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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16화 (16/605)

16화. 맹수

16화. 맹수

페르젠 백작 휘하의 젋은 기사가 빵 터질 것 같은 얼굴로 소리쳤다.

“저 요새에 대포라곤 고작 3문이오. 고작 3문! 한 발 쏘고 재장전하는데 1분이 넘게 걸리오! 다시 말해 1분에 돌멩이 3개가 전부란 말이오!”

“그 돌멩이에 죽은 병사가 스물이오. 그리고 북쪽 성탑에 발리스타도 무시 못 하오.”

“어정쩡하게 웅크리고 있으니까 그런 것 아니오! 전 병력을 동원해서 일시에 치고 올라가야 하오! 성벽 아래 붙기만 하면 대포고 발리스타고...”

“경의 눈에는 적병들이 안 보이시오?”

“숫자만 보면 우리가 3배 더 많소!”

숫자에 밝은 어린 집사라면 2.7배라고 정정해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화살통에 들어가는 화살보다 많은 숫자는 고민해 본 적 없는 기사들이라 산수에 약했다. 고백하자면, 로벨도 3배라고 생각했다.

로벨은 천막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기둥이 등잔불을 가려서 곳곳에 어둠이 그려져 있었다.

페르젠 백작은 깊은 한숨을 쉬고 로벨에게 물었다.

“로벨 경은 어찌 생각하시오.”

로벨은 생판 남인 페르젠 가문 가신들과 작전 회의하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아는 사람이 하나 없는 파티에 초대된 기분이었다. 그래도 할 일은 해야 했다.

“해자에 시체가 많이 쌓였소. 대부분 아군 시체지만, 적군도 적지 않소.”

“그게 뭐 어쨌다는 것이오?”

열변을 토하던 젊은 기사가 뚱하게 말했다. 로벨은 무시하고 말했다.

“허드슨 자작에게 시체를 수습할 것을 제안해보시오. 전염병을 막기 위해서, 병사들의 원망을 피하기 위해서, 그것도 아니면 해자가 메꿔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응할 것이오.”

“시체 수습은 전투가 끝나고 해도 되잖소?”

젊은 기사들은 어리둥절했지만, 페르젠 백작은 조금 날카로웠다.

“기사도에 반하는 짓은 할 수 없소! 시신을 수습하러 나온 적병을 공격할 작정이라면 결코...”

로벨은 눈꼬리를 살짝 올렸다. 페르젠 백작은 실언했음을 인정했다.

“경이 그런 생각을 할 리 없지. 미안하오.”

로벨은 사과를 반만 받았다.

“시체수습을 이용하긴 할 거요.”

“어떻게 말이오?”

로벨은 밤바람에 펄럭이는 천막 틈새로 팔콘 요새를 훔쳐보았다. 한낮의 치열함이 식지 않은 듯 지금도 이글거렸다.

“성벽이 높고 물자가 풍부하나, 병력은 많지 않소. 시체를 수습하기 위해 병사를 내보내면 그만큼 후방경계가 약해질 것이오.”

페르젠 백작은 로벨의 작전을 금방 이해하고 감탄했다. 사실 로벨이 생각한 작전이 아니었다. 지금쯤 늑대 남매와 뒹굴고 있을 마녀 키르케의 작전이었다.

로벨은 여전히 이해 못 한 기사들을 위해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요새에 몰래 잠입할 생각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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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울프 용병단 주둔지로 돌아와 달빛 아래 하얗게 빛나는 팔콘 요새를 관찰했다. 성벽 위 감시병도 이쪽을 지켜보는 듯 횃불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My Lord? 언제 오셨습니까?”

“방금.”

펄프 대장이 눈을 비비며 천막 밖으로 나왔다. 착한 아이도 잠들기 싫어할 이른 시간이지만, 긴 행군과 격렬한 전투를 치른 용병들은 업어 가도 모를 만큼 고이 잠들어 있었다.

“피곤해?”

“흐아아암... 버틸 만합니다. 장사 밑천이 체력 아닙니까.”

“잘됐네. 3시간 뒤에 이동하니까 준비해.”

“이동이요?”

“언덕을 돌아서 요새 동쪽으로 갈 거야. 볼턴 경의 병사들은 어디 있지?”

“안 그래도 그 친구들이 영주님을 찾고 있었습니다. 고용주가 죽어서 붕 뜬 상황인데,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갈 수도 없으니 영주님이 고용해줬으면 합니다.”

“그럼 고용해.”

“저... 그럴만한 자금이 있습니까?”

“이 전쟁에서 이기면 포상금과 봉토가 생길 거야.”

“...지면 어쩝니까?”

로벨은 펄프 대장을 돌아보고 웃었다. 미남(?) 기사가 달빛을 등지고 눈웃음 짓자 노병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어어? 왜 이래? 나 이쪽(?) 아니야!’

로벨은 펄프 대장의 성 정체성을 흔들어놓고 부드럽게 말했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자. 이상의 내용을 전달하고 출발 전까지 휴식하도록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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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기울기 시작한 새벽녘, 무기와 방패를 짊어진 울프 용병단이 소리 없이 들판을 가로질렀다.

어제 낮 전투로 신출내기 용병 2명이 죽고 1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러나 볼턴 경의 풋맨 51명이 합류해서 총원이 64명으로 늘어났다.

마녀 키르케가 으르릉거리는 아야와 이야카를 조용히 시키며 속삭였다.

“잘 될까요, 기사님?”

로벨은 칼집 소리가 나지 않게 롱소드 손잡이를 잡고 말했다.

“네가 제안한 거잖아.”

“제안을 검토한 것은 기사님이니까요.”

로벨은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후 말했다.

“팔콘 요새 수비병은 180명 내외야. 어제 전투로 좀 더 줄었겠지. 병사가 적으니 서쪽에 집중해야 하고, 자연히 동쪽이 허술할 거야. 그나마도 시신수습을 위해 병력을 빼내면... 감시병은 많아야 다섯 명. 아니, 세 명 이하.”

로벨은 애꾸눈 볼포스를 보았다. 정확히는 애꾸눈이라 생각되는 그림자를 보았다. 밤눈이 좋지 않아 60개 그림자 중 누가 애꾸눈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 60명이야. 성벽만 넘으면 우리만으로도 해볼 만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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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팔콘 요새 동쪽 1.5마일 떨어진 곳에서 대기했다. 돌격 거리라고 하기는 너무 멀고, 행군 거리라고 하기는 조금 짧은 곳이었다.

로벨은 뒷목을 간질이는 햇살에 움찔하고 옆구리의 끼운 아멧을 풀어 머리에 썼다. 페르젠 백작과 입을 맞춘 것은 해가 뜨고 2시간이 지난 시점이다.

“펄프 대장, 볼포스, 피터, 존, 그리고 제이콥.”

로벨은 활솜씨가 좋고 전투경험이 풍부한 용병 다섯 명을 호명했다. 펄프 대장은 한숨을 쉬었고 제이콥은 어깨를 으쓱였다.

“My Lord, 젊은 애들을 쓰지 않으시고.”

“네 급료가 가장 많아.”

“그럼 할 말이 없군요.”

다섯 용병은 무거운 방패를 치우고 최소한의 장비만 챙겼다. 로벨은 임시 지휘관이 된 외팔이 더치에게 말했다.

“1시간 뒤에 따라와. 성문이 열려있지 않으면 즉시 본대로 복귀하고.”

“기사 나리를 두고 말입니까요?”

“나도 죽을 생각은 없어. 몸값 가지고 다시 와.”

“어린 집사가 싫어하겠는뎁쇼.”

원조 울프 용병단원은 껄껄 웃었다. 새로운 지휘관이 익숙지 않은 풋맨들은 어디가 웃긴지 몰라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로벨은 그 모습에 한 번 더 웃고 말했다.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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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딘은 조이드 자작령에서 태어났다. 걸음마를 떼고서 12년을 농부의 아들로 살았으나 큰 형의 결혼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팔리듯이 무두공방 도제로 들어갔다. 그러나 매 맞는 게 싫어 6개월 만에 뛰쳐나오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다 싸구려 용병이 되었다.

하루도 잠잠한 날이 없는 것이 영주들의 자존심 싸움이고 상인들의 이권 다툼이라 밥 벌어 먹고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여기서 1년, 저기서 1년 일하다보니 어느덧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슬슬 정착해야지 않을까 고민할 때, 크게 한 몫 벌 수 있다는 꼬임에 넘어가 허드슨 자작에게 몸을 맡겼다.

그리고 여기서 에딘의 일대기가 끝났다.

“하아암!”

푹!

하품하는 입속에서 철로 된 화살촉이 튀어나왔다. 시장에서 선보이면 박수갈채를 받을 묘기인데, 여건이 안 좋아 두 번은 못할 듯했다.

에딘은 피를 한 줌 토하고 그대로 쓰러졌다. 그리고 이전에 죽은 병사와 이후에 죽을 병사들처럼 기억하는 이 하나 없이 잊혀졌다.

“역시 애꾸눈이야. 눈알이 하나라서 잘 쏘나?”

“시끄럽고 갈고리 꺼내.”

에딘의 시체 옆으로 삼각대 모양 갈고리가 날아왔다. 이쪽으로 숙련된 병사가 있는지 여장 아래 정확히 걸렸다.

“좋아. 올라간다.”

철컥철컥. 부스럭부스럭. ‘거 좀 빨리 좀 올라가쇼!’, ‘너나 엉덩이 치워!’ 작은 소란이 있다가 젊은 기사가 성벽 위에 나타났다. 아침 해를 등지고 있어 얼굴을 볼 수 없지만, 젊고, 날렵하며, 잔인한 기사였다.

“어어? 누구...”

로벨은 허리에 찬 대거를 뽑아서 던졌다. 날카롭게 갈아둔 칼날이 아침식사를 가지고 올라온 병사의 이마를 쪼갰다. 로벨은 괜히 미안해서 한마디 했다.

“투구 좀 쓰라고.”

로벨은 부하들이 빨리 올라올 수 있게 밧줄을 당겨주었다. 한 명, 그리고 또 한 명, 숫자가 늘어날수록 속도가 빨라졌다. 마침내 여섯 명이 모두 올라왔다.

“시체수습이 끝나면 화장을 할 거야. 연기에 맞춰서 성문을 열어야 해.”

“이거 좀 야비한 거 아닙니까? 기사도 정신은 어떡하고...”

로벨은 시체를 발로 굴려 성벽 아래로 떨어트렸다. 그리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전쟁에서 이기는 게 기사도의 정수야. 그리고 시체수습 중인 병사를 공격한 게 아니잖아?”

“맞아. 맞아. 경계를 소홀히 한 이놈들 잘못이지.”

로벨은 아멧을 고쳐 쓰고, 바이저를 내리고, 롱소드를 뽑았다.

“시간 없어. 내려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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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성탑 내부의 계단을 따라 지상으로 내려갔다. 로벨이 짐작한 대로 병사가 많지 않았고, 그 얼마 안 되는 병사조차 아침식사로 경계가 소홀했다.

로벨이 성탑 1층에 내려왔을 때, 남보다 일찍 식사를 끝낸 불운한 병사가 성탑 안으로 들어왔다.

“어억! 너희들 뭐야!”

로벨은 문답무용으로 롱소드를 찔렀다. 칼끝이 깔끔하게 기도를 잘라냈다. 묵직한 양손검이 아니라 날렵한 단도를 다루는 것 같았다. 펄프 대장과 용병들은 그 칼솜씨에 반했다.

“역시 그랜드 챔피언이야.”

로벨은 질식해서 죽는 건지, 출혈과다로 죽는 건지 아리송한 병사를 발로 뻥 차고 요새 안마당으로 뛰쳐나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스튜에 코를 박고 숟가락을 놀리는 병사, 화톳불에 언 손을 녹이는 병사, 팔짱 끼고 웅크린 채 꾸벅꾸벅 조는 병사 등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주 잠깐 침묵이 스쳐간 후, 반발하듯 혼란이 일어났다. 피 흘리는 전우를 발로 차고 등장한 기사를 어찌 대해야 할지 명확했다.

“적습이다! 적군이 침입했다!”

“비상! 비상!”

허드슨 자작군은 즉시 무기를 꼬나들었다. 숏소드, 스피어, 메이스, 모닝스타 등등 다양했다. 저 흉흉한 무기들을 어찌 대해야 할지도 분명했다.

로벨은 롱소드를 옆으로 휘둘러 핏물을 털어내고 다시 앞을 겨냥했다.

“조준!”

로벨 뒤에서 나온 울프 용병단은 일렬로 정렬해서 크로스보우를 견착했다. 쇠촉이 차갑게 반짝였다.

“발사!”

파파팡-! 팡-!

무기가 아니라 방패를 챙겼으면 좀 나았을까, 허드슨 자작군은 손도 쓰지 못하고 우르르 쓰러졌다.

“우아아앗!”

“덤벼라!”

로벨은 일제사격이 끝나자마자 돌진했다. 목에 쿼럴이 박혀 허우적거리는 병사의 머리를 쪼개주고, 메이스를 휘두르며 달려오는 병사를 어깨로 받아넘기고, 그 뒤에서 롱 스피어를 찌르는 병사에게 달려갔다.

지금의 로벨은 강철로 된 피부와 3피트짜리 발톱을 가진 맹수 중의 맹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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