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고드름
73화. 고드름
로벨은 가신들을 모아 긴급회의를 열었다. 그러나 각자 생각이 많아서 회의가 진행되지는 않았다.
로벨은 에릭 공작의 실각 가능성을 검토했고, 어린 집사는 에릭 공작의 실각이 로드릭 영지에 끼칠 영향을 고심했고, 펄프 대장은 에릭 공작의 친부가 누구일지 의심했고, 애꾸눈 볼포스는 에릭 공작에게 충성한 봉신들의 반응을 걱정했다. 물론, 모두가 생각이 많은 것은 아니었다. 외팔이 더치와 마녀 키르케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어린 집사가 서두를 던졌다.
“거짓말 아닐까요?”
펄프 대장이 실소하고 반박했다.
“옛 신의 사제가 직접 고해한 일이라잖소.”
“사제도 사람이에요. 얼마든지 거짓말 할 수 있어요.”
“사람들은 그리 생각하지 않소.”
머를 브릭은 기사가 되자마자 터진 초대형 스캔들에 안절부절못했다.
“페르젠 백작의 소환... 이런! 죄송합니다. 초대장을 어찌하시겠습니까?”
로벨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서 롱소드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생각해 보겠다는 자세였다. 어린 집사가 딱 잘라 말했다.
“그냥 무시하세요. 지가 백작이면 백작이지 왜 오라 가라 명령해요? 한두 번 어울려줬더니 우리 영주님을 아주 부하 취급하네요?”
“그런 뜻이 아닐 거요.”
펄프 대장이 로벨을 한번 보고 어린 집사에게 말했다.
“페르젠 백작은 보기와 달리 영리한 기사요. 의미를 담고 있을 거요.”
“무슨 의미요?”
“볼탄 반도의 새 주인이 되겠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성이 낡은 탓은 아닐 것이다.
“페르젠 백작 입장에서 생각해보시오. 에릭 공작에게도 충성할 수 없지만, 류트 공자에게도 충성할 수 없소. 지난 후계자 전쟁 때 그리 싸웠으니 곱게 여기지 않을 거요. 설령 류트 공자가 받아줘도 새롭게 재편될 권력에서 완전히 밀려날 것이오.”
“그럼요?”
“꼭 충성할 필요는 없잖소?”
서늘함에 찝찝함이 더해졌다. 로벨이 불쾌한 공기의 정체를 밝혔다.
“반란?”
펄프 대장은 어깨를 으쓱였다.
“반란이라 할 것도 없습니다. 에릭 공작이 정통성을 상실하면, 에릭 공작에게 충성한 볼탄 반도 봉신들은 주인 잃은 기사가 됩니다. 샘 포클 시대로 돌아가는 셈이죠. 야심이 있는 자라면 열심히 주워담는 것만으로 제2의 프란시스 공작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럼 페르젠 백작이?”
펄프 대장은 봉인도 안 뜯은 소환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소환장은 ‘내가 볼탄 반도의 새로운 주인이 되겠다’란 의미인 동시에 ‘내게 충성할 것이냐?’ 묻는 것입니다. 누구 머리에서 나왔는지 모르지만 그럴싸한 제스처입니다.”
로벨, 어린 집사, 마녀 키르케 등은 소환장에 숨겨진 뜻을 이해하고 감탄 반, 공포 반을 표현했다. 외팔이 더치만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콧구멍 확장작업에 열중했다.
어린 집사가 한숨과 한탄을 동시에 흘렸다.
“우리 영주님 입장도 난감하죠. 류트 공자 일당과 박 터지게 싸웠으니, 이제 와서 줄을 바꿀 수도 없고...”
“그걸 알고 소환장을 보냈을 거요. 영주님에게는 다른 대안이 없으니까.”
그때 마녀 키르케가 침묵을 깨고 말했다.
“왜 대안이 없어요?”
로벨 등은 기대 어린 표정으로 마녀를 보았다. 평소에는 외팔이급으로 멍청, 아니, 멍하지만, 위기 시에는 묘책을 내놓을 때가 많았다.
“에릭 공작님을 돕는 것은 어때요?”
“옛 신의 사제 말이 사실이라면 에릭 공작은 공작은커녕 귀족도 아니에요. 출신 모를 잡부의 아들이죠.”
“그치만 능력이 있잖아요? 게다가 기사님이 충성맹세도 했고요.”
“귀족이 아닌 내가 말하면 우습지만, 귀족이 귀족도 아닌 사람에게 충성할 수 없소.”
마녀 키르케는 ‘칫!’ 소리 내고 말했다.
“그럼 누구 편도 안 들면요?”
“중립을 선언하란 말이오?”
“어느 쪽을 편들어도 좋지 않아요. 꼭 누가 꾸민 일 같단 말이에요.”
로벨은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류트 공자? 아니면 악마추종자일까?”
모건 아만다 남작을 이용해 공작 가문의 내전을 일으키고, 싸움이 한참일 때 에릭 공작의 정통성을 박탈한다. 불을 지피고 기름을 끼얹는 일이었다. 다행히 로벨이 모건 아만다 남작을 조기 격퇴해 불이 번지지는 않았지만, 옛 신의 사제가 기름을 뿌렸으니 불씨 하나만 날아와도 펑 터질 것이다. 그때는 볼탄 반도, 아니, 포비아 왕국 전체가 흔들릴 것이다.
“에릭 공작, 류트 공자, 사트로 후작, 페르젠 백작, 헤르만 백작, 그 외에도 야심 많은 기사들이 기회를 엿보고 있겠죠.”
로벨은 롱소드를 만지며 중얼거렸다.
“전쟁이 날까?”
“엄청 큰 전쟁이 될 거예요.”
전쟁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었다.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마녀 키르케가 이야카 귀를 비틀며 말했다.
“그래도 기사님 덕분에 당장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아요. 결국 누군가가 칼을 휘두르긴 하겠지만, 그건 아마도...”
“내년 봄이겠죠?”
어린 집사가 끼어들자 마녀 키르케가 눈을 흘겼다.
“예. 그러니까 다시 말해...”
“아직 준비할 시간이 있어요.”
“예. 그런데 왜 자꾸...”
“말을 가로 채냐고요?”
마녀 키르케가 어린 집사의 머리를 쿵! 소리 나게 때리고 주방으로 도망쳤다. 어린 집사는 분기탱천해서 쫓아갔고, 싸움을 좋아하는 아야와 이야카가 신나서 따라갔다. 자연히 긴급회의가 끝이 났다. 로벨은 한숨을 쉬고 자세를 똑바로 했다.
“좀 더 고민해야겠어. 머를 경은 날이 밝는 대로 아만다 성으로 출발해. 겨울을 날 식량과 돈을 빌려줄게. 펄프 대장은 울프 용병단을 신경 써. 여유가 되면 병력을 늘리도록 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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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공작의 정통성이 혀끝에 올랐다. 그리고 큰 전쟁이 일어날 거란 소문이 돌았다.
기사들은 물론이고, 가을추수가 끝나 할 일이 없는 촌부들까지 누가 정당한지, 누가 우세한지, 누가 위험한지 떠들었다. 곡물 값이 예년보다 크게 올랐지만, 영주와 농민들은 시장에 물건을 내놓지 않았다. 봄 농사 전에 전쟁이 시작될 것을 직감한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몸을 사리는 것은 아니었다. 무적의 기사가 다스리는 로드릭 영지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화로웠다. 로벨과 울프 용병단이 자신들을 지켜줄 거라 굳게 믿었다. 그 믿음이 아주 틀리지는 않았다.
“울프 용병단 숫자가 150명이 넘었습니다.”
펄프 대장이 용병 계약서를 쌓으며 말했다. 까막눈이 많아 서명 대신 손도장을 찍은 계약서가 대부분이었다. 어린 집사가 전력질주한 것처럼 숨을 헐떡였다.
“으으으... 대체 얼마가 나가는 거야!”
소금광산에 늙다리 잭슨 이하 35명을 배치하고, 뉴 로드릭 마을에 과묵한 몬트 이하 15명을 배치하고, 로드릭 성에 새로 뽑은 용병을 포함해 100명을 집결시켰다. 소음과 소화된 음식물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100명의 용병은 로드릭 영지 예산에 막대한 지출을 가져왔다. 로벨이 골치 썩는 어린 집사를 위로했다.
“여차하면 토너먼트라도 다녀올게.”
“시국이 어지러운데 누가 토너먼트를 개최해요?”
울프 용병단뿐만 아니라 푸른 고래 호 선장과 선원임금도 지불해야 했으니 소금광산 수익으로도 감당이 안 되었다. 유일한 희망은 새로 개척하는 양모와 치즈 교역이었다.
이안 선장은 로드릭 마을이 1년 동안 모은 생산품을 가지고 인어의 바다로 나갔다.
“해상무역은 도박이에요. 성공하면 수익이 엄청나지만, 실패하면 1로닝도 못 건져요. 이안 선장만 믿고 있을 수 없어요.”
“그럼?”
“대책을 세워야죠.”
어린 집사는 겨울철 가능한 돈벌이를 고민했다.
로벨은 벽난로 앞에서 손바닥을 굽는 펄프 대장에게 나가자고 눈짓했다. 아야와 이야카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따라왔다.
“신입은 어때?”
“영주님의 말씀대로 활솜씨가 좋은 친구들을 우선 선발했습니다. 크로스보우맨 3개 소대입니다.”
“그럼?”
“3열 사격을 본격적으로 훈련할까 합니다.”
로벨은 입술을 모아 ‘오?’ 소리를 내었다. 전술적인 운영이 가능하니, 이제 제대로 된 ‘군대’라 할 수 있었다. 로벨은 펄프 대장을 격려했다.
“내년 봄이야.”
사전적인 의미도, 문학적인 의미도 아니었다. 내년 봄까지 훈련을 끝내란 뜻이었다. 바꿔 말해 내년 봄에 실전에 투입될 거란 뜻이었다. 펄프 대장은 어깨를 조금 떨구고 말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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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겨울은 유난히 짧았다.
서리가 내리는가 싶더니, 곧장 한파가 밀어닥치고, 보름쯤 지나자 금방 포근해져서 봄맞이 준비가 끝났다.
“세월 참 빠르죠?”
어린 집사가 마구간 처마의 고드름을 떼어내며 중얼거렸다. 진짜 봄이 오려면 달이 한 번 더 차야겠지만, 기분 탓인지 벌써 봄이 시작된 것 같았다. 로벨은 쇠스랑을 세우고 13살 사내아이를 바라보았다. 어린 집사는 고드름을 살짝 깨물고 이가 시린지 퉤퉤 뱉었다.
“왜요?”
로벨은 고개를 가로젓고 다시 쇠스랑을 굴렸다. 로드릭 성에서 가장 몸값이 비싼 전투마가 간밤에 큰 볼일을 보아 묵은 짚과 함께 걷어냈다.
마녀 키르케는 점심식사 준비 중이고, 펄프 대장 일행은 사열준비를 위해 성 아래로 내려갔다. 전투마를 챙길 사람이 로벨 밖에 없었다.
“이런 건 종자가 할 일인데요.”
“어쩔 수 없잖아.”
로벨은 깨끗한 짚을 깔고 기분 좋아진 전투마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시간 다 됐어요.”
“응.”
로벨은 전투마 위에 안장을 올리고 가죽끈을 꼼꼼히 묶었다. 수년간 반복한 일이라 눈감고도 할 수 있었다.
로벨이 전투마를 끌고 마구간을 나오자 어린 집사가 고드름을 던지고 따라왔다.
“이번 일만 잘 풀리면 성이랑 성벽을 보수해요. 전전대 영주님이 못한 석재 성벽을 세워도 좋을 것 같아요.”
“이번 일?”
“이안 선장이 무사히 돌아오면 말이에요.”
로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 선장은 로드릭 영지에 큰 도움이 되었다. 교역 루트를 새로 개척했을 뿐만 아니라, 아만다 마을의 어선을 수리하는데도 도움을 주고, 애물딴지 취급하는 대포의 사용법도 가르쳐 주었다.
펄프 대장은 머리가 좋고 조심성이 많은 용병 여섯 명을 차출해서 포병으로 훈련시켰다. 하지만 화약값이 만만치 않아서 실제 포격훈련은 많이 못했다. 포탄과 화약을 장전하고, 불붙이는 시늉한 후 다시 빼내는 식으로 훈련했다. 불 없는 막대를 가져다 대면서 입으로 ‘펑!’ ‘펑!’ 소리 내는 것이 재미있었다.
그 우스운 대포가 성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겨울 동안 할 일이 없어서 살이 찐 농마들이 대포 실린 수레를 끌며 헐떡거렸다.
“저 농마들은 알뜰살뜰 잘 써먹네요.”
로벨은 피식 웃고 울프 용병단 야영지로 들어갔다. 천막 몇 개 세운 거로 시작한 용병단 야영지가 병력이 늘어나면서 작은 마을 수준으로 커졌다. 오두막도 몇 채 짓고, 우물도 하나 파고, 무기와 갑옷을 손질하는 작은 대장간도 차렸다.
“영주님이 오셨습니다!”
“정렬해라! 정렬해라!”
로벨이 전투마를 타고 등장하자 자유분방하게 흐트러져 있던 용병들이 5열 횡대로 집합했다. 풋맨 1개 소대, 스피어맨 1개 소대, 크로스보우맨 3개 소대로 총 103명이었다. 울프 용병단에서 처음 용병일을 시작한 신출내기도 있고, 여러 전장을 떠돌아다닌 베테랑 용병도 있고, 사트로 후작군 소속이었던 용병도 있고, 헤르만 백작군 소속이었던 용병도 있었다.
“영주님, 어떻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로벨의 울프 용병단이었다.
“아주 좋아.”
로벨은 로드릭 가문을 위해 싸울 100명의 용병을 굽어보았다.
“이 정도면 페르젠 백작에게 지지 않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