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85화 (85/605)

85화. 겨울

85화. 겨울

눈이 많이 왔다.

하늘은 내리는 눈으로 하얗고, 땅은 쌓인 눈으로 하얬다. 아침잠이 없는 농부는 지붕에 쌓인 눈을 치우다가 함께 떨어졌고, 부지런한 아낙은 눈을 쓸다가 눈 속에 갇혀서 당황했다. 기운이 넘치는 사내아이는 친구를 찾아 나섰다가 엄마와 누나에게 귀가 잡혀 끌려들어 갔고, 헐벗은 양들은 아궁이 주위에 옹기종기 모여서 힘없이 ‘메에에...’ 울었다.

근 10년 만에 찾아온 폭설이었다. 자잘한 사고가 이어졌다. 지붕이 낮은 몇몇 집들이 눈에 파묻혀서 이웃 주민이 구조해야 했고, 조심성이 부족한 노인들이 눈길에 미끄러져 허리를 다쳤다.

마녀 키르케는 이렇게 많은 눈은 처음 본다며 재미있어했지만, 일찌감치 감수성이 마른 어린 집사는 ‘하늘에서 내리는 하얀 오물’이라 평가했다.

“난 눈이 싫어요.”

“왜요? 하얗고 폭신폭신하잖아요.”

“그딴 거 다 가져가요. 난 누렇고 딱딱한 게 좋으니까.”

“...코딱지?”

“금화요!”

펄프 대장은 두 손을 겨드랑이에 끼우고 댓바람부터 티격태격하는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를 보며 젊어서 좋다고 투덜거렸다.

로벨은 고드름을 따다가 칼싸움하는 마을 꼬마들을 보고 미소 지었다. 로벨도 어릴 때 창문 아래 생긴 고드름으로 아버지와 큰 오빠를 흉내 내고 했다.

“My Lord, 기별도 없이 어쩐 일로...”

촌장이 쌍둥이 증손자를 양손에 안고 로벨 일행을 맞이했다. 갓난쟁이들은 어미 품에 안긴 것 마냥 곤하게 잘도 잤다.

“부모는?”

“물레방아가 말썽이라 거들러 갔습니다.”

로벨은 머리카락이 자라기 시작한 쌍둥이를 구경하고, 벽난로 옆에 천장까지 쌓아놓은 장작을 살피고, 양 뒷다리 햄, 치즈, 넓적하게 펴놓은 귀리반죽 등을 감상했다. 예의바른 손님이라 평가받기 힘든 행동이었다.

로벨은 한참 뜸을 들이다가 어렵게 말했다.

“군사훈련을 할 거야.”

“울프 용병단 말입니까?”

“아니. 마을주민들.”

촌장은 촌장으로 살아온 세월이 헛되지 않게 바로 이해했다.

“징집령을 내리실 겁니까?”

“응.”

“무슨 일인지 여쭈어도 되겠는지요.”

로벨은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내년 봄에 성이 완성되면 성을 비울 거야. 40일 정도.”

촌장은 기사의 의무 종군일이 40일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로벨을 소환할 군주는 힘이 없으니, 로벨이 봉신을 소환하려는 것임도 알았다.

촌장은 작디작은 시골 영주가 봉신들을 거느리고 전쟁터로 나갈 만큼 성장했다는 것에 새삼 놀라고, 전쟁 자체에 다시 놀랐다.

“영주님께서는 중립을 선언하지 않으셨습니까.”

“프란시스 공작가의 내전에는 그랬지.”

“도반 도트넘 백작이군요.”

역시 촌장이라서인지, 아니면 개인적으로 전쟁에 관심이 많아서인지 금방 알아챘다. 사실 대다수 농민들은 누가 누구의 기사인지, 누가 누구와 싸우는지 관심이 없었다.

“전장으로 데려가지 않을 거야. 내가 없는 동안 성과 마을을 지켜줬으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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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라고 우울한 일만 생기지는 않았다. 이안 선장이 두 번째 항해를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다.

아니, 무사(無事)하지는 않았다. 풍랑을 만나 선원이 한 명 죽고, 전염병이 돌아서 노잡이 노예 다섯이 손실되었다.

“그래도 화물은 멀쩡합니다.”

이안 선장이 환하게 웃으며 보고했다. 화물이 무사하니 무사한 항해였다. 선원과 노잡이 노예의 사망은 예상손실 범위였고, 교역성과로 얼마든지 보충할 수 있었다. 그래서 로벨은 조금 씁쓸했다.

어린 집사와 어린 집사를 좋아하는 늑대 남매가 이안 선장이 가져온 수레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아이란드 왕국 벨벳? 후추 없어요? 앗! 설탕이다!”

어린 집사는 열 자루가 넘는 포대를 열어보고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눈처럼 새하얀 설탕이 가득했다.

“설탕 풍년이래요?”

“뭐, 비슷하오.”

이안 선장은 으하핫! 웃으며 사탕수수 농장주인과 담판을 지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나 모두들 설탕에 정신이 팔려서 듣지 않았다.

설탕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어린 집사는 설탕 자루에 손가락을 담갔다가 꺼내 쪽쪽 빨았다. 로벨은 좀 더 품위 있는 방법을 선택했다.

“사탕을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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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참! 이런 거 처음 한다니까요.”

마녀 키르케는 설탕을 녹이고, 끓이고, 굳히며 열심히 사탕을 만들었다. 사탕 같은 고급 간식을 만들어본 적 없어 수차례 실패했지만, 실패작도 서로 가져가려는 수염 난 꼬맹이가 100명이나 있으니 즐거운 일이었다.

“물러나라!”

펄프 대장이 세 자릿수 군사를 지휘하는 용병대장답게 호통쳤다. 외팔이 더치가 산만한 덩치로 용병들을 밀어냈다. 성질 더러운 용병들이 화를 냈지만, 차마 대들지 못했다.

욕설과 욕망과 짜증과 호기심 속에서 애꾸눈 볼포스가 망치를 휘둘렀다. 아주 가볍게. 신중을 기울여서. 툭.

주먹만 한 사탕이 수십 개로 깨졌다. 어린 집사는 크기와 모양이 적당한 것을 골라 천주머니에 담고 부스러기로 크게 인심 썼다.

“나눠 드세요.”

펄프 대장은 가장 큰 사탕 조각을 낼름 주워 입에 넣었다. 그러자 간신히 유지된 질서가 와장창 무너졌다.

“이 더러운 늙은이가!”

“저리 비켜!”

“넌 아까부터 먹었잖아!”

몸을 자주 쓰는 용병들은 단맛에 굶주려 있었다. 과일조차 구할 수 없는 한겨울에 달달한 사탕은 단순한 군것질거리 이상이었다.

어린 집사는 곰처럼 달려드는 용병들을 피해 로벨에게 다가갔다.

“영주님! 영주님! 완성품이에요!”

“응.”

로벨은 어린 집사에게 가장 큰 조각을 주고 자신도 하나 입에 넣었다. 설탕의 진한 단맛과 불에 살짝 탄 쓴맛이 어우러져서 일품이었다.

로벨은 사탕 주머니를 잘 묶어서 품에 넣고 아귀다툼을 벌이는 용감무쌍 울프 용병단을 구경했다. 사탕을 왕창 만들어서 포상금 대신 내리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어린 집사가 혀로 사탕을 굴리며 말했다.

“영주님. 우리도 공장을 만들면 어떨까요?”

“공장?”

“푸른고래 호 말고도 안정적인 수입이 필요하니까요. 염색공장도 좋고, 방직공장도 좋고, 양조장도 좋아요.”

“쉽지 않을 텐데?”

시골에서 자란 로벨도 공장일이 쉽지 않다는 것은 알았다. 기술자를 확보하고, 자재를 공급받고, 상품을 유통하려면 로드릭 마을 같은 시골이 아니라 큰 도시에서 시작해야 했다. 어린 집사도 생각한 게 있었다.

“노스폴드 시티도 좋고, 프란시스 시티도 좋아요. 웨던 남작이나 에릭 공작이나 영주님한테 빚이 있으니까 거절을 못 할 거예요. 그리고 직공은 경력 많은 도제를 소개받으면 되고요.”

“돈이 없잖아.”

로벨이 가장 아픈 곳을 찔렀다. 소금광산과 해상교역으로 수익이 늘었지만, 그만큼 지출도 늘어나 수중에 돈은 여전히 부족했다.

“성벽 공사가 끝나면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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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긴 겨울이지만, 로벨과 로벨의 아랫사람들은 심심하거나 지루하지 않았다. 추위가 한풀 꺾이자 바쁜 나날을 보냈다.

“똑바로 서! 똥구멍에 힘을 팍 주고 버텨라! 못 버티면 너 혼자 죽는 것이 아니다! 옆 사람도 같이 죽는다!”

펄프 대장의 우렁찬 목소리 뒤로 돌덩이가 구르는 소리가 따라왔다. 우르르- 쿵!

“이쪽이 아니라 저쪽이야! 왼쪽! 아니! 나한테 왼쪽! 여긴 돌이 필요 없어!”

영지민 훈련소리와 성벽 공사소리로 로드릭 성이 떠내려갈 것처럼 시끄러웠다.

로벨은 밀집과 산개를 반복하는 영지민을 따스하게 내려다보고, 23피트 높이로 솟은 성탑을 뿌듯하게 올려다보았다.

둘 다 봄이 오면 완성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껏 성을 지켜온 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볼탄 반도를 관통하는 화살이 되어 호수성을 공격할 것이다. 어린 집사가 격렬히 반대했다.

“고작 200명으로 600명을 공격해요? 안 돼요! 안 돼! 바보짓이잖아요!”

반면, 애꾸눈 볼포스는 긍정적이었다.

“헤르만 백작이 도울 거요. 운이 좋으면 에디즈 자작도 도와줄 테고.”

“두 사람 다 도트넘 백작군이 무서워서 꼼짝도 못 하잖아요. 봄이 오면 성 안에서 굶어 죽은 채로 발견될지도 몰라요.”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로벨은 두 사람 의견을 모두 받아들였다.

“의사를 타진하자.”

“누구랑요?”

“볼트 헤르만 백작.”

로벨의 억양이 조금 까칠했다. 거인의 발 전투 이후 헤르만 백작이 달갑지 않았다. 그저 처녀를 제물로 바치고, 대가문의 전쟁을 부추기는 도반 도트넘 백작에 비할 바가 아니라 참을 뿐이었다.

“그 백작님도 영주님을 좋아하지는 않을 텐데요.”

“그래도 손을 잡을 거야. 호수성을 잃은 것은 단순히 땅을 뺏긴 것이 아니니까.”

어린 집사는 로드릭 성을 빼앗겼다고 상상해보고 납득했다. 로드릭 성은 로드릭 가문의 역사를, 다시 말해 정통성을 증명했다.

헤르만 백작은 헤르만 백작가의 정통성을 빼앗긴 것이다.

“악마와 손을 잡아서라도 되찾을 생각일 거야.”

“그런데 악마가 적이니까요.”

늦잠을 잔 마녀 키르케가 아야와 이야카를 끌고 나타났다.

로벨은 마녀 키르케가 인근 영주들한테 ‘늑대의 마녀’라 불린다는 것을 떠올리고 미소 지었다. 그러나 늑대가 네 발로 다니는 늑대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다. 로벨을 낮춰서 부를 때 쓰는 별명이 늑대였다.

마녀는 하품하고 자기자리를 찾아갔다.

“도반 뭐시기 기사님은 악마추종자에요. 수백 명의 용병보다 무서운 사람일 수 있어요.”

애꾸눈 볼포스가 하나뿐인 눈을 매섭게 떴다.

“헤르만 백작도 류트 공자와 한패였습니다. 헤르만 백작도 악마추종자일 가능성이 있지 않습니까?”

어린 집사가 고개를 저었다.

“도반 도트넘 백작은 사생아라 악마추종자의 길을 걸었겠지만, 볼트 헤르만 백작은 후계가 확실한 장자로 태어났는데, 뭐가 아쉬워서 지저분한 마법 따위를 배우겠어요?”

“마법이 왜 지저분해요!”

로벨은 옆으로 샐 낌새를 보이자 결론을 내렸다.

“내가 갈게.”

“...어딜요?”

“절벽성. 헤르만 백작이 있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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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전쟁터 한복판임을 고려해 컴포지트 아머의 플레이트와 폴드런를 착용했다. 하프 아머 비슷해서 이상하지는 않지만, 어쩐지 풀 플레이트 아머를 갖추지 못한 가난한 기사 같았다. 어린 집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꼼꼼히 챙겨주며 7번째로 물었다.

“꼭 가야 해요?”

로벨은 짜증 내지 않고 7번째로 대답했다.

“헤르만 백작은 영악한 자야.”

“그러니까 하는 말이에요.”

어린 집사가 생각하는 로벨 로드릭은 착해 빠진 토종 기사였다. 영악한 소악당을 상대하기에 지나치게 순수했다. 그러나 펄프 대장의 생각은 달랐다.

“영주님은 지혜롭고 현명하시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오.”

“영주님이 현명해요?”

“내가 현명해?”

“기사님이 현명하다고요?”

여기저기에서 반발이 나왔다. 심지어 당사자까지 동의하지 않으니 난감했다. 펄프 대장은 쩝! 소리 내고 한발 물러섰다.

“영주님은 날카로운 안목을 가지셨습니다. 사악하고 영악한 두 백작이 음모를 꾸미면 바로 알아챌 수 있을 겁니다.”

그래도 어린 집사는 안심하지 못했다. 마녀 키르케가 엄지로 지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제가 함께 가니까 염려 붙들어서 뻥 차세요.”

“제 두 번째 걱정이 당신이에요.”

“어머나! 저를 그리 아낄 줄이야!”

“그쪽 때문에 우리 영주님이 피해를 볼까봐 걱정이라고요!”

로벨은 “하하핫!” 웃었지만, 어린 집사는 웃을 일이 아니라고 빼액! 소리쳤다. 그때 애꾸눈 볼포스가 전투마를 끌고 나왔다.

“준비 끝났습니다.”

로벨은 전투마에 올라 수행원을 둘러보았다. 마녀 키르케, 애꾸눈 볼포스, 허풍쟁이 제이콥, 발가락 슈미츠 등이었다. 로벨은 눈짓으로 작별인사하고 전투마의 엉덩이를 가볍게 두드렸다.

“출발.”

어린 집사가 성문 밖까지 따라와 잔소리했다.

“절벽성은 가는 길이 험하다고 해요. 눈 때문에 사고가 날 수 있으니 조심! 또 조심하세요!”

로벨은 손을 흔들어주고 애꾸눈 볼포스에게 조금 빨리 걷자고 재촉했다. 로벨이 재촉하지 않아도 알아서 빨라지고 있었다. 아무튼, 겨울보다 빠르게 떠나는 일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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