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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144화 (144/605)

144화. 끝자락

144화. 끝자락

로벨은 말구유통에 앉아 지푸라기로 무기와 갑옷을 닦았다.

제대로 손보려면 사슬과 판금을 완전히 분리해서 모래통에 넣고 굴려야겠지만, 그럴 시간도 없고, 상황도 아니라 손이 닿는 곳만 대충 비볐다.

그 정도만 해도 영주의 특권이자 치열하게 싸운 포상이었다. 울프 용병단과 마을주민은 쉴 틈 없이 성내를 정리 중이었다. 전사자를 수습하고, 부상자를 치료하고, 오크 시체를 한곳에 모아 불태웠다. 200마리가 넘게 죽어서 시체를 처리하는 것도 곤욕이었다. 그런데 로벨만큼 특권을 누리는 자가 한 명 더 있었다.

“이거 아주 치열했소? 이크! 이놈은 왜 여기서 죽은 거요? 정말 못생겼군!”

“하버트 페르젠 ‘주니어’ 백작.”

로벨은 피 묻은 지푸라기를 버리고 지원군을 이끌고 온 페르젠 백작을 반갑게 맞이하...

“우하핫! 그랜드 챔피언 몰골이 말이 아니군! 이래서 무적무패라 자랑할 수 있겠소? 이런! 내 덕분에 지지는 않았으니 아직 무패인가? 으하하핫!”

...려다가 그만뒀다. 로벨은 지원군이고 나발이고 쥐어박을까 고민하다가 참았다. 페르젠 백작은 몰라도 백작을 따르는 7명의 기사와 200명의 병사는 큰 전력이었다.

“북쪽 숲에 오크 잔당이 남아 있소. 추정하기로 300마리쯤 될 것이오. 확인되진 않았으나 오우거와 트롤이 있을지도 모르오.”

경박하긴 해도 기사는 기사였다. 페르젠 백작은 세 자릿수의 오크와 끔찍한 오우거를 우려해서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경과 본인의 군사를 합쳐야겠군.”

로벨은 고개를 끄덕이고 내심 안도했다. 여기까지 와서 그럴 리야 없겠지만 ‘당신네 영지 일이니까 알아서 하시오!’ 식으로 나올까봐 걱정했다. 치기 가득한 젊은 백작은 의심 많은 가짜 백작을 안심시켰다.

“기사의 본분은 힘이 없는 자를 지키는 것이오. 이 냄새 나는 놈들이 남쪽으로 내려가지 못하게 막는 것이 우리 사명 아니겠소?”

“...맞는 말인데, 너무 맞는 말이라 믿기지가 않소.”

“기사도가 의심받는 시대라니! 우린 참으로 암울한 시대에 살고 있소이다.”

페르젠 백작은 좋은 쪽으로나 나쁜 쪽으로나 12살 소년 같은 사람이었다.

“성으로 모시고 싶지만, 보다시피 손님을 접대할 처지가 아니라... 성 아래 야영지를 빌려드리리다.”

“아, 신경 쓰지 마시오. 저 아래 휴경지에서 지낼 테니. 어디든 시체 굴러다니는 이곳보다 낫지 않겠소?”

로벨은 마음대로 하라고 어깨를 으쓱였다. 페르젠 백작은 휘하 기사들을 불러 모아 언덕 아래로 내려갔다.

성 안팎으로 300명이 넘는 군사가 주둔하게 되었으니 오크의 습격은 걱정할 필요 없었다. 로벨은 영지민 중 젊은 남녀를 우선 마을로 내려보냈다. ‘인간’ 자체에 관심이 있을 뿐, 인간의 재화에는 무심한 탓에 미처 옮기지 못한 살림살이 대부분이 무사했다.

어린 집사가 울프 용병단 주둔지 외곽에 무사히 멀쩡히 남아있는 창고를 보고 안도했다.

“창고가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에요. 불이라도 지를까봐 조마조마했는데.”

마녀 키르케가 의아해서 물었다.

“어차피 텅 비었잖아요? 전부 성으로 옮긴 거 아니에요?”

“무슨 소리? 저거 짓는데 돈이 얼마나 나갔는데요. 솔직히 창고 안에 물자보다 창고가 더 비싸요.”

“아... 아하?”

“가장 비싼 것은 성이고, 그다음 비싼 것은 성 밖 주둔지와 창고인데, 세 개다 무사하니 천만다행이죠.”

로벨이 전투마 위에서 부정했다.

“아니. 가장 비싼 건 사람이야.”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가 동시에 로벨을 올려다보았다.

“너희가 무사해서 다행이야.”

어린 집사의 눈꼬리는 아래로 쳐지고, 마녀 키르케의 입꼬리는 위로 올라갔다.

“여, 영주님...”

“와아! 기사님!”

로벨은 무안해서 헛기침하고 전투마의 걸음을 재촉했다.

오랜만에 나들이 나온 전투마는 기분이 좋아서 발을 수직으로 올리며 총총 걸었다. 쑥스러운 기사와 신이 난 전투마와 감동한 소년소녀는 전쟁 분위기에 안 어울렸다.

로벨 일행은 적막한 마을을 한 바퀴 둘러보고 북쪽으로 이동했다. 마을 경계를 넘자 이름이 없어 ‘북쪽 숲’이라 불리는 산림지가 나타났다. 평소에도 늑대가 출몰해서 위험한 곳이지만, 지금은 괴물이 숨어들어 더욱 위험했다.

“이제 안 덤비겠죠?”

“벌써 도망가지 않았을까요?”

두 차례 승리에도 불구하고 오크의 숫자는 상당했다. 근심이 가시지 않았다. 로벨은 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스산한 바람을 느끼며 말했다.

“내일 정찰대를 보낼 거야.”

어린 집사가 걱정스럽게 로벨을 보았다.

“위험하지 않을까요? 가뜩이나 병력도 모자란데...”

“이제 겨울이야. 장작을 구하지 못하면 겨울나기가 힘들어. 그리고 시장은 어쩔 거야? 행상인과 이웃 마을에게 안전하다는 것을 보여줘야지.”

어린 집사는 시장 문제를 깨닫고 즉시 태세전환 했다.

“오늘 당장 보내죠!”

“...오늘은 좀 쉬고. 내일 갈 거야.”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는 로벨의 말에서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간다니요?”

“기사님이 직접 가시려고요?”

로벨은 시선을 피해서 조그맣게 변명했다.

“나밖에 없잖아.”

@

로벨은 오크 추격대 겸 북쪽 숲 정찰대를 자원 받았다. 울프 용병단은 (자신의)생명을 존중하고 (자신의)안전을 최우선으로 삼는 참된 용병집단이라 아무도 자원하지 않았다. 로벨이 시무룩해하자 보다 못한 어린 집사와 펄프 대장이 각자 방식으로 설득했다.

“정찰을 마치고 돌아오면 포상금 10페닝 줄게요! 오크 목을 따면 10페닝 더 주고요!”

“성에 남으면 편할 거 같냐? 오늘 중으로 방어시설과 주둔지를 원상복구한다! 그리고 전투 중에 어리버리 깐 놈! 울프 용병단 명성에 걸맞은 실력이 되도록 특별관리에 들어간다!”

고용주의 풀 죽은 모습이 안쓰러워서인지, 10페닝이 탐나서인지, 아니면 특별관리가 싫어서인지 마지못해 십여 명이 손을 들었다. 그걸 지켜본 리암 수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짐승을 부리는 데는 당근과 채찍이 최고죠.”

울프 용병단은 짐승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었다.

페르젠 백작도 수행기사 두 명과 사냥꾼 출신 병사 십여 명을 거느리고 합류했다.

“역시 로벨 백작! 솔선수범할 줄 알았소!”

“경이 직접 나올 줄은 몰랐는데... 경이야 말로 대단하오.”

로벨과 페르젠 백작이 서로의 용기를 찬양하는 동안, 울프 용병단과 페르젠 백작군은 서로를 안쓰럽게 보았다.

‘그쪽도?’

‘이쪽도야.’

아무튼, 로벨과 페르젠 백작을 포함한 31명의 정찰대가 북쪽 숲으로 출발했다.

@

가을의 끝자락이 다다른 숲은 괴물이 아니어도 삭막했다. 새소리가 멀리서 들릴 뿐, 생기가 전해지지 않았다.

로벨은 북쪽 숲 경계에 이르자 전투마에서 내렸다.

“내가 앞장서겠소. 잘 따라오시오.”

로벨의 땅이고, 로벨의 숲이었다. 숲지기보단 못해도 어디가 어디인지 훤했다.

검은 숲이나 하얀 숲처럼 몇 날 며칠을 가야 하는 큰 숲은 아니지만, 그래도 숲이라 불렀을 때 위화감이 없는 크기였다. 어둡고 복잡해서 치기 어린 페르젠 백작과 직업 자부심이 가득한 사냥꾼도 로벨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사냥꾼 찰드 삼부자가 만들어놓은 오솔길을 따라 30분 정도 걷자 찾던 것이 나왔다. 물론, 반갑지는 않았다.

“쿠르르릉- 쿠르릉-”

송곳니 때문에 입술이 닫히지 않아 숨소리가 괴상한 오크였다. 울프 용병단과 사냥꾼이 장전된 투사병기를 위로 올렸다. 인간도 놀랐지만 인간과 조우한 오크는 더 놀랐다. 보리빵을 통째로 삼킬 만큼 커다란 입이 한 뼘쯤 벌어졌다. 인간의 말이 유창했으면 ‘살려줘!’ 혹은 ‘쏘지 마!’라고 외쳤을 것이다. 하지만 끝내 말을 내뱉지 못했다. 사실 말해도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쏴라!”

10여 개의 쿼럴과 20여 개의 화살이 날아갔다. 오크 한 마리를 잡기에는 과한 화력이었다. 검은 숲 산(産) 오크는 머리부터 정강이까지 고슴도치가 되어서 절명했다.

“시작부터 좋구만!”

“야! 빗나간 놈 누구냐!”

울프 용병단은 낄낄거리며 오크 시체로 다가갔다. 쿼럴을 회수하고, 그럴 가능성은 없지만 돈 될 만한 것을 찾았다. 로벨은 흐룬팅 손잡이에 팔을 걸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수령이 오래된 참나무가 가득했다. 오크가 공성병기를 만든 곳이 이곳 같았다.

페르젠 백작은 손수건을 꺼내 코를 막고 오크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이놈은 혼자 떨어져서 뭐한 거지?”

페르젠 백작을 수행하는 젊은 기사가 싹싹하게 말했다.

“탈영병 아닐까요?”

“오크도 탈영해?”

“검은 숲에서 온 행상인이 하는 말이 인간과 오크는 상당히 닮았다고 합니다.”

“올해 들은 말 중 가장 불쾌한 말인데?”

쿵-

로벨은 발바닥을 간지럽히는 미세한 진동과 고막을 자극하는 작은 소음을 감지했다. 주위 사람을 둘러봤지만 시끌벅적하게 떠드느라 알아채지 못한 듯했다.

쿵-

한번은 착각일 수 있지만 두 번은 아니다. 로벨은 모두에게 경고했다.

“적이 온다! 전투준비!”

울프 용병단은 오크의 피가 묻은 쿼럴을 다시 크로스보우에 올렸다. 로벨의 명령이니 의심하지 않았다. 반면 페르젠 백작군은 반응이 굼떴다.

“또 오크야?”

“뭐야? 뭐가 온다고?”

그 잠깐의 차이가 생각보다 컸다.

쿵- 쿵- 쿠직-!

로벨의 허리만한 참나무가 갈대마냥 부러졌다. 로벨은 “피해!” 라고 소리쳤지만 소음에 묻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숲 속을 경계 중인 울프 용병단은 알아서 흩어졌다. 피해자는 멀뚱멀뚱 서서 두리번거리던 페르젠 백작의 젊은 기사였다. 최고의 철을 최고의 대장장이가 다듬어낸 플레이트 메일도 2천 파운드 무게에 깔리면 아무 소용이 없었다. 머리가 깨지고 목이 부러져서 즉사했다.

“괴물이다!”

“암! 괴물이지. 괴물 잡으러 온 거잖아?”

참나무를 꺾으며 등장한 괴물은 용이나 유니콘처럼 실제로 볼 일은 없지만 널리 알려진 괴물이었다. 로벨은 흐룬팅을 뽑으며 익숙한 이름을 불렀다.

“오우거!”

오우거는 성큼성큼 뛰어와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페르젠 백작의 병사를 발로 차고 짓밟았다. 페르젠 백작이 뒤늦게 명령했다.

“물러나! 물러나라! 그쪽 말고... 제길! 아무래도 좋으니까 일단 피해!”

15피트에 이르는 덩치. 황갈색 피부. 바위 같은 근육... 오우거와 처음 조우한 병사들은 패닉에 빠졌다. 산전수전 다 겪은 울프 용병단조차 당황할 정도였으니, 페르젠 백작의 징집병은 말할 것도 없었다.

로벨은 앞으로 뛰어나가며 칼끝으로 오우거 머리를 겨냥했다.

“눈을 노려! 조준! 조준!”

“사격 준비!”

울프 용병단은 ‘눈이 어디야?’, ‘에이, 저게 눈이라고?’ 등의 헛소리를 하면서도 크로스보우를 견착했다. 머리가 아니라 몸이 반응했다.

“쏴!”

파파팡-!

시위가 풀리고 활대가 펼쳐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애꾸눈 볼포스가 훈련시킨 명사수답게 상당히 정확했다. 비록 주먹보다 작은 눈알을 명중시키지는 못했지만, 눈 주위에 박혀서 치명적인 피해를 주었다.

고오오오오오-!

오우거가 피투성이 얼굴을 감싸 쥐고 괴성을 토했다. 숲 전체가 흔들렸다. 늑대성과 마을에서도 감지할 수 있을 듯했다.

로벨은 귀를 막고 싶은 욕구를 꾹 참고 울프 용병단에게 손짓 발짓했다.

“물러나! 물러나서 재장전해!”

울프 용병단은 감사하게 생각하며 신속히 뒷걸음쳤다. 로벨 주위에는 머리가 깨져서 죽은 기사와 다리가 으스러져서 비명 지르는 병사만 남았다.

“이번이 두 번째지?”

로벨은 마른침을 삼키고 흐룬팅을 양손으로 잡았다. 목 관절을 심히 꺾어야 마주할 수 있는 오우거의 얼굴을 올려다보니 흐룬팅이 바늘처럼 작게 느껴졌다.

“네놈이 이번 전쟁의 마지막이야. 그렇지?”

오우거는 인간의 말을 알지 못했다. 피와 침을 뿌리며 괴성을 질렀다. “구오오오-!” 로벨은 알아서 결론지었다.

“긍정으로 받아들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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