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징계위원회
“시연아, 박 형사님 깨우고 119랑 경찰에 신고 좀 해줘!”
“응, 알았어.”
옆에 서서 일련의 사태에 당황하고 있던 시연은 필웅의 외침에 비로소 정신을 차린 듯, 이미 일어나기 시작한 장경과 함께 건물 밖으로 뛰어나갔다.
어두운 건물 안에는 필웅과 기절한 서춘주, 그리고 김영지만 남았다.
“쿨럭!”
김영지의 피 섞인 기침 소리에 필웅은 비로소 옆에 쓰러진 김영지에게 다가갔다.
“괜찮습니까?”
“이게 괜찮아 보이나?”
입을 열기도 힘겨워 보였지만 김영지는 말대꾸를 잊지 않았다.
필웅은 그의 상처 부위를 내려다보았다.
이미 지혈이 무의미할 정도로 상처가 벌어져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조금만 버티세요. 곧 구급차가 올 겁니다.”
“개소리하지 마. 이게 끝인 걸 나도 잘 알아.”
김영지가 다시 폐를 토해낼 듯 격하게 기침했다.
간신히 기침을 멈춘 그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다시 힘들게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이러려던 건 아니었어.”
“말하지 마십시오.”
“어차피 죽을 거니까 상관없어. 처음부터 너희들을 죽일 생각은 없었다. 아니… 교단 놈들도 죽일 생각까진 없었지. 그저 너희들이 저놈들을 잡아넣는 모습을 구경하는 걸로 족하다고 생각했어. 지평이가 죽기 전까지는 말이야.”
권지평은 그의 숨겨진 자식으로, 월흥 리조트 붕괴 사고 때 목숨을 잃은 학생이었다.
“그때 깨달았어. 그저 악한들을 감옥에 보내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감옥에 들어간 악당은 결국 언제든 다시 터질 수 있는 폭탄일 뿐이다. 그 폭탄을 제거하기 위해 악당은 죽어야 하지만, 국가는 그 일을 해 주지 않아.”
필웅은 그의 말에 바로 반박하지 않았다. 죽어가는 그와 논쟁을 벌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틀리다고 말해 봐.”
“당신의 분노에는 공감합니다.”
필웅이 그의 곁에 서서 그의 꺼져 가는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저들이 규칙을 지키지 않으니 나도 지키지 않겠다고 하는 건 궤변입니다. 우리는 언제든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고, 그럴 수 있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나는 저들과 같은 수준이 되지 않겠습니다.”
“항상… 정도를 걸어온 너야 그렇겠지.”
김영지의 목소리가 점점 힘을 잃어갔다. 필웅은 그가 잡고 있는 김영지의 팔에서도 점점 기력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천만에요. 저도 악당이었습니다.”
“언제…?”
“먼 미래에서요.”
김영지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필웅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에 이내 희미한 미소가 스쳐 갔다.
“웃기지도 않는 농담이군….”
그의 목소리가 점점 옅어졌다.
“무슨 방식이 됐든, 교단은 사라져야 해. 무슨 말인지 알겠지?”
“예, 알고 있습니다.”
“한 가지 알려줄 것이 있다.”
간헐적으로 터져 나오던 그의 기침 소리조차도 힘을 잃어갔다.
“교주는… 제8요일 교단의 교주는… 누구도 본 적이 없어.”
필웅이 자기도 모르게 몸을 그에게 더 가까이 기울였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말 그대로야. 원로들 중에서도 실제로 그를 대면한 자는 없어… 지금 생각해 보면….”
필웅은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지만, 점점 희미해져 가는 그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김영지의 피 묻은 입술이 그렇게 닫혔다.
필웅은 그의 입술이 다시 열릴 일은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바깥에서 사이렌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필웅은 도착한 경찰들에게 끌려가는 서춘주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어느새 정신을 차린 장경이 뒤통수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다가왔다.
“어휴… 어떻게 된 겁니까? 검사님이 잡으신 거예요?”
필웅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시연도 그에게 다가왔다.
“서춘주는 어떻게 된 거야? 왜 갑자기…?”
시연은 서춘주가 머리를 감싸 쥐며 쓰러지는 모습을 모두 옆에서 지켜보았기에, 갑자기 보인 그의 이상한 행동에 어리둥절해 있었다.
당장이라도 총을 쏠 것 같이 굴던 서춘주가 총을 떨어트리고 미친 사람처럼 행동한 것이 시연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글쎄? 갑자기 죄책감이라도 들었나 보지.”
“그러고 보니 김영지는? 어떻게 됐어?”
필웅은 말없이 고개를 좌우로 가로저었다.
장경과 시연은 말없이 숙연한 기분이 되었다.
비록 위험한 인물이고 마지막에는 그들을 죽이려고까지 했지만, 어쨌든 여러 차례 그의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었기에 시연과 장경은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필웅의 말에 시연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필웅은 더 설명하지 않고 앞장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디 가?”
시연이 그를 뒤쫓아오며 물었다.
필웅이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징계위원회를 준비해야지.”
* * *
징계위원회 소집일.
징계위원회가 열리는 회의실에는 이규필 차장과 예의 두 부장검사가 앉아 있었다.
이규필 차장이 이죽거리며 필웅에게 말을 걸었다.
“조필웅 검사, 이번에는 절차에 맞춰 징계위원회를 소집했으니, 징계위원회가 위법한 것은 아니겠지? 자네가 대답해 보게.”
“절차에 하자는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잘 됐군. 그럼 지난 시간의 논의를 이어가 보지. 혐의를 인정하나?”
필웅은 꼿꼿이 앉아 이규필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이규필의 눈에는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야망, 대상을 알 수 없는 분노, 비열한 승리감, 미묘한 희열.
그 어디에도 필웅을 이대로 놓아 주겠다는 자비심이나 이해심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필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전에 제가 한 가지 이야기를 들려 드리고 싶습니다.”
“뭐지?”
필웅이 두 손을 들어 펼쳐 보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첫 번째 상황입니다. 두 소년이 과자를 훔치기 위해 가게에 갔습니다. 과자를 고르던 두 소년, 편의상 A와 B라고 하죠. A와 B는 마침 사장님과 직원들이 모두 가게를 비웠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A는 돈이 없었고, 무척 배가 고팠죠. 망설이는 A에게 B가 넌지시 말합니다. ‘이것 봐. 아무도 보는 눈이 없네? 지금 누가 집어가도 모르겠는걸?’ 그 말에 넘어간 A는 과자를 훔칩니다. 그런데 사실 B는 가게 사장의 아들이었고, B는 바로 사장에게 A가 한 짓을 고자질하게 됩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이규필 차장이 짜증스럽게 묻자 필웅이 조용히 손을 들어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음을 알렸다.
“두 번째 상황입니다. 아까의 A와 B 이야기로 돌아가 보죠. 두 소년은 이번에도 함께 가게를 갑니다. 이번에는 훔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과자를 사기 위해서요.
그런데 이번에도 가게를 보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눈치챈 B가 A에게 넌지시 말합니다. ‘이것 봐.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네? 지금 누가 집어가도 모르겠는걸?’ A는 과자를 훔치고, B는 당연히 이를 고자질합니다.”
필웅이 이야기를 끝맺고 잠시 의도적으로 침묵하다가, 이규필과 부장검사들을 돌아보았다.
“두 사례의 차이점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이규필 차장이 인상을 쓰며 되물었다.
“뭐가 다르단 말인가? 결국 A는 절도범이지. B가 그를 함정에 빠트렸든, 빠트렸지 않든 말이야.”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다고?”
필웅이 대답했다.
“두 사례 간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결국 두 사례에서 가장 다른 점은, A가 처음부터 범죄를 저지를 계획이었는지 아니었는지에 있죠. 맞습니까?”
이규필 차장과 두 부장검사는 서로를 불안하게 마주 보더니 마지못해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두 사례에서 B는 모두 A를 함정에 빠트립니다. 그러나 그 함정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죠. 말하자면 단순히 기회를 주었느냐, 아니면 범죄의 마음을 실행하게 만들었냐의 차이인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A가 범죄를 저질렀다는 점은 같지 않나! 그리고 우리는 범죄자를 처벌해야 하는 사람들이고!”
이규필 차장이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책상을 탕 두드리며 외쳤다. 필웅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저희는 범죄자를 그냥 처벌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규필이 뭐라고 반박하기도 전에 필웅이 말했다.
“만일 저희가 범죄자를 처벌하는 사람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선량한 사람을 꼬드겨서 범죄자로 만든 다음에 처벌해도 괜찮은 것입니까?”
“그건 얘기가 다르지! 애초에 선량한 사람이라면 꼬드겨도 범죄를 저지르지 않아! 범죄는 저지를 놈이 저지르는 거라고.”
필웅은 잠시 예전 이규필 차장이 ‘범죄자들에게도 사연이 있으니 너무 괴물로 보지 말아라’고 해준 말이 떠올랐다.
사실은 이규필 차장이 보호하려는 특정 범죄자들에게만 적용되는 이야기였지만.
‘그때 당신이 말한 범죄자와 지금의 범죄자는 다른 생물이기라도 한단 말인가?’
필웅은 속으로 역겨움을 느꼈지만 내색하지 않고 침착하게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다르지 않습니다. 애초에 완벽하게 선량한 사람 같은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누구든 눈앞에 다가오는 유혹에는 취약하기 마련이죠. 단지 그 유혹에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이 다를 뿐입니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서, 잘 생각해 보십시오. 첫 번째 이야기에서 B가 충동질을 하지 않았다면, A가 도둑질을 하지 않았을까요?”
부장검사가 자기도 모르게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무의식적으로 대답했다.
“아니, 그래도 A는 도둑질을 했겠지. 애초에 가게를 털려고 들어간 거잖아?”
옆의 부장검사도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맞습니다. 첫 번째 상황에서 B는 단지 A가 언제 행동할 수 있는지를 귀띔해 줬을 뿐, 처음부터 A가 범죄를 저지르라고 꼬드긴 건 아니죠. 애초에 처음부터 A는 범죄를 저지를 생각이었으니까요.”
이규필 차장이 물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뭐가 말인가?”
필웅이 어깨를 으쓱했다.
“두 사례에서 모두 B를 처벌한다면 말입니다. 애초에 첫 번째 상황에서 B는 한 것도 없습니다. B가 귀띔하지 않았어도 A는 어느 타이밍이든 절도를 했겠죠. 하지만 두 번째 상황이라면 사실상 B가 A의 범죄를 조장한 겁니다. 범죄에 대한 기여도가 다르단 말입니다.”
처음 필웅의 질문에 대답했던 부장검사가 턱을 쓰다듬으면서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 그런 것 같기도 한데….”
그러나 이규필 차장이 그를 노려보자 그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자넨 자네가 두 번째 상황에서의 B라는 건가?”
필웅이 똑바로 그를 쳐다보며 대답했다.
“뭐가 다르죠? 제가 그 자리에 있든 없든, 오점순은 계획을 실행했을 겁니다.”
“자네가 그 범죄의 실행이 더 쉬워지도록 만들어 줬잖아!”
“본질을 외면하지 마시죠. 먼저 범행계획이 있었고, 그 위에 제가 첨가물을 더한 거지 제가 첨가물을 갖고 왔다고 해서 범행계획이 세워진 게 아니지 않습니까? 범행계획은 제가 있든 없든 어쨌든 완성됐을 겁니다. 좀 더 수월하진 않겠지만, 저희가 더 포착하기 어려운 형태로요. 제가 도와줘서 범행계획을 수정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빨리 범행을 파악할 수 있었겠습니까?”
필웅의 지적에 이규필 차장은 말을 잃었다.
그가 뭐라도 말해 보라는 듯 옆의 부장검사들을 돌아보았지만, 부장검사들도 갑자기 먼 산을 보거나 쓸데없는 것을 끄적이는 등 딴청을 피웠다.
이규필은 잠시 그렇게 필웅을 노려보다가 선언했다.
“일단 징계위원회는 이걸로 마치기로 하지. 의결 결과는 곧 알려 주겠네.”
“감사합니다.”
눈치를 보던 부장검사들이 헛기침을 하며 더 이상 이 분위기에 엮이기 싫다는 듯 서둘러 방을 나섰다.
필웅도 일어서려는 찰나, 이규필 차장이 그에게 손짓했다.
“자네는 잠깐 남지. 할 얘기가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