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여인숙
86화. 여인숙
겨울의 끝자락에서도 봄이 보이지 않았다. 폭설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여행을 방해했다.
행상인이 자주 다니는 큰길은 그나마 알아볼 수 있지만, 그 길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온통 눈밭이라 어디가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허풍쟁이 제이콥은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눈을 헤집고 나갔다. 힘들고 괴롭지만, 차마 자리를 바꾸자고 하지 못했다.
서너 시간 전만 해도 머릿속에 볼탄 반도 중부지방 지도를 여러 장 펼쳐놓고 걸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동서남북 방향표시 이외에는 깨끗한 백지를 가지고 이동했다.
로벨 이하 용병들이 미심쩍은 눈초리로 허풍쟁이 제이콥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이쪽이 맞아?”
“마, 맞습니다!”
“왜 소리를 질러?”
“그, 그냥 그랬습니다!”
허풍쟁이 제이콥은 볼탄 반도 동부대로를 따라 이동하자는 상식적인 의견을 ‘지름길’, ‘하루 단축’, ‘볼탄 반도 토박이’, ‘나만 믿어라!’ 등등으로 반대하고 샛길-이 있었던 자리-로 안내했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 머릿속이 백지가 되었다.
로벨은 롱소드 손잡이에 왼손을 올리고 속삭이듯 말했다.
“난 너를 믿어. 정말로 믿는데, 길을 잃어놓고 아닌 척하는 거면 대단히 화가 날 거야.”
“길을 잃었습니다!”
로벨의 자상한 협박에 허풍쟁이가 자백했다. 로벨은 관대하게 용서했다. 로벨이 아니어도 대신 밟아줄 용병들이 있었다.
“이 자식! 기어이 사고 칠 줄 알았다!”
“야! 때려! 때려!”
허풍쟁이는 머리를 감싸고 발길질을 견디며 길을 잃은 것부터 세상에 태어난 것까지 두서없이 사과하다가 저 멀리 눈발 속에서 나부끼는 깃발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역참이다!”
애꾸눈 볼포스가 안대를 만지며 정정했다.
“여관이군요.”
허풍쟁이는 매질 당한 사람치고 멀쩡하게 벌떡 일어났다. 허풍쟁이의 맷집이 좋은 탓도 있지만, 사람 잡는 게 천직인 용병들이 상하지 않게 잘 때린 탓도 있었다.
“으하하핫! 보십시오! 제대로 왔잖습니까요!”
로벨은 눈을 가늘게 뜨고 여인숙을 보았다. 애꾸눈만큼 눈이 좋지 않아 뭔가 있다는 것만 겨우 알았다.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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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풍쟁이 제이콥은 역참, 애꾸눈 볼포스는 여인숙이라 주장했는데 둘 다 맞았다. 그리고 동시에 식당, 술집, 병원, 잡화점 등등이기도 했다. 여행자가 노상에서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을 제공하는 만능 여인숙이었다.
로벨은 기사답게 마구간부터 살폈다. 덩치는 작지만 억센 짐말과 몸집은 산만하지만 둔한 농마가 한 마리씩 있고, 잘나신 마님(馬-)에게 기죽은 당나귀와 노새도 몇 마리 있었다. 그러나 너무 기죽을 필요 없었다. 잘 빠진 네 다리와 폭발하듯 꿈틀거리는 근육, 윤기 넘치는 털, 찰랑거리는 갈기까지. 멋과 품위가 어우러진 오베리아산 전투마가 들어오자 늠름해 보이던 말들이 노새 수준으로 전락했다. 그야말로 까마귀 속에 백조 같은 자태였다.
“우왁! 기사님?”
마구간지기로 일하는 소년이 감탄했다. 키 크고 잘생긴 기사와 덩치 좋은 전투마의 조합은 소설 속에서 뛰쳐나온 주인공 같았다. 후줄근한 행상인하고 사뭇 달랐다.
“여물. 콩이 있으면 같이 줘.”
로벨은 전투마의 고삐를 넘겨주었다. 마구간지기는 저도 모르게 두 손으로 받았다. 로벨은 그런 마구간지기가 재미있는지 피식- 웃고 돌아섰다. 그리고 애꾸눈과 허풍쟁의 호위를 받으며 떠나갔다.
“기사는 멋지구나...”
기사도 소설이 끊이지 않고 창작되는 이유가 다 있었다.
애꾸눈 볼포스가 여인숙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노숙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입니다.”
“나만 믿으라고 했잖아!”
허풍쟁이가 우쭐해서 콧대를 올렸다. 발가락 슈미츠 일당은 잘난 척하는 허풍쟁이가 아니꼬웠지만 공이 있으니 애써 참았다.
로벨은 1층은 흙으로, 2층은 나무판자로 지은 독특한 건물을 훑어보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옵쇼!”
여인숙 주인이 손을 싹싹 비비며 반겼다. 요즘 같을 때 길손을 만나기란 힘든 일이라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방 있어?”
“큰 방이랑 작은 방 하나씩 남았습니다요, 기사 나리.”
“둘 다 줘.”
로벨은 양심이 충만해서 애꾸눈 볼포스 이하 5명에게 큰 방을 양보했다. 애꾸눈 등도 기사와 한 방을 쓸 생각이 없었기에 만족했다.
로벨은 메인 홀 겸 주방 겸 식당에 삼삼오오 모여 있는 일당을 살폈다. 20살에서 40살 사이의 젊은 남자들로 전쟁 특수를 노리는 떠돌이 용병과 행상인이었다.
“윽. 술 냄새.”
마녀 키르케가 로벨의 망토로 코를 막았다. 이런 곳에서는 술이 물이고 밥이고 취미라, 술에 취해 얼굴이 벌게진 손님이 항상 있었다. 그나마 겨울이라 망정이지 여름이었으면 땀 냄새와 토사물 냄새 등으로 깔끔한 체하는 로벨과 마녀 키르케는 들어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뭐 좀 드릴깝쇼?”
“빵과 수프.”
“그리고 맥주! 아, 죄송합니다.”
발가락 슈미츠가 끼어들었다가 사과했다. 아직 울프 용병단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한 모양이다. 로벨은 발가락의 제안을 받아 맥주도 한 잔씩 돌렸다. 술과 음식이 나오고, 근심과 농담이 오가자 여인숙 분위기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로벨은 나무창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지금은 온통 하얀 눈밖에 없지만, 봄이나 가을에 왔으면 여인숙 앞 큰길로 농부와 행상인이 지나다녔을 것이다.
“이보쇼, 주인장. 절벽성이 어느 쪽이오?”
애꾸눈 볼포스가 길을 물었다. 허풍쟁이가 영 믿음이 가지 않았다. 여인숙 주인은 애꾸눈의 큼직한 헌팅 나이프를 힐끔 보고 공손히 대답했다.
“이쪽 길을 따라 대여섯 시간만 가면 됩니다요, 용병 나으리.”
“...길이 안 보이니까 묻는 것이오.”
“이런! 죄송합니다. 에... 이쪽 방향으로 쭉 가시면 바다가 나올 겁니다. 그곳에서 남쪽을 잘 살피면 큰 절벽과 절벽 위에 성을 볼 수 있을 겁니다. 장님이 아닌 이상 쉽게 찾을 겁니다. 으하핫!”
눈이 하나 없는 사람에게 적절한 농담이 아니었다. 애꾸눈이 웃지 않자 여인숙 주인은 머쓱해서 자리를 피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다가왔다.
“절벽성? 헤르만 백작의 떨거지들이냐?”
그때, 눈 쌓인 들판 위로 겨울새가 끼룩- 소리 내며 날아갔다. 로벨이 입술을 둥글게 모았다. 사람은 없어도 새들은 돌아다녔다.
애꾸눈 볼포스가 팔짱을 끼고 말했다.
“그렇다면?”
“개 같은 허세 부리지 말고 잘 대답해. 뒤지기 싫으면 말이야.”
시비를 거는 용병 뒤로 우는 아이를 더욱 세차게 울릴 인상파 용병 5명이 늘어섰다.
허풍쟁이 제이콥이 발끈해서 소리쳤다.
“이분이 누군지 알고 감히!”
“헤르만 백작의 기사잖아?”
“누가 그깟 백작의...!”
“너희는 뭐야?”
로벨이 시선을 돌렸다. 용기에 술기운을 더해서 시비를 걸었지만, 기사 면전에서 차마 욕할 수 없는 용병은 조금 누그러진 태도로 대꾸했다.
“도반 도트넘 백작에게 고용된 용병이요. 그리고 기사 나리의 주군인 볼트 헤르만 백작에게 쌓인 게 많은 용병이기도 하고.”
“난 헤르만 백작의 기사가 아니야.”
로벨은 간단히 상황을 정리했다. 평소라면 이런 무례를 그냥 넘기지 않았겠지만, 겨울 여행의 피로와 식후 포만감으로 일찍 쉬고 싶었다. 그러나 술이 과해 간이 부은 용병들은 로벨의 양보를 오해했다.
“카악- 퉤! 절벽성으로 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요? 누구를 귀머거리로 아나?”
마녀는 비명을 질렀고, 발가락은 화를 냈고, 허풍쟁이는 경악했고, 애꾸눈은 한숨을 쉬었다. 기사 앞에서 침을, 그것도 가래침을 뱉었다. 저 멍청한 용병놈이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질렀다.
로벨은 시선을 옮겨 싸움이 날까 봐 조마조마해하는 여인숙 주인에게 말했다.
“주인장, 미안해.”
“예? 무엇이 말입니까?”
무엇인지 금방 알게 되었다. 로벨은 의자에 앉은 채로 롱소드를 발검했다. 3피트 길이의 칼날이 짤막한 단검처럼 날렵하게 뽑혔다. 경이로운 발검술이지만, 용병은 감탄 대신 굵은 침을 흘렸다. 목구멍에 칼날이 박히면 그런 법이다.
“겔드!”
로벨은 마녀에게 피하라 눈짓하고 죽어가는 용병을 발로 밀어 롱소드를 뽑았다.
“기사고 나발이고! 그냥 쳐!”
“어차피 전쟁이야! 기사 목을 가져가면 포상받는다!”
겔드의 동료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복수보다 포상금에 비중을 두는 것을 보아 동료애가 돈독하지 않은 듯했다.
로벨은 의자에서 일어나는 동시에 앉아있던 의자를 가장 가까운 용병에게 던졌다. 거리가 짧아 휘둘렀다는 표현이 적당했다. 용병은 반사적으로 손을 올려 방어자세를 취했는데, 그것이 인생의 마지막 실수였다. 텅 빈 복부로 피 묻은 롱소드가 파고들었다.
“어설퍼.”
창자가 조각난 느낌을 표현 중인 용병을 왼쪽으로 당기고, 흐룬팅을 뽑아 오른쪽으로 휘둘렀다. 모닝스타를 튕겨내며 기이한 금속음을 토해냈다. 치잉-!
허풍쟁이가 대거를 빼들고 소리쳤다.
“이 모자란 놈들! 그랜드 챔피언 로벨 로드릭 남작에게 덤비다니!”
“그, 그랜드 챔피언?”
용병 하나가 얼빠진 목소리로 반문했다. 피 튀기는 싸움 중에 해서 안 될 행동이었다. 발가락 슈미츠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옆구리를 크게 찢어주었다.
6대 6의 싸움이지만, 로벨이 홀로 셋을 처리하면서 일방적인 승리가 되었다. 로벨은 숨이 끊긴 용병 배때기에서 롱소드를 뽑았다. 피가 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뽑았는데, 시체가 들썩여서 괴기한 장면이 되었다.
“으아... 아...”
여인숙 주인이 10년 묵은 구울처럼 웅얼거렸다.
로벨은 애꾸눈 볼포스에게 시체를 치우라고 명령했다. 애꾸눈은 오랜만에 피를 봐서 흥분한 허풍쟁이 등을 불러 한 구씩 둘러메게 했다. 숨이 덜 끊어진 용병이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빌었지만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상처부위와 출혈을 보아 5분도 못가 죽을 것이다.
로벨은 넋이 나간 여인숙 주인을 달랬다.
“전쟁 중이야. 익숙하지 않아?”
“그야 그렇습니다만... 저희 집에서 일어난 건 처음이라...”
“숙박비를 두 배로 줄게.”
로벨은 여인숙 주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자신의 방을 찾아갔다. 낮은 계단을 올라가며 창밖을 다시 보니 곰발 베버와 발냄새 베커가 죽은 용병의 주머니를 뒤져서 돈을 챙기고 있었다. 로벨은 인상을 찌푸렸지만 제지하지 않았다. 죽은 자에게 페닝은 필요 없으니, 저들이 안 챙기면 여인숙 주인이나 행상인이 챙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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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이 소드 벨트를 풀어 롱소드와 흐룬팅을 말끔히 닦아낼 무렵, 마녀 키르케가 시뻘게진 얼굴로 방에 들어왔다.
“기사님! 기사님은 기사님이죠!”
로벨은 흐룬팅을 칼집에 넣어 무릎 위에 놓았다. 그리고 마녀가 무슨 대답을 바라는지 추리하기 시작했다. 술 냄새가 조금 나지만 취한 것 같진 않았다.
마녀는 벽난로 속 장작처럼 빨개져서 다시 말했다.
“그러니까 결혼도 안 하고 여자와, 그런 거, 그거 안 하잖아요!”
“...모르겠어.”
로벨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의미로 대답했는데, 마녀 키르케는 할지 말지 모르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마녀의 얼굴이 결국 빵! 터졌다.
“그렇게 안 봤는데! 정말! 정말 실망이에요!”
그러자 객실 밖에서 ‘우리가 괜히 망친 거 아니야?’, ‘기사 나리도 생각이 있을 텐데, 왜 그랬냐?’ 등의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허풍쟁이 등이 순진한 마녀를 놀린 모양이다.
마녀는 소리지르고 나니 시원한 듯 우물우물 말했다.
“하, 하지만 기사님이라면... 따, 딱히 잘 곳도 없고... 진짜 이럼 안 되지만...”
로벨은 “아!” 소리를 내고 소드 벨트와 망토를 챙겨서 일어났다. 마녀가 어리둥절해서 올려다보았다.
“왜, 왜요, 갑자기?”
“도반 도트넘 백작의 용병들이 죽었으니까. 빈방이 생겼을 거야. 거기서 잘게.”
“저, 저는요?”
로벨은 순박한 웃음으로 마녀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여기서 자. 깨끗하고 따뜻해서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