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60화 (60/605)

60화. 갤리선

60화. 갤리선

프란시스 시티는 높고, 넓고, 많고, 씨끄럽고, 뜨거웠다. 한 단어로 요약하면 번화했다. 유라피아 대륙의 동부와 서부를 연결하는 거점항구다운 번화함이었다.

“와, 덥다.”

“남쪽으로 내려오니까 덥긴 덥네요.”

마녀 키르케가 손부채질하며 말했다. 사실 위도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대가 낮고, 통풍이 안 되고, 사람이 많은 탓도 있었다. 어린 집사가 그 점을 잘 짚었다.

“인구가 1만 명이나 되는 대도시니까요.”

“와아!”

“포클랜드 시티 인구는 4만 명이 넘어요.”

“와아아!”

산골에서 자란 마녀 키르게는 만 단위의 인구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숫자를 모르는 아야와 이야카도 쉴 새 없이 스쳐가는 사람들과 짜고, 비리고, 달고, 구수한 냄새들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로벨은 정신없는 일행을 위해 곧장 장미성으로 향했다. 그리고 혹시 몰라 마녀 키르케에게 경고했다.

“놀라지 마.”

“뭘요?”

로벨의 경고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마녀 키르케는 성문을 통과하자 두 손을 맞잡고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

행복이 가득한 비명이었다. 로벨은 예상이 맞아 떨어지자 흐뭇하게 웃었다.

“역시.”

크고 웅장한 성채 주위로 하얗고 노랗고 새빨간 장미가 만발했다. 정원사의 솜씨가 좋은지 꽃송이가 하나같이 큼직했다. 바닷바람이 꽃잎 위를 스치면 장미향이 사르륵- 퍼져나갔다. 마녀 키르케는 숨이 깊이 들이마신 후 다시 탄성을 질렀다.

“이래서 장미성이군요!”

“아참, 지난번에 늦가을에 와서 보지 못했죠?”

마녀 키르케는 신이 나서 꽃밭을 뛰어다녔다. 유난히 탐스러운 붉은 장미에 코를 박고 냄새 맡고, 경비병 몰래 꺾어서 귀에 꽂았다. 어린 집사는 얼굴을 붉히면서 찌푸리는 신기한 재주를 선보였다.

“여기 있는 꽃들은 에릭 프란시스 공작의 소유물이에요.”

“에이, 한 송이잖아요? 예로부터 책 도둑과 꽃 도둑은 도둑이 아니랬어요.”

“누가 그래요? 책이 얼마나 비싼데... 그리고 꽃은 어디서 나온 말이야?”

“저요.”

“영주님, 영주님, 저 마녀 좀 내다버리면 안 돼요? 이제 도둑질까지 하잖아요?”

로벨은 소년소녀의 싸움에 관심 주지 않았다. 아니, 관심 주지 못했다. 로벨도 장미성의 진정한 모습에 감탄하는 중이었다.

‘예쁘다...’

쇠와 피로 얼룩진 로벨의 삶에도 소녀의 감수성이 남아있는 모양이다. 혹은 장미성이 다 죽은 감수성을 깨울 만큼 아름다운 것일지도 모른다. 허풍쟁이 제이콥이 투덜거렸다.

“먹지도 못하는 거 뭐 이리 많이 심었을까?”

“......”

로벨은 어느 쪽이 맞는지 좀 더 고민해보았다.

정원을 지나서 성채에 이르자 사람이 마중 나왔다. 로벨은 시종이나 종자일 거라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다가가다가 깜짝 놀랐다.

“My Lord?”

“어서 오게, 로벨 로드릭 남작.”

로벨의 젊은 주군 에릭 프란시스 공작이었다.

로벨은 무례를 사과할 겸 무릎 꿇고 손가락에 입을 맞추었다. 에릭 공작은 너그럽게 용서했다.

“갑작스러운 초대에 선뜻 응해주어 고맙네. 경이 오지 않을까 봐 내심 걱정했네.”

물론 거짓말이었다. 에릭 프란시스 공작의 친필 초대장을 무시할 봉신은 없었다. 로벨은 조심스럽게 의중을 떠보았다.

“제가 도울 일이 있습니까?”

에릭 공작은 로벨을 일으키고 로벨의 가신들을 쳐다보았다. 로벨은 어린 집사 등에게 떨어지라 눈짓했다. 어린 집사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정원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늑대와 마녀와 용병들이라. 재미난 부하들을 데리고 다니는군.”

“용감하고 영리한 친구들입니다.”

로벨은 속으로 성호를 두 번 긋고 거짓말을 속죄했다.

에릭 공작은 주위가 조용해지자 말없이 산책로를 걸었다. 로벨은 자연스럽게 수행기사가 되어서 뒤를 따랐다. 얼마쯤 침묵했을까, 로벨이 불안감에 진저리칠 때, 그러니까 정원을 절반쯤 돌았을 때 에릭 공작이 말을 꺼냈다.

“에르나 왕국에서 사절단이 방문하네.”

“에르나 왕국... 입니까?”

로벨은 자신과 무관한 일임을 알고 안도하는 동시에 에르나 왕국이란 단어에 집중했다.

국경이 맞닿은 나라는 가상적국 제1호인 법이다. 천 년 역사의 포비아 왕국과 에르나 왕국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두 나라 역사에서 전쟁사만 추려도 장편 서사시를 2부작으로 쓸 수 있을 것이다.

“사절단이 머무는 동안 내 곁에 있어 주었으면 하네.”

로벨은 의아해서 물었다.

“수행기사가 있지 않습니까?”

“물론 내 기사들은 용맹하고 충성스럽지. 허나 자네만큼은 아니지 않은가?”

“제가 모셔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에릭 공작은 잠깐 뜸을 들인 후 말했다.

“이번 사절단에 그렉 페럿 경이 포함되어있네.”

세상일에 어둡고 대인관계가 몹시 좁은 로벨이지만 그렉 페럿 경의 이름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자는...”

“에르나 왕국의 그랜드 챔피언이지.”

로벨은 자신을 ‘간곡히’ 부른 이유를 알았다. 사절단인 만큼 피를 뿌릴 일은 없겠지만, 친선, 교류, 유흥의 이름으로 검술시합을 치를 수 있었다.

“그렉 페럿 경을 사절단으로 보낸 의도는 명료하네. 나는 프란시스 가문의, 아니, 포비아 왕국의 명예를 걸고 대응할 생각이야.”

그 대응이 로벨이었다. 에르나 왕국의 그랜드 챔피언 그렉 페럿 경과 싸울 기사라면 포비아 왕국의 그랜드 챔피언 로벨 로드릭 남작밖에 없었다.

로벨은 롱소드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가 불경하게 보일 듯해서 화급히 치웠다. 다행히 에릭 공작은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서 보지 못했다.

“자네도 잘 알겠지만-전혀 모른다- 류트 프란시스의 모반 이후 내 정통성은 끝없이 시험대에 오르고 있네.”

로벨은 몹시 침통하다는 표정을 지으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아 포기했다. 우울해 하기에는 장미성의 정원이 너무나 화사했다. 애당초 연극에도 소질이 없었다.

“이런 일이 있을 때는 더욱 그러하지. 내 명예에 작은 흠이 생길 때마다 악귀처럼 물어뜯는 놈들이 있으니.”

로벨이 무표정으로 일괄하자 에릭 공작은 피식- 웃었다.

“그렇다고 너무 긴장할 것 없네. 그렉 경을 무조건 이기라고 하지 않을 테니. 경이라고 항상 이길 수는 없지 않나? 그저 무시 받지 않을 정도만 해주게. 체면치레면 충분하네.”

로벨은 정치 감각이 없어 아부할 줄 몰랐다. 주군의 정통성을 의심하는 자들을 용서하지 않겠다느니, 주군의 명예를 위해 반드시 승리하겠다느니, 말하지 않았다. 조금 멍 때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예.”

에릭 공작은 피식 웃고 따라오지 마라 손짓했다.

“에르나 왕국 사절단의 방문은 이틀 뒤일세. 뱃길로 오니 하루정도 늦을 수 있네. 시종을 붙여줄 테니 그때까지 편히 쉬도록 하게.”

에릭 공작은 정원 저편으로 혼자 걸어갔다. 로벨은 롱소드와 흐룬팅 손잡이에 양손을 올리고, 이 자세가 은근 편하다고 생각했다.

‘그렉 페럿 경이라?’

그리고 왕국의 명예니 주군의 정통성이니 하는 것은 깨끗이 잊어버렸다. 그런 것은 로벨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랜드 챔피언이란 말이지?’

@

외국 사절단의 방문은 문화교류를 가장한 자존심 싸움이었다. 시, 음악, 그림, 수학, 의학, 연금술 등등 모든 분야에서 꿀리지 않게 준비해야 했다. 그 말인 즉, 검술에서 로벨을 초대한 것처럼, 시인, 화가, 수학자, 연금술사 등도 불러야 했다.

“...라는 것은 에릭 공작님 사정이고요! 우리는 이틀 동안 뭐하고 놀지 고민해 봐요!”

로벨 일행은 이틀간 시간이 남게 되었다. 마녀 키르케가 허리까지 자란 머리카락을 두 갈래로 따며 말했다.

“이틀은 좀 애매한 시간이네요.”

“시장에 가요!”

어린 집사가 소리를 질렀다.

“시장?”

“정기시가 열리는 도시잖아요? 볼 것도 많고 놀 것도 많을 거예요.”

“향신료도 많고요?”

“그렇죠!”

프란시스 시티는 볼탄 반도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사트로 시티나 버팅거 시티도 크기는 하지만, 바다를 낀 항구도시의 위용을 따라오지는 못했다.

“아이란드 왕국에서 물 건너 온 향신료가 있을 거예요! 후추! 계피! 생강! 설탕!”

“소금?”

“소금은 향신료가 아니에요.”

“그럼 설탕은 향신료에요?”

“...어?”

어린 집사가 혼란에 빠졌다.

로벨은 고장 난 어린 집사를 내버려두고 애꾸눈 볼포스에게 말했다.

“모처럼 대도시에 왔으니 놀다 와.”

허풍쟁이 이하 울프 용병단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러나 눈이 하나라 눈치가 부족한 애꾸눈이 초를 쳤다.

“영주님을 수행해야 하지 않습니까?”

“아야와 이야카가 동행할 거야.”

애꾸눈은 늘어지라 하품하는 늑대 남매를 보았다. 울프 용병단 사이에서는 귀염둥이라 불리지만, 외부인에게는 결코 귀엽지 않았다. 북부산 회색늑대를 보고 덤빌 간 큰 건달은 없을 것이다.

“그럼 그리하겠습니다.”

“이거 가져가.”

로벨은 금화 2개를 꺼냈다가 어린 집사가 눈을 부라려서 1개만 주었다. 애꾸눈은 주저하다가 금화를 받았다. 용병들이 소리 없이 환호했다.

“내일 저녁 제12시까지 복귀해. 제 시간에 돌아오지 않으면 무단이탈로 간주할 거야.”

@

울프 용병단이 우르르 몰려나가고, 로벨 곁에는 어린 집사, 마녀 키르케, 아야와 이야카만 남았다. 어린 집사가 로벨의 소매를 잡아끌며 말했다.

“우리도 빨리 가요!”

“시장?”

“아뇨. 항구로 가요. 생각해보니까 우린 조합원이 아니라 시장에서 향신료를 사기 힘들 것 같아요. 차라리 선원에게 사는 편이 좋겠어요.”

“선원 급료가 그렇게 좋아?”

“원산지에서는 그리 비싸지 않아요. 선원 중에 사비로 몰래 사서 가져오는 작자들이 있다고 들었어요. 일종의 밀수품이라 잘만하면 시장가보다 싸게 살 수 있을 거예요.”

로벨은 어린 집사의 계획이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현장에서 철저히 무시받기 전까지 말이다.

로벨과 어린 집사는 선원들을 잡고 향신료를 찾는다고 넌지시 운을 띄웠지만, 시장에 가보라는 뻔한 소리만 들었다. 그나마 대꾸해준 선원은 착한 선원이었다. 지능을 의심하는 눈으로 쳐다보거나 아예 무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로벨이 칼을 3자루나 찬 귀족이라 이 정도지, 어린 집사 혼자였으면 오만가지 욕과 조롱을 받았을 것이다.

“으으... 이것이 이론과 실전의 차이인가?”

애당초 외지인이 쉽게 구할 수 있으면 ‘밀수’라 부르지도 않을 것이다.

어린 집사는 향신료에 대한 열망으로 끙끙 앓았다. 반면 로벨은 향신료보다 항구에 관심이 많았다. 고기잡이 나가는 돛단배 사이로 성탑보다 커다란 무역선이 정박해 있었다.

“저것도 갤리선이지?”

어린 집사는 갤리선을 힐끔 보고 끄덕였다.

“인어의 바다를 오가는 배에요.”

로벨 일행은 가까이서 구경이나 할까 하고 외항에 정박 중인 갤리선으로 향했다. 그런데 뜻밖의 환대를 받았다. 선장인지 선주인지 모를 중년 사내가 손바닥을 싹싹하게 비비며 맞아주었다.

“배를 보러 오셨습니까?”

“...파는 거야?”

로벨이 얼빠지게 묻자 중년 사내 얼굴에 실망이 떠올랐다.

“이런! 길드에서 오신 분이 아닙니까?”

“그냥 지나가다 들린 거야.”

중년 사내는 로벨을 위아래로 빠르게 훑어보았다. 고급 옷감, 고급 칼자루, 시동과 시녀, 늑대처럼 생긴 개(?)까지 범상치 않았다.

“헤헤, 귀족 나리, 기왕 오셨으니 한번 둘러보시지요.”

셈이 빠른 것을 보아 선장이 아니라 선주가 분명했다. 로벨은 돈이 없다고 말하려 했지만, 자존심이 강한 어린 집사가 한발 먼저 거들먹거렸다.

“우리 영주님도 갤리선 한 척쯤 장만할까 생각하고 계시죠. 이런 건 얼마나 하죠?”

중년 사내는 ‘영주님’이란 말에 화색이 되었다. 손바닥이 닳도록 비비며 안내했다.

“선박조합에 내놓은 가격은 12만 7천 페닝인데, 급매로 내놓은 만큼 12만 페닝만 받겠습니다.”

“12만!”

로벨과 어린 집사는 입을 딱 벌렸다. 로드릭 성을 팔아야 나올 돈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