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늑대소굴
82화. 늑대소굴
어둠은 혼란, 공포, 비밀, 변수 등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태곳적부터 각인된 인간의 본능으로, 눈에 보이지 않으니 알 수 없고, 알 수 없으니 두려우며, 두렵기 때문에 당황스러웠다.
“어디야! 젠장! 어디 숨은 거냐!”
“불을 꺼! 저격당한다!”
어둠의 속성은 어둠 속에서 싸울 때 특히 잘 드러났다.
발가락 슈미츠와 곰발 베커가 수통의 물을 쏟아 붓고 발로 마구 밟아 모닥불을 꺼트렸다. 그 사이 공격이 시작되었다. 수풀 속에서 대여섯 발의 화살이 날아왔다.
“엎드려!”
로벨은 마녀 키르케를 땅바닥에 넘어트리고, 몸을 웅크려서 왼팔로 얼굴을 감쌌다.
퍽! 퍽-!
왼쪽 상박과 허벅지가 말굽에 치인 것처럼 아프고, 말벌에 쏘인 것처럼 화끈했다. 가느다란 입술 사이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기사님! 기사님!”
마녀 키르케가 뾰족하게 소리 질렀다. 로벨은 화살을 뽑지 않고 일어났다.
‘급소는 피했어.’
로벨은 멀쩡한 오른발을 움직이고, 이어서 화살 맞은 왼발을 움직였다. 그리고 롱소드를 끌어당겨 왼손과 함께 파지했다. 불로 지진 것처럼 괴롭지만 움직이는데 지장이 없었다.
“서쪽이야! 따라와!”
로벨은 롱소드를 앞세우고 뛰쳐나갔다. 어둠 속에 숨은 적이 당황하는 것이 느껴졌다. 화살을 두 대나 맞고도 달려드는 기사가 흔하지는 않을 것이다.
로벨은 숲을 베어낼 기세로 롱소드를 휘둘렀다. 수풀 너머로 살을 찢고 뼈를 부수는 손맛이 느껴졌다.
“꾸이익-!”
악취와 함께 녹색 피가 왈칵 쏟아졌다. 기억 속 어딘가에 저장된 냄새였다.
“고블린?”
로벨은 롱소드를 회수하면서 2년 전 북쪽 숲에 출몰한 고블린과 납치된 처녀들을 떠올렸다. 볼탄 반도에서 씨가 마르다시피한 고블린이 어디서, 어떻게 찾아왔는지 의아했었는데, 이제야 답을 알았다.
“도반 도트넘 백작의 괴물이야!”
도반 도트넘 백작이 악마추종자라면, 인간이 아닌 존재를 부리는 것도 당연했다.
고블린, 북쪽 숲, 손녀딸 납치, 33명의 재물, 악마추종자, 그리고 도반 도트넘 백작이 하나로 연결되었다. 피를 빼서 그런지 머리가 잘 돌아갔다.
“안 돼! 베커!”
“고블린 따위가!”
발냄새 베커가 워 해머를 휘두르며 가세했다. 셋 중 가장 소심한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가장 용감했다.
로벨은 발냄새 베커에게 뒤를 맡기고 정면으로 치고나갔다. 고블린들은 숏보우을 버리고 쇠뭉치가 달린 메이스와 쇠못이 박힌 스파이크 클럽을 꺼냈다.
‘야생(?) 고블린이 아니야!’
고블린의 손재주는 원숭이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라 돌도끼나 방망이를 겨우 제작하고, 그 외에는 인간의 무기와 농기구를 훔쳐서 쓰는데, 크기가 맞지 않아 잘 다루지 못했다. 그러나 로벨 일행을 습격한 고블린은 고블린 체구에 딱 맞는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도반 도트넘 백작!”
로벨은 오른발을 번쩍 들어서 정강이를 노리는 스파이크 클럽을 피하고, 도로 내리며 고블린의 머리를 찍었다. 고블린은 자신의 클럽에 이마를 찍고 자지러져라 비명을 질렀다. 쇠못이 얼굴을 찢어 피투성이가 되었다.
“고작 고블린 따위로 내게 대적할 수 있을 성 싶은가!”
로벨은 개구리처럼 폴짜 뛰어서 덤비는 고블린의 목에 롱소드를 꽂고 고블린의 속도와 무게를 이용해 세로로 갈랐다. 고블린의 핏물이 어둠보다 어두운 색으로 숲을 물들였다.
로벨은 롱소드에 묻은 피를 옆으로 뿌리고 성난 곰처럼 울부짖었다.
“나를 잡고 싶으면 직접 나서라!”
도반 도트넘 백작이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알 수 없지만, 설령 들었어도 직접 나설 생각은 없어 보였다. 고블린 서너 마리가 동시에 달려들었다. 로벨은 이를 꽉 깨물고 고블린의 메이스와 스파이크 클럽을 동시에 튕겨냈다.
체구가 작고 리치가 짧아 숙련된 용병보단 상대하기 쉽지만, 겁이 없고 몸이 재빨라 보통의 농민병보단 까다로웠다. 서너 마리를 도륙하면 겁을 먹거나, 최소한 경계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데, 고블린은 조심하는 낌새조차 없었다.
로벨은 고블린의 숫자를 가늠했다. 어두워서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뀌익!”, “뀍!” 울어 젖히는 소리를 보아 열 마리는 넘고 스무 마리는 되지 않았다.
‘도망칠까, 아니면 다 죽여야 하나.’
발가락 슈미츠와 곰발 베커가 로벨의 결정을 도와주었다. 워 사이드의 창끝을 고블린 정수리에 꽂으며 용맹하게 소리쳤다.
“한번 붙어보자! 난쟁이 괴물아!”
“난 녹색이 싫어!”
용병들은 고민 없이 싸우기로 결정했다. 머리가 아니라 경험, 혹은 본능으로 판단했다.
어두운 밤에 고블린을 따돌리기도 힘들거니와, 로벨의 칼솜씨를 보아 서포트만 잘하면 승산이 있어 보였다.
로벨 역시 본능으로 용병들을 이해했다.
“왼쪽을 맡아!”
로벨은 발가락 슈미츠에게 등을 맡기고 오른쪽으로 치고 나갔다. 롱소드와 메이스가 거세게 부딪치며 불똥이 튀었다. 로벨의 희고 매끄러운 얼굴과 고블린의 울퉁불퉁한 얼굴이 교차했다.
로벨은 1초도 안 되는 짧은 장면을 머릿속에 담고 고블린의 빈틈으로 칼날을 쑤셔넣었다. 살이 찢어지고, 핏물이 튀고, 비명이 울렸다.
“흡!”
로벨은 롱소드를 더욱 깊이 밀어 넣어 가드까지 박았다. 고블린의 뒤집힌 눈과 주르륵 흐르는 침이 코앞에서 보였다.
‘못생겼어.’
로벨은 고블린을 꽂은 채로 두 걸음 나갔다. 지능이 떨어지는 고블린들은 아무 생각 없이 절명한 동족의 등짝을 후려 팼다.
로벨은 무릎을 굽히고 어깨로 충격을 흡수하다가 별안간 몸을 쭉 펴서 고블린들을 밀어냈다. 깊이 박힌 롱소드가 쉬이 뽑히지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로벨에게는 칼이 한 자루 더 있었다. 로벨은 흐룬팅을 뽑아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는 고블린의 목을 베었다. 잘 벼린 면도칼로 벤 것처럼 깔끔했다. 피부가 천천히 벌어지고, 핏물이 분수처럼 솟구쳤다.
“여섯!”
로벨은 기합처럼 숫자를 외쳤다. 고블린은 로벨보다 숫자에 약해서 무슨 뜻인지 알아채지 못했다.
“일곱!”
로벨이 롱소드를 뽑아 훨윈드를 돌 때 간신히 숫자의 의미를 파악했다. 일곱 번째 동족이 살해당했다.
“뀌이익!”
“케엑!”
고블린은 덜 여문 머리로 겨우 상황을 파악했다. 자신들은 한 명도 못 죽였는데, 인간들은 일곱 명, 아니, 지금 막 워 해머에 얼굴이 뭉개진 동족까지 여덟 명을 죽였다. 주위를 둘러보니 동족이 절반으로 줄었다.
“도망치자! 도망치자!”
“안 된다! 주인님한테 혼난다!”
로벨은 롱소드와 흐룬팅을 부딪쳐 챙! 소리를 내고 쫓아갈 듯 다리를 구부렸다. 고블린의 의견을 하나로 모으는데 도움을 되었다.
“뀌이익! 넌 싸워라! 난 도망간다.”
“나도 간다!”
행동력이 우수한 고블린 한 마리가 손에 든 무기를 팽개치고 수풀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자 너도나도 무기를 내던지고 도주했다. 로벨은 자세를 풀고 롱소드를 지팡이 삼아 숨을 돌렸다. 발냄새 베커가 워 해머를 휘두르며 난폭하게 웃었다.
“으하하! 미개한 괴물놈들! 상대를 봐가며 덤벼야지!”
“...그만해.”
로벨이 눈살을 찌푸리고 돌아보자 찔끔해서 평소의 소심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참 독특한 성격이었다.
마녀 키르케가 꼬트 자락을 잡고 달려왔다.
“기사님! 기사님 다치셨어요?”
로벨은 마녀가 달라붙지 못하게 제지하고 말했다.
“살짝 찔린 거야. 안 아파.”
살짝 치고 피가 꿀렁꿀렁 잘도 흘렀다. 마녀가 상처를 확인하고 승리에 들떠있는 용병들을 불렀다.
“저 좀 도와주세요! 화살을 뽑아야 해요!”
로벨은 도움을 받지 않았다. 상박에 박힌 화살을 스스로 뽑았다. 파앗! 상처가 벌어지고, 붉은 피가 나무와 바닥을 적셨다. 곰발 베버가 질려서 중얼거렸다.
“와우. 터프하군.”
로벨은 상처에서 올라오는 열기와 등 뒤로 흐르는 식은땀을 동시에 느꼈다.
“이거 좀... 아픈데...?”
“그럼 안 아프겠어요? 으아앙! 피 좀 봐!”
마녀 키르케는 자신이 다친 것처럼 질질 짜며 로벨의 상처를 싸매주었다.
로벨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 허벅지의 화살도 뽑았다. 그리고 멀뚱멀뚱 구경하는 용병들에게 한 소리 했다.
“뭐해?”
“뭐하냐니요?”
“고블린이 다시 몰려올 때까지 기다릴 거야?”
“아차차!”
용병들은 할 일이 떠오른 듯 흩어졌다. 짐을 챙기고, 랜턴을 끄고, 전투마를 끌고 왔다.
로벨은 마녀에게 다리를 맡기고 고블린의 화살을 살펴보았다. 피에 젖은 쇠촉이 여전히 날카로웠다. 싸구려 철이지만, 철은 철이었다.
“고블린이 다룰 무기가 아니야.”
“예? 뭐가요?”
로벨은 롱소드에 의지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를 많이 흘려서 머리가 띵 했다. 고블린의 피 냄새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기사 나리! 말 가져왔습니다!”
로벨은 마녀 키르케의 부축을 받아 전투마에 올랐다. 주위는 여전히 어둡고 위험했다.
“해가 뜨려면 서너 시간은 더 있어야 하겠는데요?”
“나리, 어디로 갑니까요?”
로벨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나뭇잎 사이로 외로운 별과 홀쭉한 달이 보였다.
“남쪽으로.”
로벨은 전투마를 걷게 했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상처가 아파왔다. 로벨은 정신을 집중하고 좀 더 구체적인 목적지를 말했다.
“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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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해가 언덕 위로 머리를 내밀 때 북쪽 숲을 벗어나 로드릭 마을에 접어들었다.
부지런한 농부가 로벨을 발견하고, 눈썰미 좋은 아낙이 비명을 질렀다.
영주님이 숲에서 다쳤다는 소식이 삽시간에 퍼져서 로벨이 성에 도착하기도 전에 어린 집사와 펄프 대장이 몰려나왔다.
“이런! 어쩌다가 다치신 겁니까!”
“그러게 왜 몰래 나가서! 내가 못 살아!”
로벨은 아무렇지 않은 척 어깨를 으쓱였다.
“살짝 스친 거야. 괜찮아.”
“조금도 안 괜찮아 보입니다.”
“얼굴이 창백하잖아요! 빨리 안으로 들어가요! 빨리요!”
어린 집사는 로벨을 업으려고 했지만 체격 차이가 심해서 실패했다. 3, 4살 더 먹어서 로벨 나이쯤 되어야 가능할 것이다. 로벨은 어린 집사의 마음만 받고 두 발로 걸어갔다. 로벨을 보살피기 위해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가 따라가고, 성문 앞에는 용병들만 남았다.
“크르릉...”
“컹! 컹컹!”
아야와 이야카가 발가락 슈미츠 등을 보며 으르릉거렸다. 고블린 냄새 때문이지만, 그걸 알지 못하는 발가락 슈미츠 등은 고목나무처럼 뻣뻣하게 굳었다.
펄프 대장이 로벨을 흉내 내서 숏소드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근데 네놈들은 누구냐?”
외팔이 더치가 손도끼를 빼 들고 늑대를 따라 으르렁거렸다.
“이것들이 영주님을 다치게 한 거야?”
“뭣이라? 이런 찢어 죽일 놈들!”
성문 안팎으로 울프 용병단이 몰려왔다. 직업 특성상 험상궂은 얼굴들인데, 고용주의 부상으로 신경이 날카로워져 한층 더 흉악스러워졌다.
발가락 슈미츠는 늑대굴에 던져진 기분을 받았다. 아니, 늑대가 사는 곳이니 늑대소굴이 맞았다.
“우린 그러니까... 기사 나리를 위해서...”
“기사 나리! 우리도 데려가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