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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로 개과천선-145화 (145/151)

145화 권력에 맞서는 용기

필웅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강중민은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열었다.

“참 평화롭지 않나? 삼라만상이 규칙에 근거해서 순환하는 것이 말이야.

때가 되면 바다는 만조가 되고, 달은 이지러지고, 해는 뜨고 지지. 오직 인간만이 자연의 순환과 관계없이 살아가.”

“철학적 대화를 나누는 건 물론 즐거운 일입니다만, 지금 그런 뜬구름 잡는 얘기가 무슨 도움이 되는지 잘 모르겠군요.”

“조용히 하고 듣게. 생각해 보게.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야말로 혼돈이야. 아무리 좋은 정책, 합리적인 제도와 질서를 만들어 놔도 인간은 항상 예상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반응하지. 그래서 결국은 그 좋은 정책들을 깨트리고 말아.”

필웅은 할 말이 많았지만 일단 그냥 들어보기로 했다.

강중민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눈을 거두고 필웅을 다시 쳐다보았다.

“자네는 우리를 무슨 최면제를 이용해 국가를 지배하고자 하는 얼토당토않은 음모를 꾸미는 조직이라고 생각하는군.”

“아닙니까?”

“아닐세. 우리가 원하는 것은, 어쩌면 궁극적인 평화야.”

강중민이 말을 이었다.

“우리는 우리가 개발한 신약을 희석해 아예 새로운 종류의 약을 만들었지. 이 약은 강력한 최면 효과는 없지만, 사람의 신경을 극도로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네. 일반적인 신경안정제와 다른 점은, 투약 후 매우 오랜 시간 동안 효과가 유지된다는 점이지.”

“그런 걸 대체 어디다 쓰려는 겁니까? 나라를 요양원으로 만들고 싶은 거예요?”

필웅이 어처구니없다는 투로 묻자, 강중민이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단순한 신경안정제가 아니야. 이건… 사람들이 현재에 만족할 수 있게 만들어 주지.”

필웅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뭐라구요?”

“들은 대로일세. 우리는 사람들이 끝없이 불만을 가지고 끝없이 변화를 요구하게 만드는 특정 호르몬을 발견했네. 이 약은 그 호르몬의 분비를 억제시키는 역할을 하지.

다시 말해, 이 약을 투약받으면 더 이상 불만스러워하는 불행한 국민이 아니라 현재에 만족할 줄 아는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거야. 예로부터 안분지족이라고 하지 않던가?”

필웅은 어이없어하며 혹시 이 노인이 노망이 든 게 아닌가 잠시 의심했다.

“사람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말입니까?”

강중민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모든 인간은 당연히 행복을 추구하게 되어 있는 것 아닌가? 어차피 정부에서 아무리 돈을 퍼주든, 복지를 강화하든, 인권을 보장해 주든 인간은 끊임없이 불평하고 불만을 갖게 되어 있어.

그 근본적인 상태를 치유하지 못하면 인간은 계속해서 불행할 수밖에 없는 거야.”

“빌어먹을, 그걸 말이라고 해!?”

갑자기 필웅이 소리를 높이자 강중민의 표정이 약간 흔들렸다.

“그건 그저 사람들을 허상 속에 영원히 가둬 놓겠다는 거잖아. 사람들한테 전부 다 VR기기 같은 걸 씌워 놓고, 이게 현실이라고 착각하면서 행복하게 살라고 하는 거라고!”

“VR? 그게 뭔가?”

필웅은 아차 싶었지만 흥분된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

“그건 됐고. 그게 영원한 마약과 뭐가 다르지? 현실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데, 마치 바뀐 것처럼 바보같이 만족하면서 살라고 하는 건가? 사람이 무슨 집에서 키우는 가축인 줄 알아?”

강중민이 눈살을 찌푸렸다.

“흐음.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네.”

“당연하지! 그런 미친 소릴 대체 누가 이해한단 말이야?”

필웅은 그때 이영규의 표정도 조금 비틀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 그렇군. 당신 같은 작자들이라면 그게 사람들에게 베풀어주는 은혜라고 생각할 법도 하군. 사람들을 그저 짖지 않게 관리하는 게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는 거라고 생각하니까 말이야.”

이영규와 강중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귀가 썩어 버릴 지경이군.”

강중민이 비웃는 어조로 말했다.

“지금 자신의 처지를 잘 알지 못하는 것 같은데.”

필웅은 어조를 바꿔 선명하게 외쳤다.

“자신의 처지를 알지 못하는 건 당신들이겠지. 당신들을 지금부터 체포하겠다.”

“무슨 수로?”

강중민이 재미있다는 듯 미소지었다.

필웅도 그의 눈을 바라보며 함께 미소 지어 주었다.

“특수공무집행방해 혐의로 당신들을 체포한다!”

갑자기 필웅이 고함을 지르자, 주위의 사람들은 흠칫 놀랐다.

필웅이 소리치고 나서 약 30초 후, 부둣가의 그림자 속에서 하나둘씩 사람의 형체가 나타났다.

장경과 경찰들이었다.

“전부 두 손 들고 꼼짝 마! 검사님은 놔 드리고!”

필웅의 팔을 잡고 있던 경호원들은 시선을 주고받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두 손을 올렸다. 필웅은 뻐근한 팔을 문지르며 장경 쪽으로 가서 섰다.

필웅은 강유라한테 맞아 터져 아직 약간 피 맛이 나는 침을 뱉으며 말했다.

“당신들을 체포하려고 시도 중이었으니 저는 엄연히 공무 집행 중이었고, 단체로 저를 위협했으니 특수공무집행방해로군요. 거기다 피가 났으니 상해까지.”

“그렇구만.”

강중민 회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섰다.

필웅이 멈칫하자, 강중민이 주름진 미소를 지었다.

“자, 나를 체포하게.”

“뭐라고?”

강중민이 지팡이를 짚으며 필웅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는 거의 70을 넘긴 나이임에도 여전히 허리가 꼿꼿했다. 또 물론 젊은 필웅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젊었을 적 싸움 좀 했다는 말이 그냥 빈말이 아닌 듯 체격도 컸다.

그렇지만 그의 위압감은 그런 신체적 조건에서 나온다기보다는 전체적인 분위기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상대를 압도하는 묘한 위압감이 그의 온몸에서 풍겨 나오고 있었다.

‘침착하자, 일단 대체 무슨 속셈인지 알아내야 해.’

“체포에 순순히 응하겠다는 건가?”

“그렇네.”

필웅은 팔을 쓰다듬으며 의심의 눈초리로 강중민을 노려보았다.

“무슨 꿍꿍이지? 갑자기 회개라도 한 건가?”

강중민은 클클 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자네가 체포하는 데 더 도움이 된다면 그렇게 생각해도 좋네. 난 그저 나만 체포하고 다른 사람들은 건드리지 않았으면 할 뿐이야. 사실 이 모든 걸 지시한 게 누군지는 비교적 뻔하지 않나.”

필웅은 슥 이영규와 강유라 등을 둘러보았다.

“내가 당신만 체포해도 이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이건 내 의지야. 저들은 간섭하지 않을걸세.”

강중민은 대답하고는 이영규와 강유라를 차례로 바라보았다. 강유라와 이영규는 공손히 눈을 내리깔고 뒤로 물러섰다.

“자.”

강중민이 필웅에게 다가갔다.

“이제 됐겠지? 죄목은 자네가 마음대로 정하게.”

‘이게 대체 무슨 짓이지?’

필웅은 강중민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해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를 체포할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강중민. 당신을 특수공무집행방해, 배임수재, 약사법 위반 혐의로 체포합니다.”

“허허, 이거야 무시무시하구만.”

“이건 빙산의 일각일 뿐입니다.”

필웅은 이영규와 강유라를 바라보았다.

“당신들은 어떡할 겁니까?”

“정식으로 영장 발부하면 수사에 협조하겠습니다.”

이영규 대표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대답했다. 그러자 강중민 회장이 조용히 타이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체포되면 이영규 대표는 굳이 건드릴 필요 없지 않나? 이야기를 나누려고 하다가 조금 실례를 범한 건 나니까, 나로 만족해 주시게.”

필웅은 슬쩍 강중민을 쳐다보고는, 일단 그로서도 무리하게 이영규를 체포하기보다는 이영규와 강중민과의 관계를 좀 더 알아보는 편이 안전할 것 같았기에 그를 놔주기로 했다.

강유라는 묵묵히 필웅을 마주 보았다.

“너는 어떻게 할 거지?”

“글쎄. 때린 건 나니까. 나도 같이 가겠어.”

“바로 구속될 수도 있어.”

“상관없어.”

강유라는 코웃음을 치고는 그 자리에 서서 도발적으로 필웅을 마주 보았다.

잠시 강유라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필웅은, 다시 강중민에게 시선을 옮겼다.

‘갑자기 자신을 체포하라고 하는 이유가 뭐지?’

필웅으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진의를 깨달을 수 없었다.

* * *

다음 날.

필웅은 기사를 보며 경악하고 있었다.

필웅이 지난 밤 강중민을 체포하여 구속한 이후, 신문기사들은 온통 강중민의 구속 소식 일색이었다.

그런데 그 기사들이 전부 가관이었다

<삼영그룹 회장 구속! 무리한 수사에 비난 쏟아져>

<구속 필요 있었을까? 도 넘은 검찰의 자의적 수사>

<경쟁사의 계획인가? 삼영그룹 경영 올스탑>

‘아니, 자기들이 왜 재벌 걱정을 해 주는 거야?’

삼영그룹의 계열사인 언론사가 강중민 회장을 구속을 비판하는 것은 차라리 이해가 되었다. 그런데 아무 상관도 없는 언론사들이 일제히 검찰의 수사를 비난하고 있었다. 심지어 삼영의 경쟁사인 AG의 계열사인 한 언론사에서도 강도는 낮췄지만 불만을 표시하고 있었다.

필웅은 기사를 몇 개 더 읽어 보다가 짜증스럽게 신문을 구겨 내던졌다.

‘이런 데에 시간 낭비할 필요 없어. 아니, 차라리 잘됐지.’

필웅은 정신을 다잡고 기소 준비를 위해 다시 한번 마지막으로 서류들을 검토했다. 어쩌면 이렇게 사건이 세간의 관심을 받게 된 것이 잘된 일일 수도 있다고 필웅은 생각했다.

‘일전 내가 쓴 전략이지. 오히려 언론의 주목을 받으면 이규필도 함부로 사건에 손대지 못할 거야. 이러니저러니 해도 어쨌든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데 아무 이유도 없이 사건을 재배당하거나 압력을 넣을 수는 없겠지.’

그리고 30분 후.

필웅은 이규필의 방해만을 염려하던 자신이 너무 안이했음을 깨달았다.

“보석 신청이라구요?”

필웅은 어이가 없었다.

“아니, 오늘 새벽에 구속된 데다가 피고인 본인도 자신을 구속해 달라고 했는데 무슨 보석을 신청한단 말입니까?”

법원사무관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피고인 본인이 구속을 원했는지야 저희는 모르고요. 아무튼 보석 신청이 거절될 사유만 없으면 피고인의 보석 신청은 받아들여질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러면 구속을 한 의미가 없잖아요!”

“그러면 형사소송법을 개정하시든가요.”

법원사무관이 사무적인 태도로 일관하며 대답하자, 필웅은 애꿎은 책상만 탕 두드리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처음부터 이럴 속셈이었나?’

물론 피고인은 보석으로 석방된다고 하더라도 혐의가 사라지거나 구속 자체가 불법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석방된 상태나 다름없기 때문에, 피고인은 얼마든지 보석 허가 조건 안에서 바깥 세상을 자유로이 다닐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증거를 인멸하거나 증인을 입막음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었다.

물론, 보석을 허가할 때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거나 도주의 우려가 있으면 허가해서는 안 되었다.

하지만 필웅으로서는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어 부득이 피고인을 구속한 것인데, 그런 피고인을 다시 놔 주면서 어떻게 증거인멸의 우려가 없다고 볼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필웅은 일단 강중민이 임시로 수감되어 있던 구치소로 향했다.

“강중민 회장님이다!”

입구에서부터 몰려든 기자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필웅은 가까스로 기자들 사이를 헤치고 구치소의 입구에서 당당하게 승자처럼 웃고 있는 강중민 회장을 목도할 수 있었다.

“강중민…!”

강중민 회장은 휠체어를 타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원래 정정하시지 않았나?”

“검찰이 무리하게 밤샘 수사를 해서 건강이 급격히 안 좋아지셨대.”

옆의 기자들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들렸다. 필웅은 이를 꽉 깨물었다.

‘밤샘 수사라고? 아직 신문은 하지도 않았어!’

보나 마나 언론 플레이를 위해 삼영그룹에서 보도자료를 배포한 모양이었다. 강중민 회장은 짐짓 초췌해 보이는 인상으로 휠체어에 탄 채였다.

강중민의 눈이 순간 필웅을 향했다. 강중민은 슬며시 보이지 않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회장님! 이번 구속 사태가 검찰의 과잉수사로 인한 것이라는 얘기가 있는데, 진상을 말씀해 주시요!”

“회장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회장님, 검찰이 무리한 밤샘 수사로 가혹행위를 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모습을 드러낸 그에게 기자들의 질문 공세가 쏟아졌다.

강중민 회장은 잠시 심하게 기침을 하더니, 한 손을 들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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