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36화 (36/605)

36화. 결투

36화. 결투

페르젠 시티 남쪽 초원지대.

페르젠 백작이 주최하는 제1회 로벨 로드릭 배(盃) 토너먼트가 계절을 무색게 하는 뜨거운 열기 속에서 성행 중이었다.

어느덧 세 번째 시합이 끝났다. 패기 넘치는 청년 기사와 노련한 중년 기사의 흥미로운 시합이었다. 마상창과 도보전 모두 열광적인 환호를 받았지만, 로벨은 시합에 집중하지 못했다.

“저기... 으음... 본인은...”

로벨이 기습적인 프러포즈(?)에 횡설수설했다. 결혼, 그것도 가문과 가문의 결혼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가난한 시골 영주였기에 생각할 필요가 없는 문제이기도 했다.

로벨이 허둥거리는 사이 네 번째 시합이 준비되었다. 그리고 작은 돌발행동이 벌어졌다.

사합장 끝에서 마상창을 준비해야 할 기사가 로벨과 페르젠 백작이 있는 VIP 관람석으로 말을 몰아왔다. 로벨이 우승후보 지목한 볼트 경이었다. 볼트 경은 바이저를 올리고 롱소드 손잡이를 가슴에 붙였다.

“레이디 소피아. 승리를 그대에게 바치겠소.”

로벨과 어린 집사는 소피아가 누구인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페르젠 일가는 잘 아는 듯했다. 페르젠 백작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네, 네 이놈이...”

로벨은 페르젠 백작의 퍼스트 네임이 소피아인가 하는 웃기는 생각을 잠깐하다가 왼쪽에 앉은 레이디 페르젠이 몸을 배배 꼬는 것을 보고 깨달았다.

‘이 아가씨가 소피아 페르젠이구나.’

레이디 소피아는 부친과 다른 이유로 얼굴을 붉히고 손가락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아무래도 볼트 경이 싫은 것 같지 않았다. 로벨은 양쪽을 번갈아 보고 소리 없이 아우성쳤다.

‘뭐가 어떻게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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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으르렁거리는 페르젠 백작과 꼬물거리는 레이디 소피아 사이에서 어찌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했다. 아무래도 휘말린 것은 파벌싸움만이 아닌 듯했다. 인연이 없는 치정문제에도 끼어들게 되었다.

‘아, 집에 가고 싶다.’

볼트 경이 우승해서 레이디 소피아에게 청혼하고, 페르젠 백작이 반대하면, 이후 토너먼트가 어찌 될지 알 수 없었다. 로벨은 싸움이 나면 어느 쪽을 뜯어말릴지 고심했다. 그러나 쓸데없는 고민이었다. 볼트 경은 첫 번째 격돌에서 요란하게 낙마해 들것에 실려 나갔다.

“...사랑의 힘으로 우승해야 하는 거 아니야?”

“현실은 기사도 소설 따위가 아니잖아요.”

레이디 소피아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비명을 질렀다. 반면, 페르젠 백작은 자신의 기사가 낙마한 것치고 매우 흡족해했다.

“이거 원. 남작에게 보이기가 참 부끄럽소이다. 저 친구 일은 잠시 치워두고, 조금 전 이야기를 어찌 생각하시오? 그리 나쁜 제안이 아닌 듯 싶소만.”

로벨은 신음을 흘리고 말했다.

“...미안하오. 생각할 시간을 주시오.”

페르젠 백작은 혀를 한 번 차고 자세를 바로 했다. 그 소동이 있었으니 즉답을 요구하기가 어려웠다. 속으로 볼트 경을 욕하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럼 천천히 생각해보시오. 우리 사이에 시간은 많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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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로벨 로드릭 배-제2회가 나올지 알 수 없는- 토너먼트는 아침 해가 뜰 때 시작해서 저녁 해가 질 때 마무리되었다.

로벨이 손꼽은 네일 공국 출신 코인 경이 우승을 차지하고, 몰락한 떠돌이 기사가 준우승을 차지했다. 페르젠 백작의 기수들은 기가 죽었다.

우승자가 외부인이라도 축하를 안 할 수는 없다. 그날 밤 파도성 메인 홀에서 우승축하 연회가 열렸다. 고기와 와인이 무한대로 나오고, 항구도시답게 커다란 물고기, 새우, 조개 등도 올라왔다.

로벨은 주빈으로 페르젠 백작 옆자리에 앉아 챔피언 코인 경을 축하하고 술을 함께 마셨다. 페르젠 백작 파벌과 반 페르젠 백작 파벌의 기 싸움이 피부로 느껴졌지만, 알코올을 투입되자 그까짓 거 아무러면 어떠냐는 분위기가 만연해졌다. 역시 와인은 평화에 공헌한다.

배가 차고 술기운이 돌자 예체능 종사자답게 힘을 자랑하기도 하고, 시를 읊기도 하고, 술잔을 두드리며 막돼먹은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술 취하면 흥을 주체하지 못하는 어느 기사가 노래하라고 소리를 질러 대었고, 페르젠 백작은 껄껄 웃으며 페르젠 시티에서 제일 잘나가는 악사들을 불러와 연주를 시켰다.

첫 곡은 항상 그랬듯 위대한 왕 샘 포클을 기리는 서사곡이었다. 포비아 왕국의 기사라면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다.

두 번째 곡은 연회 분위기를 띄우는 신나는 무곡이었다. 볼탄 반도를 주름잡는 기사들이 악동처럼 술을 뿌리고 뼈다귀를 던지며 즐거워했다.

그리고 세 번째 곡은 귀부인을 위한 서정곡이었다.

잔잔한 미뉴에트가 울려 퍼지자 흥이 가라앉지 않은 일부 기사가 투덜거렸지만, 젊은 기사와 젊은 레이디들은 뜨거운 눈길을 주고받으며 홀 중앙으로 나왔다.

여기서 잠깐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나타났는데, 키 크고 잘생기고 집안 좋은 기사 곁에는 젊은 레이디가 모이고, 그렇지 못한 기사 주위에는 비슷한 처지의 기사들만 남았다. 여자 쪽도 마찬가지라, 인기가 없는 레이디는 애써 낸 용기에 도리어 고통 받았다. 그래도 한 사람이 둘, 셋의 파트너와 춤을 출 수는 없는 일이라 시간이 지나자 자연히 짝이 정해졌다. 물론, 끝내 짝이 없는 레이디도 있었다. 추하거나 비루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오늘 연회에서 가장 화려하고, 가장 주목받는 레이디였는데, 이상하게 아무도 춤을 신청하지 않았다.

페르젠 백작은 자신이 먹은 닭다리 숫자를 세는데 열중하는 로벨에게 속삭였다.

“로벨 남작, 저기 남작의 파트너가 기다리고 있소.”

로벨은 열네 개까지 세다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본인은 그런 거...”

“기사란 자가 숙녀를 기다리게 할 셈이오? 어서 나가보시오.”

로벨은 어린 집사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어린 집사는 연회장 구석진 곳에서 시녀들과 노닥거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술을 몇 잔 걸쳤는지 헤벌쭉해서 치마폭에 쌓여 있었다.

‘저 녀석이...’

로벨은 어린 집사의 도움을 포기하고 옷매를 가다듬었다. 한 시대를 주름잡는 기사답게 춤 정도야 출 수 있었다. 속아 넘어가는 분위기지만, 집 주인을 위해 이 정도는 해야 맞다.

로벨은 파트너가 없어 오들오들 떠는 레이디 소피아에게 다가가 오른발을 뒤로 빼고 허리를 살짝 굽혔다.

“레이디, 한 곡 추실까요?”

레이디 소피아는 마침내 나타난, 그것도 훤칠한 기사의 춤 신청에 화색이 되었다. 치마자락을 살짝 올리며 무릎을 굽혔다.

“기꺼이.”

눈치 빠른 페르젠 백작의 기사들은 자리를 옮겨 홀 중앙을 로벨과 소피아에게 내주었다. 챔피언 코인 경을 위한 축하연회지만, 지금만큼은 로벨과 레이디 소피아가 주인공이었다.

‘밟고, 밟고, 돌리고, 밟고...’

로벨은 비질 땀을 흘리며 스탭에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오랜만에 추는 춤이라 쉽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히 이상할 정도는 아니었다.

커다란 창문 너머로 반짝반짝 빛나는 별무리, 서로가 서로를 비추는 아름다운 유리 조명, 끊길 듯 끊기지 않고 이어지는 서정적인 음악, 그리고 잘생기고 아름다운 한 쌍의 커플이 완벽했다. 아니, 완벽했어야 했다.

쾅!

테이블이 뒤집히면서 악사들의 연주가 끊겼다.

로벨과 레이디 소피아도 손을 맞잡은 채 굳었다. 연회장의 세 자릿수 눈들이 소란의 원흉을 찾아 움직였다.

“그 손... 그 손 당장 놓으시오!”

테이블을 뒤집어엎은 것은 전도유망한 청년 기사였다. 로벨이 이름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기사 중 한 명이기도 했다.

“볼트 경!”

레이디 소피아가 하얗게 질려서 소리쳤다. 꼭 바람 피우다 걸린 철부지 아내 같았다. 그리고 볼트 경의 반응도 바람 피우는 현장을 잡은 순박한 남편의 그것 같았다. 자고로 순박한 사람이 화를 내면 무서운 법이다. 앞뒤를 재지 않으니까.

“로벨 로드릭 남작!”

볼트 경이 장갑을 꺼내 로벨에게 집어 던졌다. 쇠장식이 달린 장갑이라 맞으면 기분 나쁜 정도로 끝나지 않을 듯했다. 로벨은 반사적으로 장갑을 낚아챘다.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는 일부 기사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래서 볼트 경의 얼굴이 더욱 달아올랐다. 바늘로 찌르면 터질 것 같았다.

“결투요! 결투를 신청하오! 기사라면 정정당당히 받으시오!”

예상한, 혹은 우려한 사태였다. 볼트 경의 지인들이 일제히 나와 뜯어말렸다.

“이 친구 취했구먼. 정신 차리시게. 그랜드 챔피언하고 결투라니?”

“상대는 로드릭 가문의 유일한 사내요. 후계가 없는 기사에게 결투를 신청하는 것은 명예롭지 못한 일이오.”

순박한 사람이 무서운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말리면 말릴수록 정신줄을 놓는다는 것이다.

“시끄럽소! 저런 촌뜨기 기사한테 나의 소피아를 줄 수 없소! 경들도 본인과 소피아의 관계를 잘 알지 않소!”

“이, 이보시오. 지금 흥분해서...”

“이노오옴!”

기어이 사단이 일어났다. 페르젠 백작이 테이블을 후려치고 벌떡 일어났다.

“일개 기수 주제에 감히 내 딸을 어쩌고 어째? 내 앞에서 할 말이더냐! 내 네놈의 기사 작위를 박탈하고 영구히...”

“결투를 받아들이오.”

로벨의 목소리에는 묘한 울림이 있어 시끄러운 장소에서도 잘 들렸다. 페르젠 백작의 역성이 가라앉았다.

“레이디의 명예와 별개로, 나와 내 가문을 모욕한 대가를 받아야겠소.”

이제 로벨을 뜯어말릴 차례였다. 현명하진 않지만, 인망이 좋은 볼트 경의 지인들이 일제히 로벨에게 달라붙었다.

“잠깐 기다리시오! 그랜드 챔피언이 이만한 일로 결투라니? 우스운 일이오!”

“볼트 경이 취해서 한 말이니 부디 마음에 담아두지 마시오.”

로벨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돌연 롱소드를 뽑았다. 스르릉-! 수년 동안, 어쩌면 수십 년 동안 피를 불러온 쇠붙이가 모습을 드러내자 거친 행동을 매력으로 삼는 기사들도 한 걸음 물러났다. 귀부인 사이에서 짧은 비명이 흘러나왔다. 로벨은 롱소드를 양손으로 잡아 가슴 앞에 수직으로 세웠다.

“오래 끌 생각 없소. 덤비시오.”

“지, 지금 바로 말이오?”

아무리 성질 급한 기사라도 2, 3일 정도 여유를 가지는 법인데, 로벨은 거침이 없었다. 로벨의 생각은 단순했다.

‘이 동네에 오래있고 싶지 않아. 잘 하면 당장 떠날 수 있겠다.’

하지만 결투는 매끄럽게 진행되지 않았다. 볼트 경은 현역 그랜드 챔피언이자 포클랜드에서 공인받은 롱소드 마스터가 진지하게 나오자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나, 나는, 아니, 본인은 무기를 놓고 와서...”

“내걸 쓰시오.”

눈치라곤 약에 쓸려 해도 없는 기사가 자신의 롱소드를 풀어 던졌다. 따가운 시선들이 쏟아졌지만, 정말 눈치가 없는 탓에 알아채지 못했다.

“포클랜드 시티의 대장장이가 특별히 제작한 명검이오. 그랜드 챔피언과 겨루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오.”

두 사람 모두 갑옷을 안 입었으니 승부는 3합 이내로 끝날 것이다. 그리고 십중팔구 볼트 경의 몸뚱이가 찢어지거나 구멍 날 것이다. 볼트 경의 지인들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볼트 경을 돌아보고 자리를 피했다. 이제 빼도 박도 못하게 되었다. 볼트 경의 목젖이 위아래로 크게 움직였다. 꿀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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