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피 냄새
첫 전투는 대승으로 끝났다.
에르나 왕국군은 100여 명이 전사하고 200여 명이 부상당했다. 산으로 숲으로 도망친 탈영병까지 더하면 사실상 1천 명이 괴멸했다. 그러나 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기뻐하지 않았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기뻐할 수 없었다.
발가락 슈미츠 일당이 로벨의 눈치를 보며 속닥였다.
“늑대의 왕이 대체 뭐요?”
“그것도 몰라서 묻는... 아참, 너희들은 거인의 발 전투를 모르지?”
“그전에도 한번 싸웠어. 후계자 전쟁 때 말이야.”
울프 용병단의 최고참인 허풍쟁이 제이콥이 별명대로 허풍을 곁들여서 늑대의 왕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소문은 생물과 같아서 시간이 지나면 덩치가 커지고 손쓰지 않으면 걷잡을 수 없이 멀어진다. 허풍쟁이 제이콥의 이야기가 에릭 프란시스 공작군 전체에 퍼졌다. 그 결과 사기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로벨이 어이가 없어서 물었다.
“병사들이 좋아한다고?”
“...예.”
“오크를 산 채로 씹어 먹고 오우거를 목 졸라 죽이는 괴물을 말이야?”
“오우거 이야기는 아마도 영주님의 모험담에서 와전된 것 같습...”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괴물이란 것을 알면서도 아무렇지 않단 말이야?”
로벨의 질문에 해답을 줄 사람이 있었다. 펄프 대장이 머리를 긁적이고 설명했다.
“저놈들이 볼 때는 기사 나리나 괴물이나 비슷합니다.”
“나를 괴물로 여긴다고?”
“그런 뜻이 아니라 ‘자신과 별개의 존재’로 생각한다는 겁니다. 기사가 자신과 똑같은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사도 벼룩이 꼬이고, 충치가 생기고, 아침저녁으로 방귀를 뀐다고 하면 무지한 농민들은 말도 안 된다고 떠들 겁니다.”
“나, 난 방귀 안 뀌어!”
로벨이 얼굴을 붉히고 소리쳤다. 수염이 거뭇거뭇 자란 사내들이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너무 뻔해서 지적하고 싶지도 않은 거짓말을 대하는 태도였다.
“아무튼, 괴물이라 해도 적이 아니면 무서울 것이 없다는 사고입니다. 이미 그런 존재에 익숙하니까요.”
로벨은 억지로 농민 입장에서 생각해보았다. 기사나 몬스터나 수틀리면 피 보는 것이 똑같았다.
“그럼 늑대의 왕을, 저 무시무시한 괴물을 그냥 둘 거란 말이야?”
“국왕 폐하와 볼프 후작이 결정할 일이지만, 아마도 그럴 가능성이 크지 않겠습니까?”
조금의 과장도 없이 ‘일당백’의 전사를 쫓아낼 리 만무했다. 로벨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골치 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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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천의 선발대를 괴멸시켰지만 변한 것은 없었다. 에르나 왕국군은 아직도 1만 4천 명의 군사와 강철곰을 가지고 있었다. 잠시 숨 고르기가 이어졌다.
사흘이 지나자 에릭 공작군과 볼프 후작군에 이어서 검은 숲의 제임스 공작군이 도착했다. 총 2,500명의 군사로 아군이 두 배 늘어났다. 승전에 이어서 지원군까지 도착하자 사기가 구름 위를 떠다녔다. 그리고 사기에 취한 자들이 나타났다.
“지금 요새를 공격하자고 했소?”
로벨보다 골치 아픈 사람이 에릭 공작이었다. 최고 지휘관-국왕 폐하-의 부재중에 3개의 군사집단이 모였으니 충돌이 필연이고 갈등은 상식이었다.
“그렇소! 승리의 여세를 몰아가야 하오!”
“...진심으로 하는 말이오?”
첫 전투에 참전하지 못한 검은 숲의 제임스 공작 기사들이 공격을 주장했다. 로벨은 그들을 혐오하는 동시에 이해했다. 국왕 폐하가 도착하기 전에 면치레할 전공이 간절할 것이다.
페르젠 백작이 쿵! 소리 나게 탁자를 내리쳤다.
“정신 차리시오! 저들은 우리군의 3배가 넘소!”
“맞소이다. 하다못해 국왕 폐하의 군대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에디즈 자작이 조심스럽게 거들었다. 그러자 제임스 공작 휘하의 모 백작이란 기사가 비웃었다.
“볼탄 반도의 기사들이 언제부터 겁쟁이가 되었소이까?”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볼탄 반도의 기사들’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한마음 한뜻으로 뭉쳤다. 페르젠 백작, 헤르만 백작, 에디즈 자작, 맥기 남작, 모몬트 남작 등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삿대질했다.
“그 겁쟁이 칼에 피 보기 싫으면 말조심하시오!”
“혀를 잘못 놀리면 목이 상하는 것은 개국공신 가문이라도 예외가 아니오!”
로벨은 눈꼬리를 살짝 올리고 개국공신의 후예를 바라보았다. 검은 숲의 제임스 공작은 정복왕 샘 포클의 12기사의 후예였다. 로벨은 시선을 돌려 다른 12기사의 후예들을 보았다. 에릭 공작과 볼프 후작이 흥분한 봉신들을 제지했다. 세 가문이 한자리에 모인 곳은 근 20년 만이었다.
‘그 옛날 샘 포클이 원정군을 이끌 때도 이러했을까?’
그 시절과 다른 것은 위대한 왕이 없다는 것과 로드릭 성(姓)의 주인이 이름 없는 수행기사가 아니란 것이다.
“본인은 찬성이오.”
로벨이 입술을 떼자 모두가 돌아보았다. 포비아 왕국의 그랜드 챔피언이자 프란시스 가문의 이인자인 로벨 로드릭의 발언은 그만한 무게가 있었다.
“로벨 백작? 지금 찬성이라 했소?”
“적군의 수비태세를 확인할 필요가 있소.”
“허나 우리군은...”
“국왕 폐하께서 도착했을 때 적군에 대해 보고할 말은 있어야지 않겠소?”
“으음...”
로벨은 에릭 공작을 훔쳐보았다. 로벨의 생각에 동의하는지, 아니면 로벨의 체면을 생각해서인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검은 숲의 제임스 공작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말이 통하는 기사가 한 명 있군! 생긴 것과 달리 용기가 아주 마음에 드오! 로벨 로드릭 백작이라 했소?”
“그러나 전면전은 안 되오.”
로벨은 검은 숲의 제임스 공작을 무시하고 여러 기사들에게 말했다. 제임스 공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먼저 볼탄 반도를 무시한 것은 공작이었으니, 정당한 앙갚음이었다.
“지금 병력으로 아이언베어 요새를 탈환하는 것은 불가능하오. 따라서 공격목표는 요새가 아니오. 요새 밖에 주둔 중인 외곽부대를 습격해야 하오.”
“그게 의미가 있소?”
“물자를 소모시키고, 긴장과 피로를 심어주면 충분하오.”
로벨이 딱 부러지게 끊자 페르젠 백작이 거들었다.
“옳소! 1만 4천 명이 넘으니 식량과 무기가 넉넉하지 못할 거요! 화살을 한 대씩만 쏘아도 1만 발이 소모되니 장기전으로 몰고 가야 하오!”
1만 명이 활로 무장했을 리 만무하지만, 기사들은 구태여 지적하지 않았다.
에릭 공작이 의자 뒤로 몸을 당기고 지휘막사를 꽉 채운 60명의 기사에게 물었다.
“로벨 로드릭 백작의 작전에 자원할 사람이 있소?”
“본인이 수행하겠소.”
도반 도트넘 백작이 제일 먼저 말했다. 로벨이 뒤이어 손을 들었다. 선수를 빼앗긴 검은 숲의 기사들은 분개하며 앞 다퉈 자원했다. 공격을 주장한 것은 자신들인데, 엉뚱한 놈이 작전을 가로챘다.
한편, 그 엉뚱한 놈(?)은 펄프 대장이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아 걱정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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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언베어 요새가 작지는 않지만, 1만 명의 군사를 수용할 정도로 크지도 않았다. 본래 800여 명이 수비하는 곳이라, 성루와 연병장을 꽉꽉 채워도 2천 명이 주둔하기 힘들었다. 1만 2천 명은 요새 밖과 붉은 산 기슭에서 야영했다.
로벨과 울프 용병단이 노리는 것도 그런 외곽 부대 중 하나였다.
펄프 대장이 이빨 빠진 숏소드를 뽑으며 고백했다.
“좋습니다. 인정합니다.”
로벨은 목소리 낮추라는 제스처를 취한 후 짧게 물었다.
“뭐를?”
“이 작전이 썩 괜찮다는 것 말입니다.”
“...왜 사서 고생 하냐고 소리칠 때는 언제고?”
“제가 언제 소리쳤습니까? 그냥, 좀, 뭐냐, 구시렁거렸을 뿐이지요.”
울프 용병단이 소리죽여 키득거렸다.
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초봄에도 무성한 침엽수 숲에 숨어 있었다. 엇갈린 할버드(Halberd:도끼창)를 가문의 문장으로 삼는 어느 기사의 야영지가 훤히 보이는 장소였다.
로벨은 붉은 빛깔을 띄는 소나무가 많아 붉은 산이라 불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지리학적이고 생물학적인 고찰을 조금 하다가 정신 차렸다.
“눈치 못 챘겠지?”
“예. 아무런 움직임이 없습니다.”
로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적으로 열세인 포비아 왕국이 공격을 시도할 줄은, 그것도 요새 뒤에 위치한 붉은 산 주둔군을 습격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수비하기도 부족한 병력이라 생각할 테니 말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우리 목적은 전략물자 파괴야. 무리해서 싸울 필요 없어.”
외팔이 더치가 잇몸을 드러냈다.
“그럼 땀 한 방울 안 흘리고 해치우겠습니다요.”
“크로스보우맨, 쿼럴 장전해.”
애꾸눈 볼포스가 고르고 골라 데려온 20명의 크로스보우맨이 고르고 골라 가져온 쿼럴을 활몸에 올렸다.
“시야 좋고, 바람 좋고, 표적 좋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다섯 놈만 재워라. 그럼 나머지는 우리가 처리할 테니까.”
외팔이 더치가 손도끼를 고쳐 쥐고 말했다. 애꾸눈 볼포스는 아바레스트를 견착하고 하나 남은 눈알을 굴려 로벨을 보았다. 로벨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죽음을 경고했다.
“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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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파팡-! 팡-!
기계장치로 끌어당긴 시위가 풀리고, 한계까지 휘어진 활대가 펼쳐졌다. 그리고 쿼럴이 쏘아졌다. 머리가 쇠로 된 무거운 쿼럴은 작은 포물선을 그린 후 에르나 왕국군을 덮쳤다. 로벨은 몇 명이 쓰러지는지 확인할 틈 없이 아론다이트를 뽑았다.
“가자!”
로벨은 산비탈을 미끄러지다가 눈여겨 봐둔 바위 위로 뛰어올랐다.
“적습이다! 적군이다!”
크로스보우 사격에 예닐곱 명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정예 중의 정예를 선발한 만큼 사격 솜씨가 뛰어났다. 로벨은 서배튼의 뾰족한 앞굽으로 숨이 어정쩡하게 남아있는 에르나 왕국 병사를 보내주고 사지 멀쩡한 병사에게 달려들었다.
“기, 기사 나리...!”
가난한 농민병이라 갑옷은 고사하고 무기조차 변변치 않았다. 로벨은 마음속으로 사과하고 아론다이트를 수직으로 휘둘렀다. 크고 무겁고 날카로운 칼날이 머리뼈를 깨트리며 피와 뇌수를 끄집어냈다.
“나는 포비아 왕국의 그랜드 챔피언 로벨 로드릭 백작이다!”
로벨이 핏물을 뿌리며 소리쳤다. 그와 동시에 로벨을 바짝 따라온 외팔이 더치 이하 울프 용병단 풋맨 소대가 로벨의 좌우로 뛰쳐나갔다. 칼과 도끼와 망치가 위아래로 휘둘러졌고, 그때마다 붉은 피가 아치 모양으로 솟구쳤다.
“으아악! 살려줘!”
“항복! 항복할게요!”
기습당한 에르나 왕국군은 무기를 버리고 산 아래로 도망쳤다. 로벨은 기사가 어디 있는지 살폈다. 기사를 붙잡아야 진정한 승리였다. 그러나 어디에도 ‘기사’가 없었다. 꽁지 빠지라 도망치는 비단옷의 ‘귀족’뿐이었다.
“전쟁 중에 갑옷도 안 입고 뭐 하는 거야?”
에르나 왕국의 기사 수준이 의심되었다.
영주가 도망치는데, 영주를 대신해 싸울 병사는 아무도 없었다. 로벨은 피 묻은 아론다이트를 털어내고 펄프 대장을 호출했다.
“적의 지원군이 올 거야. 챙길 수 있는 것은 챙기고, 챙기지 못할 것은 불태워. 빨리 움직여.”
“이놈들아! 영주님 말씀 들었지? 서둘러라!”
오랜만에 피 맛을 본 울프 용병단은 환호하며 지휘막사와 보급마차를 털었다.
로벨은 아론다이트의 피를 닦아 칼집에 밀어 넣고 산 아래에 자리한 아이언베어 요새를 보았다. 가까이서 보니 정말 웅장했다.
‘이 전쟁은 이제 시작이야.’
로벨의 말은 사실이었다. 같은 시각, 아이언베어 요새 외곽 주둔지 곳곳에서 습격이 벌어졌다. 일부는 성공하고, 일부는 실패했지만, 어느 곳이나 짙은 피 냄새가 새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