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살육
127화. 살육
아이언베어 요새.
붉은 산과 벌거숭이 산 사이에 위치한 거대 요새로 포비아 왕국의 첫 번째 관문이었다. 한 명이 열 명을 상대할 만큼 견고하고, 800명이 석 달간 농성할 수 있는 물자를 갖추고 있었다.
에릭 공작이 봉신들에게 물었다.
“적의 병력은?”
“1만 5천이 조금 넘습니다.”
소식이 어두운 기사들-로벨도 포함된다- 남들보다 반나절 늦게 경악했다.
“1만 5천 명!”
“1만 5천이라니!”
이곳 지휘막사에 자리한 기사들 대부분이 평생 겪어본 적 없는 숫자였다. 연례행사처럼 치르던 볼탄 반도 영지전과 수준이 달랐다. 유라피아 대륙 북부가 뒤집힐 초대형 전쟁이었다. 에릭 공작이 팔짱을 끼고 중얼거렸다.
“고작 1천 명으로 막으려 했으니, 터무니없이 무모했군.”
“진작에 지원부대를 보냈어야 했습니다.”
“포클랜드 시티의 기사들은 무얼 한 거야!”
로벨은 성내는 기사들에게서 시선을 거둬 며칠 사이 꼬질꼬질해진 페르젠 백작을 보았다. 변명의 여지가 있어도 패장(敗將)은 패장이었다. 고개를 감히 들지 못했다. 에릭 공작이 공식적으로 면죄부를 주었다.
“그래도 경이 무사해서 다행이오.”
페르젠 백작은 자칭 라이벌인 로벨을 훔쳐보고 더욱 고개를 숙였다.
“아뢰기 부끄럽지만, 도반 도트넘 백작 덕분입니다.”
“강철성의?”
“도반 도트넘 백작이 놀라운 무용으로 포위를 뚫고 기사와 병사들을 탈출시켰습니다.”
“...그렇겠지.”
로벨이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그런데 마침 침묵하던 순간이라 회의실의 모두에게 들렸다. 로벨은 시선이 집중되자 어쩔 수 없이 한마디 덧붙였다.
“도반 도트넘 백작은 평범한 기사가 아니오.”
순도 100%의 진실이었다. 그러나 회의의 참석한 기사들은 숙적에 대한 나름의 존중이나 존경이라 이해했다. 로벨은 그리 생각하지 않지만, 세 차례에 걸쳐서 전쟁을 치른 로드릭 가문과 도트넘 가문은 누가 봐도 적대적인 사이였다.
그때, 지휘막사 밖에서 경계를 서는 수행기사 중 한 명이 큰 소리로 에릭 공작과 봉신들에게 고했다.
“볼프 사트로 후작이 도착했습니다!”
입구 쪽 자리한 봉신들이 일제히 옆으로 물러났다. 에릭 공작 옆자리에 앉은 로벨은 움직일 필요가 없어 느긋하게 손님을 구경했다.
볼프 후작을 비롯한 십여 명의 기사가 꾸역꾸역 안으로 들어왔다. 육각 막사가 결코 작지 않은데, 강철을 두른 기사가 쉰 명이 모이자 숨이 막힐 듯했다.
“오랜만이오, 사트로 후작.”
“그렇군. 승전 토너먼트 이후 처음이오.”
볼프 후작은 에릭 공작과 인사하고, 로벨에게도 가볍게 눈인사했다. 그랜드 챔피언이란 공통점을 알기에 특별히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볼프 후작은 수행기사가 챙겨준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전군 대기하며 검은 숲 제임스 공작의 군대가 도착할 때까지 대기하라는 국왕 폐하의 명령이오.”
“검은 숲의 군사는 얼마나 되오?”
“본인이 확인한 바로 2,500명 정도요.”
“...제길!”
에릭 공작과 볼프 후작의 군사를 합쳐도 5,000여 명밖에 되지 않았다. 포클랜드 군사가 합류해야 겨우 8, 9천 명 정도 될 것이다.
“저쪽은 요새를 차지하고 눌러앉았는데, 우리 쪽은 병력까지 모자라는군.”
“언제 에르나 왕국보다 병사가 많았던 적이 있었소?”
에릭 공작의 봉신들과 달리 볼프 후작의 기사들은 태연했다.
자존심이 상한 헤르만 백작 등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 자연스럽지 못해서 역효과였다. 볼프 후작은 못 봐주겠다는 듯 회의를 빠르게 진행했다.
“그럼 이곳에서 막아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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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비아 왕국군은 아이언베어 요새에서 3마일 떨어진 곳에 주둔지를 건설했다.
땅을 깊게 파서 해자 삼고, 나무를 뾰족하게 깎아서 바리게이트 삼고, 파비스를 촘촘하게 설치해서 엄폐물 삼았다. 삽질과 도끼질에 특화된 3천 명의 병사가 작업하니 하루가 채 걸리지 않았다.
로벨은 맨발로 통나무를 잡고 새끼줄로 다른 통나무를 연결하는 40대 농민병을 지켜보았다. 철이 들기 전부터 땅을 갈고 나무를 캐온 숙련된 일꾼이었다. 로벨이 지켜보는 잠깐 사이 통나무 대여섯 개를 엇갈려 세웠다. 기마는 물론이고, 사람도 넘어오기 힘든 바리게이트가 뚝딱 만들어졌다.
“지금쯤이면 아군의 위치와 규모가 전해졌을 겁니다.”
로벨은 농민병에게서 시선을 거두어 막사 안의 사람들을 보았다. 그곳에도 자신의 일에 숙달된 사람들이 있었다.
“어떻게 나올까?”
“검은 숲의 군사가 도착하기 전에 각개격파를 시도할 겁니다. 이르면 내일 아침, 늦어도 오후 중에 공격할 겁니다.”
펄프 대장이 턱수염을 긁적이고 말을 끝냈다. 지체가 높은 기사들이 모인 자리라 ‘어찌어찌하자’란 의견은 내지 않았다. 역시나 숙련된 용병이었다.
에릭 공작의 수행기사였던 바위성의 켈트 경이 질문했다.
“에릭 공작님의 명령이 있습니까?”
“자리를 지키라는 명령이오.”
전쟁 경험이 많지 않은 늪지성의 메튜 경이 불안한 눈초리로 동료 기사들을 훔쳐보았다.
“1만 명이 넘는다는데... 우리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로벨의 맹렬한 추종자인 머를 브릭 경과 가시성의 바이란 경이 갓 서임 된 기사에게 핀잔주듯 말했다.
“기사란 자가 싸우기도 전에 겁을 먹소?”
“거, 겁이 아니라 이성적인 질문이오!”
“주군의 지시대로 따르면 아무 문제없을 것이오.”
언성이 높아지자 자작나무 숲의 호른 경이 로벨에게 허락을 구한 후 빠르게 말했다.
“1만 5천 명의 대군이라 해도 산과 숲에 둘러싸여 있으니 한 번에 투입할 수 있는 병력은 1천에서 2천 명 정도요. 수비를 철저히 하면 어렵지 않게 막을 수 있소.”
“1, 2천도 적은 수가 아니잖소...”
로벨은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해 아론다이트 칼자루를 잡고 허리를 똑바로 폈다.
“본인은 지금껏 싸워서 져본 적이 없소. 앞으로도 그럴 것이며, 경들 또한 그리될 것이오. 본인을 믿고 따라주시오.”
머를 브릭 경은 벅찬 얼굴로 흉갑을 쾅! 소리 나게 두드렸다. 다른 기사들도 어느 정도 자신감을 되찾아 얼굴이 밝아졌다.
그러나 진짜 자신감은 다른 곳에서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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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프 대장의 예상대로 다음날 아침 에르나 왕국군이 나타났다. 에릭 공작은 각 부대로 전령을 보내 전투태세를 점검했다.
로벨은 전투마에 올라 고삐를 휘어잡고 전방을 보았다. 창을 앞세운 아군과 삐뚤삐뚤한 바리게이트 너머 저 멀리 산그늘에 에르나 왕국군이 보였다.
‘1천 명 정도 되나?’
로벨은 적의 숫자를 가늠한 후 아군을 돌아보았다.
로벨 로드릭 백작군은 병력이 절반으로 줄어든 페르젠 백작군과 함께 정중앙이었다. 총 450명으로, 에릭 공작의 본대가 지원해도 850명밖에 되지 않았다.
‘좌우익도 취약하긴 마찬가지라, 우리만 지원할 수 없을 테지.’
로벨은 울프 용병단을 전방에 배치하고 롱보우와 크로스보우를 준비시켰다.
“백병전이 되면 불리해. 가까이 오기 전에 최대한 피해를 줘야 해.”
펄프 대장이 딱딱한 얼굴로 애꾸눈 볼포스에게 신호했다.
“1소대 조준!”
“2, 3소대 장전 후 대기!”
로벨은 머를 브릭 경과 바이란 경에게 눈짓했다. 적군이 바리게이트를 넘으면 두 기사가 우회해서 옆구리를 칠 것이다. 그러면 로벨을 비롯한 마튼 경, 메튜 경, 호른 경이 군사를 총동원해 정면으로 치고 올라갈 것이다.
그러나 누가 말했듯이 전투발발 5분 만에 폐기되는 것이 작전이고 전술이었다. 지휘계통이 분산된 군대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좌익에 위치한 볼프 사트로 후작군이 대뜸 앞으로 뛰쳐나갔다. 의표를 찌르기는 했지만 거리가 멀어서 기습의 이점이 없었다. 도리어 수비의 이점만 손실했다. 로벨을 수행하는 호른 경이 어금니를 바드득! 갈고 소리쳤다.
“저런 무모한!”
그러나 볼프 사트로 후작군은 ‘누가 무모하다고?’ 되묻듯이 에르나 왕국군을 쪼개었다.
볼프 사트로 후작군, 정확히는 볼프 후작 휘하의 도반 도트넘 백작군 2백여 명이 에르나 왕국군 1천 명을 흔들었다. 잔잔한 호수가 풍랑을 만난 것처럼 요동쳤다.
“저 괴물은 뭐야!”
“꼭 우리 기사 나리를 보는 것 같은데?”
도반 도트넘 백작군은 보통의 군사와 다를 것이 없었다. 무장 수준도 대단치 않고, 병사 개개인의 실력도 에르나 왕국군과 비슷했다. 그러나 딱 하나, 제일 선두에서 날뛰는 8피트 거인의 존재가 압도적이었다.
“우리 기사 나리도 저 정도는 아니야...”
로벨은 1천 명의 군사를 홀로 휘젓는 무시무시한 기사를 눈여겨보았다. 저만한 덩치와 저만한 힘을 가진 자가 유라피아 대륙에 또 있을 리 없었다.
‘늑대의 왕...?’
늑대의 왕은 제대로 봤다는 듯 츠바이핸더를 수평으로 휘둘렀다. 에르나 왕국 기사가 쇳덩이에 맞아 날아갔다. 대포알도 막아낼 플레이트 메일이 아니었으면 허리가 두 동강 났을 것이다. 신장이 다른데 허리인 이유가 있었다.
“바, 방금 사람이랑 말을 한 번에 때려눕혔...”
“그렇지? 내가 잘못 본 거 아니지?”
로벨은 전투마의 갈기를 꽉 쥐었다.
‘적일 때도 그리 두렵더니...’
호른 경이 로벨의 긴장을 눈치 채고 조용히 물었다.
“주군, 저 기사를 알고 있습니까?”
“저자는 기사가 아니오.”
기사는커녕 인간도 아니었다. 그러나 호른 경은 신분이 미천한 자란 뜻으로 이해하고 다시 묻지 않았다.
늑대의 왕이라도 홀로 1천 명을 쓰러트릴 수는 없었다. 늑대의 왕을 제외한 일반 병사들이 하나둘 쓰러져갔다.
“우오오오오오오!”
늑대의 왕이 츠바이핸더를 땅바닥에 꽂고 어느 재수 없는 에르나 왕국 병사의 머리와 어깨를 붙잡았다. 그리고 닭목을 비틀듯이, 아니, 닭보다 더하게 머리통을 쥐어뜯었다. 두개골이 으개지고, 척추가 일부 끌려나와 대롱대롱 흔들리는 것이 멀리서도 생생히 보였다. 비위가 약한 몇몇 병사들은 오바이트를 쏟아냈다. 로벨은 병사들과 다른 이유로 경악했다.
‘정체를 들켜도 상관없다는 건가?’
늑대의 왕의 퍼포먼스가 기울어가는 전황을 원상복구했다. 에르나 왕국군 상당수가 겁에 질려서 도주하기 시작했다. 호른 경이 말고삐를 당기면 소리쳤다.
“주군! 지금 쳐야 합니다!”
“누구를?”
어떨 결에 나온 반문이지만 솔직한 의문이었다.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이 싸우고 있었다.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이란 말인가?
전술적인 감각이 풍부한 호른 경은 갈등을 오래 두지 않았다. 롱소드를 뽑아 하늘 높이 들고 외쳤다
“로벨 로드릭 백작님의 명령이다! 전군 돌격! 침략자 에르나 왕국인을 참살하라!”
바위성의 켈트 경이 자신의 기사 종자로부터 랜스를 빼앗듯이 챙겨 소리쳤다.
“돌격! 돌격! 돌격하라!”
한 명이 뛰쳐나가자 모두가 뛰쳐나갔다. 가시성의 바이란 경, 구릉성의 마튼 경, 늪지성의 메튜 경도 앞다투면 돌진했다. 로벨의 가장 충직한 기사인 머를 브릭 경과 로벨의 명령만 듣는 울프 용병단만 남았다. 호른 경이 롱소드를 회수하고 말 위에서 머리를 조아렸다.
“주군, 감히 월권하여 죄송합니다. 허나 전공을 볼프 사트로 후작에게만 줄 수 없습니다.”
“...잘했소.”
로벨은 삽시간에 난장판이 되어서 죽고 죽이는 인간들을 바라보았다. 늑대의 왕은 살육을 멈추고 츠바이핸더를 어깨에 걸친 채 인간들을 지켜보았다. 거리가 멀어 표정이 보이지 않지만, 로벨은 저 괴물이 웃고 있으리라 의심치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