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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로 개과천선-134화 (134/151)

134화 진짜 적을 찾아갈 시간

나가려던 필웅은 이 차장의 심각한 목소리에 의자를 끌어다가 다시 앉았다.

“무슨 일이죠? 징계위원회는 종료됐다고 하셨잖습니까.”

“징계위원회의 일이 아니야.”

이 차장은 무겁게 대답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잠시 천천히 회의실 안을 서성였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가?”

이 차장의 질문에 필웅이 무슨 소린지 못 알아듣겠다는 듯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뭘 말입니까? 징계위원회의 대상자가 방어권을 행사하는 건 당연한…”

“멍청한 소리하지 말게. 무슨 뜻인지 다 알고 있잖아.”

필웅은 피식 웃고는 다리를 꼬고 앉았다.

“다시 한번 똑같이 대답할 수밖에 없군요. 뭘 말입니까? 검사가 범죄를 수사하는 게 잘못됐다고 말하고 싶으신 겁니까?”

이 차장은 말없이 서성이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지루해진 필웅이 다시 한번 입을 열려고 할 때 이 차장이 입을 먼저 열었다.

“자네를 영산으로 보내고 나서는 이제 좀 조용해질 거라고 생각했지.”

필웅은 잠자코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런데 영산을 가더니 이제는 더 큰 스케일로 사고를 치는군. 조 프로. 말해 봐. 대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야? 이제는 지칠 때도 되지 않았나?”

“검사가 검사 일을 하는데 지치고 말고가 어딨겠습니까? 범죄자가 눈에 띄면 조져야지.”

“후…”

이 차장은 이마에 손을 짚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자리에 풀썩 앉았다.

“조 프로. 난 자네가 좋아. 보통 이 정도로 밟아주면 정신을 못 차리고 꼬리를 흔드는 개가 되거나, 아니면 모든 걸 포기한 채 폐인이 되어 버리지. 하지만 자넨 달라. 밟을수록 더 악착같이 달려드는 게 젊을 적 내 모습을 보는 것 같단 말이지.”

필웅이 고개를 내두르며 말했다.

“저는 재벌들로부터 청탁을 받고 후배를 내치지 않았는데, 제가 어떻게 차장님과 비슷할 수가 있습니까?”

이 차장이 끌끌거리며 웃었다.

“되바라지고 위아래 없는 것까지 똑같군. 나도 원래부터 이랬던 건 아니야. 나도 자네처럼 열심히 하면 사회가 바뀔 거라는 믿음을 가진 적이 있었지.

그래, 자네가 그렇게 발에 불이 나게 뛰어서 범죄자들을 잡아넣는다고 치지. 강무완 사장님도 잡아넣고 말이야. 그러면 이 나라가 바뀔 것 같은가? 강무완 사장님이 사라지면 강중민 회장님이 그 자리를 대신하겠지. 강중민 회장님도 사라지면 그다음은 강유라가 되려나? 그 강유라까지도 사라져도, 바뀔 건 아무것도 없어.

이 사회는 진공 상태를 거부하지. 삼영의 사라진 빈자리를 순식간에 누군가가 메꾸게 될 거야. 그러면 또 그를 상대로 싸움을 되풀이할 텐가?”

“그 말씀에는 어린애들도 대답할 수 있겠군요.”

이 차장이 흥미롭다는 듯 대답을 재촉하는 눈빛으로 필웅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뒤질 건데 밥은 왜 먹습니까? 그냥 뒤지지.”

이 차장의 눈가에 씰룩이며 주름이 졌다.

잠시 후, 이 차장이 폭소를 터뜨렸다.

“푸하하!”

이 차장은 뭐가 그리 웃긴지 한참을 배를 잡고 웃다가 창가에 기대서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아, 재밌구만. 나한테 그런 식으로 얘기하는 검사를 보는 것도 오랜만이야.”

이 차장은 여전히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로 필웅에게 물었다.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지. 난 여전히 자네가 마음에 들어.”

“방금 전까지 제 옷을 벗기려고 안달을 내시지 않았습니까.”

“그건 그거고. 오히려 순응하는 놈들보단 그렇게 악착같이 덤비는 쪽이 내 취향이지.”

말을 하다가 이 차장은 잠시 쯧 하고 혀를 찼다.

“유 검사 같은 되다 만 놈들이랑은 다르지.”

“유 검사님은 차장님의 심복 아닙니까?”

“심복? 그냥 말을 잘 들으니 대충 써먹는 것뿐이야. 말을 잘 듣는 놈들은 말을 듣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못하지. 자기 머리로 생각을 못 하니까.”

이 차장이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나와 다시 일해볼 생각 없나?”

필웅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 차장은 그것이 고민의 뜻이라고 생각했는지 재차 말을 이어갔다.

“나는 이미 가장 유력한 남부지검장 후보야. 다음 인사발령 때 지검장이 되겠지. 그때 자넬 부장검사로 앉혀 주겠네. 물론, 금방 차장검사도 될 수 있을 거야.”

“솔깃한 제안이군요.”

“그렇지? 잘 생각해 봐. 부장이 되고 차장이 되면 자네가 하고 싶은 건 마음껏 할 수 있다고.”

이 차장이 신이 나서 말하자 필웅이 피식 웃었다.

“그래도 안 할 겁니다.”

이 차장의 눈썹 한쪽이 치켜올라갔다.

“뭐? 왜?”

“대가 없는 선물은 없습니다. 제가 부장검사가 된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더 자유롭지 못하게 되겠지요.

제안은 감사합니다만 더 할 말씀 없으시면 나가보겠습니다.”

필웅은 이 차장이 뭐라고 말을 더 꺼내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회의실 밖으로 나왔다.

이제 진짜 적을 찾아갈 시간이었다.

* * *

필웅은 서춘주의 신문을 위해 조사실로 들어갔다.

서춘주는 필웅이 들어오는 모습을 보자 불안하게 눈을 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지막에 봤던 모습보다는 많이 진정한 상태인 것 같았다.

“밥은 입에 맞습니까?”

서춘주는 일단 살인 혐의로 구속된 상태였다. 증거도 명확했고, 서춘주가 체포될 당시에 끊임없이 자신의 범행에 대해서 중얼거리고 있었기에 자백도 충분했다. 그가 처벌을 받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따라서, 사실 필웅은 살인사건에 대한 신문을 위해 그와 대면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필웅의 질문에 침묵을 지키던 서춘주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설마 밥 잘 먹고 있나 확인하려고 온 건 아닐 테고. 왜 온 겁니까?”

필웅은 보고 있던 척하던 서류철을 내려놓았다.

“당신이 김영지의 살인혐의를 벗을 수 없다는 것쯤은 잘 아시겠지요.”

“정당방위를 주장할 겁니다.”

“제가 그렇게 놔두지 않을 겁니다.”

“어떻게 말이죠? 저와 김영지는 격투 중이었습니다. 제가 죽이지 않으면 제가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구요.”

서춘주는 점점 자신감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필웅은 피로감을 느꼈다.

“설사 격투 중이었다고 해도 과잉방위입니다. 당신은 이미 쓰러진 김영지에게 한 발을 다시 한번 쐈지요. 이미 방위의 범위를 벗어난 겁니다.”

“뭐, 그런 얘기는 제 변호사랑 하시죠.”

서춘주는 흥미를 잃었다는 듯 성의없이 대답하고는 시선을 돌렸다. 이야기를 이어가고 싶지 않다는 의사표시였다.

“서춘주 씨.”

필웅이 그를 불렀지만, 서춘주는 여전히 필웅을 돌아보지 않았다.

“저는 뭔가를 협조해 달라고 찾아온 게 아닙니다.”

서춘주가 그제야 힐끔 필웅을 바라보았다.

“저는 경고를 하러 온 겁니다.

당신이 김영지의 살인 건 외의 다른 범죄에 대해 자백하거나 증거를 내어놓지 않으면, 저는 생각할 수 있는 최고 형량으로 당신을 기소할 겁니다. 만약 제가 담당 검사가 되지 않으면, 누가 사건을 잡더라도 최고 형량으로 기소하지 않으면 못 배기게 만들 거구요.”

“당신에게 그런 힘 따윈 없다는 것 잘 알고 있….”

“계속 그렇게 제 인내심을 시험해 보시죠. 어차피 전 더 잃을 것도 없습니다.”

필웅이 으르렁대며 서춘주의 말을 끊었다.

“자, 다시 시작해 보죠.”

필웅이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교주는 어디에 있습니까?”

“모릅니다.”

“교주와 삼영은 무슨 계획을 꾸미고 있는 거죠?”

서춘주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모릅니다.”

필웅은 다시 그의 크리미널 아카이브를 이끌어내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은전차사가 알려 준 크리미널 아카이브의 ‘진정한 사용법’은, 바로 크리미널 아카이브를 갖고 있는 이들에게 자신의 범죄를 직시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물론 피해자인데 크리미널 아카이브를 갖고 있는 자들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조요경, 네 표현에 의하면 크리미널 아카이브는 자신의 마음속에 감춰진 어둠을 보여 주는 거울이다. 보통은 그 어둠을 이끌어 내어 보여 주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에 압도당하거나, 죄책감에 몸부림치겠지.

하지만 진짜 악당 놈들은 설령 그 어둠을 눈앞에 들이댄다고 하더라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수도 있다. 어디까지나 어둠을 끄집어내어 그에게 보여 주어 일시적으로 정신을 연약하게 것이지, 정신을 잃게 하거나 최면에 빠트리는 능력은 아니라는 점 명심해.”

필웅은 은전차사의 조언을 떠올리면서, 서춘주가 다시 한번 스스로의 크리미널 아카이브를 직시하도록 힘을 이끌어냈다.

서춘주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흐…흐윽…?”

그러나 서춘주의 모습은 처음 크리미널 아카이브를 대면했을 때보다는 확실히 덜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필웅은 그때를 놓치지 않고 재차 질문했다.

“그 신약을 삼영과 교단은 어떻게 사용할 계획입니까?”

서춘주가 몰려드는 정신적 공격을 물리치기라도 하려는 듯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애초에 조요경의 효과는 그의 정신 내부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가 마음대로 떨쳐낼 수는 없었다.

그는 계속해서 그가 명령해서 죽였거나, 직접 죽였거나, 사기를 당해 재산을 전부 날리고 길바닥에 나앉은 사람들의 환상을 보고 있었다.

“난… 몰라요. 그냥 그걸 이용해서 교단을 장악하라고만….”

“뭐라구요?”

“교단을… 원로들을 장악하라고 했어요.”

서춘주가 숨을 헐떡이며 대답했다.

“신약을 원로들에게 사용했다는 겁니까?”

“맞아요… 신약의 프로토타입을….”

그제야 필웅은 오점순을 신문할 당시 그녀가 기이하게 행동했던 이유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의심을 해 온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그게 사실로 밝혀지니 충격적이었다.

‘이익을 위해서는 같은 편이고 뭐고 없다는 거군.’

“그런 지시를 한 게 누굽니까?”

“교주님이….”

“교주는 누구죠!?”

그때, 서춘주가 머리를 부여잡고 있던 손을 내리면서 눈을 떴다.

어쨌든, 크리미널 아카이브는 상대방을 계속해서 혼란에 빠트릴 수 있는 무기는 아니었다.

자주 사용할수록 적응할 수도 있고, 특히 죄책감이 상대적으로 없는 범죄자들의 경우 더더욱 효과가 없을 것이었다. 서춘주가 바로 그런 유형이었다.

서춘주는 얼마 지나지 않아 호흡을 다시 가다듬었다.

“어, 음… 갑자기 이상한 환상 같은 것들이 보여서 말입니다. 종교인은 가끔 겪고는 하는 현상이죠. 말씀드렸듯, 교주님이 누구신지, 어디에 계신지는 말할 수 없습니다.”

서춘주의 말에 필웅은 실소를 금치 못했지만, 한편으로는 조금만 더 밀어붙였으면 교주를 알아냈을 수 있었을 거라는 사실이 못내 아쉬웠다.

“솔직히 말해 보시죠. 당신도 교주를 본 적이 없는 것 아닙니까?”

서춘주의 표정에 순간 약간의 당황이 스쳐 지나갔다.

“무슨 말입니까? 최고원로가 없는 지금 교단의 최고위직은 바로 나…”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 하고. 그래서 교주를 봤습니까, 못 봤습니까?”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서춘주는 말하고는 다시 입을 꾹 닫았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 떠오른 동요와 당황의 기색을 필웅은 놓치지 않았다.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서춘주는 필웅의 눈길을 피하고 있었다.

그러나 필웅의 집요한 눈빛은 그를 물고 놔주지 않았다.

“사실 교주 같은 건 존재한 적도 없던 것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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