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공사
79화. 공사
성(Castle)은 영주의 권위이자 상징이며 권리이고 책무였다. 다시 말해, 영주의 권력을 형상화한 조형물이면서 유사시 영지민과 영지민의 재산을 지켜주는 보루였다. 그런 이유로 영주의 성은 크고, 아름답고, 실용적이며, 튼튼해야 했다.
노스폴드 시티 사교모임에서 ‘정중히’ 초대해 온 건축가가 로드릭 성을 도면에 옮기며 설명했다.
“여기 네 곳에 성탑을 짓고, 그곳을 기준으로 성벽을 둥글게 쌓을 겁니다. 지반이 잘 다져져 있고, 지금 있는 성벽을 지지대로 삼으면 되니 공사 자체는 어렵지 않습니다. 다만, 걱정이 있다면 자재와 인부인데...”
로드릭 영지에는 성을 지을 만한 바위가 부족했다. 그 때문에 로벨의 조부가 되는 전전대 영주는 석재 원형 성곽으로 증축하는데 실패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로벨은 달랐다.
“그건 걱정하지 마.”
로벨이 점령한 바위성에는 채석장이 갖춰져 있고, 로드릭 성 지하에는 돌을 캐고, 다듬고, 운반할 노동력이 쌓여 있었다.
어린 집사가 전(前) 루카스 자작군 포로들을 모아놓고 제안했다.
“몸값을 일체 받지 않고 풀어주며, 겨울을 날 식량과 새 출발할 품삯을 지급할 거예요.”
어린 집사의 제안에 치기 가득한 가시성 출신 병사가 삐딱하게 대꾸했다.
“싫다면 어쩔 거요?”
어린 집사는 마음에 상처를 받은 듯 주저주저하며 말했다.
“그, 그럼 영주님에게 대항한 죄로 검지와 중지를 자르고 노예로 삼아 채찍질하며 돌을 나르게 할 거예요.”
“결국 돌을 날라야 하잖아!”
선택의 여지가 있다고 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로벨의 제안이 나쁘지는 않았다. 고향에 가봐야 먹고살 걱정하는 것은 매한가지니 이곳에 남아 돈을 버는 편이 나았다.
로벨은 포로들이 협력한다는 보고를 받고 건축가를 보았다. 건축가가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성이 크지 않고, 기초공사가 잘 되어 있으니 내년 봄이면 완공할 수 있습니다.”
“성이 크지 않아서...”
로벨은 좋아할 일인지 슬퍼할 일인지 헷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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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노스폴드 시티에서 석수와 목수를 각각 10명씩 고용하고, 가시성과 바위성의 포로를 총동원해서 로드릭 가문의 3대째 숙원사원을 시작했다.
“농마를 10마리나 빌렸다고요?”
“빌렸다고 해야 할지, 뺏었다고 해야 할지...”
로벨이 ‘수레를 끌 가축이 부족해’ 한마디 하자, 로벨에게 충성을 맹세한 영주들이 소와 말을 아낌없이 보내주었다. 가축이 없는 영주들은 일꾼을 보내기도 했다. 로벨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안간힘 쓰는 것이 안쓰러웠다.
아무튼, 로벨 로드릭의 역량이 총동원된 대규모 공사였다. 뉴 로드릭 마을에서 나무를 벌목해 가져오고, 아만다 마을에서 모래를 퍼내 운송하고, 바위성 채석장에서 돌을 다듬어 옮겨왔다. 개미가 먹이를 모아 돌아오듯 사방에서 말과 수레가 들어왔다.
로드릭 성 연병장에는 크고 작은 아궁이가 설치되어 밤낮으로 불을 때웠고, 성벽 위에는 기중기가 설치되어 사람 몸통만한 돌을 들었다 놓았다. 일꾼들은 쿵쿵거리고 쾅쾅거리다가 우르르륵- 한번 하고, 상대방 부모님의 종족을 추론하는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눈 후 다시 쿵쾅거렸다.
로벨은 쾅! 소리에 맞춰서 종이 밖으로 삐져나간 잉크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시끄러워...”
로벨은 종이를 꾸겨서 이야카에게 던졌다. 이야카는 앞발을 번쩍 들어 종이공을 물고 우적우적 씹었다.
로벨은 새 종이를 꺼내 다시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페르젠 백작은 힘이 소진되어 움직일 수 없고, 헤르만 백작과 에디즈 자작은 서로를 견제하느라 움직일 수 없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적은...’
쿵!
또 삑사리가 났다. 로벨은 다섯 번째 편지를 꾸겨서 아야에게 던졌다. 아야는 제자리에서 폴짝 뛰어 종이공을 물었다.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것이 로벨이 새로 개발한 놀이로 여기는 것이 분명했다.
“으아! 시끄러워서 일을 못 하겠어요!”
로벨만 괴로운 것이 아니었다. 어린 집사가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로벨의 집무실을 찾아왔다. 어린 집사를 좋아하는 아야와 이야카는 잘근잘근 씹은 종이공을 선물해주었고, 어린 집사는 기겁해서 늑대 남매를 두드렸다. 하지만 늑대 남매는 덩치가 어린 집사만 해져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정말 많이 컸네.’
로벨은 아야와 이야카를 처음 데려왔을 때를 떠올렸다. 팔뚝보다 작은 녀석들이 저리 커졌으니 세월이 참 빨랐다.
‘그래 봐야 3년인가?’
망치로 벽을 두드리는 쿵! 쿵! 쿵! 소리가 들려왔다. 로벨은 진저리치고 여섯 번째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영주님, 뭐 하세요?”
어린 집사가 아야와 이야카를 쫓아내고 다가왔다. 로벨은 펜을 움직이며 대답했다.
“에릭 공작에게 보낼 편지.”
“호, 혹시 연애편지?”
“......”
“...그럴 리가 없죠.”
어린 집사는 아야가 뱉어놓은 편지를 조심스럽게 펼쳤다.
“가장 경계해야 할 적이 누군가요?”
“이번 전쟁의 원인.”
“에릭 공작님이요?”
“아니야. 류트 공자와 사트로 후작이야.”
“아! 아아.”
로벨은 잉크가 번지기 전에 후우! 후우! 불어서 빠르게 말렸다. 드디어 반듯한 격식과 충실한 내용이 담긴 편지가 완성되었다.
어린 집사가 촛불과 밀랍조각을 가져와 거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 두 사람이 제일 좋아하겠네요. 공작가문이 알아서 무너지고 있으니까요.”
“그냥 좋아만 하면 다행인데...”
어린 집사가 조심스럽게 밀랍을 부었다. 로벨은 조상 대대로 물려온 인장반지를 빼서 편지를 봉인했다. 그리고 밀랍이 굳을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보았다. 욕설이 담긴 흙먼지와 고함이 담긴 돌가루가 가득했다. 머리가 더 아파졌다.
“내가 류트 공자라면 가을이 오기 전에 움직일 거야.”
“그럼 지금이잖아요?”
“응. 전쟁을 일으킬 거면 지금 군사를 소집해야 해.”
어린 집사는 로벨을 따라 창밖을 보았다. 성벽 너머 구불구불한 길이 보이고, 그 끝에 울창하게 자란 북쪽 숲이 있었다. 저 숲을 지나 동쪽으로 하루쯤 가면 사트로 후작령을 지키는 강철성이 있었다.
“그런데 왜 조용하죠?”
“글쎄...?”
로벨도 그게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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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 전에는 사람을 모으고, 장비를 모으고, 의논하고, 타협하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막상 공사가 시작되자 할 일이 없었다. 노스폴드 시티의 경험 많은 건축가가 알아서 척척 일을 진행했다. 어린 집사는 성탑을 조금 더 높이자, 총안을 조금 길게 만들자, 호딩(Hoarding: 성벽 밖으로 돌출된 방어시설)을 설치하자 등등으로 건축가를 귀찮게 하다가 “그럼 직접 공사하시오!” 라는 호통을 듣고 깨갱 해서 도망쳤다. 그러나 건축가는 툴툴거리면서도 어린 집사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했다.
“재미난 사람이야.”
로벨은 소리 없이 웃고 전투마에 안장을 올렸다.
마녀 키르케는 주방에서 나와 재투성이 고깔모자를 털다가 전투마를 끌고 나오는 로벨을 발견했다.
“기사님? 어디 가세요?”
“으응. 잠깐.”
“잠깐이 아닌 것 같은데요? 그거 싸우러 갈 때 쓰는 안장이잖아요? 게다가 봇짐도 있고요? 어디 멀리 가는 것 같은데요?”
로벨은 거짓말을 못 하는 편이었다.
“내일 돌아올 거야.”
“노스폴드 시티 가세요? 아니지, 아니야. 시장에 갈 거면 저랑 어린 집사한테 뭐 필요한 거 있냐고 물어봤겠죠. 으으음... 역시 의심스러워요.”
로벨은 마녀의 날카로운 추리력에 전전긍긍하다가 이실직고 말했다.
“강철성에 다녀올 거야.”
“강철성이 어디... 아! 소머리 백작네요?”
“쉿!”
로벨은 조용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마녀는 얼결에 목소리를 낮춰서 속닥였다.
“왜 그래요?”
“집사가 알면 못 가게 할 거야.”
“그런데 왜 가요?”
“정찰이야.”
볼프 사트로 후작이 프란시스 공작과 2차전을 준비 중이라면 최전방 강철성에서 낌새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성 안이 시끄러워서, 일하기 싫어서, 바깥바람을 쐬고 싶어서 등등의 이유도 있었다. 마녀가 반색했다.
“그럼 저도 가요!”
“그냥 둘러보고 올 거야. 재미없을 거야.”
“그래도 같이 가요!”
로벨은 마녀의 목소리가 다시 커지자 당황해서 입을 막았다.
“알았어. 소리치지 마.”
로벨은 전투마 위로 훌쩍 올랐다. 그리고 눈을 반짝이는 마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태워줄게.”
“그래도 돼요?”
“해지기 전에 도착하려면 서둘러야 해.”
마녀는 활짝 웃으며 로벨의 손을 잡았다. 로벨은 작고 가느다란 마녀를 단숨에 끌어올려 앞자리에 태웠다.
“기사님이랑 말을 탄 거 처음이에요!”
로벨은 두 사람을 태우고도 거뜬한 전투마를 칭찬한 후 엉덩이를 때렸다. 전투마는 망아지 시절부터 주입된 습관대로 땅을 박차고 뛰었다. 마침 성으로 올라오던 펄프 대장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영주님? 영주님! 어디 가십니까?”
로벨 대신 마녀가 소리쳤다.
“강철성이요! 재미있게 놀다 올게요!”
“강철성? 재미없는 농...!”
전투마의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귓가에 스치는 시원한 바람 소리와 마녀 키르케의 비명 같은 함성 때문에 펄프 대장의 뒷말이 들리지 않았다.
“재미없어도 잘 다녀오라는 거겠지?”
“그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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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북쪽 숲을 지나다가 살해된 웨일 도트넘 백작을 떠올렸다. 예의 바르고, 호탕하며, 명예와 긍지를 가진 기사였다.
‘이곳에서 죽었지?’
웨일 도트넘 백작을 추억하자, 자연히 그의 아들인 조지 도트넘 백작이 떠올랐다. 추억꺼리로 보면 조지 도트넘 백작이 더 많았다.
“지금 강철성을 다스리는 기사님이 누군가요?”
“소머리... 아니, 조지 도트넘 백작의 이복동생인 도반 도트넘 백작이야.”
“기사님이 잘 아는 기사님인가요?”
“아니. 몰라.”
로벨은 마녀의 머리를 꾹 눌러 나뭇가지에 부딪히지 않게 도와줬다. 여름을 먹고 자란 가지와 잎사귀 때문에 속도를 낼 수 없었다. 그래도 심심하지는 않았다. 산새 소리, 풀벌레 소리, 전투마의 발굽소리, 마녀 키르케의 숨소리가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로벨은 자리가 불편한지 자꾸 꼼지락거리는 마녀를 달래기 위해 아무 이야기나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소원을 못 들어줬지.”
“소원이요?”
“유리잔으로 퉁칠 수 없는 소원 말이야.”
“아! 맞다!”
마녀는 까맣게 잊고 있던 비상금을 찾은 것처럼 기뻐했다.
“이제 여유가 있으니까 말해봐. 어지간한 것은 사줄 수 있어.”
마녀는 어깨를 움츠렸다. 안 그래도 작은 체구인데 몸을 움츠리니 로벨 품 안에 쏙 들어왔다.
“제 소원은 그런 것이 아니에요.”
“그런 것?”
“돈으로 살 수 있는 게 아니라구요. 저는 그냥... 아윽!”
로벨은 마녀의 정수리를 턱으로 눌렀다. 마녀는 혀를 깨물고 긴 신음을 흘렸다.
“기사님!”
“조용해. 누가 있어.”
로벨은 전투마를 수풀 쪽으로 몰았다. 마녀가 혀를 내두르며 항의했다.
“나무꾼 아니면 약초꾼 아닐까요?”
“...아니야.”
로벨은 마녀에게 얌전히 있으라고 말하고 전투마에서 내렸다. 이곳은 나무꾼이 찾지 않는 깊은 숲이었다.
철컥- 철컥-
그리고 나무꾼이 쇠로 된 신발을 신고 다닐 리 만무했다. 걸음을 뗄 때마다 쇠붙이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용병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