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사로 개과천선-135화 (135/151)

135화 피해자의 상처

“그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를…!”

서춘주가 항의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필웅은 재빨리 그의 어깨를 잡고 주저앉혔다.

“일어서지 않아도 말은 잘 들립니다. 간단한 질문 아닙니까? 교주를 본 적이 있는 사람도 없고, 만나 본 사람도 없고, 누군지도 모르는데. 사실 교주라는 건 존재한 적도 없는 것 아니냐고요.”

“보지 못한다고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닙니다!”

“뜬구름 잡는 소린 그만하시죠.”

서춘주는 명백히 동요한 기색이었지만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필웅이 그를 향해 내뱉었다.

“뭐, 좋습니다. 당신이 자백을 하든 하지 않든 결과는 동일할 겁니다. 나는 교주가 누군지, 교주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모든 일을 뒤에서 꾸민 건 누군지 명명백백히 밝혀낼 테니까요. 어차피 당신은 파멸할 겁니다. 당신이 꾸며 놓은 모든 범죄들과 함께 말이죠. 그리고 한 가지 더.”

필웅이 두 손을 모아쥐고 서춘주를 노려보며 물었다.

“왜 정시연 검사를 죽이려고 했죠?”

서춘주가 인상을 찌푸렸다. 마치 무슨 말이냐고 되묻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김영지에게 납치되기 전부터 정시연 검사를 죽이려고 계획했던 것, 다 알고 있습니다. 왜 정시연 검사를 죽이려고 했죠?”

“살인 혐의에 이제는 있지도 않은 음모까지 덮어씌우려는 거라면…!”

“그만. 얼빠진 소리 좀 그만하시죠. 이미 살인죄의 혐의가 분명해졌는데, 굳이 살인예비죄를 덮어씌울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서춘주가 뭔가 반박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스스로 생각해 봐도 딱히 필웅이 그럴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건… 어떻게 알았습니까?”

“이미 당신을 미행할 때부터 당신이 정시연 검사의 살인을 계획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요. 아니면 우리가 왜 당신을 몰래 뒤쫓았겠습니까?”

필웅은 그럴싸하게 들리게 하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

서춘주가 시연을 살해할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건 그가 크리미널 아카이브를 통해 확인한 사실이나, 처음부터 시연의 살해 음모에 대한 객관적인 증거를 가지고 서춘주를 계속해서 뒤쫓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필웅으로서는 합리적인 이유로 자신이 서춘주를 의심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었다.

“개인적인 감정은 아닙니다.”

“그럼 그것도 제3자의 지시겠군요.”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이미 그걸로 대답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필웅이 차갑게 응수했다.

‘역시, 서춘주는 교단에서는 지금 실질적으로 최고 권력자처럼 행세하고 있지만 누군가의 지시를 받고 움직이고 있을 뿐이야. 그건 아직도 정체가 불분명한 교주일까? 아니면….’

필웅은 조용히 서춘주를 지켜보다가, 조사실 밖으로 나가기 위해 일어섰다.

“그러고 보니.”

나가려던 필웅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뒤돌아보았다.

“그 기세등등하던 당신네 원로들도 이제 거의 다 끝장났군요. 죽거나, 체포당하거나, 황대산 같이 감시하에 있거나. 당신이 도움을 청할 곳 따윈 없습니다. 아직 소재파악을 하지 못한 4원로나 6원로도 금방 잡게 되겠죠.”

“쉽지 않을 겁니다.”

“그건 당신이 결정하는 게 아닙니다.”

필웅은 차갑게 대꾸하고는 조사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 * *

“검사님, 지금 서춘주가 벌인 피라미드 사기행각의 피해자들 조사하고 있는데, 잠깐만 와 보시죠. 들어둘 만한 증언이 좀 있는 것 같슴다.”

필웅은 장경의 연락을 받고 장경을 만나러 가기 위해 택시에 올라탔다.

‘그러고 보니 시연이의 위기는 이걸로 끝난 건가.’

분명 서춘주는 시연을 죽이려고 했었고, 실제로 필웅이 막지 않았다면 시연을 쐈을 것이 분명했다.

그의 총구가 향한 곳은 분명 필웅이 아니라 시연이 먼저였다. 아마도 둘 다를 죽일 생각이었겠지만, 우선순위가 시연에게 있었음은 분명했다.

필웅은 피곤한 몸을 택시 뒷좌석에 기대며 생각했다.

‘분명 시연이를 먼저 쏘려고 했었지. 그리고 서춘주는 시연을 죽이라는 지령을 누군가로부터 받았을 거야. 하지만 왜 내가 아니고 시연이지?’

교단과 삼영을 수사하고 있는 것은 물론 필웅과 시연 모두였지만, 필웅이 주도적으로 수사를 진행하고 있음을 그들이 모를 턱이 없었다.

만약 수사 검사를 저지하기 위한 목적이라면, 시연이 아닌 필웅을 먼저 노리는 것이 이치에 맞을 터였다.

필웅이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택시는 서울남부지방경찰서에 도착했다.

“검사님, 오셨슴까.”

장경이 나와 필웅을 맞았다. 장경은 지금 서춘주가 주희필이라는 이름으로 벌인 피라미드 사기 사건의 피해자들을 조사 중이라고 했다.

“이놈, 이거 아주 악질이더만요. 오늘 조사한 사람은 초창기 소위 스텝업 투자에 참여한 사람인데, 언제부터인가 투자금에 대한 이자가 점점 적어지더라는 겁니다. 뭔가 이상해서 서춘주가 운영하는 업체에 자꾸 문의를 했더니, 나중에는 되려 협박을 하더란 말입니다. 서춘주가 잡혀 들어가니까 기존 자금 돌리는 것도 뭔가 꼬인 것 같슴다. 이 판국에 신규 투자자를 유치한다는 광고를 내다니….”

열이 받을 대로 받은 장경이 두서없이 방금 조사한 피해자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필웅은 잠자코 듣고 있다가 질문했다.

“피해를 신고한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예? 어… 아직은 한 10명 정도?”

“그럼 이제 시작이겠군요.”

필웅은 서춘주의 강연이 이뤄지던 날 행사장에 모였던 인파를 떠올렸다. 지금은 뭔가 이상하다는 낌새를 눈치챈 정도의 사람들만 신고를 해 왔지만, 그 행사장에 모여있던 인파들이 모두 피라미드 사기의 대상자라고 가정하면 피해자 수는 눈덩이처럼 불어날 터였다.

“저도 한 번 피해자를 만나볼 수 있을까요?”

“예, 이쪽으로.”

장경은 조사실로 필웅을 안내했다.

조사실에 필웅이 들어서니 뭔가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눈빛의 중년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중년 남자도 필웅을 발견하고는 벌떡 일어섰다.

“검사님! 제 얘기 좀 들어 주십쇼!”

“피해자분, 걱정 마세요. 이 검사님께서 다 잘 들어주실 검다. 아까 저한테 해 주신 얘기 다시 한번 해 주시죠.”

남자는 풀썩 주저앉더니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 돈이 어떤 돈인데….”

“진정하시고, 한 번 자세히 얘기해 보세요.”

필웅이 자리에 앉아 남자의 손을 잡으며 그를 진정시키고는 말했다.

“저는 얼마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잘리고, 받은 퇴직금으로 작은 가게를 운영할까 해서 이리저리 알아보고 다니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친구 놈이 와서는 좋은 투자처가 있다며 저를 꼬드기더군요. 1000만원을 넣으면 1000만원을 그대로 회수할 수 있다면서 말이죠. 그러면서 통장 거래내역도 보여줬습니다. 정말로 1000만원을 투자해서 1900만원을 돌려받은 기록이 있더군요.”

남자는 말하면서 시선을 밑으로 떨구었다.

“처음엔 반신반의하면서 퇴직금 중 절반만 넣었습니다. 한동안은 이자가 꼬박꼬박 들어오더군요. 그때 멈췄어야 했는데… 홀린 듯이 퇴직금을 전부 다 거기에 넣어 버렸습니다.”

남자는 불안하게 덜덜 떨리는 자신의 두 손을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그때부터였습니다. 이자가 지급되지 않거나, 아주 적게만 지급되더군요. 업체에 항의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오히려 업무방해로 고발하겠다는 으름장까지 받았지요.

그 퇴직금은 앞으로 저희 가족이 먹고 살 터전을 마련할 재산 전부였습니다. 아내 몰래 투자했기에 아내는 이 사실을 몰라요. 만약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충격에 어떻게 되어 버릴지도 모릅니다.”

남자의 눈가에 기어코 고통의 눈물이 한 점 어리었다.

장경은 안쓰러워하며 휴지를 뽑아 그에게 건넸다. 남자는 꾸벅 인사를 하고는 휴지를 집어 들어 눈가를 찍어냈다.

“혹시 얼마 전 강연회에도 갔었습니까?”

필웅이 그에게 묻자, 남자는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아무래도 직원들한테 얘기해서는 말이 안 통할 것 같아, 주희필 씨를 직접 만나서 하소연을 해 보려고 했지요. 역시나 만나게 해 주지 않더군요.

아, 잠깐. 그러고 보니 저 말고도 그런 식으로 찾아온 사람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잠자코 남자의 말을 듣던 필웅이 긴장하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누가 더 있었다고요? 어떤 사람이죠?”

필웅이 다급하게 물었다.

필웅이 긴장하면서 그의 대답을 기다리자, 남자는 생각을 쥐어짜 보려고 노력하다가 입을 열었다.

“키가 크고 젊은 남자였습니다. 제가 남의 겉모습을 평가할 처지는 아니지만, 옷차림이나 외관이 조금 추레해 보이더군요. 뒤에서 봐서 얼굴은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느낌상 나이는 40대 중반 정도? 그리고 주희필 대표랑도 개인적으로 친한 사이인 듯했습니다. 실수였는지는 몰라도, 주희필 대표를 ‘형’이라고 하더군요.

형이라고 하면서 뭔가를 계속해서 다급하게 말하는 것 같았는데, 정확히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주희필 대표는 그 사람도 귀찮다는 듯 쳐내더라구요.”

‘형이라고?’

서춘주의 가족관계를 살펴본 적은 없었기에, 필웅은 정말로 친동생이 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당장 월흥 리조트 사건 때 죽은 이원필도 교단과 모종의 커넥션이 있을 것이라고 의심되는 이규필의 동생이 아니던가. 물론 이규필 본인은 이원필과의 관계를 극구 부인하고 있었지만.

“혹시 서춘주, 그러니까 주희필 대표와 실제로 좀 닮아 보이던가요?”

남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요. 얼굴은 제대로 보지 못해서요. 친동생일까요?”

“형사님, 서춘주의 가족관계 조사 좀 부탁드립니다.”

“예, 알겠슴다.”

필웅과 장경은 남자의 손을 맞잡고 그를 격려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꼭 잡아드릴 테니 마음 푹 놓으십쇼.”

“예… 감사합니다, 형사님. 그런데.”

남자가 애처로운 눈빛으로 필웅과 장경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사기당한 돈… 돌려받을 수 있을까요?”

필웅은 쓴 입맛을 다셨다.

사기 사건의 가장 어려운 점이 이것이었다.

수사기관은 범죄로서의 사기를 조사하고, 그에 따른 형벌을 내릴 뿐, 사기 사건의 피해자인 피해자들에게 수사기관이 배상을 해 주는 것은 아니다.

물론 간혹 사정이 딱한 피해자들에게 담당 수사관이나 검사들이 십시일반으로 도의적인 위로금을 건네는 경우도 있기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의 선택이고 언제나 그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었다.

결국 사기 사건은 민사소송으로 피해자가 범죄자들로부터 배상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 소송절차는 길고 지루하게 이어지는 데다가 이미 사기를 당해 재산적 피해를 입은 피해자들이 제대로 대응을 하기도 어려웠다.

게다가 보통 사기를 치는 범죄자들은 지능범인 경우가 대부분이라, 사기를 쳐 놓고는 재산을 다른 곳으로 빼돌려 두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래서 사기 피해자들은 소송에서 이겨 놓고도 막상 돈을 내놓으라고 하면 배째라는 식으로 나오는 범죄자들을 보며 울분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필웅과 장경은 결국 최대한 노력해 보겠다는 원론적인 대답밖에는 줄 수 없었다.

남자는 그것조차도 고마워하며 몇 번이고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힘없이 경찰서를 떠났다.

장경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그 개새끼들을 잡아넣어도 저분들은 여전히 힘들게 살아가야 하겠죠.”

필웅은 그의 말에 뭐라 대꾸할 말이 없었다.

장경도 필웅의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기에, 푹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그래도 안 잡아넣는 것보단 낫겠죠. 서춘주의 가족관계를 알아보도록 하겠슴다.”

왠지 모르게 기운 빠져 보이는 장경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필웅의 생각도 복잡해졌다.

‘범죄자들을 가두고, 벌금을 때려도 그 상처는 이렇게 진득하게 남는구나.’

필웅은 착잡해 하며 장경의 뒤를 따라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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