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40화 (40/605)

40화. 악마추종자

40화. 악마추종자

어린 집사가 촛대를 찾아왔다. 하지만 불을 붙일 도구가 마땅치 않았다. 부싯돌은 성 밖에 두고 왔고, 외눈 안경 렌즈가 있지만, 해가 저물어 쓸 수 없었다.

“에헴! 마법사 대령이오!”

마녀 키르케가 떡갈나무 지팡이로 심지를 툭! 때렸다. 연기가 한 가닥 오르더니, 갑자기 불꽃이 화르륵- 피어났다. 용병들은 보기 드문 마법쇼에 입을 모아 감탄했다. 어린 집사는 마지못해 칭찬했다.

“가끔 쓸모가 있네요.”

“가끔? 가끔이요?”

어린 집사는 도끼눈을 뜬 마녀 키르케를 피해 로벨 곁으로 도망갔다.

“영주님, 영주님, 무슨 생각하세요?”

“내 전투마...”

로벨은 성 밖에 두고 온 전투마를 걱정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고삐를 묶어두지 않은 것이다. 어린 집사는 전투마의 가격을 생각하며 함께 걱정했다.

“똑똑한 녀석이니까 도망쳤을 거예요. 구울은 느리잖아요? 절대 못 잡아요.”

“그럼 다행이지만...”

“그리고 로드릭 가문의 인장이 찍혀있으니까 찾은 사람이 성으로 가져올 거예요. 기사의 말을 훔쳐 탈 만큼 간댕이 부은 놈은 흔치 않죠.”

“그 말투는... 아니야. 나중에 이야기하자.”

로벨은 전투마의 안전만큼이나 울프 용병단을 닮아가는 어린 집사의 말투가 걱정스러웠다.

체력이 회복되고, 흥분이 가라앉자, 생리적인 욕구가 거세게 몰아쳤다. 먹을 것, 마실 것, 그리고 잠잘 곳이 필요했다. 아야와 이야카도 배가 고픈지 자꾸 칭얼거렸다. “끼잉... 끼이잉...”

“성이니까 찾아보면 뭐가 있지 않을까요?”

“평범한 성이 아니니까 문제잖소.”

로벨은 고민 끝에 3인 1조로 나눠서 2층, 1층, 그리고 지하를 수색하게 했다. 가장 큰 전력인 로벨은 가장 도움이 안 되는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 그리고 아야와 이야카를 이끌고 2층을 담당했다. 어린 집사가 공포심을 털어내기 위해 쫑알거렸다.

“하몬 마을 주민이 450명이라지만, 그 모두가 구울이 된 것은 아닐 거예요. 구울에게 먹혀서 구울이 되지 못한 사람도 있을 테고, 무사히 도망간 사람도 있을 테고, 어린애랑 노인도 있을 테니까...”

로벨은 겁 먹은 어린 집사에게 촛대를 주고 롱소드를 뽑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첫 번째 방을 열었다. 귀족의 집이 대개 그러하듯 첫 번째 방은 서재 겸 응접실이었다.

로벨은 촛불에 의지해 서재를 꼼꼼히 살폈다. 책장 두 개에 옛 신의 경전, 선지자들의 철학서, 영지경영법을 기술한 경영서, 귀족의 품위를 지도하는 교양서 등등이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기사도 소설과 로맨스 소설 몇 권뿐인 로벨의 서재와 달랐다.

“에잉, 볼만한 책이 없네요.”

“응.”

로벨과 마녀 키르케는 실용적이고 교육적인 전문서적을 쌓아두고 말초적인 내용의 소설이 없다고 불평했다. 반면 어린 집사는 돈이 없어 읽지 못한 책들을 탐냈다. 지식도 지식이지만, 되팔면 짭짤한 부수익이 나오는 책들이었다. 가장 두꺼운 책을 골라 튜닉 안쪽에 숨겼다. 로벨이 눈살을 찌푸리자 애써 변명했다.

“갑옷 대신이에요. 갑옷이요. 암.”

로벨 일행은 서재를 나와 메인 홀이 내려다보이는 복도를 조금 지나 두 번째 방을 찾았다. 이번 방은 좀 긴장해야 했다.

“끄어어어어!”

방문을 여는 순간, 피투성이 가운을 걸친 노인이 덮쳐왔다. 검버섯 가득한 얼굴, 몇 가닥 남지 않은 머리카락, 삐쩍 마른 팔다리에 비해 볼록 나온 아랫배, 적나라하게 드러난 남성의 상징물이 여러모로 인상적이었다.

로벨은 노인의 손목을 끌어당기며 롱소드의 폼멜로 안면부를 찍었다. 노인은 허우적거리면서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코뼈가 부러졌는지 검붉은 피가 주르륵- 흘렀다. 어린 집사가 반 박자 늦게 놀라서 소리쳤다.

“뭐야! 구울이잖아?”

로벨은 축 처진 노인의 성기를 보고 얼굴을 붉혔다.

“마크 하몬 남작이야.”

“이 구울이요?”

“기억 안 나? 3년 전에 봤잖아.”

“아... 그러고 보니까... 가만, 그때는 이런 몰골이 아니었는데요. 꽤 품위 있는 노(老)귀족이었는데...”

“옷을 벗기면 품위도 사라지나 보죠.”

마녀 키르케가 로벨 뒤에 바짝 붙어서 혀를 내둘렀다. 하몬 남작은 제대로 일어나지 못해 엉금엉금 기어서 다가왔다. 영주의 철학과 귀족의 품위가 사라지고, 오직 식욕만이 가득한 괴물이 되었다.

로벨은 한 걸음 두 걸음 물러나다가 결심을 굳혔다. 롱소드를 빙그르 돌려서 역수로 쥐었다.

“하몬 남작, 그만 쉬시오.”

그리고 하몬 남작 뒤통수를 찍었다. 칼날이 머리뼈를 부수고 눈썹 사이로 빠져나왔다. 그걸로 하몬 남작은 미뤄진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다.

로벨은 하몬 남작이 절명한 것을 확인한 후 롱소드를 천천히 뽑았다. 구울 특유의 끈적끈적한 피가 묻어났다.

“여긴 침실이군요. 영주님 침실만큼이나 검소한데요?”

로벨은 칼날에 묻은 피를 닦으며 하몬 남작의 침실을 둘러보았다. 전대 영주로 보이는 노인의 큰 초상화와 사별한 아내로 보이는 중년 여성의 작은 초상화가 있었다. 어머니는 어릴 때 여위고, 자식이 딱히 없다고 하니, 가족은 저 두 사람이 전부일 것이다. 달빛이 스며드는 창가에는 기사의 목숨과 같은 풀 플레이트 아머와 롱소드가 거치되어 있었다.

“부디 평안하기를...”

로벨은 두 눈을 감고 하몬 일가의 불운을 위로했다. 한편, 감수성이 메마른 어린 집사와 호기심이 풍부한 마녀 키르케는 서랍과 옷장을 열고 값나가는 물건이 있는지 뒤적였다. 로벨 이외의 귀족 침실을 구경하는 것은 처음이라 여러모로 신기했다.

“그만!”

로벨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집주인, 그것도 귀족의 시체 앞에서 너무 무례했다. 로벨이 화를 내는 일은 거의 없기 때문에 이정도 격앙된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어린 집사는 목을 움츠렸다.

“그냥 궁금해서요...”

“하몬 남작의 재산은 정당한 후계자가 상속받을 거야. 우리가 손댈 수 없어.”

“영주랑 영지민이 다 죽었는데 후계자가 있을까요?”

“그건 모를 일이야. 아무튼 그대로 놔둬.”

로벨이 강경하게 나오자 어린 집사는 입술을 삐죽이고 옷장을 닫았다. 하지만 마녀 키르케는 서랍장을 닫지 않았다.

로벨이 발을 굴려 쿵! 소리를 냈지만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쯤 되자 로벨과 어린 집사의 호기심을 일으켰다.

“대체 뭘 보길래...?”

로벨과 어린 집사는 마녀 키르케 어깨너머로 훔쳐보았다. 어린 집사가 빼돌린 책만큼이나 두꺼운 책이었는데, 글자가 삐뚤고 잉크가 번진 것이 전문 필사자가 만든 책이 아니었다. 로벨은 첫 문장을 읽고 책의 정체를 알았다. 하몬 남작의 일기장이었다.

“기사가 일기를 쓰다니, 신기하네요.”

마녀 키르케는 감수성이 풍부한 시기라 훌쩍이며 말했다.

“이 기사님... 정말 불쌍해요...”

로벨과 어린 집사도 긍정했다. 하몬 남작의 일생은 최고의 추도사로 포장해도 감춰지지 않을 우울한 삶이었다.

세상에 태어나는 날 어머니를 잃었다. 어미를 잡아먹은 괴물, 저주받은 아이란 낙인이 찍혀 쫓겨나듯 시동으로 보내졌다. 가혹한 자작 밑에서 9년간의 시동 생활과 8년간의 종자 생활을 보냈다. 늦은 나이에 간신히 기사 서임을 받지만, 그해 아버지가 사망했다. 아버지의 인정을 받지 못한 슬픔이 무척 컸다.

어느 몰락한 기사의 외동딸과 결혼하나 연이은 유산으로 자식을 갖지 못했다. 셋째 아이를 유산하는 날 아내와 사별했다. 이후 미망인 전쟁에서 무릎을 다쳐 싸우지 못하게 되고, 그 일로 후계자 전쟁과 사트로 후작가 전쟁에 불참하여 불명예를 남겼다.

“그리고 저런 처참한 몰골로 최후를 맞이하다니...”

“끄윽! 불쌍해요!”

로벨은 그 불쌍한 남작의 재산을 털어먹으려고 했느냐 질책하는 대신 가장 최근 기록을 살폈다. 구울이 생겨난 이유가 궁금했다.

“‘나의 불행이 옛 신의 저주라면, 나 또한 옛 신을 저주하겠다.’”

로벨의 평온한 목소리가 섬뜩하게 들렸다. 로벨은 몇 장 앞으로 돌렸다.

“‘진리탐구회라 자칭하는 자들이 방문했다. 그럴듯한 호칭과 달리 실상은 악마추종자였다. 악마가 정말 있는지 의심스러우나 상관없다. 옛 신에게 버림받은 나를 구원해줄 존재라면 악마라 해도...’ 진리탐구회? 악마추종자?”

“히익! 진짜 사악한 마법사잖아요!”

로벨은 일기에서 눈을 떼고 마녀 키르케를 보았다. 마녀답게 악마추종자 집단을 소상히 알고 있었다.

“잉그비아 왕국의 마법사 집단이에요. 그 사람들이 왜 포비아 왕국에 왔을...”

“우와아아아악!”

성 전체를 뒤흔드는 비명이 울려 퍼졌다. 어린 집사가 이어서 소리쳤다.

“지하실에요!”

“가자.”

로벨은 기사의 일기를 팽개치고 침실을 나갔다. 어린 집사와 아야와 이야카가 뒤쫓았다. 마녀 키르케는 땅에 떨어진 일기를 주워서 따라갔다.

“아이참! 중간에 끊으면 더 궁금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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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계단 앞에는 1층을 수색 중이던 애꾸눈 볼포스 일행이 먼저 와있었다. 애꾸눈을 제외한 용병 두 사람은 주방에서 찾아낸 딱딱한 귀리빵을 쩝쩝거리고 있었다. 어린 집사가 눈을 치켜뜨고 따졌다.

“영주님도 쫄쫄 굶고 계신데, 지금 빵이 넘어가요?”

“아니, 이건, 독이 들었나 안 들었나 확인차...”

“독이 왜 들어가요!”

“독이 아니라, 그 뭐냐, 혹시 상했을까봐...”

로벨은 어린 집사와 용병들을 무시하고 지하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애꾸눈 볼포스가 아바레스트를 두 손으로 파지하고 뒤따랐다.

“겁쟁이 데비의 비명입니다.”

“안쪽에?”

“예.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

로벨은 어린 집사에게서 촛대를 받고 롱소드를 뽑았다. 칼날이 반사광을 번쩍일 때마다 어둠이 한 뼘씩 물러났다. 그리고 비명의 진원지를 찾았을 때 용병들은 몰래 귀리빵을 먹은 것을 후회했다.

세 번째 창고에 들어서자 겁쟁이 데비 일행과 함께 몇 명의 사람이 있었다. 정확히 몇 명인지는 알 수 없었다. 팔과 다리가 제멋대로 분리되어서 굴러다니고, 몸통은 칼집 내어 구운 빵처럼 쩍쩍 갈라져 있고, 심장, 간, 창자 등이 못에 박혀 벽을 장식하고 있었다. 시체 썩은 내와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은근히 겁이 많은 아야와 이야카가 크게 짖고 도망쳤다. 용병들은 허리를 숙이고 위장에 넣은 것을 게워냈다. “우웨엑!” 로벨은 욕지기가 나오는 것을 참고 마녀 키르케를 돌아보았다.

“이게 뭐지?”

로벨 일행 중 멀쩡한 것은 마녀 키르케 한 사람뿐이었다. 마녀라서 그런지, 아니면 그냥 비위가 좋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짐작하신 대로에요.”

“마법?”

“저주라고 해야 옳아요. 하몽 남작 기사님이 불쌍하단 것을 취소할게요.”

“...하몬 남작이야.”

마녀 키르케는 겁도 없이 피 칠갑된 방에 들어갔다. 좌우 벽을 살펴보고, 천장과 바닥을 둘러본 후 중얼거렸다.

“마도의 길은 어둡고 위험해서 올바른 인도자가 안내해야 하는데, 이처럼 끔찍한 저주를 겁도 없이 사용했군요.”

로벨은 차마 방에 들어갈 수 없어 밖에서 물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마녀 키르케는 쪼그리고 앉아-겁쟁이 데비가 다시 비명을 질렀다- 처녀의 머리를 바로 하고 눈꺼풀을 감겨주었다. 눈알이 빠져서 잘 감기지 않았다.

“정화의 의식도 어렵겠어요. 불로 태우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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