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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72화 (72/605)

72화. 진실

72화. 진실

로드릭 성 메인 홀.

이곳은 진지한 알현장이 되기도 하고, 웃고 떠드는 연회장이 되기도 하고, 두려움이 가득찬 피난처가 되기도 하며, 가끔은 장엄한 의식의 장소도 되기도 했다.

“용기를 가지고 적을 두려워하지 마라.”

손길에 닳고 닳아서 반들반들해진 기둥 사이로 신성한 기사 서임식이 진행 중이었다.

“신의를 가지고 주군에게 충성하라.”

로벨은 흐룬팅으로 머를 브릭의 오른쪽 어깨를 두드리고, 왼쪽으로 옮겼다. 정석대로 하자면 세 명의 기사와 옛 신의 사제가 증인이 되어야 하는데, 로벨과 머를 브릭 모두 인맥이 빈약해서 그만한 인원을 초청할 수 없었다.

“정의를 가지고 약자를 보호하라.”

로벨은 다시 오른쪽 어깨를 두드리고 흐룬팅을 회수했다. 먼 옛날에는 흠씬 패주는 것으로 서임식을 치렀는데, 품위도 없거니와 사상자가 많이 나와서 어깨를 두드리는 것으로 간소화되었다. 머를 브릭 ‘경’에게 천만다행이었다.

“서 머를, 일어나라.”

로벨은 머를 브릭 경을 일으키고, 웃음을 참기 위해 헛기침을 조금 했다. 머를 브릭 경은 기쁨이 북받쳐서 대단히 난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로벨은 최대한 이해하기로 했다. 오랜 종자 생활 끝에 기사가 된 머를 브릭 경에게는 세상에 둘도 없는 기념적인 날이었다. 그리고 로벨과 어린 집사에게도 기념할 만한 날이었다.

“우리 영주님한테도 봉신이 생겼어요.”

어린 집사가 감격해서 중얼거렸다. 마녀 키르케는 서임식과 처형식을 구분 못 하는 늑대 남매를 말리면 물었다.

“꼬마 집사가 먼저 충성맹세 했잖아요?”

“전 기사가 아니니까요.”

어린 집사가 구시렁거렸다. 어린 집사뿐만 아니라, 펄프 대장 일행도 오랫동안 충성했지만 귀족이 아니라 기사가 될 수 없었다. 기사가 아니라 봉토 또한 받을 수 없었다.

로벨은 머를 브릭 경에게 아만다 성과 아만다 마을을 하사하고, 로드릭 가문의 첫 번째 봉신으로 삼았다. 머를 브릭 경은 감격해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인구가 200명도 안 되는 작은 장원이지만, 이름뿐인 기사 가문 출신으로 자신의 영지를 손에 넣었으니, 대단한 성공이고 파격적인 출세였다.

“어린 집사와 펄프 대장이 실무를 익히게 도와줄 거야.”

어린 집사가 ‘에헴!’ 소리를 내고 선생 노릇을 시작했다.

“머를 경, 모아둔 돈이 좀 있나요?”

“돈? 그러니까 페닝 말이오?”

“우리 영주님이 올해 인두세를 감면해주기로 했으니까, 올해 수입은 없을 거예요. 겨울을 버티려면 많은 돈이 필요할 텐데, 꼬불쳐둔 쌈짓돈이나 물려받은 유산이 있으면 얼른얼른 꺼내보세요.”

“도, 돈이라면 여기...”

머를 브릭 경은 호주머니에서 은화 열 몇 개를 꺼내놓았다. 어린 집사가 머리를 물어뜯을 기세로 호통쳤다.

“지금 장난해요? 어린애 용돈 가지고 뭘 하려고요! 사탕 몇 개 사면 끝나겠네!”

사탕이 그만큼 비싸다는 뜻이기도 했다.

로벨과 마녀 키르케는 어린 집사를 피해 성 밖으로 도망쳤다. 로벨은 성 밖까지 쩔렁쩔렁 울리는 어린 집사의 목소리를 감상하며 중얼거렸다.

“옛날 생각나네.”

“옛날에도 저랬어요?”

“응. 돈 못 벌어오면 짜증냈지.”

성 안도 시끌시끌하지만, 성 밖도 만만치 않게 떠들썩했다. 로드릭 마을 광장에서 불기둥이 치솟고, 마을주민이 ‘와아아!’ 소리를 질렀다. 얼핏 보면 화재가 난 것 같지만, 화재 현장치고 웃음이 많았다.

마녀 키르케가 뛸 듯이, 아니, 정말 폴짝폴짝 뛰면서 좋아했다.

“기사님! 추수제가 시작됐어요!”

“응.”

성 안은 머를 브릭 경을 축하하는 사람들로, 성 밖은 가을 추수를 기뻐하는 사람들로 요란했다.

마녀 키르케가 로벨의 옷자락을 당기며 말했다.

“우리도 가요.”

“어디를?”

“마을 광장이요!”

로벨은 성 안을 돌아보았다. 어린 집사의 입을 틀어막는 펄프 대장과 술잔을 나눠주는 애꾸눈 볼포스와 허풍쟁이 제이콥을 보았다. 오늘의 주인공은 따로 있으니, 로벨은 잠시 자리를 비워도 될 듯했다.

“응.”

@

추수제는 일 년에 딱 한 번뿐인 축제였다. 이날만큼은 고기와 술을 마음껏 먹고, 노래하며 춤을 출 수 있었다. 고단한 한 해를 위로하는 낙이고, 새로운 한 해를 버티는 힘이었다.

“아앗! 영주님이다!”

“영주님이 오셨다!”

로벨이 나타나자 작은 소란이 일어났다. 아무리 선량하고 친절해도 지체 높으신 영주님이라 허락 없이 웃고 떠들 수 없었다. 경쾌한 노랫소리가 잦아들고, 술잔 두드리는 소리가 사라졌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로벨의 눈치를 보았다. 로벨은 괜히 내려왔다고 후회했다.

“어이구! 영주님! 저희들을 위로하러 오셨군요! 술 한 잔 올려도 되겠습니까?”

눈치 빠른 촌장이 손녀딸 루시에게 눈짓했다. 어느새 만삭이 된 루시가 맥주를 듬뿍 떠서 수줍게 내밀었다.

“여기, 여기 받으시와요.”

촌장의 손녀딸은 어머니가 되었어도 소녀 시절 감수성을 잃지 않았다. 아니, 시간이 지난 만큼 더욱 미화되고 과장되었다. 촌장의 손녀딸에게 로벨은 100마리의 괴물을 용감히 물리치고 어두운 미궁에서 자신을 구해준 백마 탄 기사님이었다. 차기 촌장 지미가 눈에 불을 켜고 노려보았지만, 로벨이 돌아보자 깜짝 놀라 술잔 속 세계를 심오하게 관찰했다.

로벨은 술잔을 머리 위로 들어 보인 후 단숨에 들이켰다. ‘꿀꺽... 꿀꺽...’ 걸러지지 않은 맥주 찌꺼기가 식도를 간지럽혔다. 술잔 밑바닥이 하늘로 올라갈수록 로드릭 마을주민의 광대뼈도 함께 올라갔다.

“우오오오!”

“와아아!”

그리고 텅 빈 술잔이 입술을 떠나는 순간, 로드릭 마을주민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갈채를 보냈다.

“영주님 만세!”

“로드릭 남작님 만세!”

축제 분위기가 다시 끓어올랐다. 아니, 로벨이 등장하기 전보다 한층 뜨거워졌다.

나이 어린 소녀들이 꼬물꼬물 만든 화관을 가져와 머뭇거렸다. 로벨은 머리를 살짝 숙였고, 소녀들은 활짝 웃으며 로벨에게 화관을 씌워주었다. 로벨은 ‘고맙다’, ‘예쁘다’ 칭찬하려 했지만, 수줍음이 많은 소녀들은 인사를 받기도 전에 가족들 품으로 도망쳤다. 순진해서 귀엽고 순수해서 사랑스러웠다. 로벨이 소리 없이 웃자 마녀 키르케가 두 끼쯤 굶은 아야처럼 으르렁거렸다.

“그거 저도 만들 줄 알아요!”

“응? 그런데?”

“그냥 그렇다고요!”

하늘에 별이 촘촘하게 뜨고, 은하수에 별똥별이 흘러가자 추수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숲지기 차남 데니가 깨끗이 비운 맥주통을 다리 사이에 끼고 북 두드리듯이 퉁탕퉁탕 두드렸다. 그러자 사냥꾼 형제가 국자로 냄비와 접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소음과 소음이 만나면 때로 음악이 되기도 했다. 박자도 높낮이도 제각각 다르지만, 분명 음악이고 연주였다.

“춤을 춥시다! 춤을 춰요!”

“나, 난 아직 술이 모자라서...‘

“그럼 제가 먼저 하지요!”

용감한 청년이 수줍은 처녀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야유 섞인 휘파람이 흘러나왔다. 이어서 말괄량이 아가씨가 소심한 총각의 손을 잡아끌었고, 소꿉친구인 소년소녀가 동시에 일어났다가 얼굴을 붉히고 손을 잡았다. 황혼을 바라보는 노부부도 조용히 손을 맞잡았다.

“헤에?”

“흠.”

남녀가 하나둘 짝을 지어 춤을 추었다. 하늘이 점지해준 부부도 있고, 못 잡아먹어 안달인 커플도 있고, 숙명적인 악의가 싹트지 않은 꼬마 남매도 있었다. 마녀 키르케가 춤추는 그림자를 구경하며 감탄했다.

“다들 춤을 잘 추네요?”

“응.”

기사와 귀부인이 교양 있는 척할 때 추는 4분의 3박자 미뉴에트 춤과 사뭇 달랐다. 추수제의 춤, 농민의 춤이었다.

이 춤의 가장 큰 특징은 ‘규칙’이 없었다. 손뼉을 치고, 발을 굴리고, 통나무를 두드리는 소리에 맞춰서 아무렇게나 춤을 추었다. 사이좋은 남녀들은 팔짱을 끼고 빙글빙글 돌고, 재주가 좋은 청년들은 물구나무서서 기우뚱기우뚱 돌아다니고, 발재간이 좋은 꼬마들은 서로의 발을 밟으려고 폴짝폴짝 뛰면서 우스꽝스러운 동작을 보였다. 엉망진창이지만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우리도 춤 춰요!”

“뭐?”

마녀 키르케가 로벨을 잡아당겼다. 로벨은 거부의 뜻을 밝혔지만 뿌리치지 못했다. 마녀 키르케의 얼굴이 너무나 해맑았다.

로벨과 마녀가 모닥불로 나오자 커플들은 자리를 옮겨 장소를 마련해 주었다. 로벨은 어떻게 춤 춰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어린 시절 가정교사에게 무도회 춤을 배웠지만, 이런 곳에서 선보일만한 종류가 아니었다.

‘칼춤이라도 출까?’

역시 어울리지 않았다.

그때, 마을광장 저편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영주님! 영주님!”

시끄러운 곳에서도 다급한 목소리는 이상하게 잘 들렸다. 떠들썩한 축제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았다. 로벨은 마녀 키르케의 손을 놓고 자신을 애타게 찾는 겁쟁이 데비를 보았다.

“나 여기 있어.”

겁쟁이 데비는 걸리적거리는 사람들을 거칠게 밀치고 광장으로 들어왔다. 로벨이 눈살을 찌푸리고 한마디 하려는데, 겁쟁이 데비가 선수쳤다.

“성으로 오셔야 합니다! 페르젠 백작, 페르젠 백작이...!”

로벨은 지난 추수제의 악몽을 떠올리고 물었다.

“페르젠 백작이 죽었어?”

겁쟁이 데비는 어리둥절해서 반문했다.

“예? 아뇨?”

“...그럼 뭐야.”

로벨은 짜증으로 무안함을 감추었다. 그러나 겁쟁이 데비의 다급함은 거짓이 아니었다.

“페르젠 백작이 보낸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기사 나리가 왔는데, 아주 큰 일이, 정말 큰 일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

로벨은 ‘페르젠 백작이 몸져누웠나?’, ‘헤르만 백작이 선전포고했나?’ 따위의 잡다한 생각을 하며 성으로 돌아왔다. 처음 보는 기사 주위로 어린 집사, 펄프 대장, 머를 브릭 경 등등이 둘러싸고 있었다. 분위기가 심각했다.

“무슨 일이야?”

“My Lord!”

머를 브릭 경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페르젠 백작의 전령은 로벨을 위아래로 훑어보고 다짜고짜 목적을 밝혔다.

“페르젠 백작의 소환장이오.”

로벨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머를 브릭 경이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무엄하오!” 호통치고, 펄프 대장과 외팔이 더치가 무기를 잡았다. 페르젠 백작의 전령은 당황해서 한걸음 물러났다.

“왜 그러시오?”

로벨은 화를 억누르고 설명했다.

“뭔가 착각한 것 같소. 본인은 프란시스 공작에게 충성하지, 페르젠 백작에게 충성하지 않소.”

로벨을 소환할 수 있는 사람은 로벨의 주군인 에릭 공작과 에릭 공작의 주군인 국왕 폐하뿐이었다. 페르젠 백작의 ‘소환장’은 대단히 무례한 것이었다. 로벨이 화를 내는 것은 당연했다. 페르젠 백작의 전령은 화급히 변명했다.

“그 충성이 잘못되었다면?”

로벨을 물론이고, 기사도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은 모두 깜짝 놀랐다. 그만큼 위험한 발언이었다. 로벨은 롱소드 폼멜을 만지며 속삭였다.

“지금부터 말을 조심해야 할 것이오.”

페르젠 백작의 전령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붉은 장미 수도원은 프란시스 공작가와 연이 깊은 곳이오.”

“수도원?”

“그 붉은 장미 수도원의 신앙 깊은 성직자가 고해했소.”

“대체 무슨 말이요!”

로벨은 뜬금없는 소리를 늘어놓자 버럭 화를 냈다. 그러나 지금 일과 상관없는 소리가 아니었다.

“에릭 프란시스 공작은 월리엄 프란시스 공작의 친자가 아니라 증언했소. 류트 프란시스 공자의 주장이 맞았소이다. 나의 주군과 남작은 잘못된 자에게 충성을 바친 것이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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