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그랜드 토너먼트
140화. 그랜드 토너먼트
빠아암- 빰빰- 빠암-!
스무 개의 황동 나팔이 푸른 가을 하늘을 향해 행진했다. 3개의 밸브가 일사불란하게 발을 맞추자 넓적한 주둥이에서 경쾌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큰 파도가 나팔의 행진을 집어삼켰다.
와아아아! 와아아!
쿵! 쿵! 쿵! 쿵!
1만 명의 관객이 내지르는 함성이 하늘을 뒤덮고, 1만 명이 구르는 발소리가 마상시합장을 흔들었다.
로벨은 건틀렛의 고정끈을 꽉 조이고 손가락을 움직였다. 컴포지트 아머에서 가장 정교하고 가장 섬세한 부위였다.
“영주님, 괜찮겠어요?”
어린 집사가 해비 랜스를 품에 안고 물었다. 로벨은 아멧의 바이저를 내리고 말했다.
“첫 시합이잖아. 당연히 괜찮아.”
“그게 아니라, 늑대의 왕이...”
로벨은 오리 주둥이를 연상시키는 금속 가면으로 어린 집사를 내려다보았다.
“그건 그때 생각하자. 랜스.”
로벨은 버드나세를 받아서 가볍게 위로 올렸다. 길이와 모양은 해비 랜스와 똑같지만, 재질이 포플러나무라 훨씬 가벼웠다.
로벨은 무게에 적응할 겸 좌우로 휘저었다. 그러자 1만의 관중이 환호성을 질렀다.
“그랜드 챔피언! 그랜드 챔피언!”
“로벨 로드릭! 사랑해요!”
시합은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혼란의 도가니였다. 로벨은 머쓱해서 전투마를 재촉했다. 시합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지고, 소란이 조금씩 줄어들었다.
난쟁이 광대가 단상에 올라가려고 낑낑거리다 굴러 떨어지자 장내에 웃음이 피어났다. 광대다운 몸짓이었다. 난쟁이 광대는 엄살을 조금 피우다가 주위 사람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단상에 올라갔다. 국왕 내외에게 정중히 인사하고, 관중을 향해 우렁차게 참가자를 소개했다.
“존경하는 신사숙녀 여러분과 조금 덜 존경하는 코흘리개 여러분! 청코너를 봐주십시오! 볼탄 반도의 제일 가는 기사! 지금껏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무적의 기사! 그 누구도 막지 못한 최강의 기사! 그랜드 챔피언 로벨 로드릭 백작입니다!”
로벨은 버드나세를 살짝 들어올렸다. 관중의 함성이 폭풍처럼 쏟아졌다.
“이어서 홍코너! 어둡고 차가운 델포이 섬에서 찾아온 공포의 기사! 아흔아홉 명의 기사를 꺾고 이 자리에 올라온 불패의 기사! 찰스 도미노!”
로벨에 비하면 조금 약하지만 무안하지 않을 정도로 환호가 나왔다.
로벨은 전투마의 갈기를 쓸어내렸다. 전쟁과 마상시합에 이골이 낫는지 이제 긴장도 하지 않았다. 태평한 얼굴로 어린 집사가 챙겨준 사과를 우물거렸다.
‘나도 그런가?’
로벨은 마상시합장 맞은편의 찰스 도미노 경을 보았다. 체구가 좋고 갑옷이 화려했다. 얼굴과 행동에 자신감이 가득했다. 그랜드 토너먼트에 출전할 정도면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을 실력이 분명했다. 그러나 긴장되지 않았다.
‘늑대의 왕이 아니니까.’
광대가 단상에서 뛰어내리고, 깃발이 아래로 떨어졌다. 로벨은 전투마의 옆구리를 차고 버드나세를 랜스 레스트에 걸었다. 그리고 멧돼지처럼 질주하는 적수에게 헝겊 뭉치를 고정했다.
‘빨리 끝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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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토너머트는 3일에 걸쳐 진행되며, 첫째 날과 둘째 날에 최종 결승진출자 8명을 선발한다. 로벨은 지난 이틀 동안 4차례 시합에 나갔고, 4번 승리했다.
“그것도 마상창으로 승리했어요!”
속된 말로 ‘개싸움’이라 불리는 도보전으로 끌고 가지 않고 말 위에서 승부를 보았다. 3번 중 1번은 무승부로 끝나는 그랜드 토너먼트임을 감안하면 놀라울 정도로 깨끗한 승리였다.
“역시 우리 기사 나리는 대적할 자가 없수다!”
“늑대의 왕을 빼면 말이지.”
허풍쟁이 제이콥이 눈치 없이 아픈 곳을 찔렀다. 따가운 눈총이 쏟아졌지만 허풍쟁이는 실수를 깨닫지 못해 당당했다
“늑대의 왕은?”
“4전 4승이요. 그리고 4번 다 낙마로 끝냈어요.”
“허! 참나! 안장에 꿀을 발랐나? 어떻게 죄다 낙마하오?”
“바위도 때려 부술 힘으로 후려 패는데 버틸 재간이 있나요.”
“그 괴물보다 괴물을 태운 말이 더 신기하오. 어디서 그런 거마를 가져왔지?”
“말도 마라. 오늘 보니까 게거품 물고 헐떡거리더라. 이거 동물학대야.”
로벨은 늑대의 왕을 떠올리고 한숨 쉬었다. 언젠가 다시 싸울 날이 올 줄은 알았지만, 그날이 그랜드 토너먼트일 줄은 몰랐다. 그때, 애꾸눈 볼포스가 저녁거리를 구해서 로벨의 막사로 돌아왔다.
“영주님과 늑대의 왕 중 누가 이길지 내기 중입니다.”
애꾸눈이 구해온 것은 빵과 치즈만이 아니었다. 어린 집사가 눈을 번쩍였다.
“어느 쪽이 배당이 높아요?”
“영주님이 좀 더 높소.”
“에잇! 못생긴 도시 놈들! 그리 눈깔이 삐었나!”
“제가 볼 때 눈깔이 좋아서 그리 배팅하... 컥!”
어린 집사는 끝까지 눈치가 없는 허풍쟁이의 머리를 물어뜯었다. 그러자 아야와 이야카가 기꺼이 동참해서 허풍쟁이의 엉덩이와 허벅지를 깨물었다.
“어억! 하지 마쇼! 하지 마! 으악! 니들은 뭐야!”
마녀 키르케는 박수를 치며 좋아했고, 애꾸눈은 귀중한 양식이 상할까봐 냉큼 자리를 피했다.
“거, 애새끼들도 아니고, 점잖게 좀 있으쇼.”
어린 집사는 외팔이에게 핀잔받자 충격으로 딱딱하게 굳었다. 로벨은 막사가 날아갈 듯한 깊은 한숨을 쉬고 말했다.
“나가.”
“...영주님?”
로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 나가. 당장.”
로벨은 정신 사나운 일행을 쫓아내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묻었다. 마녀가 어린 집사 때문이라고 징징거리는 소리와 애꾸눈이 철 좀 들라고 타박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다가 멀어졌다. 로벨은 아론다이트와 흐룬팅을 가까이 끌어당기고 중얼거렸다.
‘내가 이길 수 있을까?’
그 질문의 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래. 이겨야지.’
로벨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늑대의 왕과 대적할 방법을 고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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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토너먼트 3일 차 아침이 밝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투명한 날이었다.
로벨은 어린 집사의 도움을 받아 컴포지트 아머를 갖추고 콩과 귀리로 배를 든든히 채운 전투마에 올랐다.
건초와 말똥이 가득한 좁은 막사 통로를 지나 급조한 울타리를 넘자 뻥 뚫린 미상시합장과 수많은 관중, 그리고 승리한 기사들이 나타났다.
“로벨 로드릭! 로벨 로드릭!”
“그랜드 챔피언이다!”
로벨의 투박한 컴포지트 아머를 알아본 관중들이 환호했다. 손을 한번 흔들어주면 좋으련만, 쇼맨십이 부족한 로벨은 무뚝뚝하게 자신의 자리를 찾아갔다.
그랜드 토너먼트에 참가한 54명의 기사 중 8명만 남았다.
“나의 자랑스러운 기사들이여! 그대들의 시합을 잘 보았다! 이 자리까지 오게 된 영광을 만끽하며,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서 정정당당하게...”
어린 국왕이 격양된 목소리로 축복했다. 국왕의 측근과 기사와 관중이 모두 흥분해 있어서 딱히 이상하지 않았다. 이곳에서 냉정한 것은 로벨 외 결승진출자 7명뿐이었다.
로벨은 눈동자를 움직여 늑대의 왕을 보았다.
‘마도의 수호자.’
오크나 고블린 사이에서 흉포하게 웃고 있어야 할 자가 인간들 속에 섞여서 말을 타고 있으니 이상했다. 어색하고 이질적이다. 로벨의 시선을 느꼈는지 늑대의 왕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인간과 짐승이 눈을 마주쳤다.
‘늑대의 왕 리카온.’
‘그랜드 챔피언 로벨 로드릭.’
늑대의 왕은 손가락 세 개를 펴보였다. 세 번째 승부라는 신호였다. 로벨은 마른침을 삼키고 중얼거렸다.
‘두 번째가 아니라 다행이야. 브이를 보였으면 이상할 뻔했어.’
어린 집사들이 들으면 로벨도 마도의 수호자만큼이나 정상은 아니라 생각했을 것이다.
첫 시합은 늑대의 왕과 검은 숲의 스콧 하퍼 경이었다.
로벨은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가 기다리는 대기석으로 돌아가 아멧을 벗고 전투마에서 내렸다.
“영주님은 두 번째 시합이에요. 상대는 포클랜드 시티의 롭슨 다비츠 경이고요.”
로벨은 마녀가 건네준 수통을 열어 한 모금 마시고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포클랜드 지방의 3연승 챔피언보다 늑대의 왕 시합이 신경 쓰였다. 장내가 정리되자 두 명의 기사, 아니, 한 명의 기사와 한 마리의 괴수가 차례로 나타났다. 난쟁이 광대가 지난 이틀 사이 부쩍 쉬어버린 목소리를 짜내어 소개했다.
“전설! 신화! 이불 속의 공포이자 난로가의 괴담! 죽음을 몰고 다니는 늑대의 기사가 현실에 나타났다! 1만의 에르나 왕국인을 떨게 만든 악몽의 기사! 리카온 베드엑스!”
로벨은 눈을 가늘게 뜨고 늑대의 왕을 관찰했다.
‘저 말이 진짜란 것을 몇 명이나 알까?’
늑대의 왕은 승마술은 기괴했다. 말을 몬다기보다 다리 사이에 끼우고 끌고 가는 느낌이었다. 로벨의 전투마와 품종이 같은 오베리아 산 거마인데, 늑대의 왕이 올라타니 꼭 아이란드 왕국산 망아지 같았다.
“검은 숲의 흉악한 몬스터조차 무서워하는 학살자! 포비아 왕국을 수호하는 진정한 기사! 스콧 하퍼 경!”
기사와 괴수가 동시에 말을 몰았다. 서서히, 그러나 걷잡을 수 없이 속도를 끌어올렸다. 길어서 가늘어 보이는 버드나세가 짐승의 뿔처럼 상대를 겨냥했다. 늑대의 왕은 랜스 레스트를 사용하지 않았다. 바위처럼 울퉁불퉁한 손으로 버드나세를 지탱했다.
스콧 하퍼 경은 빼어난 솜씨로 늑대의 왕의 헬멧을 강타했다. 깡-! 예의에 어긋나지만 탓할 수 없었다. 늑대의 왕을 쓰러트릴 유일한 방법을 찾아낸 것이니까. 그러나 회심의 일격이 소용없었다. 늑대의 왕은 산산이 깨져 휘날리는 버드나세 파편 속에서 흐트러짐 없이 자세를 유지했다.
“역시 괴물!”
“진짜 랜스로 찔러도 아파할까 말까한데, 저런 장난감이 통할 리 없죠.”
스콧 하퍼 경은 기사 종자에게서 새 창을 받아 자세를 잡았다.
“한 번으로 안 되면 두 번! 세 번 때려 넣어주마!”
“와우!”
로벨 일행이 동시에 감탄했다. 패기가 대단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패기뿐이었다. 2차전에서 늑대의 왕의 버드나세에 맞아 하늘을 비행했다.
“역시...”
“역시는 역시야.”
로벨은 똑똑히 보았다. 늑대의 왕은 전투마가 비명을 지를 만큼 몸을 비틀며 버드나세를 찔렀다. 고정된 랜스를 맞히는 것이 아니라 직접 찔러 넣었다. 인간을 초월한 힘과 반사신경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마녀가 비명처럼 로벨을 불렀다.
“기사님! 기사님! 저런 걸 이길 수 있어요?”
“...아니.”
로벨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아무리 로벨이라도 저런 비상식적인 랜스 차칭을 할 수 없었다.
‘마상창으로 이기는 것은 불가능해. 점수를 유지해서 도보전으로 가야할 거야.’
로벨은 포클랜드 챔피언을 상대할 준비하면서 늑대의 왕을 생각했다.
“아이참! 무슨 생각해요?”
어린 집사가 지금 시합에 집중하라고 조언했지만 듣지 못했다.
‘그런데 도보전으로 이길 수 있을까?’
로벨의 모든 근심, 걱정은 부질없었다.
“마로드! 마로드!”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로벨이 열띤 환호를 받으며 마상시합장에 들어섰을 때였다. 애꾸눈과 허풍쟁이, 그리고 자작나무 숲의 호른 경과 겁쟁이 데비가 숨을 헐떡이며 로벨을 찾았다. 로벨은 낯선 곳을 찾아온 낯익은 얼굴들에 놀라서 바이저를 올렸다.
“여기 어떻게...”
겁쟁이 데비가 호들갑 떨면서 소리쳤다.
“기사 나리! 큰일 났습니다! 아주아주 큰일이 났습니다!”
“국왕 폐하가 지켜보는 시합을 방해할 정도로?”
자작나무 숲의 호른 경은 못마땅하게 쳐다보는 국왕과 웅성거리는 관중을 차례로 보고 짤막하게 보고했다.
“성으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전쟁이 일어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