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강철성
80화. 강철성
로벨은 전투마를 달래고 롱소드를 뽑았다. 잘 훈련된 말은 갑작스러운 상황에도 놀라지 않았고, 잘 손질된 칼은 조심스러운 발검으로 소리 내지 않았다.
마녀 키르케가 긴장한 건지 흥분한 건지 숨을 빠르게 몰아쉬었다.
“싸워요? 싸울 건가요?”
어쩌면 즐거워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로벨은 나직이 속삭였다.
“안 덤비면 안 싸울 거야.”
“그럼 칼은 왜 빼요?”
“분명히 덤빌 테니까.”
용병과 도적의 차이점은 고용주의 유무뿐이었다. 용병일을 하다가 급료를 못 받으면 도적이 되고, 도적질을 하다가 누가 돈을 주면 용병이 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살인과 약탈이 주된 업무라 어차피 하는 일은 비슷비슷했다.
그런 용병들이 인적 드문 숲에서 근사한 말을 가진 청년(?)을 보았으니 곱게 보내지 않을 것이다.
‘셋만 넘지 않으면 괜찮아.’
로벨은 선제공격으로 한 명을 제압하고, 당황한 틈에 한 명 더 무력화시킨 다음, 여유 있게 남은 한 명을 상대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세상을 너무 각박하게 취급했다.
“와씨! 뭐야?”
“뭐? 뭐야! 도적이냐!”
로벨이 용병을 경계하는 만큼이나 용병들도 로벨을 경계했다. 로벨이 롱소드를 앞세우고 앞을 가로막자 후다닥- 물러나서 자세를 잡았다. 실전경험이 풍부한 용병들이었다.
‘세 명!’
로벨이 기습의 이점을 살리기 위해 롱소드를 끌어당길 때, 용병 하나가 삿대질하며 소리쳤다.
“로벨 로드릭 남작이다!”
“뭐? 진짜? 진짜다!”
로벨은 자신의 얼굴이 그리 잘 알려졌는지 몰랐다. 그러나 로벨을 알아보는 이유가 따로 있었다.
“우리들 기억 안 나십니까?”
“멍청아! 우리 같은 말단을 기억하시겠냐!”
“헤헤, 울프 용병단 제2중대였습니다요.”
로벨은 조그맣게 감탄했다. 루카스 자작과 싸울 때 고용한 용병들이었다.
로벨은 200명이나 되는 용병을 하나하나 기억하지 못하지만, 용병들이 무안할까봐 기억나는 척했다.
“그래. 넌 분명...”
“슈미츠입니다. 발가락 슈미츠라고 불립죠.”
“전 곰발 베버입니다.”
“저, 저는 발냄새 베커입니다요.”
로벨은 발에 무슨 애환이 있나 의문을 가지면서도 롱소드를 내리지 않았다. 방심을 유도하는 고도의 속임수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여러 ‘발’이 속닥이는 것을 듣고 한숨을 내쉬었다.
‘저 기사 나리가 이런 곳에 무슨 일이지?’
‘그건 모르겠고! 아주 좋은 기회야!’
‘기회?’
‘지금 잘 보이면 정식으로 울프 용병단이 될지도 모르잖아?’
기뻐서 떨리는 목소리와 손뼉 치며 감탄하는 동작이 전부 속임수라면, 용병 때려치우고 배우를 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로벨은 롱소드를 칼집에 밀어 넣고 전투마와 전투마에 앉은 마녀 키르케를 데리고 나왔다. 용병들은 하나뿐인, 그것도 고깔모자를 눌러쓰고 고뜨를 뒤집어쓴 수행원에 복잡한 표정을 교환했다. 발가락 슈미츠는 고민 끝에 마녀를 못 본척하고 말했다.
“기사 나리는 어디로 가십니까요?”
로벨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강철성.”
“아! 저희도 거기 가는 중입니다요! 그렇지? 그렇잖아?”
용병들은 워 해머, 워 피크, 워 사이드 등등 생김새부터 흉악한 병장기를 곰 인형처럼 끌어안고 고개를 끄덕였다. 로벨은 자신에게 잘 보이려고 한 말인지, 정말 강철성에 볼 일이 있는지 떠보았다.
“무슨 일로?”
곰발이 곰처럼 커다란 손으로 코를 쓱- 훔치고 말했다.
“용병놈이 용병일하러 갑지요. 강철성 주인이 용병을 모집한다고 합니다.”
로벨의 얼굴이 사나워졌다. 발가락 슈미츠는 당황했고, 발냄새 베커가 겁을 먹고 물었다.
“왜, 왜 그러십니까요?”
로벨은 낯선 용병들과 조금 친해지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고용할게.”
“저희를요?”
“응. 일이 잘되면 울프 용병단에 입단해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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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성은 무시무시한 별명과 달리 평범한 석재 성이었다.
언덕 위에 발리스타가 갖춰진 보루를 두고, 15피트 정도 되는 성벽을 베일처럼 둘렀다. 로벨이 짓고 있는 석재 원형 성곽 형태였다. 마녀 키르케는 구름에 닿을 듯 웅장한 성을 구경하다가 불현듯이 소리쳤다.
“가만! 강철이 아니잖아요!”
“강철처럼 강하다는 뜻이지, 강철로 지은 성은 아니야.”
“그리고 철광산이 많은 이유도 있습니다요.”
발가락 슈미츠가 끼어들었다가 눈총을 받았다.
로벨은 상대적 빈곤만 안겨주는 영주의 성보다 영지민의 마을에 관심을 가졌다. 크고 높은 강철성 아래에 작고 낮은 건초지붕이 펼쳐져 있었다. 얼추 잡아도 100여 가구가 넘었다.
“한 가구당 5명씩 잡고, 약 500명인가?”
“성 아랫마을과 산골짜기 광산마을을 합치면 영지민이 1,000명 넘습니다. 예전에는 훨씬 더 많았는데, 전대 영주가 전쟁을 일으켰다가 역으로 털리는 바람에 죽기도 많이 죽고, 도망도 많이 갔다고 합니다.”
발가락 슈미츠가 또다시 끼어들었다. 이번에는 도움이 되었다. 마녀 키르케가 고깔모자를 위로 올리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 기사님이 우리 기사님이에요.”
“오오! 역시!”
“과연 무적무패로군!”
로벨은 할 말이 없어 어깨를 으쓱였다.
강철성 아랫마을은 작은 도시라 해도 될 만큼 번화했다. 네일 공국과 사트로 시티를 연결하는 관문이기 때문이다.
강철성 마을을 관통하는 북부대로는 그대로 사트로 시티까지 이어졌다. 그 때문에 영지민 이외에도 외지인이 많았고, 외지인을 상대하는 여인숙과 술집도 적잖게 있었다.
발가락 슈미즈가 워 사이드를 어깨에 걸치고 길을 안내했다.
“이쪽에 제가 잘 아는 술집이 있습니다요.”
로벨은 롱소드 손잡이에 손을 얹고 전투마가 알아서 따라가도록 방치했다.
거마를 탄 로벨과 중무장한 용병 셋이면 주목받을 만도 한데, 주위에 비슷한 부류가 워낙 많아 2초 이상 눈길을 끌지 못했다.
“거인 용병단에서 어깨를 나란히 할 용사를 모집한다. 롱보우를 소지한 자, 혹은 롱보우를 다룰 줄 아는 자를 우대하며...”
“우리 천둥 용병단은 과거 미망인 전쟁에서 가장 높은 전공을 세운 용병단이다. 신뢰할 수 있는 대장을 찾는다면 주저 없이...”
번쩍번쩍하고 으리으리한 갑옷을 입은 용병들이 호객꾼처럼 소리쳤다. 마녀 키르케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둘러보았다.
“저 아저씨들은 뭐 하는 거예요?”
로벨을 대신해 떠벌이기 좋아하는 발가락 슈미츠가 설명했다.
“용병을 모집하는 거요.”
“저러면 용병이 모여요?”
“그러니 하지 않겠소?”
“그냥 기사님하고 계약 맺음 되잖아요? 꼭 용병단에 들어가야 해요?”
“귀족 나리를 찾아가서 대뜸 ‘나 좀 고용해주십쇼!’ 할 수 없잖소. 귀족 나리도 뭘 믿고 고용하겠소. 이름이 있는 용병단을 통해서 고용하는 편이 확실하지. 가만, 울프 용병단도 저렇게 모집하잖소?”
“그랬어요?”
로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주로 펄프 대장이 나서서 울프 용병단을 홍보하고-로벨의 명성을 이용해서- 용병을 모아왔다.
로벨 일행은 관문에서 멀지 않은 술집으로 들어갔다. ‘Bar’라고 쓰인 간판도 있지만, 글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라 맥주와 소시지를 음각한 그림 간판이 더 높이 걸려있었다.
“제 단골집인 ‘뚱보네’입니다. 사실 뚱보는 전(前) 주인인데, 재작년 프란시스 공작과 사트로 후작이 싸울 때 뭐시기 백작한테 죽었고, 지금은 과부랑 아들놈이 장사하고 있습니다.”
페르젠 백작이 강철성을 공격할 때 징집된 모양이다. 로벨과 마녀 키르케는 괜히 찔리는 구석이 있어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뚱보네 술집은 기와지붕을 올리지도, 회반죽을 바르지도 못했지만, 가정집과 비교하면 상당히 깔끔한 편이었다. 실내에서 닭이랑 돼지를 키우지 않는 것으로도 높은 점수를 줄 수 있었다.
“잘 있었냐, 꼬맹아?”
“발가락 아저씨!”
발가락 슈미츠는 수염이 거뭇거뭇 나기 시작한 어린 주인과 아는 척하고 맥주를 다섯 잔 주문했다. 마녀 키르케가 손을 번쩍 들고 말했다.
“전 우유요!”
“우유는 없고, 양젖은 있는데요?”
“그럼 양젖이요!”
로벨은 나무창문을 위로 올리고 받침대를 걸어 고정했다. 사트로 시티로 가기 위해 관문 앞에 줄을 선 행상인이 보였다. 관문이라 해도 도로 양옆에 바리게이트를 쌓고 오두막 비슷한 초소를 세운 것이 전부라 대단치 않았다
초소 앞을 지나는 행상인이 은화를 몇 닢 꺼내서 초병에게 주었다. 로벨은 급격한 관심을 보였다.
“통행료를 받아?”
“예전에는 안 받았지만...”
“지금은 받아?”
“영주의 재량 아닙니까요.”
어린 주인이 맥주와 양젖을 가져왔다. 로벨은 잠시 말을 아꼈다가 중얼거렸다.
“자금을 모으고, 병사를 모으잖아.”
“이곳 나리들은 사흘에 한 번씩 전쟁하지 않습니까? 새삼스러울 것 없습니다.”
억양을 보아 인어의 바다 남쪽에서 온 것이 분명한 곰발 베버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러나 사흘째에 싸워야 할지도 모를 로벨은 그럴 수 없었다.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벌떡 일어났다.
“확인해야겠어.”
“엥? 뭐를 말입니까요?”
“전부.”
도반 도트넘 백작의 군사, 군자금, 성향, 동향, 목적 등등이 포함된 한마디였다.
로벨은 한 모금 마신 맥주를 내버려두고 술집을 나갔다. 로벨을 따라온 마녀와 로벨에게 받아야 할 것이 있는 용병들은 허겁지겁 술잔을 비우고 트림할 여유도 없이 따라 나갔다.
“대체 뭘 하시려고요!”
로벨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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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성은 지난 반세기 동안 크게 유행한 원형 성곽으로 성탑과 보루가 모두 원통 모양이고, 성벽 또한 낮고 두껍게 지어졌다. 12, 3세기에 유행한 네모반듯한 성탑과 높이에 치중한 성벽하고 비교하면 외형적으로 큰 차이가 있었다.
여기까지 설명하자 호기심 많은 마녀 키르케가 참지 못하고 질문했다.
“네모하고 동그랑하고 뭐가 다른데요?”
“사각이 없어.”
원형 성탑에서 내려다보면 성벽에 접근한 적이 그대로 보였다. 감시와 수비가 한층 쉬워진 것이다. 그와 더불어서...
“피탄 피해도 최소화할 수 있고.”
성벽을 넘는 것이 아니라 부수는 것으로 인식하게 만든 대포의 등장이 영주의 성을 새롭게 만들었다. 투석기와 발리스타 같은 유서 깊은 공성 무기에도 효과를 발휘했다.
“대포가 더 세지면요?”
“성을 더 단단하게 쌓을 거야.”
“그거보다 더 세지면요?”
“글쎄... 더 단단하게 쌓지 않을까?”
로벨과 마녀 키르케가 조금 유치한 대화를 이어갔다. 무기와 갑옷의 역사를 새롭게 답습하는 만큼 결론이 쉽게 나지 않을 것이다.
한편, 로벨과 구두로 계약해 끌려온 임시 울프 용병단은 여유를 부리기가 힘들었다.
“기사 나리,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습니다요.”
“그럼 더 좋은 생각 있어?”
“그, 뭐냐, 거인 용병단인지 뭔지 하는 용병단에 섞여서 잠입하면...”
“그리고 도망치면 탈영병이 되는데?”
발가락 슈미츠, 곰발 베버, 발냄새 베커가 속으로 소리쳤다.
‘탈영병이 재무관 납치범보다 낫다고!’
손발이 한 덩이로 묶이고, 재갈까지 물린 채 전투마에 실린 강철성 재무관도 적극적으로 동의했다. 마녀 키르케가 고령에 곤욕을 치르는 공무원을 불쌍하게 쳐다보았다.
“그냥 둘러보고 올 거라더니...”
어린 집사가 알면 이마를 짚고 쓰러질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