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불길
41화. 불길
로벨은 빵과 물을 나눠주고 휴식을 명령했다. 그러나 심장이 강철이 아닌 이상 그런 꼴을 보고 마음 편히 쉬기는 어려웠다.
애꾸눈 볼포스를 포함한 울프 용병단은 모래 씹는 얼굴로 귀리빵을 우물거렸다. 그나마 피와 죽음에 익숙한 용병들이라 끼니를 챙길 수 있었다. 어린 집사의 경우 물도 제대로 삼키지 못했다.
“흠... 흐음... 호오... 이야!”
마녀 키르케만 평소와 다름없었다. 카펫에 엎드려 빵 껍질을 오물거리며 하몬 남작의 일기를 정독했다. 기사도 소설과 달리 현실적인 기사의 고충이 가득해서 흥미로웠다.
“저 마녀 아가씨는 순하게 생겨서 비위가 장난 아니구먼.”
“괜히 마녀가 아니잖아.”
어린 집사는 아야의 허리를 베고 아야카의 머리를 이불 삼아 억지로 잠을 청했다. 하지만 나이트메어에게 시달리기라도 하는지 10분을 못 채우고 자다 깨기를 반복했다. 결국 보다 못한 겁쟁이 데비가 도움이 될 만한 물건을 찾아왔다.
“이것 좀 마시쇼. 잠이 잘 올 거요.”
지하창고에서 숙성 중인 와인통이었다. 하몬 남작이 어쩌다 좋은 날이나 유난히 우울한 날이나 드물게 귀한 손님이 찾아온 날 마시기 위해 준비한 와인이었다.
“이거 보기 힘든 상등품인데? 어디 맛 좀 보자.”
“나도! 나도!”
술 냄새가 퍼지자 용병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어디서 났는지 크고 작은 잔을 꺼내 한 잔씩 마셨다. 술 생각이 없는 어린 집사는 저리 가서 마시라고 소리쳤지만 아무도 듣지 않았다.
“와인?”
로벨도 술 냄새에 반응했다. 술이 고파서가 아니었다. 번뜩이는 생각이 있었다.
“잠깐! 마시지 마!”
로벨은 롱소드로 와인통을 막았다. 용병들은 잠시 반항하는 눈빛을 보였지만, 로벨이 칼자루를 쓰다듬자 건실한 용병이 되어 내일 아침을 걱정하며 잠자리로 흩어졌다.
“겁쟁이 데비.”
로벨은 와인을 가져온 겁쟁이 데비를 부르고 애꾸눈 볼포스에게도 손짓했다. 두 고참 용병은 얌전히 지시에 따랐다.
“와인, 어디서 찾았어?”
“지하창고 첫 번째 방입니다요.”
“더 있어?”
“두 통 정도... 한 통 가져다 드립니까요?”
“아니.”
로벨은 애꾸눈 볼포스를 힐끔 보고 말했다.
“전부 가져와.”
애꾸눈 볼포스는 의아하게 생각하다가 불현듯 깨달았다. 와인은 몸과 마음에 불을 지피는데 주로 쓰지만, 진짜 불을 지필 수도 있었다.
“촉매제입니까?”
로벨은 생각이 통하자 활짝 웃었다.
“응. 준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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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세로로 난 좁은 창문으로 햇살이 스며들어왔다. 봄날의 따스한 햇살은 촛농으로 뒤덮인 촛대를 부드럽게 넘어 늑대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아야의 가늘고 긴 코털이 씰룩거렸다.
로벨은 롱소드와 대거를 확인하고 소드 벨트를 단단히 쪼였다. 애꾸눈 볼포스 이하 울프 용병단도 각자 자리에서 준비를 마치고 대기 중이었다. 로벨은 충직한 부하들을 차례로 둘러보고 속삭이듯 말했다.
“시작해.”
애꾸눈 볼포스가 2층으로 신호를 보냈다. 2층에서 대기 중인 겁쟁이 데비가 ‘장비’를 챙겨서 발코니로 달려나갔다. 잠시 뒤, 성 안팎으로 요란한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오오오오! 여기다! 여기 봐라!”
“냄새나는 괴물들아! 나 잡아봐라!”
성 안쪽으로 돌출된 2층 발코니에서 겁쟁이 데비 이하 용병 2명이 냄비를 두드리며 소리를 질렀다. 성 안마당을 어슬렁거리는 구울들이 하나둘 반응을 보였다. 지능이 심각하게 낮은 구울은 실내외 개념을 알지 못해 발코니 아래에서 손을 휘저었지만, 일반적인 구울들은 성문을 두드리며 성안으로 들여보내 줄 것을 요구했다. 아침부터 시끄럽게 구는 겁쟁이 데비를 가만두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전해졌다.
1층 메인 홀에서 대기하는 용병들은 꼭 동료애가 아니라도 자신이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성문을 막았다.
“내 살다 살다 구울을 상대로 수성할 줄이야!”
“고향 가서 자랑할 일이잖아? 팍팍 밀어!”
구울을 막는 것은 인간을 막는 것보다 쉬웠다. 구울은 망치나 도끼를 사용하지도 않기 때문에 그저 버티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구울의 숫자가 열이 넘고, 스물이 넘고, 쉰이 넘어가자 버티는 것도 힘들어졌다.
용병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로벨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판단을 내리는 것은 로벨이 아니었다. 2층 창가에 걸터앉은 어린 집사였다. 구울이 충분히 모일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젠장! 언제까지 버텨야 합니까!”
“지금이요!”
어린 집사가 계단 난간을 타고 쭈르륵 미끄러지며 소리쳤다. 로벨은 겁쟁이 데비에게 빌린 아바레스트를 겨드랑이에 끼우고 용병들에게 명령했다.
“물러나!”
용병들은 어느 때보다 성실히 명령을 따랐다. 로벨과 애꾸눈 볼포스를 지나쳐 후다닥 2층으로 올라갔다.
쿵!
쿵!
콰직-!
100마리 가까운 구울이 몸무게로 밀어붙이자 빗장이 버티지 못하고 부러졌다. 문 쪽에 바짝 붙은 구울은 압사당해서 쓰러졌다. 그 시체에 걸려 몇 마리가 넘어졌다. 그러나 누구도 개의치 않았다. 구울은 서로의 몸을 타고 넘어 해일처럼 밀어닥쳤다. 로벨과 애꾸눈 볼포스는 가장 먼저 진입한 구울에게 쿼럴을 쏘았다. 제대로 명중했는지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방아쇠를 당기자마자 몸을 돌려 2층으로 올라갔다.
“좋아! 2단계로!”
용병들은 숨 돌릴 틈 없이 서재와 침실에서 끄집어낸 집기들을 계단 아래로 밀었다. 구울의 뻣뻣한 몸으로 안 그래도 오르기 힘든 계단인데, 책장, 책상, 옷장, 의자 등이 쌓이니 성벽이 따로 없었다. 옷장을 넘지 못해 앞으로 쓰러지고, 의자 다리에 다리가 끼어 넘어졌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결국 넘어올 것이다.
로벨은 떡갈나무 지팡이를 꼭 쥐고 주문을 외우는 마녀 키르케를 보았다. 어린 집사가 갑갑한지 발을 동동 굴렀다.
“으이구! 느려 터져가지고! 좀 서두르라고요!”
“태양의 노래! 용암의 춤! 용의 잠꼬대! 살라만다의 한숨!”
마녀 키르케가 조용하라는 듯 마법을 발동했다. 홀 중앙에 산더미처럼 쌓아 둔 책더미에 불이 붙었다. 잘 마른 종이라 한번 불이 붙자 거침없이 번졌다.
“좋아! 던져라!”
“Fire in the hole!”
용병들은 작은 통에 나눠 담은 와인을 거침없이 투척했다. 기화하기 시작한 알코올은 불구덩이 속에서 폭탄이나 진배없었다. 나무통 틈새로 불길이 스며들자 콰과광-! 소리를 내며 폭발했다. 불은 몇 배로 커져서 2층까지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목재성이라 시간이 지나면 불길은 더욱 커질 것이다.
“와우! 생각보다 화끈한데?”
“영주님! 머뭇거리다 저희까지 타겠습니다!”
로벨은 머리 위로 손을 휘저었다. 용병들은 즉시 뒤뜰 발코니로 도망쳤다. 구울 대부분이 성안과 앞마당에 모였으니 불길이 번지기 전에 밧줄로 내려가면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
로벨은 머리에 불이 붙은지도 모르고 “우우... 우어어...” 소리 내며 돌아다니는 구울들을 내려다보았다. 이미 한번 죽은 구울은 고통도 공포도 느끼지 못했다.
‘경이 바란 것이 이런 것이오?’
하몬 남작이 진정 원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성이 불타고 영지민이 괴물이 되는 것은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로벨은 불 속에서 춤을 추는 하몬 남작의 백성들에게 동정을 던지고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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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병들은 무기와 방패를 발코니 아래로 던지고 밧줄에 매달려 쭈르륵 미끄러졌다. 여유 시간이 많고 조심성도 많은 겁쟁이 데비의 경우 갑옷까지 벗어서 아래로 던졌다. 먼저 내려간 용병들이 육두문자를 보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로벨은 거의 마지막 차례였다. 로벨이 내려갈 때가 되자 메인 홀에서 번진 불길이 2층까지 올라와서 발코니 천장을 넘보았다.
“My Lord, 도와드립니까?”
“아니!”
로벨은 소매를 둘둘 말아 장갑 삼고 능숙하게 밧줄을 내려갔다. 기사교육 과정에 밧줄타기가 있다고 해도 믿어줄 정도였다. 마녀 키르케도 어린 시절 나무타기 한 가닥이 있는지 더듬더듬 내려왔다. 가장 큰 문제는 아야와 이야카였다. 겁 많은 늑대 남매는 넘실거리는 불길과 까마득한(?) 발코니 아래를 번갈아 보며 어쩌지 못하고 “컹컹!” 울어 재꼈다. 어린 집사가 아야의 엉덩이를 뻥! 소리 나게 걷어찼다.
“그냥 좀 뛰어!”
아야는 “깨갱!” 소리를 지르며 1층으로 추락했다. 로벨 등은 울프 용병단의 마스코트를 추락사시킬 생각은 없었기에 몸을 던져 받아냈다. 앞발이 입속으로 들어가고 뒷발이 아랫배를 걷어찼지만 아무튼 무사히 받아냈다. 로벨은 침을 퉤! 뱉고 이야카에게 손짓했다. 이야카는 어린 집사를 한번 돌아보고 포기한 듯 자발적으로 뛰어내렸다. 그렇게 인간과 늑대 모두 무사히 하몬 남작의 성을 탈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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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무기와 방패를 주섬주섬 챙겨서 성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사회성이 떨어지는 구울 몇 마리가 주위를 어슬렁거렸지만, 성 하나를 말아먹고 나온 역전의 용사들에게 위협이 되지는 않았다. 가까이 오기도 전에 쿼럴을 박아주었다.
“어라? 눈 온다.”
“겨울 지난지가 언젠데 눈이 와요?”
로벨은 어린 집사 머리 위로 나풀나풀 떨어지는 눈송이를 보았다. 햇살이 따스하니 정말 눈일 리 없었다. 마녀 키르케가 가짜 눈송이의 정체를 밝혔다.
“재에요.”
로벨은 손바닥을 펼쳐 하얀 재를 받았다. 그리고 몸을 돌려 제법 멀어진 하몬 남작의 성을 바라보았다. 아침 해가 다시 떠오르듯 하늘 한 귀퉁이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어린 집사가 고개를 끄덕이고 깨달음을 설파했다.
“정말 불조심해야겠어요. 성으로 돌아가면 물통 꽉꽉 채우고 모래주머니도 쌓아놓아요.”
“...그래.”
어린 집사는 현실적이라 좋았다.
“그나저나 하몬 마을은 어찌 될까요? 영주도 없고, 영지민도 없고, 성까지 홀라당 타버렸으니 그냥 버려지는 걸까요?”
“글쎄. 에릭 공작이 알아서 할 거야.”
로벨은 주인 잃은 땅은 어쩔 수 없지만, 주인 잃은 말은 찾을 수 있었다.
“히이잉! 히잉!”
로벨은 익숙한 울음소리에 활짝 웃었다. 재가 날리는 들판 저 멀리에서 오베리아 산 전투마가 갈기를 날리며 달려왔다. 주인을 되찾아 좋아했다. 로벨도 분신이나 다름없는 말이 돌아와 무척 좋았다. 인간과 말이 얼싸안고 서로의 얼굴을 비볐다. 어린 집사가 코밑을 쓰윽- 닦고 말했다.
“제가 똑똑한 녀석이라고 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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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 일행은 큰일을 치르고 로드릭 영지로 돌아왔다. 오랜 시간을 보낸 것 같은데, 계획한 8일이 다 지나지도 않았다. 영주 대리이자 용병대장 대리인 펄프 대장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어서 오십시오. 수고하셨습니다.”
“응. 정말 수고했지.”
로벨은 전투마를 마구간에 넣고 안장을 손수 벗겼다. 펄프 대장은 어리둥절해서 애꾸눈 볼포스를 보았다. 애꾸눈 볼포스는 어깨를 으쓱이고 말았다. 자세한 이야기를 들으려면 말이 많은 용병을 찾아 족쳐야 할 듯했다. 그건 좀 있다 해도 될 일이고, 우선 보고할 사항이 많았다.
“회색산에서 물건이 도착했습니다. 금화 2,000페닝과 소금 다섯 포대입니다.”
“와우! 제법 소득이 나오네요?”
어린 집사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좋은 소식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어제 점심 노스폴드 시장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노스폴드 시티의 수비 및 치안유지를 위해 울프 용병단을 고용하고 싶다고 합니다.”
“치안유지?”
로벨은 전투마를 브러쉬로 빗질하다가 깜짝 놀랐다.
“자세한 것은 시장과 이야기해봐야겠지만, 고정적인 수익이 생기는 일이니 나쁘지 않습니다.”
로벨은 어린 집사를 돌아보았다.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며 좋아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진중한 얼굴이었다.
“지금까지 경험상 좋은 일이 연거푸 생길 때는 안 좋은 일이 반드시 따라와요.”
펄프 대장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왜 그리 비관적인지 묻고 싶지만, 오늘만큼은 날카롭다고 칭찬하겠소.”
“그럼 역시...!”
펄프 대장은 다시 로벨에게 보고했다.
“볼탄 반도 북쪽에서 몬스터가 대규모로 출몰했습니다. 일부 영지가 벌써 함락된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