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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로 개과천선-144화 (144/151)

144화 드러나는 정체

필웅은 비로소 달빛에 드러난 사람들의 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한 남자는 그가 본 적이 없는 노인이었다.

그리고 한 사람은….

“강유라?”

노인의 뒤에서 조용히 모습을 드러낸 여자는, 강유라였다.

“네가 어떻게 여기에? 아니, 그것보다 이분은….”

노인은 한참 필웅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천천히 걸어와 입을 열었다.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군. 나, 강중민일세.”

‘강중민!?’

필웅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강중민이라면 강무완의 아버지, 즉 강유라의 할아버지였다. 지금은 삼영그룹의 일선에서 물러서 있지만, 여전히 삼영그룹 전반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인물이라고 들었던 기억이 났다.

필웅은 얼떨결에 잡혀 있는 처지도 잊은 채 급하게 물었다.

“여긴 왜 온 겁니까?”

강중민이 슥 뒤에 서 있는 이영규를 넘겨 보고는 말했다.

“나를 찾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군.”

“당신을요?”

필웅이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이영규와 강중민, 그리고 강유라를 차례로 번갈아 보았다.

그 순간, 필웅에게 어떤 깨달음이 번개처럼 찾아왔다.

“설마 당신이?”

강중민의 주름진 입가에 서서히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가 번졌다.

“그래.”

강중민이 쥐고 있던 지팡이를 고쳐 잡았다.

“내가 바로 자네가 찾고 있던 교단의 ‘교주’일세.”

필웅이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니… 잠깐… 그렇지만 당신은!”

강중민이 필웅을 외면하며 천천히 걸어가 이영규의 옆에 서서 밤바다를 향해 섰다.

“뭐가 이상하다는 겐가? 자네도 교주가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을 테지. 교주가 사실은 교단의 외부에 있다는 사실도 짐작하고 있을 것이고 말이야.”

필웅은 강중민의 말을 듣고 어느 정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교주는 교단 밖에 있어. 평소에 직접 교단을 통제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유사시에는 영향력도 발휘할 수 있어야 하지. 그렇다면 숨겨진 교주가 삼영의 인물이라고 해도 이상하지는 않아. 오히려 적임자일지도 모르지.’

필웅은 빠르게 생각을 정리하고 재차 물었다.

“그렇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왜 교단이라는 꼭두각시를 내세운 겁니까? 삼영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스스로 실현할 역량을 갖고 있을 텐데요.”

강중민이 흐흐 하고 웃었다.

“조 검사는 수사는 잘하는지 모르겠지만 실무적 감각이 부족하군.”

“무슨 의미입니까?”

“말 그대로네.”

강중민이 비로소 필웅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조 검사, 자네는 힘이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나?”

필웅이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하고는 대답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힘이 있는 것과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지요.”

“어떻게 말인가?”

“힘이 있다고 모두 그 힘을 자기가 원하는 데에 사용한다면, 사회는 혼란에 빠질 테니까요. 그 힘을 절제할 줄 아는 것도 강자의 도리입니다.”

강중민이 껄껄 웃으며 필웅에게 다가왔다. 필웅은 저 뒤에 서 있는 강유라를 바라보았다. 강유라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강자의 도리라. 그건 너무 불공평하지 않은가?”

“뭐가 말입니까?”

“강자가 그 힘을 얻게 되기까지는 수많은 고난과 역경을 거쳐 왔겠지. 그 힘은 그냥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야. 왜 강자가 스스로 얻어낸 힘을 다른 사람이 가한 제약에 굴복해야 한단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릴 하시는군요. 회장님이 그런 이상주의자인 줄은 몰랐습니다.”

“이상주의?”

강중민이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설명해 보라는 듯 필웅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필웅은 양팔이 잡혀 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힘차게 외쳤다.

“예. 그건 강자의 이상주의입니다. 강자는 회장님이 말씀하신 대로 자신의 힘을 구속 없이 펼쳐 보이고 싶어 하죠. 그러나 그런 건 원시시대에나 가능했던 겁니다. 강자가 그 힘을 제약 없이 휘두르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인간은 오랜 역사를 통해 충분히 깨우쳤습니다. 그 결과 만들어진 게 법과 제도라는 겁니다.

회장님이 얘기하는 건 그렇게 만들어진 법과 제도를 무시한 채, 칼과 몽둥이만이 지배하는 원시시대로 돌아가자는 강자의 향수병에 지나지 않습니다. 틀립니까?”

강중민은 여전히 웃는 것인지 화가 난 것인지 아리송한 표정으로 필웅을 말없이 잠시 쳐다보았다.

“재미있는 해석이군. 유라야.”

갑자기 강중민이 강유라를 불렀다.

“내 손녀와 깜찍한 짓들을 벌이고 다닌 모양이더군.”

필웅이 불안하게 강유라를 바라보자, 강중민은 다시 한번 껄껄 웃었다.

“자네가 한번 유라에게 직접 물어보게. 왜 유라가 여기 와 있는지.”

필웅이 강유라를 돌아보았다. 강유라의 표정은 평온해 보였다.

“강유라…?”

강유라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서서히 입을 열었다.

“저는…”

강유라가 잠시 멈칫하다가, 말을 이었다.

“삼영에 복귀하고 싶습니다.”

필웅은 강유라를 빤히 쳐다보았다.

“무슨 소리야?”

강유라가 필웅을 돌아보았다.

“말했잖아. 나는 내 의지로 삼영에 복귀할 거야.”

“뭐라고? 갑자기 왜 이제 와서….”

“너무 무의미해.”

“뭐가?”

“철저한 강자에게 대적하는 것. 완벽한 강자에게 대적하는 것보다, 강자의 일부가 되는 편이 편해.”

“그게 무슨 개소리야! 그들이 널 내버려 둘 리가…!”

“할아버지가 약속하셨어. 강준수가 얼마 전 또 사고를 쳤거든. 음주운전으로 사람을 죽였어. 이제 강준수에게 남은 기회는 없을 거야. 아버지와 할아버지에게 내가 유일한 선택지가 된 셈이지.”

필웅은 일성회관에서 서춘주와 이영규를 만나고는 술에 취해 깽판을 치던 강준수의 모습을 떠올렸다.

절제력 없고 충동적인 그라면 언제든 그런 사고를 칠 만했다. 지금이 아니라도 언젠가는. 그런 불확실성을 남겨둔 채 강준수를 후계자로 지목하기는 망설여졌을 것이다.

강유라는 이어서 담담하게 말했다.

“그래서 내가 복귀하고 싶다고 말씀드렸어.”

“전부 거짓말이었군.”

강유라의 표정에 의문이 떠올랐다.

“무슨 말이지?”

“그날. 사고 현장에서. 너를 도와 아버지를 잡아넣어 달라고 하지 않았나? 너는 깨끗한 삼영을 물려받고 싶다고 했어. 그때만 해도 너는 스스로 해내겠다는 의지가 있는 ‘인간’이었지. 지금은 그냥 말 잘 듣는 집 지키는 개가 되겠다는 거고.

그나마 네가 뭔가를 스스로 해낼 생각이 있는 인간인 줄 알았는데, 결국 너도 그냥 개새끼였군.”

강유라가 또각또각 걸어와 주저 없이 필웅의 뺨을 후려쳤다.

“때려 주고 싶어.”

“이미 때렸잖아.”

필웅은 입 안을 혀로 살피다가 퉤 피 섞인 침을 뱉었다. 아무래도 입 안이 터진 모양이었다.

“생각보다… 아니, 생각만큼 손이 맵네.”

“더 맛보고 싶지 않으면 입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강유라, 잘 생각해봐.”

“그만. 더 이상 날 친근하게 부르지 말았으면 좋겠군.”

강유라는 처음 필웅을 만났을 때의 차갑고 냉혹한 표정을 비춰 보이며 강중민의 뒤로 가서 섰다. 필웅의 표정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이제 알겠나?”

강중민이 끌끌 거리면서 눈을 번뜩였다.

“잘 봤겠지?”

“뭘 말입니까?”

강중민이 심기가 불편한 듯 손에 든 지팡이를 들었다가 땅을 탁 하고 쳤다.

“아직도 모르겠는가? 힘이 곧 본질이야. 자네가 말한 제도며 법률 따위는 구속구에 불과해. 처음엔 그러한 힘의 논리에 반대하고 싶겠지. 자네가 약자라면 말이야.

하지만 조금이라도 힘의 맛을 본 사람들은, 결국 그 체제에 동화될 수밖에 없는 거야. 내 말괄량이 손녀가 결국은 이렇게 그 힘의 근원에 돌아오게 되는 것처럼.”

“궤변입니다!”

“그런가? 잘 생각해 보게. 처음엔 약자였던 자들도, 권력과 돈을 쥐게 되면 결국 똑같이 힘을 추구하게 되는 것을 수없이 봐왔을 텐데?

힘을 추구하고, 그 힘을 사용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야. 인간의 본성을 틀어막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어. 그리고 자연, 그리고 인간의 본성에 반하는 시도는 언제나 실패하지.”

강중민의 말에 필웅은 연줄 없는 평검사였다가 점차 야욕을 드러내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의 중추로 향해 가는 이규필과, 막노동꾼에서 시작했지만 유권자들을 한낱 개돼지로 보는 이영규를 차례로 떠올렸다.

그들도 처음부터 맹목적으로 힘만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그들에게도 그들 나름의 신념과 정의 관념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난한 인생의 경로 끝에 그들이 도달한 것은, 당초 그들이 의도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위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지금의 지위와 위치에 있게 한 선택들에 후회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필웅이 생각에 잠긴 것을 보던 강중민은 그것 보라는 듯 입술을 비죽였다.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나 보군.”

필웅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럼 이제 내 말을 인정하는 겐가?”

필웅이 무슨 소리냐는 듯 강중민을 바라보았다.

“아뇨.”

강중민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쯧 하고 강하게 혀를 찼다.

“명백한 증거를 보고도 믿지 않는 것은 신념도 뭣도 아니야. 그냥 아둔함이고, 고집일 뿐이네.”

필웅이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어떤 사람들이 그렇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절대적인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니죠. 법과 제도라는 구속 장치가 생긴 근본적인 이유는, 힘만을 추구하는 것이 틀렸다는 것을 사람들이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회장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힘의 논리를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옳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건 남의 음식을 전부 빼앗아 먹고는 ‘너도 나라면 먹고 싶었을 거잖아?’라고 우기는 것과 똑같은 일이니까요.”

강중민은 잠시 아무 말 없이 필웅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자네는 더 큰 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힘만 있으면 자네가 원하는 대로 세상을 바로잡을 수도 있어.”

“그게 정상적으로 얻어진 힘이라면 거절할 이유가 없죠. 하지만 그 힘이 쓰레기 같은 범죄자 놈들과 결탁해서 그 대가로 얻어낸 거라면 사양입니다.”

필웅은 말하면서 일부러 강중민과 이영규를 차례로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것보다, 어차피 솔직히 얘기해 줄 생각인 듯하니 더 물어보겠습니다.”

“뭐지?”

“신약을 이용해 정치인들을 이용해먹을 생각입니까?”

강중민의 표정에는 미동도 없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신약은 고위급 정부 관계자나 권력자에게 사용해야 효율적이니까요.”

“효율적이라… 그래, 그렇긴 하군.”

“여기 이영규 대표에게도 이미 신약을 사용한 게 아닙니까?”

“그렇지는 않아.”

“어떻게 믿죠?”

“자네가 믿고 말고는 진실과 아무런 상관이 없네.”

강중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지팡이를 딱 소리가 나게 땅에 두드렸다.

“그럴 계획이 아니라는 말처럼 들리는군요. 그러면 신약을 어디다 쓰려는 겁니까?”

“궁금한가?”

“몹시.”

강중민은 잠시 말을 잇지 않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좋네. 녹음기는 꺼두겠다고 약속하면 내 이야기를 들려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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