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배신
83화. 배신
어린 집사는 허둥거리며 붕대와 약초를 찾았다. 짜증을 부릴지언정 당황하지는 않는 어린 집사였기에 똑같은 서랍을 두 번 열어보는 모습이 낯설었다. 로벨은 침대에 걸터앉아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왼쪽 다리를 높이 들었다.
“천천히 해. 안 죽으니까.”
“찾았다!”
어린 집사가 비단풀을 빻은 약초가루를 찾았다. 마녀 키르케가 지혈과 소독효과가 있다며 선물한 구급약이었다.
“옷 벗으세요! 약 바르고 붕대를...”
로벨은 눈짓으로 마녀 키르케를 가리켰다. 마녀 키르케는 눈을 깜박이며 로벨과 어린 집사를 번갈아 보았다.
“왜요?”
“이이이이익! 왜 따라왔어요! 나가요!”
“제가 뭘 잘못했다고요!”
“시끄럽고! 영주님 치료해야 하니까 빨리 나가세요!”
어린 집사는 우격다짐으로 마녀를 쫓아내고 방문을 걸 어잠갔다.
로벨은 어린 집사만 남자 안심하고 우플랑드와 브레를 벗었다. 지혈해 놓은 손수건을 풀자 핏물이 후두둑- 떨어져서 바닥을 더럽혔다. 상처가 생각보다 깊었다.
“화살을 맞았어요?”
“빨리 해... 나 어지러워...”
“아, 알았어요!”
어린 집사는 상처 부위에 구급약을 바르고 붕대를 과할 만큼 둘둘 감았다. 그 덕분에 지혈은 확실했다.
“다 됐어요! ”
어린 집사는 붕대를 매듭짓고 한걸음 떨어졌다. 그리고 뒤늦게 로벨이 나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오, 옷을 갈아입고, 조금 쉬세요.”
로벨은 새 옷을 가져오라고 손짓하고 미심쩍게 물었다.
“화 안 내?”
“제가 화냈으면 좋겠어요?”
“아니, 그건 아니지만, 그래야 정찰 결과를 말해주니까.”
어린 집사는 불경하게 ‘하! 참나!’ 소리 내어 웃은 후 진지하게 말했다.
“누구 짓이에요?”
“고블린이야.”
“고블린이 또 나왔어요?”
“아니, 도반 도트넘 백작이야.”
“도반 도트넘 백작이 고블린이라고요?”
로벨은 설명이 꼬인 것을 깨닫고 핵심을 우선 짚었다.
“도반 도트넘 백작이 쳐들어올 거야.”
너무 급하게 짚었나보다. 어린 집사의 턱이 땅에 닿을 만큼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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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키르케는 입술을 삐죽이며 성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발가락 슈미츠의 엉덩이를 호시탐탐 노리는 늑대 남매를 불렀다.
“착한 아저씨야! 괴롭히지 마!”
아야와 이야카는 풀이 죽어서 귀를 축 늘어트리고 마녀한테 돌아왔다.
네 발 달린 늑대들은 사라졌지만, 두 발 달린 늑대들은 여전히 사나웠다. 로벨을 공격한 범인이 아니어도, 로벨이 공격당할 상황으로 몰고 간 원인 제공자일 수 있었다. 평생직장의 꿈을 가진 외팔이 더치 등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중죄인이었다.
발가락 슈미츠가 그나마 친한 마녀를 애타게 찾았다.
“이보시오! 마녀! 우리가 기사 나리를 도왔다가 설명 좀 해보시오!”
하지만 심통 난 마녀는 발가락 슈미츠에게 관심두지 않았다. 마녀가 대답하지 않자 분위기가 더더욱 사나워졌다. 외팔이 더치는 손도끼를 뽑을 듯 말듯 움찔움찔했고, 허풍쟁이 제이콥은 크로스보우를 장전하고 쿼럴을 만지작거렸다. 발가락 슈미츠 등은 울상이 되었다.
펄프 대장은 마녀가 우울하자 심각하게 물었다.
“영주님은 어떠시오?”
“저도 몰라요.”
“치료해준 것이 아니오?”
“쫓겨났어요.”
펄프 대장은 안도했다. 마녀를 쫓아낼 정도면 큰 부상은 아니니라.
마녀는 엄지손톱을 잘근잘근 깨물며 추리력을 발휘했다.
“몸에 보기 흉한 흉터가 있는 걸까요? 그래서 남한테 못 보여주는 걸지도?”
“칼을 쥐고 살아가는 자에게 흉터는 훈장이오.”
“그건 용병 아저씨들 생각이죠. 기사님 정도 되면 흉터가 수치일 수 있어요.”
펄프 대장은 조금 생각한 후 고개를 가로저었다.
“영주님은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소. 어찌 흉터가 있단 말이오?”
“그럼 왜 숨어서 치료해요? 가만 생각하면 잠잘 때도, 씻을 때도, 볼일 보러 갈 때도 항상 혼자거나 어린 집사만 대동하잖아요.”
“우리 영주님이 소탈하긴 해도 귀족이오. 귀족들은 원래 그렇소.”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그런 게 상식이오.”
펄프 대장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하지만 마녀는 심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요. 무슨 여자도 아니고...”
펄프 대장은 어처구니없어서 웃었다.
“쓸데없는 소리 마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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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아침 겸 점심으로 보리빵과 귀리죽을 해치우고, 가장 신뢰하는 5명의 가신을 불러 모았다. 어린 집사가 침통하게 말했다.
“도반 도트넘 백작이 군사를 모으고 있어요.”
의외로 놀라는 사람이 없었다.
마녀 키르케는 돌아오는 길에 먼저 들었고, 펄프 대장과 애꾸눈 볼포스는 대충 예상하고 있었으며, 외팔이 더치는 무슨 말이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 모인 용병이 150명이고, 좀 더 늘어날 거예요.”
이번에는 조금 반응이 있었다.
“150명이라...”
“영지민은 동원하지 못할 테니, 해볼 만합니다.”
“엥? 뭘 해볼 만해? 싸우는 거야?”
옛날 같으면 짐 싸서 도망갈 것을 심각하게 고민할 숫자인데, 지금은 어떻게든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니 많이 발전했다. 그러나 어린 집사의 경고는 끝나지 않았다.
“영지민은 동원 안 하겠지만, 영지민보다 까다로운 놈들이 있어요.”
“용병 말고 말이오? 그게 뭐요?”
“고블린.”
로벨이 불편한 왼팔을 주무르며 말했다. 장난칠 상대를 찾아 기웃거리는 아야와 이야카를 제외하고 모두가 침묵했다.
“짐승이나 다를 바 없는 고블린을 어떻게 병사로 부린단 말입니까?”
“촌장 손녀딸 루시가 납치당한 일을 기억해?”
“그걸 어찌 잊겠습니까.”
“고블린 숫자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처녀가 납치되었잖아.”
“그건 저희도 이상하게 생각... 설마, 그 범인이 도반 도트넘 백작입니까?”
“뱀파이어의 왕 드라카.”
또다시 낯선 이름이 거론되었다. 로벨은 피를 많이 흘려 창백해진 얼굴로 말했다.
“늑대의 왕처럼 마도의 수호자 중 하나인 괴물이야.”
좀 더 확실한 반응이 나왔다. 펄프 대장은 길게 침음을 삼켰고, 애꾸눈 볼포스는 초조하게 안대를 만졌다.
도반 도트넘 백작이 로드릭 성으로 쳐들어온다는 보장은 없지만, 정황상, 그리고 느낌상 확신했다.
“고블린을 부릴 거면 쪼잔하게 10마리나 20마리를 부리지는 않을 테고...”
“최소 100마리 이상이겠지.”
“열심히 소집하고 있는 용병하고 합치면 300명 이상의 대병력이군요.”
“우, 우리가 막을 수 있을까요?”
로드릭 성의 병력은 100명 남짓이었다. 뉴 로드릭 마을과 아만다 마을의 병력을 긁어모아도 150명이 되지 않았다.
“영지민을 징집해서...”
“안 돼요! 가을 추수가 코앞이에요!”
“어떻게든 올해만 넘기면 좋겠는데, 저 성벽도 그렇고...”
“울프 용병단 결원 보충을 서두르고, 머를 경과 켈트 경에게 군사를 모으도록 지시하죠.”
로벨이 지시하지 않아도 로벨의 측근들이 알아서 척척 움직였다. 그만큼 전쟁을 자주 치렀다는 뜻이었다.
“하여간, 우리를 왜 가만히 안 두는 거야!”
누구 말마따나 사흘에 한 번씩 전쟁을 치르는 볼탄 반도지만, 로벨과 로드릭 영지는 그 정도가 심했다. 펄프 대장이 수염을 긁적이며 말했다.
“그러게 말이오. 지정학적으로 그리 좋은 곳도 아닌데.”
“어억? 그런 어려운 말을 쓰다니!”
“내 나이쯤 되면 이런 단어도 써줘야지.”
그래도 대책이 세워지자 조금씩 농담이 나왔다. 펄프 대장은 여유자금을 확보한 다음 노스폴드 시티로 떠났고, 외팔이 더치와 애꾸눈 볼포스는 봉신들에게 경고하기 위해 동쪽과 남쪽으로 내려갔다. 어린 집사는 성벽공사 중인 석수와 목수를 일부 동원해 포탄과 화살을 만들게 하고, 화약을 확보하기 위해 행상인을 찾아다녔다.
한편, 가장 바빠야 할 로벨은 마녀 키르케의 강압에 못 이겨 침실에 갇혔다.
“난 괜찮다니까. 그거 내려놔.”
“아니요! 기사님이 훈련한다고 날뛰면 때려서 기절시켜도 좋데요.”
“누가?”
“어린 집사가요.”
로벨은 뒤바뀐 주종관계에 의문을 표시했지만, 마녀는 그렇지 않았다. 떡갈나무 지팡이를 몽둥이처럼 쥐고 주장했다.
“이것도 충성이고, 우정이고, 사, 사, 사랑이라고요!”
로벨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었다.
“알았어. 얌전히 있을게.”
로벨은 머리맡에 둔 롱소드와 흐룬팅을 끌어와 천천히 뽑았다. 고블린의 피가 굳어있었다.
로벨은 눈살을 찌푸렸다. 칼과 갑옷은 기사의 정체성이었다. 폭력을 밥벌이 수단으로 삼는 것은 용병과 건달도 마찬가지지만, 기사가 그들과 다른 것은 잘 손질된 칼과 갑옷이 있기 때문이다. 기사도와 명예도 칼과 갑옷이 있을 때 성립되었다.
“키르케, 거기...”
“여기요!”
마녀가 재빨리 헝겊과 기름 주머니를 대령했다.
로벨은 고개를 까닥여서 고마움을 표시하고 롱소드를 손질했다. 정향유 냄새가 침실을 가득 채웠다.
마녀는 칼날을 닦는 로벨을 유심히 관찰하다가 이야카의 꼬리로 똑같이 흉내 냈다. 이야카는 귀찮은지 꼬리를 좌우로 피하다가 포기하고 하품을 늘어져라 하며 엎드렸다. 로벨은 고요함을 만끽하다가 문뜩 이상함을 깨달았다.
“조용하네?”
마녀가 꼬리털로 콧수염을 만들며 말했다.
“어린 집사가 오늘은 쉬라고 했어요. 영주님 쉬는데 방해된다고요.”
로벨이 말한 것은 마녀지만, 마녀는 성벽 공사하는 일꾼을 말했다. 로벨은 부연해 설명하기 귀찮아서 그냥 넘어갔다.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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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이틀을 꼬박 누워서 보낸 후 사흘째 아침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 사이 펄프 대장이 신입 울프 용병단을 20명 뽑아왔다. 그중에는 발가락 슈미츠 일행도 포함되어 있었다.
“기사 나리! 이제 좀 괜찮으십니까요!”
발냄새 베커가 손을 흔들며 친한 척하다가 주위에 눈총을 받고 소심하게 시선을 깔았다. 용병단 규모가 세 자릿수를 넘자 위계질서 비슷한 것이 생겼다. 수컷들이 모인 곳에서는 당연히 일어날 일이었다.
“저게 다 얼마야...”
어린 집사가 세상 다 산 노인처럼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용병을 굴릴 돈으로 양을 사서 양털과 양젖을 모으면 영지 수익이 몇 배로 늘었을 것이다. 그러면 로벨에게 맛없는 보리빵 대신 설탕이 들어간 부드러운 밀빵과 후추가 뿌려진 고기를 내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보리빵도 못 먹게 되는 것보단 낫잖아.”
로벨은 사열식을 간소하게 끝내고 다음 일정으로 넘어갔다. 영지민 숫자, 소와 양의 숫자, 추경지 작황, 식량창고, 자재창고 등등을 확인하고, 전쟁이 나면 성 안으로 옮길 수 있게 준비했다.
“이제 됐지?”
“아니요. 과묵한 몬트가 보낸 보고서요.”
어린 집사가 두툼한 서류를 내밀었다.
영지가 커지고 군대가 커진 탓에 옛날처럼 주먹구구식으로 처리할 수 없었다. 회색산과 뉴 로드릭 마을에서 보내온 보고서가 쌓였다.
“이게 끝이지?”
“아니요. 아만다 성, 가시성, 바위성에서 사람이 올 거예요. ‘소집령을 내리면 못해도 30명은 보내주겠지?’ 하고 떠봤는데, 뭐라 대답할지 모르겠네요.”
“30명은 너무 많지 않아?”
“그래야 20명 정도 보내줄 테니까요. 처음부터 20명만 보내라고 하면 10명만 보낼 걸요?”
“아, 그래?”
로벨은 일이 늘어나서 침울해졌다. 정말 땅이 커져서 좋을 게 없었다.
그렇게 며칠 고생해서 전쟁준비를 끝냈다.
로벨이 소집할 수 있는 총 병력은 185명, 식량은 로드릭 마을주민을 포함한 592명이 두 달간 버틸 양이 있고, 가을 추수가 무사히 끝나면 내년 봄까지도 버틸 수 있었다. 장작, 기름, 포탄, 화약, 화살 등도 성 지하창고에 가득가득 쌓였다.
어린 집사는 주먹을 불끈 쥐고 창밖으로 외쳤다.
“고블린이든 용병이든 올 테며 와보라고요!”
그러나 가을걷이가 끝나고, 촌장이 조심스럽게 추수제를 제안할 때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로벨과 어린 집사는 배신 아닌 배신에 떨떠름해 했다.
“왜 안 쳐들어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도반 도트넘 백작의 군대는 겨울이 오기 바로 직전, 볼탄 반도를 비스듬히 횡단해 헤르만 백작의 호수성을 쳤다. 총 병력 600명의 대군이었고, 거기에는 고블린과 트롤 부대가 섞여 있었다.
옛 프란시스 공작의 봉신들은 사트로 후작가의 개입과 몬스터 군단 중 어느 쪽에 더 놀라야 할지 고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