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17화 (17/605)

17화. 대장간

17화. 대장간

‘후우... 후우...’

로벨은 숨을 몰아쉬다가 신경질적으로 바이저를 올렸다. 숨결로 얼룩진 철판이 사라지자 차디찬 공기가 얼굴에 닿았다. 피 냄새와 쇠 냄새가 담긴 아침 공기였다.

“이야아압!”

“흠!”

로벨은 롱소드를 끌어올려 우악스러운 포차드(Fauchard:글레이브의 일종. 칼등에 돌출된 갈고리가 있다)를 쳐내고 한 발 내디디며 다시 아래로 내려쳤다. 핏물 위에 핏물이 아로새겨졌다.

로벨은 이름 모를 병사의 두개골에서 롱소드를 회수했다. 칼날이 상해서 베기보다 뭉개고 있었다. 공인된 소드 마스터로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성문 열어! 빨리!”

펄프 대장은 허리에 차고 온 숏소드를 어디다 흘렸는지 큼직한 배틀 액스를 휘둘렀다. 무기를 잃은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피터와 존은 머리통을 잃고 땅바닥에 누워있었다.

로벨은 롱소드를 세워 허드슨 자작군을 겨냥했다. 조금 전 정수리가 깨진 병사까지 도합 아홉이 당했다. 그 광경을 지켜본 병사들은 섣불리 다가가지 못했다.

로벨과 펄프 대장이 적을 막자 애꾸눈 볼포스와 허풍쟁이 제이콥은 무기를 집어 던지고 성문에 매달렸다. 빗장을 올리고, 받침대를 치우고, 문짝을 어깨와 두 팔로 밀었다. 억센 용병들이지만 힘이 부쳐서 쉽지 않았다.

“아, 안 돼! 저놈들을 막아!”

허드슨 자작군은 한 걸음 나섰지만, 로벨이 피 묻은 롱소드를 휘젓자 두 걸음은 떼지 못했다.

“뭣들 하는 거야! 성문이 열리면 우리 다 죽어! 한꺼번에 덤벼!”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다. 하지만 현실을 지배하는 것은 감정이었다.

간신히 사람 하나 들어올 만큼 성문이 열렸다. 그 틈새로 처음 들어온 것은 사람이 아니었다.

“컹! 컹컹!”

회색 늑대 두 마리가 뛰어들어와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허드슨 자작군을 덮쳤다. 얼굴과 목을 물고 체중으로 쓰러뜨렸다.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로벨은 늑대 남매의 이름을 반갑게 외쳤다.

“아야! 이야카!”

아야와 이야카는 병사의 목을 분지르고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다. “아우우우우-!” 늑대가 늑대를 부를 때 하는 하울링이었다.

성문이 절반정도 열렸다. 아야와 이야카의 부름에 응해 ‘늑대’들이 밀어닥쳤다. 한쪽팔이 없는 거구의 늑대가 펄프 대장의 등을 툭! 치고 지나갔다.

“대장, 고생했수다! 이제 물러나쇼!”

“하악... 하악... 진짜 은퇴해야지. 못 해먹겠다. 이 자식들아! 그만 쳐!”

울프 용병단은 비실거리는 펄프 대장을 한 대씩 툭툭 치고 허드슨 자작군에게 달려들었다. 정예병, 특히 훈련된 궁수들을 서쪽에 집중 배치한 허드슨 자작군은 동쪽에서 밀고 들어오는 울프 용병단을 제지할 방법이 없었다.

울프 용병단은 그 이름처럼 상대를 물어뜯었다. 칼과 칼이 불꽃을 빚어내고, 피와 피가 서로를 물들였다. 로벨은 난전에서 벗어나 소리쳤다.

“펄프 대장! 다섯 명 데리고 따라와!”

“왜 또 접니까!”

“네 급료가 가장 많아!”

“그놈의 급료...”

펄프 대장은 끙! 소리를 내며 배틀 액스를 어깨에 올렸다. 그리고 얄밉게 생긴 놈들 위주로 다섯을 골라 두드렸다.

“이놈들아! 영주님을 따라가자!”

로벨은 난장판이 된 요새 안마당을 가로질렀다. 간혹 용감한 병사가 앞을 막았지만 3초 이상 버틴 자가 드물었다. 펄프 대장이 힘겹게 따라붙으며 물었다.

“어디 가십니까?”

“남쪽 탑!”

“이야핫! 죽어랏!”

펄프 대장은 배틀 액스 손잡이를 길게 잡고 눈이 시뻘게져서 덤비는 허드슨 자작군 병사의 머리를 두 쪽으로 갈라주었다. 그리고 병사가 가진 숏소드를 잡아챘다. 무식하게 무거운 배틀 액스보다 한결 나았다.

펄프 대장은 새로운 무기를 두어 번 휘둘러보고 만족했다. 그리고 남쪽 성탑에 무엇이 있는지 생각했다. 그곳에도 새로운 무기가 있었다.

“...대포?”

@

로벨은 앞을 가로막은 허드슨 자작군 병사 복부에 롱소드를 깊숙이 담갔다가 뽑았다. 유언을 감상할 여유 없이 남쪽 성탑 내부에 들어섰다.

고개를 들어 나선형 계단이 끝나는 성탑 꼭대기를 보았다. 울림 때문에 잘 들리지 않지만 꽤 험한 소리가 오가고 있었다. 펄프 대장이 욕설의 내용을 정확히 분석했다.

“페르젠 백작이 요새 밖에서 공격하고 있습니다.”

“서둘러.”

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죽기 살기로 성탑을 올랐다. 완전무장하고 가파른 계단을 뛰니까 죽을 맛이었다. 하지만 진짜 죽을 사람은 성탑 위의 포병들이었다.

“페르젠 백작군이다!”

“벌써 여기까지...!”

로벨은 롱소드를 거꾸로 잡고 몽둥이처럼 휘둘렀다.

“백작 아니야! 로벨 로드릭이야!”

빠각! 뼈 부러지는 감촉이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손잡이가 더 무거운 만큼 타격감이 뛰어났다.

로벨을 롱소드를 한 바퀴 돌린 후 다음 상대를 찾았지만, 뒤따라온 울프 용병단이 한 명씩 맡아 머리를 깨트리거나 성탑 밖으로 밀어버렸다. 성탑 위에 남은 것은 시커먼 잉그비아 왕국산 대포 1문뿐이었다.

로벨은 번뜩이는 생각을 고민 없이 실천에 옮겼다.

“도와줘!”

로벨은 피범벅이 된 롱소드를 검집에 욱여넣고 대포 측면에 붙었다. 이쪽으로 눈치 빠른 펄프 대장이 로벨의 생각을 알아챘다.

“이놈들아! 영주님을 도와! 대포 방향을 돌려라!”

장정 넷이 붙자 대포가 서서히 움직였다. 깊고 어두운 포구가 성벽 위를 지나 서쪽을 향했다.

펄프 대장은 포실 상태도 확인 안 하고 대뜸 횃불을 가져다 대었다. 포병이나 대포 기술자가 봤으면 기겁할 짓이지만,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다.

쾅!

천만 다행히 대포가 깨지는 등의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행운의 여신은 기왕 인심 쓴 김에 팍팍 쓰기로 했는지 추가로 명중까지 시켜주었다.

콰과가강-!

펄프 대장이 쏘아올린 포탄이 화약상자를 정확히 때렸다. 대포가 터지고, 불꽃이 치솟았다. 성탑 아래로 허우적거리며 떨어지는 병사들은 그나마 희극적이었다. 대부분은 조각조각 찢어졌으니까. 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기대 이상의 효과에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이거... 끝내주는데?”

하늘로 치솟은 불꽃은 에릭 공작의 첫 승리를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

팔콘 요새 함락.

에릭 공작의 첫 승리와 로벨 로드릭의 무용이 볼탄 반도 전역에 전해졌다. 이로써 작년 가을 조지 도트넘 자작군을 상대로 승리한 것이 우연이 아님을 증명했다. 그랜드 챔피언의 명성에 연전연승의 무공이 더해져 로벨의 유명세가 하늘을 찔렀다.

“...유명하다고 꼭 잘 사는 것은 아니지.”

펄프 대장이 무릎을 끌어안고 궁상맞게 중얼거렸다. 모닥불을 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허풍쟁이 제이콥이 격렬하게 긍정했다.

팔콘 요새를 점령했으나, 허드슨 자작과 기사들은 무사히 탈출했다. 울프 용병단이 동쪽과 남쪽을 장악하고, 페르젠 백작군이 서쪽을 공격하는 사이, 허드슨 자작은 텅 빈 북쪽으로 빠져나간 것이다.

페르젠 백작은 승리를 만끽할 틈을 주지 않고 추격대를 구성했다. 에릭 공작의 뜻을 받들기 위해서는 류트 공자의 왼팔인 허드슨 자작을 필히 제거해야 했다.

페르젠 백작을 따라 종군하는 로벨과 울프 용병단도 꼼짝없이 추격을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수색부대가 아니라 예비대로 돌려졌다는 것이다.

외팔이 더치가 덩치에 안 맞게 입술을 삐죽였다.

“어차피 쉬지 못할 거면 공이라도 세우게 선두로 보내주지. 왜 후미로 보낸 거야?”

“요새 점령하느라 고생했으니까 쉬엄쉬엄 따라오라는 거 아니겠나.”

그런 이유도 있지만, 로벨이 허드슨 자작의 처형을 방해할까 우려한 것도 있었다. 로벨은 명예로운 기사였고, 귀족을 죽이는 것은 명예롭지 못한 일이니까.

마녀 키르케가 화살 구멍 난 주전자를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대뜸 팽개쳤다.

“전쟁 때문에 살림이 거덜 나겠어요!”

로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에는 생산성이 없었다. 60명으로 늘어난 울프 용병단을 어떻게 먹여 살릴지 고민이었다. 허풍쟁이 제이콥이 안쓰럽게 말했다.

“우리도 우리지만, 마녀 아가씨도 고생이 많아.”

“카아악! 마녀 아니고 마법사라고요!”

전통적인 기사에게는 시동과 종자, 그리고 수발을 드는 다수의 수행원이 따라다녔다. 그러나 로벨이 거느린 수행원은 마녀 키르케 한 사람뿐이었다. 음식을 차리고, 잠자리를 챙기고, 씻을 물을 준비하고, 아야와 이야카까지 돌보았다. 로벨이 손수 말을 씻기고 무기를 손질하기에 망정이지, 그것까지 떠넘겼으면 잠잘 시간도 없었을 것이다.

로벨은 고마움을 담아 말했다.

“성으로 돌아가면 원하는 것을 말해. 가능한 한 들어줄게.”

외팔이 더치가 앉은 채로 팔짝 뛰었다.

“어? 기사 나리, 지금 엄청 위험한 발언을 했습니다요. 얼빠져 보여도 마녀입니다요. 무슨 부탁을 할 줄 알고...”

“저 곰탱이 아저씨가 또 시작이네. 마녀가 아니라 마법사라고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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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드슨 자작의 추격은 이틀 만에 종결되었다. 사트로 후작령으로 도망친 것이 확인되었고, 페르젠 백작과 로벨 로드릭의 군사로는 싸울 수 없었다. 그리고 또 하나, 버팅거 시티의 물류를 차단하기 위해 남쪽으로 진출한 루카스 남작군이 랭스터 백작군에게 대패했다. 그로써 볼탄 반도 남동부가 온전히 류트 공자 손에 들어갔다.

로벨과 울프 용병단이 스톤헤드 요새로 복귀했을 때가 루카스 남작의 패전소식이 전해졌을 때였다.

로벨은 일전에 머물던 말똥 밭에서 휴식을 명령하고 요새 안쪽으로 향했다.

“영주님? 어디 가십니까?”

로벤은 이 빠진 롱소드를 쓸어 만지며 말했다.

“대장간.”

“저도 따라가도 됩니까? 전 이놈이 말썽이라.”

펄프 대장은 칼집에 다 안 들어가서 두 마디정도 삐쭉 튀어나온 숏소드를 두드렸다. 로벨은 동행을 허락했다.

젊은 기사와 늙은 용병이 나란히 요새 안을 걸었다. 로벨을 알아본 요새 수비병들이 수군거렸지만 ‘감히’ 귀찮게 굴지는 않았다. 로벨은 롱소드 손잡이에 왼손을 걸치고 뻥 뚫린 길을 산책하듯 걸었다. 펄프 대장은 수일 전 시장통 같았던 요새 거리를 떠올리고 말했다.

“사람이 많이 줄었습니다.”

로벨은 주위를 힐끔 보고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렇네.”

그러나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에릭 공작은 예비병력을 남기지 않고 총력을 다하고 있었다. 전황이 순조롭지 않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사람이 없어서 좋은 점도 있었다. 대장간이 한산해서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로벨은 해골에 근육 조금 붙여둔 듯한 대장장이에게 롱소드를 보여주었다.

“호오, 잘 만들어진 칼이군요. 주인을 잘못 만난 것이 흠이라면 흠일까요.”

펄프 대장이 픽- 웃었다. 로벨의 정체를 모르는 듯했다.

“어지간히 막 쓰지 않고서야 이 지경이 될 리 없는데, 얼마나 쓴 겁니까?”

로벨은 검을 잡은 햇수를 헤아려보았다.

“5년 조금 안 돼.”

“5년이요? 이거 뭐 10년쯤 막 다룬 꼴인데요? 그동안 숫돌 한번 안 쓰셨습니까?”

로벨은 억울했다. 매일 저녁 칼날을 갈고, 어린 집사의 눈치를 보며 정향유로 닦아주었는데, 관리 미숙이라니!

“사흘 전까지 멀쩡했어.”

“사흘 만에 이 꼴이 되었다고요? 동방의 야만인처럼 백인베기라도 하셨습니까?”

“백 명은 아니고, 열대여섯 명 정도?”

로벨이 해명하자 대장장이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랜드 챔피언 로벨 로드릭 경이셨군요.”

“나를 알아?”

“이 요새에서 나리를 모르는 사람 찾기가 더 힘들지요. 가만있자, 그럼 이 롱소드가 팔콘 요새의 성문을 가로로 찢고, 대포알을 두 동강 낸 롱소드군요.”

“...무슨 소리야?”

대장장이는 껄껄 웃고 로벨 또래의 젊은 도제를 불러 롱소드를 맡겼다.

“3시간 뒤에 오십시오. 새것처럼 고쳐놓겠습니다.”

로벨의 용무가 끝나자 펄프 대장이 잽싸게 끼어들었다.

“내 것도 좀 봐주시오. 칼집을 새로 맞춰야 하오.”

대장장이는 숏소드를 대충 훑어보고 휙- 던졌다. 로벨의 롱소드와 달리 마음에 안 찬 모양이다.

“저쪽에 안 쓰는 칼집이 많으니 적당한 거로 주워가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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