙글 돌려서 역수로 쥐고 눈높이로 내려온 오우거 목덜미에 꽂아 넣었다. 가죽이 종이처럼 찢어지고 근육이 가닥가닥 찢겨지며 피가 솟구쳤다. 로벨은 핏물이 들어오지 않게 두 눈을 질끈 감고 손잡이를 비틀었다. 상처가 주먹 크기로 확장되었다.

“쿠오오...!”

인간이라면, 아니, 곰이나 사자라도 절명할 상처인데 이름 그대로 괴물인 오우거는 쉽게 죽지 않았다. 오른손을 뒤로 돌려 로벨의 허리를 움켜잡았다. 갈비뼈가 쪼이고 장기가 압축되었다.

“컥!”

로벨은 폐에 찬 공기를 강제로 토했다. 악력만으로 갈비뼈가 부러질 지경이었다. 플레이트가 아니었으면 진짜 부러졌을 것이다.

로벨은 오우거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바동거렸다. 그러나 손가락이 팔뚝만 하고, 힘줄이 돛 줄 같은 오우거였다. 로벨의 발버둥은 그냥 발버둥일 뿐이었다.

“기사 나리를 구해야 한다!”

“사격! 사격 개시!”

울프 용병단이 2차 사격을 가했다. 파팡! 팡! 철제 쿼럴이 말벌의 독침마냥 오우거를 쪼아댔다.

“우오오! 우오오오오!”

오우거가 몸을 비틀며 괴로워했다. 로벨은 오우거의 악력이 약해지자 기합을 지르며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두 발이 땅에 닿자 숨 돌릴 틈 없이 재차 오우거에게 달려들었다. 오우거 턱 밑에서 정수리를 향해 흐룬팅을 찔러 넣었다.

“우우우... 우우...”

오우거의 상체가 휘청거렸다. 로벨은 허리를 세우고 두 팔에 힘을 줘서 칼날을 더욱 깊이 밀어 넣었다. 칼끝이 오우거 정수리에서 볼록 튀어나왔다. 로벨의 머리 위로 뜨거운 피가 소낙비처럼 쏟아졌다.

“해, 해치웠나?”

“쉿! 쉿!”

로벨은 핏물을 뒤집어쓴 채 자세를 유지했다. 오우거의 몸을 지탱하는 것도 같고, 선 채로 기절한 것도 같았다.

“영주님!”

“기사 나리!”

울프 용병단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로벨의 팔, 다리, 가슴을 끌어안고 오우거 아래에서 빼냈다. 그리고 소중한 고용주가 상하지 않았는지 이리저리 굴리며 살폈다.

“이야! 이야아! 허풍쟁이가 오우거 잡았다고 할 때 어이없어서 못 믿었는데!”

“세상에! 진짜였어! 진짜 오우거를 해치웠다고!”

로벨은 현기증이 나도록 흔들리다가 간신히 정신 차리고 용병들을 떨쳐냈다. 용병들은 고용주가 멀쩡하자 쾌재를 부르고 오우거를 구경하기 위해 우르르 떠나갔다.

“이잇... 손수건 한 장 건네는 녀석이 없어.”

로벨은 툴툴 거리며 컴포지트 아머와 더블릿을 흥건히 적신 피를 털었다. 그때 로벨 앞으로 손수건 한 장이 불쑥 나타났다. 용병이 가지고 다니기에는 비싸고 깨끗한 비단 손수건이었다.

“여기 닦으시오.”

페르젠 백작이 머쓱한 얼굴로 권했다. 로벨은 비단이 아까워서 선뜻 잡지 못했다. 백작이 되고 대영주가 되었어도 뿌리 깊은 가난뱅이 근성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로벨이 주저하자 페르젠 백작은 다른 쪽으로 오해했다.

“그냥 성의요! 성의! 거참, 의심도 많소!”

로벨은 마지못해 손수건을 받았다.

“...고맙소.”

페르젠 백작은 작은 동산 같은 오우거 시체를 관찰했다. 가까이서 보니 더욱 거대했다.

승모근이 지나치게 두꺼워서 머리와 목둘레가 비슷했다. 이두근과 삼두근은 울퉁불퉁 튀어나와 징그러울 정도였다. 다리보다 팔이 더 길고, 팔 길이에 비해 손이 2배쯤 컸다. 정말 성벽을 허물 수 있을 듯했다.

“이런 괴물과 혼자 맞서다니... 경은...경은 진짜...”

페르젠 백작 얼굴에 존경심이나 경외심 비슷한 것이 어렸지만 로벨은 얼굴과 흉갑의 피를 닦느라 미처 보지 못했다.

“아직 안심하기 이르오.”

“어째서? 오크 때문이오?”

“오크도 오크지만, 오우거가 한 마리라 확신할 수 있소?”

로벨의 말에 페르젠 백작과 백작의 기사들이 겁에 질렸다.

“설마? 설마 이런 괴물이 또 있을 리가?”

“검은 숲의 기사들이 오우거 한 마리 때문에 패전하진 않았을 것이오.”

페르젠 백작의 기사들은 ‘아니! 충분히 패전했을 거요!’라고 소리치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오우거를 홀로 때려잡다시피 한 챔피언 앞에서 약한 소리를 할 수 없었다.

“전사자를 수습하고, 부상자를 치료하시오. 그리고 수색을 계속합시다.”

“아, 알겠소. 이봐, 다들 들었지?”

“예스, 마로드.”

@

로벨의 우려와 달리 오우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대신 10여 마리씩 몰려다니는 오크 무리와 조우해 교전했다. 사납고 억센 오크지만 오우거를 때려잡은 울프 용병단의 기세를 당해낼 수 없었다. 로벨이 나서지 않아도 울프 용병단과 페르젠 가문 기사가 말끔히 처리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해가 서쪽으로 넘어가자 비로소 확신했다.

“이 근방에는 더 이상 위험이 없습니다.”

“그 많은 오크가 어디 간 거지?”

로벨 일행이 사살한 오크는 고작 30여 마리였다. 적은 수가 아니지만, 예상한 300마리에 비하면 10분지 1밖에 되지 않았다.

“북쪽으로 빠져나간 것 아닐까요?”

“북쪽 숲의 북쪽이면... 강철성인데...?”

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심각한 표정으로 서로를 보았다. 그리고 동시에 푸하핫! 웃었다.

“그 짜증나는 도트넘 가문이잖아!”

“잘 됐네. 잘 됐어.”

“기사 나리, 해도 지는데 그만 돌아갈깝쇼?”

로벨은 구름 그늘이 늘어지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끄덕였다.

“응.”

로벨은 세상에서 가장 짧은 말로 승리를 선언했다.

이후로도 울프 용병단과 페르젠 백작군은 사흘에 걸쳐 북쪽 숲을 수색했다. 남들 다 하는 것을 따라하지 못한 못난 오크 서너 마리와 겨울을 대비해 배를 불리려는 늑대 가족을 잡았다.

로벨은 강철성과 인근 영지로 사람을 보내 동향을 살피고 위험을 경고하는 한편, 로드릭 가문과 페르젠 가문의 승전소식을 널리 알렸다. 그리고 불필요하지만 안 할 수 없는 행사를 시작했다.

“그 녀석 말고 저 녀석 잡아요! 영주님이랑 백작님 식탁에 올릴 거니까 한 살이라도 어린 것을 잡아야죠.”

“이얼... 집사가 웬일로 인심이오?”

“미우나 고우나 우리 쪽 사람이잖아요. 도와주러 온 것도 고맙고. 그리고 우리 시장이 발전하려면 페르젠 시티랑 잘 연결되어야 한다고요.”

“마지막 이유가 제일 큰 거 같은데?”

“역시 그렇지?”

외팔이와 허풍쟁이는 마을 아낙들이 굽는 고기를 몰래몰래 빼먹다가 마녀한테 손등이 쥐어뜯겼다. 그러나 고기 도둑은 인간만이 아니었다. 마녀가 눈 돌린 틈을 타서 아야와 이야카가 양다리를 하나씩 물고 도망쳤다.

“야! 이리 와! 우리 기사님꺼라고!”

마녀가 울상이 되어서 늑대 남매를 쫓아갔다. 그러자 노련한 용병들은 음흉하게 웃고 남은 양고기를 몽땅 털어갔다.

로벨은 뒷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른 채 페르젠 백작과 페르젠 가문 기사 사이에서 억지웃음을 짓고 있었다.

“으흐흐... 본인은 선대와 다르오. 아아... 물론 아버님을 욕되게 할 생각은 없소. 그러나 생각이랄까, 철학이랄까, 그런 거 있잖소? 아무튼 좀 더 편하고 친근하게, 그리 어려울 것 없잖소. 친구란 그런 거니까. 친구 아니오? 맞소? 맞는 거 같은데? 꺼억-! 우리 위대하신 그랜드 챔피언께서는 어찌 생각하시오?”

“...경이 취했다고 생각하오.”

“으하하하핫! 역시 농담도 재미있소! 자! 한잔 합시다! 건배!”

로벨은 와인 반병에 주사가 들통 난 페르젠 백작을 한심하게 보았다. 페르젠 가문의 충직한 기사들은 껄껄 웃으며 젊은 두 백작의 승전을 축하했다. 구석진 곳에 자리한 코골이 바디가 혀를 찼다.

“쳇! 싸운 건 우리 기사 나리고, 저 백작 나리는 마지막에 숟가락만 얹었잖수?”

“어허, 숟가락을 가져온 것도 고마운 일이니까 조용히 해라.”

펄프 대장이 와인을 가득 따라 코골이의 입을 막았다. 좀처럼 맛볼 수 없는 고급 와인이라 하나뿐인 혀를 투덜거리는데 낭비하지 않았다.

불순한 의도와 숨겨진 불만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즐겁고 떠들썩한 연회였다.

멀쩡한 사람보다 정신 놓은 사람이 많아질 시간, 로벨은 ‘경은 최고요. 내가 인정하리다. 어허! 인정한다니까?’ 어쩌고 중얼거리는 페르젠 백작을 무시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기운이 돌지만 몸을 못 가눌 정도는 아니었다. 그저 300년 묵은 늑대성이 중심을 못 잡고 흔들릴 뿐이었다.

‘하긴. 300살 먹었으면 서 있기가 힘들만도 하지.’

로벨은 메인 홀의 기둥을 잡고 위로했다. ‘그럴 수 있어. 자책하지마.’

어린 집사는 접시에 코 박고 옹알이하는 페르젠 백작과 기둥을 붙잡고 블루스를 추는 로벨을 번갈아 보았다.

“하아... 볼탄 반도의 미래가 어둡다. 정말 어두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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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숲 몬스터 침공이 15일째로 접어들었다. 로드릭 영지는 3일 간의 전투와 3일 간의 수색 후 평화를 되찾았으나, 북쪽과 동쪽에서는 피비린내가 가시지 않았다. 로벨의 말대로 늑대성을 공격한 오크와 오우거는 극히 일부였다. 볼탄 반도 여러 영지에서 수십, 수백의 오크와 살육을 일삼는 오우거가 목격되었다. 그런 와중에 로벨의 승전소식이 퍼지자 각 지방 영주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어린 집사가 깁스 자작의 편지를 건성으로 훑어보고 심드렁하게 요약했다.

“지원군을 보내달라는 거네요?”

“응.”

“그 불쌍한 영지민 좀 받아줬다고 칼부림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도와 달래요?”

“사실 칼부림은 우리가 했는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로벨은 어린 집사의 뾰족한 시선을 피해서 창밖을 보았다.

“이건 후계자 전쟁 직후에 도적 소탕을 의뢰했던 뚱보 영주잖아요?”

“울프 용병단을 다시 고용하고 싶은가 봐.”

“에라이! 고기에 쳐뿌릴 후추만 아껴도 용병을 스무 명은 고용했겠다! 아쉬울 때만 용병을 찾는다니까?”

“아쉬울 때 필요하니까 용병이잖... 아니야. 아무 말 안 할게.”

로벨은 누가 주인이고, 누가 몸종인지 모르겠다고 한숨을 푹 쉬었다.

어린 집사는 편지를 잘 접어서 책상 위에 올리고 하루가 지나도 가시지 않은 승전 파티의 후유증을 감상했다.

“어쩔 거예요?”

“글쎄... 몬스터를 볼탄 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내야 하는 것은 맞지만...”

“그 일을 왜 우리가 해야 하나?”

“으응... 그렇지?”

페르젠 백작 정도면 상당히 준수한, 아니, 이상적인 영주다. 영지민의 세금을 뜯어서 기름진 음식과 값비싼 치장에만 신경 쓰는 영주가 대다수였다. 그런 영주들을 위해 참고, 아끼고, 준비해온 영주들이 희생하는 것은 억울했다. 로벨과 어린 집사가 그런 생각을 할 때, 펄프 대장이 주름을 활짝 펴고 로벨의 집무실로 들어왔다.

“영주님! 드디어 찾았습니다!”

어린 집사가 반색하며 돌아보았다.

“지나간 젊음이요? 존재한 적 없는 사랑이요?”

“...둘 다 잃은 적 없소.”

로벨은 상념이 깨지자 손을 휙휙 저었다. 혹은 숙취 때문에 머리가 아픈 걸지도 모른다.

“뭘 찾아?”

펄프 대장은 등장할 때 표정으로 돌아가 손에 쥔 기다란 물건을 내밀었다.

“영주님의 칼을 찾았습니다!”

“아론다이트!”

로벨과 어린 집사의 표정도 덩달아 밝아졌다. 오크와 싸울 때 잃어버린 명검 아론다이트였다. 오크가 훔쳐가지 않았나 걱정했는데, 아직 성 안에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펄프 대장이 뿌듯한 미소로 말했다.

“성 밖 구렁텅이에 빠져 있었습니다. 욕심이 정도를 넘은 오크가 가지고 달아나다 빠트린 모양입니다.”

“아니면 옛 신의 뜻일지도 모르지요.”

펄프 대장을 따라온 리암 수사가 성호를 긋고 빙긋 웃었다. 기도가 싫다, 계율이 싫다 떠들면서도 성직자의 삶을 떨치지 못했다.

“그것도 아니면 부하를 아끼는 대장의 배려일지도 모르고요.”

펄프 대장이 찔끔해서 리암 수사를 곁눈질했다. 로벨은 어리둥절하게 두 사람을 보다가 아무러면 어떠냐는 심정으로 아론다이트를 받았다.

“옛 신의 뜻이라...”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쓰다듬었다. 호수의 요정이 선물한 진짜 요정검이었다. 천금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었다.

“역시 그런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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