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검은 성
97화. 검은 성
로벨은 갑옷에 눌러 붙은 피딱지를 보고 짜증을 냈다. 사람의 피도 비리고 찝찝한데, 고블린의 피는 더욱 역하고 끈적했다. 뱀파이어 군주가 수많은 고블린을 수하에 두고 인간을 납치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래도 로벨 정도면 점잖은 반응이었다. 허풍쟁이 제이콥은 크로스보우를 내던지고 두 팔 벌려 만세를 불렀다.
“살았다! 살았다앗!”
마녀 키르케가 고개를 끄덕이고, 발가락 슈미츠가 옛 신의 성호를 그리며 동조했다. 옛 신의 열렬한 신자가 된 모양이다.
누가 보면 첩첩산중 오지나 지하미궁에서 빠져나온 것 같겠지만, 사실은 하루거리의 오솔길을 지나 사트로 시티에 도착한 것뿐이었다.
“하루거리를 이틀이나! 그것도 밤을 꼬박 새워서 왔다고요!”
“빌어먹을 고블린들...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으니까...”
“고블린의 번식력은 토끼 수준이라던데, 정말인가 봐요.”
로벨 일행은 이틀 동안 일곱 번의 습격을 받았다. 앞서 두 번 정도 습격을 눈치 채고 피했으니, 잘하면 열 번을 채울 수도 있었다. 그만큼 싸우고도 살아남은 것이 기적이었다. 로벨의 무용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다.
“사트로 후작령에 몬스터가 창궐한다 해도, 이건 좀 비정상이지?”
“예. 기사님을 노리고 몬스터를 보낸 거예요.”
“어떤 놈이 그런 짓을!”
“흑마법을 사용하는 사람이요. 아마도...”
“악마추종자.”
로벨은 사트로 시티의 높은 성문을 지나 바다까지 뻥 뚫린 대로와 좌우의 늘어선 3, 4층 목조건물을 구경했다. 북해도시라 불리는 사트로 시티였다.
북동쪽에는 과거 바바리안의 땅이라 불린 네일 공국이 있고, 북서쪽에는 세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잉그비아 왕국이 있어 삼국의 무역을 주도했다.
허풍쟁이 제이콥이 크로스보우를 주워서 흙을 털어내며 물었다.
“여긴 안전하겠지요? 설마 도시에 고블린을 풀진 않겠지요?”
발가락 슈미츠가 코를 팽! 풀고 말했다.
“고블린보다 더한 것을 데려올 수 있지. 여긴 안전지대가 아니라 적진이잖아.”
“허걱! 그런가?”
로벨은 북해에서 눈을 떼 언덕으로 옮겼다. 샘 포클의 12기사 중 한 명이자 왕국을 지키는 방패인 닥스 사트로 후작의 검은 성이 도시와 바다를 굽어보고 있었다.
“저기가 검은 성이군요?”
“어두운 성. 새까만 성. 거무칙칙한 성.”
“별로 안 까만데요?”
“까만 것은 북해니까.”
“아하! 강철성하고 비슷하군요?”
로벨 일행은 잡담을 나누며 시내를 걸었다. 사트로 시티는 프란시스 시티와 비슷하면서 달랐다. 건물이 크고 도로가 넓은 것은 비슷하지만, 하나같이 뾰족하고 각진 느낌이었다. 남해의 따스한 느낌이 아니라 북풍의 서늘한 느낌이었다.
외국인이 많은 것도 비슷하나, 에르나 왕국인과 아이란드 왕국인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키가 작고 머리색이 밝은 잉그비아 왕국인과 키가 크고 수염이 풍성한 네일 공국인 대부분이었다.
“볼탄 반도 최남단과 최북단의 차이군요.”
그래도 도시의 활기는 똑같았다. 큰길 좌우로 늘어선 가게들은 손님을 잡기 위해 목청껏 소리 질렀고, 인부들이 수레와 등짐을 지고 바삐 걸어다녔고, 선원 패거리는 돈주머니를 흔들며 우르르 몰려다녔다.
로벨 일행은 여유롭게 시내를 걸었다. 과일 수레에서 잘 익은 사과를 하나씩 골라 쪼개 먹고, 어린 집사 또래의 어린 소녀가 파는 손바닥만한 쿠키를 사서 나눠 먹고, 이야카만한 덩치의 개가 끄는 우유 수레에서 우유를 한 잔씩 돌려 마셨다.
마녀 키르케는 기분이 좋아 깔깔 웃다가 갑자기 정색하고 중얼거렸다.
“가만, 뭔가 이상한데요?”
“뭐가?”
“뭔지 모르지만, 뭔가 잘못한 기분이에요.”
로벨은 마녀 키르케 입가에 묻은 우유를 닦아주며 말했다.
“무슨 뜻인지 알아.”
마녀 키르케는 우유 자국이 부끄러운지 귀까지 빨개졌다.
“어떻게 알아요?”
“어린 집사가 없어서야.”
로벨과 마녀 키르케가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사 먹어도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허풍쟁이 제이콥과 발가락 슈미츠는 자기 돈 아니라고 이것도 먹자, 저것도 맛있다, 적극 추천했다. 그리고 이런 일이라면 따라다닐 만하다고 시시덕거렸다.
“...아하?”
로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날이 흔치 않아. 그래서 하는 말인데.”
로벨은 거리를 둘러보고 말했다.
“오늘은 마음껏 사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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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 일행은 고기꼬치와 맥주잔을 들고 왁자지껄 떠들며 시내를 가로질렀다. 먼 길을 달려온 피로도, 고블린에게 죽을 뻔한 위기감도 싹 가셨다. 그러나 검은 성 앞에 이르자 긴장감이 뭉게뭉게 피어났다.
성문은 활짝 열려있지만, 성문 좌우에 우악스러운 포차드를 소지한 경비병이 버티고 있었다. 로벨은 전투마 위에서 근엄하게 말했다.
“볼프 사트로 후작을 만나러 왔어.”
경비병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평범한 행인이 저리 말하면 손에 쥔 도구가 어떻게 쓰이는지 시범 보이겠지만, 커다란 갑옷과 호화로운 두 자루의 칼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성함이 어찌 되십니까?”
“로드릭 가문의 당주, 로벨 로드릭이야.”
후작가의 경비병이라고 귀족 가문을 다 외우지는 못했다. 그러나 근래 들어 가장 유명해진 로드릭 가문만큼은 기억했다.
“그, 그랜드 챔피언 로벨 로드릭?”
“늑대의 기사! 악마의 기사!”
로벨의 명성이 남부와 조금 달랐다. 경비병 중 눈치 빠른 한 명이 재빨리 몸을 돌려 성 안으로 달려갔다. 선수를 뺏긴 남은 한 명은 딱딱하게 굳어서 악명 높은 로벨 로드릭 남작과 대치해야 했다.
“이, 이곳은 볼프 사트로 후, 후작님이 계신 곳입니다. 용건을 머, 먼저 밝히고...”
“친구야.”
“친구?”
“친구요?”
“친구라굽쇼?”
경비병과 울프 용병단이 한마음으로 되물었다. 로벨은 의심 가득한 시선에 곤혹스러워 했다. 친구가 왜 친구인지 설명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였다. 다행히 그랜드 토너먼트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았다. 성(Keep)으로 뛰어간 경비병이 숨이 헐떡이며 돌아왔다.
“로벨 로드릭 경! 후작님께서 뵙자고 합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로벨은 허풍쟁이와 발가락과 경비병을 향해 그거 보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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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하게 말하면, 로벨과 볼프 후작은 서슴없이 친구라 부를 만큼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 토너먼트에서 한두 번 겨뤘을 뿐이니, 그걸로 친구가 되면 볼탄 반도의 기사 중 절반은 친구일 것이다. 물론, 로벨이 생각할 때 말이다.
“우와... 엄청나네요.”
“장미성도 대단했지만, 이곳도 만만치 않군요.”
성문을 지나자 드넓은 정원이 나왔다. 꽃이나 나무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시야에 가득 들어오는 것은 수백 개의 조각상이었다.
랜스를 꼬나 들고 돌진하는 기사, 쇠뇌와 방패를 늘어트린 지친 병사, 두 쌍의 날개를 펴고 포효하는 드래곤, 깃발을 휘두르며 진두지휘하는 기사 종자,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소녀 등등... 새하얀 대리석 조각상과 새까만 현무암 조각상이 흑백흑백 구도로 교차하며 정원 전체에 전시되어 있었다.
“그런데 좀 우울하군요.”
“생물이 없어서 그런가?”
아무리 역동적이어도 조각상은 조각상이었다. 생화로 꾸며진 장미성과 비교하면 활기가 모자랐다. 시간이 정지된 느낌이었다.
“그래서 좋은 점이 있지.”
거대한 츠바이핸더를 휘두르며 포효하며 전사상 뒤로 누가 걸어왔다. 로벨은 아론다이트 손잡이를 아래로 끌어내렸다. 익숙한 목소리 뒤로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여기선 벌에 쏘일 일이 없거든.”
“볼프 사트로 후작?”
로벨은 츠바이핸더 아래로 고개를 숙이고 나오는 젊은 후작의 풀네임을 불렀다.
“본인을 찾아와주다니, 정말 고맙소, 로벨 로드릭 남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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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에게 볼프 후작은 수없이 꺾어온 수많은 기사 중 하나였지만, 볼프 후작에게 로벨은 첫 패배를 안겨준 기사이자 그랜드 챔피언의 명예를 빼앗은 숙적이었다.
“에르나 왕국의 그렉 페럿 경을 꺾었다고 들었소. 역시 본인이 인정한 최고의 기사요.”
“운이 좋았소.”
“우리도 다시 한 번 겨뤄봐야지 않겠소? 그랜드 토너먼트 이후 얼마나 성장했는지 궁금하오.”
“얼마든지.”
그러나 볼프 후작은 로벨을 친구로 생각했다.
세인들은 이해하지 못하나, 진정 자존감이 높은 기사는 한두 번의 패배로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사트로 후작쯤 되는 사람이 대등하게 대할 수 있는 인물은 몇 되지 않았다. 신분이 다른 아랫사람과 주종관계로 맺어진 기사를 제외하면 한 손에 꼽을 정도였다. 로벨은 그 중 첫손에 꼽히는 인물이었다.
볼프 후작은 검은 성의 자랑이라는 흑백 정원을 손수 안내했다. 샘 포클을 수행한 초대 사트로 후작의 조각상부터 증조부 후작의 조각상까지. 오랜 전설로 전해지는 이야기부터 역사에 기록된 사건까지. 온갖 것이 검은 돌과 하얀 돌로 묘사되어 있었다.
마녀 키르케는 예술혼이 깨어난 듯 진지하게 감상하고, 손뼉 치며 감탄하고, 우스꽝스럽게 흉내 내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로벨과 비교할 수 없는 ‘높은 분’과 함께하게 된 허풍쟁이 제이콥과 발가락 슈미츠는 조각상 중 하나가 되어 로벨을 수행하는데 집중했다.
“그나저나 고향 일이 이만저만 복잡한 것이 아닐 텐데, 이 먼 곳까지 무슨 일이오?”
서른 번째인지 마흔 번째인지 가물가물한 양치기 조각상 앞에서 본론을 꺼냈다. 로벨은 기꺼이 응했다.
“몇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소.”
“주위를 물려야 할 일이오?”
볼프 후작은 허풍쟁이와 발가락을 힐끔 보았다. 로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들은 믿어도 괜찮소.”
“경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질문하시오.”
로벨은 어떻게 운을 띄울지 고민하다가 일단 안전한 패를 잡았다.
“강철성의 도반 도트넘 백작이 고블린을 조종하고 있소.”
“고블린이라. 추악하고 끔찍한 괴물이지.”
볼프 후작의 표정이 조금 일그러졌다. 도반 도트넘 백작의 정체를 아는 것 같지 않았다. 로벨은 즉시 다음 패를 던졌다.
“몇몇 영주들이 고블린의 습격을 받았다고 들었소.”
“나도 알고 있소.”
“난 우연의 일치라는 말을 믿지 않소.”
로벨이 추궁하듯이 몰아붙이자 볼프 후작의 표정이 굳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요? 고발이오? 아니면 비난이오?”
“사람을 찾고 있소. 어쩌면 후작이 알고 있지 않을까 생각하오.”
“왠지 불쾌한 이야기가 될 거 같군. 그게 누구요.”
볼프 후작의 말투가 거칠어지자 허풍쟁이와 발가락은 역시 괜히 따라왔다고 속으로 소리쳤다. 로벨도 성급하게 패를 꺼낸 것을 후회했지만, 기사답게 물리지는 않았다.
“에릭 프란시스 공작을 음해하려는 류트 프란시스 공자와 그자를 돕는 잉그비아 왕국의 악마추종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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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프 후작은 정원을 가로질러 구석진 곳으로 이동했다. 로벨은 외딴곳에서 결투를 신청할까봐 걱정했고, 허풍쟁이 제이콥과 발가락 슈미츠는 경비병을 불러 ‘이 무도한 잡것들을 당장 베어라!’ 외칠까 전전긍긍했고, 마녀 키르케는 그냥 지나친 조각상이 궁금해서 발을 동동 굴렸다.
그러나 볼프 후작이 안내한 곳은 정원 끄트머리의 미완성된 조각상 앞이었다.
“누군지 알아보겠소?”
로벨은 윤곽만 겨우 잡힌 조각상을 훑어보고 고개를 저었다.
“내 부친이오. 전대 사트로 후작이지.”
“버팅거 시티에서 전사한...?”
“전사? 하하핫! 경도 사람을 웃기는 재주가 있구려. 어린 여자 셋을 끼고 놀다 죽었소. 구태여 말하자면 복상사지.”
로벨은 복상사란 말에 얼굴을 붉혔다.
“이 양반이 욕심이 대단했소. 여자 때문에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기사를 죽인 것도 모자라, 철부지 꼬마를 이용해 골육상쟁을 유도했으니, 옛 신의 사제가 말하는 판데모니엄이 있다면 필히 그곳에 떨어졌을 것이오.”
로벨은 무슨 말인지 대충 이해했다. 미망인 전쟁과 후계자 전쟁 이야기였다. 아무리 그래도 부친에게 지옥 운운하는 것이 보기 그래 한마디 꺼냈다.
“허나...”
로벨이 말을 맺기 전에 볼프 후작이 다시 소리쳤다.
“악마추종자를 끌어들인 것도 이 작자요. 그 사악한 것들이 내 영지 곳곳에서 독버섯처럼 자라나고 있소. 도반 도트넘 백작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오. 그보다 더 음험한 자들이 수없이 많소. 그리고 그자들은...”
볼프 후작은 잠시 숨을 골랐다. 어린 마녀가 겁을 집어먹고, 거친 용병이 칼자루를 쥐었다. 주인을 지키려는 모습이 가상했다. 볼프 후작은 한숨처럼 마무리했다.
“그자들은 인간이 아니오. 어설픈 비유가 아니오. 난 프란시스 시티에서 싸워보았소. 그자들은... 진정한 의미로 괴물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