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96화 (96/605)

96화. 슬라임

96화. 슬라임

켈트 경은 전사자를 수습한 후 바위성으로 철수했다. 로벨의 진심 어린 설득 덕분인지, 파비스 뒤에서 반짝이는 60개의 크로스보우 덕분인지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로드릭 가문의 내전이 조기 진화되었다는 것이다.

로벨은 바이란 경을 위로한 후 로드릭 성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마녀 키르케가 떡갈나무 지팡이를 발로 툭툭 차며 물었다.

“에릭 공작님이 누명을 썼다고 생각하세요?”

“아니.”

로벨은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마녀 키르케는 아랫입술을 쭉 당겼다가 놓고 다시 질문했다.

“그럼 에릭 공작님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세요?”

“아니.”

이번에도 고민하지 않았다. 마녀 키르케는 지팡이로 땅을 탕탕 두드리며 따졌다.

“그럼 뭐에요? 아무 생각 없어요?”

“아니... 아니, 그런 거 아니야. 화내지 마. 난 기사고 넌 수행원이야. 지팡이 내려. 잠깐! 때리지 마!”

로벨은 흥분한 마녀를 통제하고 다시 점잖은 자세로 돌아갔다. 허풍쟁이 제이콥 등이 낄낄거리는 것을 보아 체통을 살리기는 조금 늦은 듯했다. 로벨은 쇳덩이를 때려도 흠집 하나 생기지 않는 단단한 지팡이를 훔쳐보고 말했다.

“능력이 있으면 정통성이 없어도 사람을 다스릴 수 있어.”

마녀 키르케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로벨은 마녀의 시선을 피해 앞을 보았다.

“내가 그걸 증명하니까.”

펄프 대장은 로벨의 패기에 감탄했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포부가 대단했다. 그러나 마녀 키르케는 그럴 수 없었다.

“‘증명할 테니까’가 맞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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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아밍 더블릿 위에 플레이트를 덧대고, 왼팔에 폴드런, 뱀브레이스, 컨틀렛을 차례로 착용했다. 왼쪽에서 보면 완전 무장이고, 오른쪽에서 보면 흉갑 하나만 갖춘 독특한 차림새였다. 마녀 키르케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질문했다.

“왼쪽만 입는 이유가 있나요?”

로벨은 뱀브레이스를 두드리고 말했다.

“가벼우니까.”

“오른쪽은 무거워요?”

로벨은 어떻게 설명할까 고심하다가 직접 보여주기로 했다. 아론다이트를 뽑아 수평으로 당겼다. 왼발이 한 발 앞으로 나오고, 어깨와 상박이 방패처럼 앞을 가로막았다. 검술의 문외한도 단번에 이해할 갑옷의 쓰임새였다. 마녀가 감탄하자 로벨은 자세를 풀고 아론다이트를 회수했다.

“오른손잡이에게는 왼쪽이 사각일 때가 많아. 칼자루를 잡을 때 오른손이 위로 올라가니까.”

“와아... 검술의 세계도 심오하군요. 그냥 힘껏 휘두르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중요하지.”

로벨은 빙긋 웃고 성 밖으로 향했다. 펄프 대장이 잡아온 허풍쟁이 제이콥과 발가락 슈미츠가 대기 중이었다.

“영주님, 준비 끝났습니다.”

펄프 대장이 두 용병을 가리키며 뿌듯하게 보고했다. 그러나 허풍쟁이와 발가락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기사 나리, 왜 또 저입니까요. 이제 짬도 있는데, 신입이나 부리시지...”

“시끄럽다! 영주님을 보필하는데 영광인 줄 알아야지! 그리고 북해 쪽은 시원하다더라.”

“그리 좋으면 대장도 같이 가쇼.”

로벨이 ‘호오?’ 소리 내며 펄프 대장을 보았다. 펄프 대장은 허리를 구부리고 잔기침했다.

“난 늙어서, 쿨럭, 장거리 여행이 힘들어. 쿨럭쿨럭.”

“그럼 은퇴하고 늙다리 잭슨 방귀 냄새나 맡으러 가쇼. 앞날 창창한 젊은이들 괴롭히지 말고.”

“뭣이라? 이놈이 누구 덕분에 호강하는 줄 알고...!”

로벨은 30대와 40대의 용병이 채신없이 싸우는 것을 보고 혀를 찼다. 저래 봬도 숱한 전장을 헤쳐온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너무 불평하지 마. 다녀오면 한 몫 챙겨줄게.”

로벨은 전투마를 쓰다듬고 안장과 편자를 점검했다. 장거리 여행인 만큼 꼼꼼히 살펴야 했다. 펄프 대장이 허풍쟁이를 두드리며 말했다.

“사트로 시티면 아무리 서둘러도 왕복 엿새는 걸릴 겝니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이곳 프란시스 공작령보단 낫겠죠. 하루걸러 한 번씩 전쟁은 안 치를 테니까.”

발가락 슈미츠가 코를 한번 훔치고 말했다. 하지만 소식에 밝은 허풍쟁이가 투덜거렸다.

“그렇지 않을 걸. 지금 볼탄 반도 북쪽은 개판이야. 어디서 흘러왔는지 몬스터가 바글바글해. 어떤 영주들은 영지민을 버리고 포클랜드 시티로 도망까지 갔다니까.”

“영주가 영지민을 버려?”

로벨이 얼굴을 찌푸렸다. 허풍쟁이는 당연하지 않냐는 듯 말했다.

“그야 몬스터는 몸값을 받지 않으니까요.”

로벨이 불쾌한 것은 그 이유가 아니었지만, 구태여 설명하지 않았다. 발가락 슈미츠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우리가 무슨 걱정이야? 오우거도 때려잡을 기사 나리가 계신데. 안 그렇습니까요?”

로벨은 오우거를 본 적이 없어 대답하지 못했다. 등자를 밟고 안장에 올라 고삐를 휘어잡았다.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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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풍쟁이 제이콥이 길잡이로 앞장서고, 로벨과 마녀 키르케가 도란도란 잡담하며 뒤를 따르고, 발가락 슈미츠가 짐을 한가득 짊어지고 쫓아갔다.

“제길! 나 같은 고급 용병을 짐꾼 취급하다니요!”

발가락 슈미츠가 전투마 꽁무니를 향해 항의했다. 그러나 울프 용병단에는 발가락 슈미츠 수준의 ‘고급’ 용병이 바글바글해서 의미 없었다. 전투마가 비웃듯이 배설물을 한 부대 쏟아냈다. 푸드드득-!

“이놈의 말이!”

“그 말이 너보다 다섯 배 비싸.”

“이런 귀한 말님이!”

허풍쟁이와 마녀 키르케가 깔깔 웃었지만 발가락 슈미츠는 재미가 없었다.

로벨 일행은 강철성을 지나지 않고 동쪽으로 크게 돌아 볼탄 반도 북부대로를 올라가고 있었다.

여름이 시작되자 한낮에는 부쩍 더웠다. 로벨은 수통을 열어 한 모금 마시고 폴드런에 조금 부었다. 치이익- 달궈진 철판에 물을 붓는 느낌이었다. 마녀 키르케가 고깔모자로 부채질하며 징징거렸다.

“으앙! 아직 멀었어요?”

“거 좀 참으쇼. 열 내면 더 더우니까.”

허풍쟁이가 한소리 했다. 그러나 허풍쟁이 얼굴도 땀에 푹 젖어 있었다.

그래도 북부라 다행이었다. 지금 남부지방은 불가마가 따로 없었다. 발가락 슈미츠가 중얼거렸다.

“아이란드 왕국에서, 이 정도 더위쯤은, 더위도 아니오. 선선하기만, 하구만.”

“앗! 발가락 아저씨! 눈이 풀렸어!”

로벨은 수통을 안장주머니에 넣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태양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좀 지나치게 환했다.

“올해는 유난히 더운 것 같아.”

“겨울은 유난히 추웠지요.”

“세상이 어찌 되려고...”

1,000년 전 사람도 걱정했고, 1,000년 후 사람도 걱정할 소재였다.

그래도 죽으란 법은 없었다. 정오가 지나자 우물과 마구간이 있는 오두막이 나타났다. 북부대로를 지나는 행상인을 상대로 장사하는 여관 겸 술집이었다. 발가락 슈미츠가 옛 신의 성호를 긋고 소리쳤다.

“맥주! 시원한 맥주 한 잔이면 영혼도 팔 수 있어!”

“정말 싸구려 영혼이군요!”

로벨은 짚더미에서 꾸벅꾸벅 조는 마구간지기를 깨워 전투마를 맡겼다. 불성실해 보이는 마구간지기는 상대가 기사란 것을 알고 굽신거렸다.

“예예, 나으리. 최고급으로 모시겠습니다.”

로벨은 말먹이에 신경 쓰라고 당부하고 오두막으로 향했다. 통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흙으로 벽을 쌓았는데, 통풍이 잘되어서인지 제법 시원했다.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 다른 테이블 주위로 2~4명으로 구성된 행상인이 모여 있었다. 해가 꺾이면 떠나려는 듯 여유로웠다.

“어서 오세요! 어멋? 기사님?”

14살? 15살? 소녀와 처녀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는 종업원이 밝게 인사했다.

“네 분이신가요? 마침 테이블이 하나 비었어요. 이쪽으로 오세요.”

싹싹한 행동이 고용인이 아니라 주인장 딸인 듯했다.

로벨이 자리에 앉자 마녀가 옆에 찰싹 붙었다. 허풍쟁이와 발가락이 이구동성으로 소리쳤다.

“맥주! 시원하고 맑은 걸로!”

“기사 나리가 드실 거다. 김빠진 거 가져오면 큰일 날 거야.”

그리즐리처럼 생긴 용병들이 겁박하는데도 종업원은 눈썹 하나 까닥이지 않았다. 이런 야지에서 살면 용병 따위는 무섭지도 않은 모양이다.

“그럼요. 가장 좋은 맥주로 가져올게요.”

로벨은 쫑알거리는 마녀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행상인을 관찰했다. 기사와 마녀와 용병이 들어왔는데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이 놀라웠다.

“허어. 그뿐만이 아니야. 버트 남작도 습격당했다니까?”

“버트 남작? 거긴 동부잖아?”

“대체 사트로 후작은 뭐하는 거야?”

“소문에 후작이 몬스터를 부린다는데.”

“뭐라고?”

“내 사촌이 후작가에 나무를 납품하는데, 거기 분위기가...”

대화를 들으니 그럴만했다. 몬스터에게 습격 받은 영지가 한둘이 아니었다.

로벨은 버트 남작령을 떠올렸다. 사트로 시티 동쪽 어디란 것은 짐작하는데, 정확히 어디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토너먼트가 열리지 않는 작은 영지가 분명했다.

“맥주 나왔습니다!”

종업원이 큼직한 맥주조끼 네 개를 요령 좋게 들고 왔다. 허풍쟁이와 발가락은 죽은 전우가 살아 돌아온 것처럼 좋아하며 목구멍에 들이부었다. 로벨은 차마 그럴 수 없어 점잖게 한 모금 마시고 다시 행상인에게 집중했다.

“이렇게 흉흉해서야. 차라리 남쪽으로 내려갈까?”

“아셔라. 프란시스 공작 일파들은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다. 눈 뒤집힌 기사들은 사흘 굶은 트롤보다 더해.”

“어? 로드릭 남작이 정적들을 제압해서 전쟁이 끝났다던데?”

“나도 들은 것 같군. 로벨 로드릭의 깃발을 사면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지?”

로벨은 자신의 이야기가 나오자 괜히 부끄러워 헛기침했다.

제11시가 지나자 더위가 한풀 꺾였다. 시간이 돈인 행상인은 서둘러 여행길에 올랐다. 반면 급할 것이 없는 로벨 일행은 이른 저녁까지 해결하고 느긋하게 이를 쑤셨다.

“그나저나 기사 나리. 사트로 시티에 도착하면 누굴 만나실 겁니까요?”

“사트로 후작.”

“그럴 줄 알았습니다요.”

허풍쟁이와 발가락은 고개를 주억였다. 지극히 로벨 다운 태도였다.

“소문이 심상치 않던데요.”

발가락 슈미츠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행상인의 대화를 엿들은 것은 로벨만이 아니었다. 행상인의 말이 반만 맞아도 사트로 후작가는 곰굴 수준이었다.

로벨은 바닥이 보이는 맥주잔을 빙그르 돌리고 말했다.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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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죽을 수 있었다.

로벨은 마녀에게 말한 것처럼 ‘힘껏’ 휘둘렀다. 고블린은 인간에게서 약탈한 쇠스랑을 올려 방어자세를 취했지만, 전설의 검인 아론다이트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깡!

쇠스랑의 이빨이 우수수 부러지고, 고블린의 어깨가 3인치 정도 주저앉았다.

“칫!”

로벨을 향해 고블린 다섯 마리가 동시에 달려들었다. 그러나 허풍쟁이 제이콥이 크로스보우를 쏴서 한 마리를 꼬꾸라트리고, 발가락 슈미츠가 숏 스피어를 던져 또 한 마리를 저지했다. 그래도 셋이 남았다.

“타핫!”

로벨은 아론다이트의 긴 리치를 이용해 돌망치를 휘두르는 고블린의 머리를 날리고, 칼을 회수할 틈 없이 어깨로 들이박았다. 쇳덩이에 치인 고블린은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나자빠졌다.

“덤벼!”

로벨은 덤비라고 소리치고 먼저 달려들었다. 조금 치사하지만 효과가 있었다. 동료를 모두 잃은 고블린은 당황해서 돌도끼를 마구 휘둘렀다.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크게 휘둘러 돌도끼를 쳐내고, 반동으로 생긴 빈틈에 흐룬팅을 찔러 넣었다. 에르나 왕국의 그랜드 챔피언도 당한 기술이니, 본능과 반사로 살아가는 고블린이 당해낼 리 없었다.

“기사 나리! 괜찮습니까요?”

허풍쟁이와 발가락이 허둥지둥 달려왔다. 로벨은 숨이 붙어있는 고블린의 목을 치고 일행을 안심시켰다.

“난 괜찮아.”

밤새워서 이동한 것이 잘못일까, 아니면 물길을 따라 이동한 것이 잘못일까. 로벨 일행은 달이 뜨자마자 습격 받고, 길에서 벗어나자 또다시 습격 받았다. 허풍쟁이는 소중한 고용주가 무사한 것을 확인하고 안도했다.

“그나저나 도시가 코앞인데 고블린이라니요?”

“마법이에요.”

마녀 키르케가 전투마 고삐를 잡고 다가왔다. 피를 묻힌 로벨보다 안색이 안 좋았다.

“마법?”

로벨은 뱀파이어 군주 드라카를 떠올렸다. 볼프 사트로 후작의 측근인 도반 도트넘 백작이 되었으니 고블린을 부리는 것이 납득 되었다.

마녀는 지팡이로 고블린의 머리를 두드렸다. 고블린의 머리가 슬라임처럼 꿈틀거리다 펑! 소리 내며 터졌다. 허풍쟁이와 발가락은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로벨은 흐룬팅을 슬그머니 끌어당기며 물었다.

“무슨 마법이야?”

“생물을 지배하는 사악한 흑마법이에요.”

“누구 짓이야?”

“그건 몰라요. 하지만... 기사님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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