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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141화 (141/605)

141화. 전쟁 준비

141화. 전쟁 준비

어린 집사가 단상 앞으로 뛰어나가 백기를 걸었다. 기권 표시였다. 국왕은 한탄하고, 관중은 야유했지만, 호른 경이 낭랑한 목소리로 검은 숲의 몬스터가 볼탄 반도를 침공하였노라 고하자 금방 조용해졌다.

로벨은 국왕 내외에게 묵례하고 말머리를 돌렸다. 로벨뿐만 아니라 볼탄 반도에서 온 기사 대부분이 마상시합장을 떠났다. 유흥을 즐길 상황이 아니었다.

“설마설마했는데! 설마가 설마라니! 설마스럽잖아!”

허풍쟁이의 헛소리에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다. 수레에 농마를 연결하고 짐을 싣느라 바빴다.

로벨은 뚱뚱한 말과 무거운 수레가 탐탁지 않아 자작나무 숲의 호른 경에게 물었다.

“말은?”

“제 말과 저 용병이 타고 온 말이 전부입니다.”

때마침 겁쟁이 데비가 짐말을 끌고 나왔다. 어린 집사가 도로 공사를 위해 빌려온 말이었다. 로벨을 포함한 늑대성 식구가 모두 놀랐다.

“너 말 탈 줄 알아?”

“세상에! 데비 주제에?”

겁쟁이 데비가 뒤통수를 긁었다.

“우리 아버지가 마구간지기였습니다. 어릴 때 자주 말 타고 놀았지요. 어라? 제가 말씀 안 드렸습니까요?”

로벨은 잘 했다고 칭찬하고 나머지 일행에게 말했다.

“어린 집사는 나랑 타고, 애꾸눈은 겁쟁이와 함께 타.”

“저요! 저는요?”

마녀 키르케가 손을 번쩍 들었지만 로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리가 없어. 외팔이와 허풍쟁이와 함께 따라와.”

“우씨! 왜 꼬마 집사랑 애꾸눈 아저씨만 데려가요!”

어린 집사는 ‘그쪽보다 유능하니까요’라고 속삭이고 콧대를 높였다. 어린 집사의 생각과 비슷하지만 달랐다.

“일 시켜야 하니까.”

애꾸눈은 ‘그럼 그렇지...’라고 중얼거리고 겁쟁이에게 다가갔다. 사내 둘이 껴안자니 영 불쾌했다. 그러나 마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저 기사님 말이 비잖아요! 저기 타고 갈게요!”

호른 경이 안장에 오르다가 발을 헛디뎠다. 그리고 수치심을 담아 되물었다.

“뭐라고?”

마녀는 팔짱을 끼고 30년 굴러먹은 용병처럼 걸걸하게 말했다.

“거 말 한 마리 가지고 생색내지 말고 같이 좀 타자고요.”

호른 경은 어이가 없어서 실소했다. 그리고 슬그머니 로벨의 눈치를 살폈다. 마녀 키르케는 로벨의 정부(情婦)라 소문나 있었다. 로벨의 주위를 조사한 호른 경은 헛소문이란 것을 알지만, 남녀의 감정이라 확신할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평범한 하녀가 아니었다.

로벨은 어린 집사를 앞에 태우고 자세를 교정해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알아서 결정하라는 의미였다. 호른 경은 심각하게 고민한 후 말했다.

“이번만 특별히 허락하지.”

“말 한번 태워주면서 특별히는 무슨...”

“생각이 바뀌었다. 저들과 함께 와라.”

“어머나! 감사해요! 우리 기사님보단 못해도 훌륭한 기사님이세요!”

호른 경은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었다.

조급한 로벨과 어린 집사, 불쾌한 겁쟁이와 애꾸눈, 찝찝한 호른 경과 마녀 키르케, 아무 생각 없는 아야와 이야카, 그리고 자포자기한 외팔이 더치와 허풍쟁이 제이콥으로 나눠졌다.

“서두르자! 볼탄 반도로!”

“출발! 늑대의 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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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때는 닷새가 걸렸지만, 올 때는 사흘로 충분했다. 짐이 가벼운 까닭도 있고, 길이 익숙한 까닭도 있었다. 물론, 말 못하는 말들의 주장은 조금 다를 것이다.

푸슈- 푸슈- 푸르릉-!

로벨은 숨을 헐떡이는 전투마를 살살 달랬다. 로벨과 어린 집사가 가벼운 편이긴 해도 두 사람의 몸무게였다. 더불어 컴포지트 아머까지 갖춰 입고 있으니 만만한 탑승자가 아니었다.

그래도 전투마 정도면 살만했다. 진짜 죽을 지경인 것은 우람한 용병 두 사람을 태운 짐말이었다. 눈이 반쯤 뒤집히고 침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어린 집사가 비싸게 빌려온 짐말이 쓰러지기 직전, 간신히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늑대의 성입니다!”

로벨은 낯익은 개울과 물레방앗간, 그리고 친근한 언덕 위에 성을 보았다.

로벨은 고삐를 뒤로 당겨 속도를 늦췄다. 죽기 살기로 로벨을 따라온 호른 경과 겁쟁이 데비도 급히 제동을 걸었다.

“마로드?”

“숨 돌려. 천천히 가자.”

“마로드, 한시가 급합니다.”

“이제 다 왔잖아. 마을 사람한테 당황한 모습을 보일 필요 없어.”

호른 경은 눈을 크게 뜨고 감탄사를 내었다. 영지를 가진 기사와 자유기사의 차이였다.

로벨은 전투마를 다독이며 천천히 로드릭 마을을 지났다. 로벨을 알아본 농부와 시장 상인이 모자를 벗고 꾸벅 인사했다. 전쟁 소식에 분위기가 흉흉한 찰나, 로벨이 부하들을 거느리고 돌아오자 크게 안심한 모습이었다.

로벨은 서두르는 기색 없이 언덕길을 올랐다. 펄프 대장이 소식을 전해 듣고 성문 밖으로 뛰어나왔다.

“영주님, 일찍 오셨군요. 다행입니다.”

로벨은 인사를 생략하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상황은?”

“검은 숲의 몬스터가 북부대로를 넘어 북쪽 영지들을 습격 중입니다. 깁스 자작의 영지에서도 오크 십수 마리가 목격되었습니다.”

어린 집사는 등자에 발이 닿지 않아 바동거리다 로벨의 도움으로 간신히 내려왔다. 그리고 날카롭게 따져 물었다.

“그렇게 깊숙이 들어왔다고요? 강철성은 뭐하고요? 지금껏 잘 막았잖아요?”

“막지 못했소. 아니, 않았소.”

호른 경과 마녀 키르케가 전투마를 몰아 가까이 다가왔다. 로벨은 일행을 쭉 둘러보고 말했다.

“자세한 것은 모두 모여서 듣자. 회의실로 소집해.”

“우리 성에 회의실이 어디 있... 아, 식당이요? 겁쟁이 데비! 소대장들한데 식당으로 모이라고 전해요!”

“...회의실이라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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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컴포지트 아머를 분리하고 아밍 더블릿 위에 가죽 망토를 둘렀다. 땀 냄새가 나지만 씻고 갈아입을 동안 기다릴 수 없었다.

로벨이 식당, 아니, 회의실에 등장하자 펄프 대장, 애꾸눈 볼포스, 겁쟁이 데비, 과묵한 몬트, 코골이 바디 등이 일제히 일어났다. 외팔이 더치를 제외하고 울프 용병단 핵심 멤버가 전부 모였다. 그 외에도 어린 집사, 마녀 키르케, 자작나무 숲의 호른 경도 한 자리씩 차지했다. 로벨은 평소 식사 자리에 앉아서 테이블에 두 손을 올렸다.

“시작해.”

펄프 대장이 헛기침과 함께 보고했다.

“이미 아시겠지만, 검은 숲의 몬스터가 북부대로를 지나 볼탄 반도로 넘어왔습니다. 산발적으로 출몰, 민가를 습격해서 정확한 숫자가 파악되지 않지만, 피난민과 행상인의 증언을 조합할 때 최소 1천 마리는 넘을 듯합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대형 몬스터, 다시 말해...”

“오우거가 목격되었다고?”

“예? 예. 그렇습니다.”

로벨은 입술을 꾹 다물고 손톱으로 식탁을 두드렸다. 검은 숲의 패잔병 말이 사실이었다. 로벨 대신 어린 집사가 질문했다.

“강철성은요? 강철성이 북부대로를 막고 있잖아요. 설마 함락되었나요?”

펄프 대장은 로벨이 아무 말 없자 어린 집사에게 보고를 이어갔다.

“아니오. 군사를 철수시켜서 성 안에 틀어박혔소. 적이 너무 많아 수성으로 바꾸었다는데, 몬스터가 본격적으로 밀려오기 전에 이미 군사를 철수시킨 것이...”

애꾸눈이 안대를 고쳐 쓰며 말했다.

“길을 내준 거요. 마침 핑계거리가 있으니. 최선을 다해 볼탄 반도를 지키고자 했으나, 볼프 후작과 늑대의 기사가 자리를 비워서 아무 지원도 받지 못했다.”

“으음...”

“그 두 사람은 지금까지 세운 공이 있으니, 세간의 비난은 어지러운 시국에 한가롭게 토너먼트나 개최한 국왕 폐하에게 집중될 거요. 어쩌면 국왕 폐하가 소환해서 어쩔 수 없이 포클랜드에 불려갔다는 뉘앙스로 선동할 수도 있소.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원망할 대상과 구원해 줄 영웅이지, 진실 따위가 아니니까.”

코골이 바디가 혀를 찼다.

“쳇! 근데 틀린 말이 아니잖아? 에르나 왕국과 검은 숲 몬스터가 날뛰는데 그랜드 토너먼트라니? 정신머리가 있으면 그러면 안 되지.”

어린 집사가 눈꼬리를 치켜떴다.

“지금 우리 영주님한테 한 말이에요?”

“어어? 그럴 리가? 국왕 폐하 나리에게 한 말이오!”

로벨은 식탁 아래로 숨어드는, 그러나 덩치가 덩치라 숨겨지지 않는 아야와 이야카를 보았다. 패거리(?)가 떠드니까 자기들도 끼고 싶은 듯했다. 로벨은 빙그레 웃었다.

‘개소리라 이거지?’

마녀가 들으면 개가 아니라 늑대라고 빼액! 소리쳤을 것이다. 로벨은 좀 더 크게 미소 지었다.

“마로드?”

로벨을 빤히 쳐다보던 호른 경이 가장 먼저 웃음을 알아챘다. 로벨은 웃음기를 지우고 군주로서, 지휘관으로서 모두에게 명령했다.

“강철성은 중요하지 않아. 우리가 신경 써야 할 것은 우리 영지민과 영지민의 재산이야. 깁스 자작령에 출몰했다면 이곳에 나타나는 것도 시간문제야.”

기사와 용병은 물론이고,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도 자세를 똑바로 했다. 로벨의 목소리에는 묘한 장악력이 있었다. 리더십 혹은 카리스마라 설명해야 할 것이다.

“어린 집사와 키르케는 노인과 아이들을 성내로 피신시켜. 애꾸눈과 과묵한 몬트는 식량과 자재를 성 지하 창고로 옮기고, 겁쟁이와 코골이는 무기를 성벽 위로 올려. 벽돌, 기름, 화약, 불쏘시개 다 좋아. 그리고 호른 경, 파발이 되어주어야겠소.”

“에릭 프란시스 공작에게 가면 됩니까?”

“그전에 파도성을 찾아가시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우리를 도와줄 영주는 페르젠 백작뿐이오.”

“하지만 그 자는... 아니, 어쩌면 도움이 되겠군요.”

호른 경은 전쟁터에서 만난 하버트 페르젠 ‘주니어’ 백작을 떠올렸다. 시기심과 질투심이 많지만, 그래서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로벨에게 잘난 척하기 위해서라도 군사를 끌고 올 것이다. 호른 경은 흉갑을 한번 두드리고 회의실을 나갔다. 로벨은 마지막으로 펄프 대장에게 명령했다.

“용병과 영지민에게 모두 전해. 언제 괴물이 쳐들어올지 모르니 철저히 준비해. 하지만 겁먹지 마. 나 로벨 로드릭의 숨이 붙어 있는 한 그 누구도 이 땅을 넘볼 수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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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마상시합으로 지저분해진 컴포지트 아머를 손질했다. 어린 집사가 돕겠다고 했으나 영지민을 챙기기도 바빠 보여서 거절했다.

탕! 탕! 탕!

작은 망치로 퀴스의 움푹 파인 부분을 두드렸다. 언제 생긴 건지 모르지만 잘 펴지지 않았다.

‘늑대의 왕과 싸울 때? 맥켈런 남작과 싸울 때? 에르나 왕국과 싸울 때?’

전쟁이 너무 많아 기억나지 않았다. 로벨 나잇대에 로벨만큼 전투 경험이 풍부한 기사는 없을 것이다. 이웃 영주와의 분쟁, 공작가의 내전, 후작가의 항쟁, 그리고 이웃나라와 전쟁까지. 저주라도 받은 것처럼 매년 싸웠다.

“이제는 몬스터야.”

한숨이 절로 나왔다.

로벨은 꿈쩍도 안 하는 갑옷을 치우고 창가로 자리를 옮겼다. 겁쟁이 데비와 코골이 바디가 신입 울프 용병단을 갈구며 기름통을 옮기고 있었다. 언어의 상당부분이 욕설이었지만 그리 주목받지 못했다. 어린 집사가 흘린 기름만큼 급료에서 차감하겠다며 눈을 부릅뜨고 돌아다니기 때문이다. 울프 용병단의 경계대상 1위가 어린 집사고 2위가 펄프 대장이란 농담이 사실처럼 느껴졌다.-사실이다-

로벨은 성벽 너머의 북쪽 숲을 보았다. 까마득하게 보이지만 말로 달리면 10분도 안 걸릴 곳이었다. 어둠과 신비와 괴물이 도사리는 곳이기도 했다.

‘올 테면 와라.’

로벨은 아론다이트의 폼멜을 꽉 쥐었다. 그러나 잠시 뒤 생각을 고쳐먹었다.

‘안 오면 더 좋고.’

옛 신만이 알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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