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61화 (61/605)

61화. 사절단

61화. 사절단

로벨과 어린 집사는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기사의 자존심과 집사의 허영심이 침착함을 강요했다.

“12만 페닝 갤리선이라니... 너 부자야?”

“어휴! 무슨 말씀을! 전부 투자자 몫이죠. 제 몫은 5분지 1도 안 됩니다.”

그래도 2만 4천 페닝이었다. 로벨은 호주머니에 있는 100페닝 금화 두 닢과 10페닝 금화 다섯 닢을 만지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린 집사가 은은히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왜 파는 거죠?”

“기대 수익이 나지 않아서. 투자자들한테 돈을 돌려줘야 하는데, 그만한 자금을 빼내기가 힘드니까.”

로벨은 어린 집사에게 그만 가자고 눈짓했다. 그러나 어린 집사는 12만 페닝짜리 상품이 궁금해서 발을 떼지 못했다. 마녀 키르케가 대뜸 질문했다.

“구경해도 되요?”

중년 사내는 로벨을 슬쩍 보고 말했다.

“뭐, 구경하는데 돈 드는 것은 아니니까. 갑판장! 손님을 안내해라!”

선상 위에서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가 손을 흔들었다.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는 “이히힛!” 웃으며 판자를 건너갔다.

로벨은 늑대를 태워도 되나 고민했지만, 늑대들은 별 고민 없이 갑판 위로 껑충 올라갔다. 그리고 배 난간에 앞발을 올리고 신나게 짖었다.

“컹! 컹!”

“영주님! 빨리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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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주갑판에 올라 주위를 돌아보았다. 오물과 잡동사니가 가득할 거란 짐작과 달리 무척 깔끔했다. 그런 로벨의 표정을 읽었는지, 아니면 앞서 구경한 손님이 비슷한 말을 했는지 갑판장이 설명했다.

“뱃놈들이 가장 자주하는 것이 청소입니다. 정리정돈이 되지 않으면 큰 사고가 날 수 있기 때문입지요. 나리의 집만큼은 아니어도 구석구석 깨끗할 겁니다.”

로벨은 고개를 끄떡이고 선수에서 선미로 한 바퀴 돌았다. 바닷바람이 시원해서 기분 좋았다.

갑판장은 돛을 조종하는 밧줄과 화물을 옮기는 밧줄을 설명한 후 선미 갑판 해치를 열고 2층으로 안내했다.

지상 건물 기준으로 반 층 정도 내려오자 해먹이 거미줄처럼 층층이 걸린 선실과 텅 빈 창고가 나타났다. 어린 집사는 창고의 크기와 숫자를 재고 감탄했다.

“이 정도 크기면 코끼리도 실어 나를 수 있겠어요!”

갑판장이 껄껄 웃으며 맞장구쳤다.

“통로까지 꽉꽉 채우면 코뿔소도 몇 마리 실을 수 있다오.”

로벨은 코끼리와 코뿔소가 뭔지 몰라 대화에 끼지 못했다.

상부갑판에 비하면 어둡고 갑갑하지만, 그래도 생활하는데 어려움이 없어 보였다. 화물이 오르내리는 메인 해치도 큼직하고, 사람이 지나다니는 통로도 널찍했다.

갑판장은 2층을 충분히 둘러보게 시간을 주고 제일 아래층인 3층으로 안내했다.

“우악! 냄새!”

용감하게 앞장서서 내려간 마녀 키르케가 코를 쥐고 도로 올라왔다.

“하여간 여자들이란...”

어린 집사는 혀를 차고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잠시 뒤 선답자를 흉내 내며 뛰쳐나왔다. 로벨이 어이없어서 물었다.

“왜 그래?”

“여기 노예실이에요!”

“노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노잡이 노예였다.

로벨은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를 2층에 놔두고 갑판장과 함께 3층으로 내려갔다. ‘과연!’ 소리가 나올 만큼 악취가 진동했다.

80명의 노잡이 노예가 쇠사슬에 묶여있었다. 선실 바닥에는 배설물이 굴러다니고, 땀 냄새, 쇠 냄새, 시체 썩은 냄새가 뒤섞여서 역했다. 환기구는 노를 내놓은 작은 구멍이 전부인데, 악취가 빠지지 않아서 눈이 따가울 정도였다.

“자유민을 쓰지 않아?”

“옛날 옛적 옛 신이 옛날이야기 들려주던 시절에 그랬죠. 요즘 누가 노잡이를 합니까? 노예들도 하기 싫어서 탈주하는데요.”

“노예한테 맡기면 불안하잖아?”

바다에서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위기, 즉, 해적이 출몰했을 때 노잡이가 노 젓기를 거부하면 큰 곤욕을 치를 수 있다.

노예 입장에서는 운이 좋으면 자유민-비록 해적이지만-이 될 수 있고, 해적과 한패가 되지 못해도 어차피 노예 생활을 이어갈 뿐이니 손해가 없었다. 선주와 선장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3년을 버티면 해방시켜 주고, 다시 3년을 일하면 고기잡이배 살 돈을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생각이 있으면 해적에게 협력하지 않죠.”

그러나 노잡이 노예 태반이 2년을 못 버틴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병에 걸려 죽거나, 영양실조로 죽거나, 쇳독이 올라 죽었다.

노잡이 노예들은 흐리멍덩한 얼굴로 로벨과 갑판장을 돌아보았다. 쇠사슬 때문에 몸을 돌리지 못해 고개만 겨우 움직였다. 생기 잃은 눈동자와 축 처진 어깨가 죽지 못하는 구울을 연상시켰다. 로벨은 기분이 나빠졌다.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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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 일행이 올라오자 중년 사내가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

“자, 어떻습니까? 12만 페닝이 아깝지 않지요?”

로벨은 구경 잘했지만 돈이 없다고 말하지 않았다. 허영과 허세가 가득한 어린 집사가 헛기침하며 선수 쳤기 때문이다.

“급하게 결정할 일이 아니죠. 성에서 좀 더 생각해보고 연락드릴게요.”

“급매로 나와 금방 나갈 겁니다. 생각이 있으면 빨리 연락 주십시오.”

“...응.”

로벨은 솔직하지 못하게 대꾸했다. 근시일에 연락할 일은 없을 것이다.

로벨 일행은 도망치듯 떠나서 부두주위를 돌아다녔다. 쉴 새 없이 오고 나가는 배들과 그때마다 우르르 몰려다니는 인부들이 퍽 인상 깊었다. 그렇게 바다 냄새와 생선 냄새가 익숙해질 때쯤, 배도 고프고 다리도 아파서 잠깐 쉬기로 했다.

“저기 선술집이 있어요!”

“항구의 선술집! 한 번쯤 보고 싶었어요!”

이럴 때는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가 장단이 잘 맞았다. 로벨이 고개를 끄덕이자 두 사람은 냉큼 선술집으로 뛰어갔다.

선술집 손님은 선원과 인부가 대부분이지만, 시장 상인, 부두 관리인, 떠돌이 용병도 일부 있었다. 출신지가 제각각이라 외모와 복장도 제각각 달랐다. 공통점은 바다를 끼고 살아가는 거친 사내들이란 점뿐이었다.

마녀 키르케가 스윙 도어를 박차고 들어오자 거친 사내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선술집과 소녀는 어울리지 않았다. 이어서 어린 집사가 나타나자 눈살을 찌푸렸다. 어린아이도 어울리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키가 훤칠한 로벨과 송아지만한 늑대 남매가 등장하자 비로소 납득하고 시선을 피했다. 귀족이랑 엮여서 좋을 게 없었다.

로벨은 선술집이 익숙지 않아 조금 헤매다가 카운터 바로 다가갔다. 얼굴과 팔뚝에 흉터가 가득한, 아무래도 전직이 의심스러운 바텐더가 말없이 목례했다. 로벨은 바를 두드리고 말했다.

“맥주 있어?”

바텐더는 군말 없이 맥주를 따라주었다. 찌꺼기를 걸러내지 않아 씹히는 맛이 있는 시골 맥주였다. 술보다 음식에 가까웠다. 그래서 만족스러웠다.

로벨 일행이 즐거워하자 바텐더는 험한 얼굴에 흡족한 미소를 띠웠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로드릭 마을.”

로벨은 반응을 기대하지 않고 말했다. 로드릭 마을은 이름만큼이나 몰개성한 시골 마을이었다. 그런 마을을 알 리 없었다.

“그럼 로벨 로드릭 남작을 모시는 분입니까?

“뭐? 로드릭 가문의 기사 나리라고?”

로벨의 예상과 달리 바텐더와 손님들은 로드릭 마을을 잘 알고 있었다. 로벨은 자신이 로벨 로드릭이라고 밝히기에 앞서 로벨 로드릭을 어찌 아는지 의심했다. 로벨이 칼자루를 쥐자 바텐더가 화급히 해명했다.

“그랜드 챔피언을 모를 리 없지요.”

“아, 그래?”

“더욱이 로벨 로드릭 남작이 에르나 왕국 그랜드 챔피언과 한 판 붙는다는 소문이 자자하니까요. 사실입니까?”

로벨은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사실이야.”

“오호? 누가 이길 것 같습니까?”

로벨은 뒤쪽을 힐끔 보았다. 선술집의 모든 시선이 로벨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기이한 관심이었다.

“그게 중요해?”

“전 아니지만, 저 손님들은 중요할 겁니다.”

“왜?”

“도박꾼이니까요.”

로벨은 어깨를 축 떨구었지만,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는 반대로 활짝 웃었다. 마녀가 자기 머리통만한 맥주잔을 휘두르며 말했다.

“여기 계신 기사님이 바로... 웁! 웁!”

어린 집사가 마녀의 입을 틀어막고 물었다.

“배당률이 얼마나 돼요?”

바텐더는 눈이 초롱초롱 빛나는 어린 집사를 거북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거의 비슷합니다. 포비아 왕국인은 포비아 왕국 챔피언에게, 에르나 왕국인은 에르나 왕국 챔피언에게 돈을 걸고 있지요.”

“우리도 걸어도 되요?”

“뭐, 안 될 것은 없지요.”

어린 집사는 로벨을 돌아보고 씨익- 웃었다.

“영ㅈ... 아니, 기사님! 가진 돈 다 꺼내 봐요.”

“다?”

“어서요! 어서! 우리 로벨 로드릭 남작님에게 걸어요!”

“그러다 지면 어쩌려고...”

“에이! 우리 영주님은 무적이라니까요? 절대 안 져요!”

로벨은 어린 집사의 말대로 250페닝을 꺼내놓았다. 바텐더는 생각보다 많은 금액에 깜짝 놀랐다.

“호오? 어지간히 자신이 있나 봅니다?”

“그럼요!”

바텐더는 장부를 꺼내 어린 집사의 이름과 금액을 기록하고 반으로 잘라 건네주었다.

“승부가 나면 찾아와요. 그쪽 주인 나리가 이기면 두 배를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이히힛!”

어린 집사는 공돈이 생긴 것처럼 좋아했다. 로벨은 자신의 승리를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는 어린 집사가 고맙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해서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잠시 뒤, 마녀 키르케가 꼬뜨 안에서 꾸릿꾸릿한 은화 한 줌을 꺼내 기어이 소리 내어 웃게 했다.

“저도 우리 기사님한테 올인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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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와 바다와 장미를 구경하다보니 이틀이 훌쩍 흘러갔다. 로벨은 하품을 꾹 참고 울프 용병단을 사열시켰다. 애꾸눈 볼포스가 투구를 고쳐 쓰며 물었다.

“오늘이 맞습니까?”

“배로 오니까 조금 늦을 수 있어. 그런데... 괜찮아?”

지난밤에 복귀한 울프 용병단은 어디서 쌈박질을 하다 왔는지 흉악한 인상이 한층 강화되었다. 코가 깨지고, 입술이 터지고, 눈탱이가 밤탱이가 되었다. 어린 집사가 혀를 차고 쏘아붙였다.

“어디 가서 울프 용병단 소속이라 하지 마세요.”

“서운한 말 하지마쇼. 우리 영주님을 모욕한 놈들 손봐준 거니까.”

“누가! 누가 우리 영주님을 모욕해요!”

“그렉인지 우웩인지 하는 에르나 왕국 기사가 이길 거라고 큰소리치는 에르나 왕국 잡놈들이 있었소.”

“지금쯤 입조심이 장수의 비결이란 것을 깨닫고 있을 거요.”

울프 용병단은 서로를 느끼하게 쳐다보며 히죽- 웃었다. 역전의 용사인 울프 용병단이 이 지경이면 상대쪽 몰골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때 눈이 좋은 마녀 키르케가 수평선 저쪽을 가리켰다.

“배가 들어와요!”

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입을 꾹 닫고 수평선을 노려보았다. 수면 아래에서 거대한 돛이 솟아나고, 이어서 기다란 선체와 지네 다리 같은 노들이 조금씩 올라왔다. 이 거리에서 노가 보일 정도니 어마어마하게 큰 갤리선이 분명했다.

“역시 해양강국이야.”

에릭 공작의 명령으로 제1부두를 깨끗이 비워진 상태였다. 멀찍이 떨어진 건물과 돛단배 위에서 구경하는 시민들이 있기는 하지만, 화살이 닿는 거리 안에는 에릭 공작 일행과 로벨 일행뿐이었다.

로벨은 애꾸눈 볼포스에게 울프 용병단 통솔을 맡기고 에릭 공작 곁으로 이동했다. 에릭 공작의 수행기사가 못마땅한 얼굴로 한 걸음 물러났다. 에릭 공작이 팔걸이에 손을 올리고 중얼거렸다.

“깍쟁이 놈들답지 않게 제시간에 오는군.”

“...예.”

로벨은 롱소드와 흐룬팅 손잡이에 손을 올리고 점점 가까워지는 에르나 왕국 사절단을 노려보았다. 70피트 돛대 위로 에르나 왕국 깃발과 하얀 깃발이 나란히 펄럭였다.

5, 600명은 족히 탑승할 거대한 오베리아 갤리선을 필두로 크고 작은 배가 3척이었다. 위용만 보면 전쟁하러 왔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갤리선은 부두가 가까워지자 돛을 접고 노를 움직여서 속도를 조절했다. 노잡이가 주동력이고, 바람은 보조동력인 줄 알았는데, 사실 그 반대였다.

에르나 왕국의 노잡이 노예들은 일사불란하게 노를 저어서 부드럽게 접현했다. 방파제에 닿기 직전, 80개의 노가 바닷물을 촤르륵- 뿌리며 위로 올라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선제공격이군.”

에릭 공작이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로벨은 생각 없이 감탄하다가 공작의 말을 듣고 에르나 왕국 사절단의 퍼포먼스임을 깨달았다. 선박기술, 혹은 항해술을 자랑한 것이다.

선체와 부두 사이에 조교가 놓이고, 에릭 공작의 병사들이 좌우로 시립한 가운데 에르나 왕국의 사절단이 내려왔다.

“오랜만이오, 에릭 프란시스 공작.”

“내 도시에 온 것을 환영하오, 루드 덱 백작.”

에릭 공작과 사절단장이 인사하는 동안, 로벨은 사절단장 뒤편의 젊은 기사와 인사했다. 귀족보다 기사답고, 기사보다 전사다운 인사였다.

‘로벨 로드릭 남작?’

로벨은 롱소드 폼멜을 만지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렉 페럿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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