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35화 (35/605)

35화. 사위

35화. 사위

페르젠 시티는 볼탄 반도 동부 해안에 위치한 작은 항구도시였다. 여기서 ‘작다’는 뜻은 비슷한 항구도시인 프란시스 시티와 비교할 때 작다는 의미였다. 로드릭 마을이나 노스폴드 시티에 비하면 궁전과 마구간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에르나 왕국과 교역이 많아 이국적인 분위기가 조금 있지만, 우람한 말을 탄 중장기사가 거들먹거리고, 글레이브와 하프 아머로 무장한 용병들이 줄지어 이동하는 광경은 볼탄 반도다웠다.

어린 집사는 항구 저 멀리 줄지어 정박해 있는 갤리선을 보고 입술을 모아 “오오-” 소리를 내었다. 성탑보다 높은 돛대와 지네의 다리 같은 수백 개의 노가 인상적이었다. 작은 배는 물레방앗간만하지만, 큰 배는 로드릭 성만한 것도 있었다. 그리고 큰 배에는 어김없이 에르나 왕국 깃발이 달려 있었다. 어린 집사가 깃발을 보고 입맛을 다졌다.

“에르나 왕국은 해운업이 발달했죠?”

“응. 해군이 강해.”

“우리나라도 바다 쪽에 관심을 가지면 좋을 텐데...”

“왜? 물뿐이잖아?”

“짐승이 옮기는 화물과 바람이 옮기는 화물은 비교할 수 없으니까요. 저 큰 갤리선으로 북부의 직물을 내다 팔고, 남부의 곡물을 가져온다고 생각해보세요. 엄청나지 않겠어요?”

어린 집사는 해상무역의 가치를 열정적으로 설명했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다. 상상력이 빈곤하고 숫자에 약한 구닥다리 기사와 용병들은 호응하지 않았다.

로벨 일행은 시끌시끌한 시장과 짠내 나는 항구를 둘러본 후 페르젠 시티의 심장이자 페르젠 백작의 집인 파도의 성으로 향했다.

마녀 키르케는 파도 모양으로 지어진 성을 기대하다가, 평범한(?) 원형 석재성인 것을 보고 실망했다.

“왜 파도성이죠? 그냥 벽돌성이잖아요!”

로벨은 2년 전 토너먼트 우승연회를 떠올리며 설명했다.

“성 뒤쪽이 바다랑 연결되었어. 후문이 선착장이지.”

“...아하?”

바다를 뒷뜰 삼고, 파도를 관상화로 심은 아름다운 성이지만, 파도가 심하게 치면 성안까지 바닷물이 올라와서 일하는 하인, 하녀들은 썩 좋아하지 않았다.

성문 앞에서 신원을 밝히자 미리 이야기가 된 듯 시종이 나와 로벨과 어린 집사를 안내하고, 애꾸눈 볼포스와 울프 용병단을 쉴 곳으로 데려갔다. 마녀 키르케가 몹시 따라오고 싶어 했지만 아야와 이야카를 돌볼 사람이 없어서 포기했다. 더불어 귀한 분들 모임에 마녀가 끼기도 조금 힘들었다.

로벨은 현관 앞에서 복장을 가다듬고 메인 홀로 들어갔다. 그리고 본의 아니게 비교하게 되었다.

로드릭 성은 수비를 위해 벽을 두껍게 하고 창문을 좁게 만들었다. 그 때문에 한낮에도 어둡고 음침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러나 파도성은 그렇지 않았다. 벽은 화사한 베이지색으로 꾸며졌고, 창문은 크고 높아서 홀 중앙까지 햇살이 비추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창문과 창문 사이에 그림과 조각상이 절묘한 구도로 배치되어 있고, 출입구마다 장식용 갑옷이 버티고 있고, 테이블마다 은촛대가 놓여있었다. 횃불걸이가 최고의 장식품인 로드릭 성과 참으로 비교되는 인테리어였다.

“와아... 엄청 화려하네요. 에르나 왕국풍인가봐요.”

“응.”

“저 촛대들만 팔아도 소 10마리는 사겠는데. 하아. 슬프다.”

로벨이 주빈(主賓)이긴 하지만 로벨만 초대받은 것은 아니라 몇몇 귀족들이 먼저 와 있었다. 에릭 공작의 봉신들과 페르젠 백작의 기사들이었다.

젊은 귀족들이 로벨을 찾아와 인사했다. 지난 전쟁의 무용담, 겨울 사냥 이야기, 토너먼트 이야기, 소금과 향신료 시세 등등 잡담이 오갔다. 그러나 대화 중간에 복잡하고 날카로운 시선들이 오갔다. 영리한 어린 집사가 분위기를 잡아냈다.

“이제 알겠어요. 파벌싸움이에요.”

“파벌싸움? 끝났잖아?”

로벨은 후계자 전쟁을 떠올리며 되물었다. 어린 집사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건 에릭 공작과 류트 공자의 파벌이었고, 이제는 에릭 공작 봉신 사이에서 파벌이 생긴 거예요. 외부의 적이 사라지면 내부에서 다툼이 생기기 마련이죠. 권력과 재물 앞에서 이해타산을 따지지 않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죠.”

“...그런 말은 어디서 배우는 거야?”

“저쪽은 페르젠 백작 사람들이고, 저쪽은 반(反) 페르젠 백작 사람들이에요. 페르젠 백작을 견제할 귀족이라면, 아마도 호수성의 헤르만 백작을 따르는 기사들이겠네요.”

“그, 그래?”

어린 집사의 분석은 정확했다.

“영주님을 왜 초대했는지 알겠어요. 페르젠 백작은 뼛속까지 무골이라고 들었는데, 은근히 영악하네요. 이런 식으로 영주님을 자기 사람이라 공표하는군요.”

로벨은 어린 집사가 분류한 파벌을 눈여겨보았다. 낯익은 얼굴들이 많아 금방 알 수 있었다.

“난 어디로 가지?”

“아무데도 가지 마세요.”

“왜?”

“페르젠 백작이 음흉한 헤르만 백작보단 낫지만, 그렇다고 호인은 아니죠. 이용당할 필요는 없어요.”

로벨도 파벌 싸움에 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파벌 싸움 중인 귀족들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랜드 챔피언이면서 100명이 넘는 정예 용병단을 가진 로벨을 그냥 두지 않았다.

“로벨 로드릭 남작, 참으로 행복하지 않소? 남작의 이름으로 토너먼트가 열리니 얼마나 영광이오?”

“그랜드 챔피언에게 보탤 영광이나 되겠소? 오히려 로벨 로드릭의 이름을 빌리니 페르젠 백작의 영광 아니오?”

‘으으윽...’

로벨은 자꾸 친한 척하는 귀족들 탓에 진저리치고 도망쳤다. 하지만 성의 주인 앞에서는 도망칠 수 없었다. 페르젠 백작은 주빈이 도착했다는 소식에 서둘러 메인 홀로 나왔다.

“오! 로벨 로드릭 남작! 어서 오시오! 혹여나 안 올까 봐 노심초사하던 차였소.”

“그간 격조했소, 페르젠 백작.”

“으하핫! 주인공이 이런 구석진 곳에 있어서 되겠소? 자자, 저쪽으로 갑시다.”

페르젠 백작은 여러 귀족들이 보는 앞에서 로벨과 친분을 과시했다. 어린 집사가 말했듯 로벨을 자기 사람으로 알리는 행동이었다.

‘이게 정치인가?’

로벨은 속보이는 친절이 불쾌했지만, 나이로 보나 작위로 보나 장소로 보나 차마 뿌리칠 수 없어 묵묵히 참았다. 동시에 괜히 초대에 응했다는 생각을 거듭했다.

@

빠암-! 빰빰-! 빰-!

나팔 소리에 맞춰서 페르젠 백작가문 깃발과 로드릭 남작가문 깃발이 동시에 펼쳐졌다. 볼탄 반도 전역을 돌며 수십 차례 토너먼트에 참가한 로벨이지만, 주최측에서 관전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로벨은 시민들 관중석보다 두 단 정도 더 높은 VIP 관람석에 올랐다. 토너먼트 주최자인 페르젠 백작 내외가 오른쪽에 앉고, 주빈으로 초대받은 로벨이 왼쪽에 앉았다. 로벨의 옆자리에는 페르젠 백작의 차녀가 앉았다. 의미심장한 자리배치였다.

로벨의 수행원으로 로벨 뒤에 시립한 어린 집사는 불안한 눈으로 레이디 페르젠을 훔쳐보았다.

“어머나! 기사님이 참 많아요!”

“그렇군요.”

“저 많은 기사님이 모두 싸우나요?”

“아마도.”

로벨은 페르젠 백작이 혼기 꽉 찬 둘째 딸을 옆자리에 앉힌 의미를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다. ‘이 여자가 왜 자꾸 귀찮게 굴지?’ 생각하며 퍼레이드에 집중했다.

페르젠 백작의 젊은 기수들이 대부분이지만, 타지에서 온 기사와 가진 것이 갑옷뿐인 떠돌이 기사도 여럿 있었다.

로벨은 혹시 아는 기사가 있나 유심히 살폈다. 스치듯이 지나친-은유가 아니다. 마상창으로 승부를 내서 도보전까지 간 적이 없는, 말 그대로 ‘스치듯이 지나친’- 기사들이 몇 명 있었다. 그 기사들도 로벨을 알아보고 주먹을 가슴에 붙이며 경의를 표했다. 로벨도 가슴을 두 번 두드려서 응원을 보냈다. 기사들의 멋진 우정이지만, 작은 옥의 티가 있었다.

“어머, 저 기사님은 모자가 오리 같네요. 호호홋! 저쪽 기사님은 말이 너무 작아요. 저런 말을 타고 싸울 수 있을까요?”

로벨을 한숨을 푹 쉬었다. 쉬지 않고 쫑알거리는 레이디 페르젠이 거슬렸다. 백작의 귀한 여식은 평소 눈치를 볼 일이 없었던 탓인지, 아니면 잘생긴 챔피언과 연애하게 되어 흥분한 탓인지 로벨의 심경을 읽지 못했다. 레이디보다 페르젠 백작이 먼저 언짢은 분위기를 깨달았다.

“이 나라에서 로벨 남작만한 토너먼트 전문가도 없지. 남작, 저들 중에 누가 우승할 것 같소?”

드디어 대화할 만한 주제가 나왔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운이 크게 작용해서 딱 잘라 말할 수 없소. 그래도 우승후보를 꼽으라면, 백작의 봉신인 볼트 경과 네일 공국 출신의 코인 경이 아닐까 생각하오.”

“볼트 경 말이오? 허허, 솜씨가 좋은 친구요. 물론, 남작만큼은 아니지만 말이오.”

화려한 퍼레이드가 끝나고, 옛 신의 기도가 이어졌다. 옛 신의 사제가 기도문을 읊는 동안 귀족과 시민들은 구름을 구경하거나 개미를 괴롭히면서 시간을 보냈다. 지루한 예식절차가 끝나고, 황동 나팔의 울음과 함께 첫 번째 시합이 시작되었다.

로벨은 시합장이 아니라 관람석에서 구경하는 것이 처음이라 흥미로웠다.

두 명의 기사가 점차 속도를 높여 상대방 몸뚱이에 버드나세를 찔러 넣었다. 창이 폭발하듯 터져나가고, 육중한 갑옷이 떨어질 듯 말듯 휘청거렸다. 거칠고, 아슬아슬하고, 생동감이 넘쳤다. 유라피아 대륙의 남녀노소가 모두 열광하는 이유가 있었다.

세 차례 격돌 후 3대 2로 승자가 정해졌다. 승리한 기사는 페르젠 백작 앞을 지나며 눈도장을 찍었다. 꼭 우승하지 못하더라도, 대영주 눈에 띄면 훗날 봉신이 될 수 있었다. 땅이 없는 기사들은 그런 목적도 있었다.

두 번째 시합은 좀 지저분했다. 마상창으로 3대 3 무승부, 도보전으로 싸우는데, 두 기사 모두 소드 앤 버클러 타입이라 체력이 떨어질 때까지 결정타를 먹이지 못했다. 시민들이 야유를 퍼붓자 페르젠 백작이 나서서 승자를 정해주었다. 패배한 기사가 항의했으나 기운이 없어 목소리가 작았다. 승리한 기사도 창을 올리지 못해 다음 시합에서 기권했다.

세 번째 시합이 시작될 때, 페르젠 백작이 로벨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넌지시 말했다.

“그러고 보니 남작의 나이가 올해 23살 아니오?”

로벨은 ‘진짜 로벨’의 나이를 계산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자식이 셋 쯤 있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나이인데, 독신을 고집하는 이유가 있소?”

로벨은 별 생각 없이 어린 집사가 가르쳐준 변명을 내놨다.

“수도원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탓에 혼인이 늦었소.”

‘진짜 로벨’이라면 그럴듯한 핑계였다. 수도원에서 성인식을 치렀으니 정상적인 결혼생활을 못 할 법도 했다. 보통은 이 정도로 납득하는데, 페르젠 백작은 집요했다.

“그렇다면 더욱 서둘러야지 않겠소? 가문의 대를 이어야하지 않소.”

“그건...”

로벨은 이미 대가 끊겼다고 말할 수 없어 우물쭈물했다. 페르젠 백작은 그런 로벨의 태도를 쑥스러움으로 해석하고 푸짐하게 웃었다.

“우리 가문이나 남작의 가문이나 뼛속까지 기사의 가문이오. 그래서인지 남작을 볼 때면 남 같지가 않소. 흠흠! 말이 나와서 말이지만, 내게 과년한 딸이 둘이나 있소이다. 남작만 괜찮으면 연을 맺어주고 싶은데... 어떻소?”

로벨은 시합에 집중하느라고 페르젠 백작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어린 집사가 두 뺨을 누르고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는데도 로벨은 멍청하게 반문했다.

“에... 방금 뭐라 했소?”

페르젠 백작은 간결하게 요약했다.

“내 사위가 되시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