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죽음의 실마리
갈등하는 필웅의 내면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서춘주가 말을 이었다.
“저는 이원필 원로가 월흥 리조트를 폭파한 데 어느 정도 김영지 원로의 책임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고민에 빠져 있던 필웅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째서죠?”
서춘주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때 장경이 차를 세웠다.
“저기서 말씀 나누시죠.”
장경이 가리킨 곳은 서울남부지방경찰서였다.
서춘주가 황당해하며 말했다.
“아니, 경찰서라구요?”
장경이 눈을 끔벅거렸다.
“그럼 어딘 줄 알았슴까?”
“저는 피해자입니다! 허어, 저는 다른 자리를 말씀하시길래 좀 더 조용하고 안정을 찾을 수 있는 곳인 줄 알았거늘…”
“피해자인데 경찰서보다 안정되는 데가 어딨슴까? 밖에 돌아다니다가 어디서 암살자가 또 튀어나올 줄 알구요?”
장경이 뻔뻔하게 대꾸하자 서춘주도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끄응… 좋습니다. 하지만 저는 어디까지나 피해자로 온 겁니다.”
“뭐 다들 그렇게들 이야기하죠.”
장경이 느물거리면서 차 밖으로 나가 뒷문을 열고 서춘주를 부축해 내려 주었다.
“그럼…”
필웅이 여전히 고민에서 벗어나지 못한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들려주신 흥미로운 이야기는 안에서 이어서 하도록 하죠.”
* * *
“정 프로, 복귀한 거 축하해.”
이규필 차장이 시연이 복귀한 것을 어떻게 알고 시연이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그녀의 사무실에 찾아와 말을 건넸다.
“아, 차장님. 죄송합니다. 갑자기 자리를 비우게 돼서….”
“괜찮아, 괜찮아! 큰일 하다 보면 그럴 수 있지.”
이규필 차장은 못 본 사이에 더 비대해져 있었다.
원래 적당히 체격이 좋은 중년 남자로 보였던 그는, 요새 점점 살이 붙어 후덕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후덕해지고 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체격뿐이었고, 그의 날카로운 눈매는 차오른 볼살에서도 여전히 번뜩이며 빛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살이 올랐음에도 후덕한 아저씨 같은 이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거대한 조직의 권력자 같은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뭐, 거대한 조직의 권력자가 맞다면 맞달까.’
시연은 짧게 감상을 마쳤다.
그런 이규필 차장이 눈을 빛내며 입을 열자 시연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영산에 갔다 왔다면서?”
시연은 일단은 개인적인 사유로 휴직 중인 것으로 해 두고 떠났지만, 이규필은 그녀의 행선지가 어디인지 이미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의 행적 정도는 손바닥 안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예… 잠깐.”
“필웅이는 잘 지내나?”
“예,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 아주 바쁜 것 같더구만.”
이규필 차장이 의미심장하게 말하며 권하지도 않았는데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시연은 긴장 속에서도 그가 과연 어느 정도까지 알고 있는 것인지 탐색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차장님, 상심이 크시겠습니다.”
“응? 무슨 소린가?”
“영산에 있다가 우연히 들었는데, 얼마 전 리조트 사고로 돌아가신 분이 동생 분이시라고.”
이규필 차장은 처음에 무슨 소리냐는 듯이 되묻더니 시연의 말을 듣고 무릎을 탁 치며 뜻밖에도 껄껄거리며 웃었다.
“아아, 원필이? 그놈이야 몇십 년 전에 내놓은 놈이지. 나는 동생이라고는 생각 안 해. 사이비종교에 빠져서 가족들 등골 빼다 팔아먹은 놈인걸, 뭐.”
“가족분들께… 무슨 일이라도?”
“개인적인 일이야. 굳이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는 않군.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야.”
이규필 차장이 말하며 관심 없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어 보였다.
시연은 혼란에 빠졌다.
‘뭐지? 정말 이원필과 의절한 사이인 건가? 당연히 이원필을 통해 교단 그리고 삼영과 연결되어 있는 줄 알았는데…’
시연이 잠시 말을 멈추자 이규필 차장이 씨익 웃으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래, 이제 바로 업무 복귀하는 거지?”
“예, 그렇습니다.”
“그렇구만. 내가 곧 맡길 일이 있어서 곧 부를 테니 잠깐 좀 보자고.”
이규필 차장은 들어왔을 때처럼 휙 일어서서 금세 사라져 버렸다.
시연은 잠시 혼란스러웠지만, 마음을 정리하고는 복사할 자료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마음속으로 새로운 의문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잠깐, 그러고 보니 나한테 맡길 일이라고? 제대로 된 일은 아닐 테고… 또 뭘 꾸미고 있는 거지?’
시연은 불안해하면서 서류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필웅과 장경, 서춘주는 서울남부지방경찰서의 한 쪽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일반 심문실을 사용할 수도 있었지만, 서춘주가 자신이 심문받는 모양새는 싫다며 강력하게 항의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장경이 김도율 계장에게 요청해서 받아 낸 장소였다.
몇 분 전.
남는 방이 있는지 알아보던 김 계장은, 필웅이 서춘주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힐끔힐끔 쳐다보며 장경에게 물었다.
“저게 니가 전에 얘기한 그 사이비종교 대장이냐?”
장경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무식하게 대장이 뭡니까? 교주지. 그리고 자기 말로는 교주도 아니람다.”
“교주가 아니면 뭐야? 중간보스 같은 거냐?”
“중간보스가 아니라 원로라구요. 이게 뭐 조폭인 줄 압니까?”
“야, 하는 짓은 조폭… 아니 조폭보다 더 심한데 호칭만 다르다고 조폭이 점잖은 종교단체 되냐? 내가 볼 땐 그냥 질 나쁜 조폭이야. 조폭 새끼들은 우리 범죄자요 하고 대갈빡에 붙이고 다니기라도 하지, 쟤네들은 뭐냐? 테러에 사기질에 염병들을 하고 있네 아주.”
김 계장이 언짢아하면서 들고 있던 서류철을 탕 소리 나게 책상에 내려치고 저쪽으로 걸어가자, 서춘주가 잠시 무슨 일인가 하고 놀란 눈으로 장경 쪽을 바라보았다.
‘뭐, 틀린 말은 아니구만.’
장경은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김 계장이 한 말을 곱씹어 보았다.
표현이 거칠긴 했지만 사실 김 계장이 지적한 사실은 정확했다. 기본적으로 불법적인 일을 꾸미고 실행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제8요일 교단과 조직폭력배는 다른 점이 없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교단은 짐짓 자신이 벌이는 일들을 합법적인 일처럼 꾸밀 능력과 수단이 있다는 점뿐이었다. 교단의 그런 행위가 교단의 행위를 처벌받기 어렵게 만든다는 점은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여기 정도면 듣는 귀도 없고 조용히 이야기하기 편할 겁니다.”
문을 닫으며 장경이 서춘주에게 말했다.
서춘주는 이리저리 방 안을 둘러보다가 물었다.
“혹시 녹음은 되고 있는 건가요?”
“그런 건 없으니 안심하쇼.”
장경이 불쾌하다는 듯 대답하자, 서춘주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게 아니고… 녹음을 좀 했으면 해서 말입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저야 뭐 거리낄 게 없지만… 형사님이나 검사님이 대화를 나누다가 갑자기 무력 행사를 하고 싶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워낙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허허.”
서춘주가 말하면서 겸연쩍다는 듯이 웃자, 장경은 정말로 당장 무력 행사를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좋슴다. 녹음기 갖고 오죠.”
장경이 자리를 떠나자, 서춘주가 기다렸다는 듯 홀로 남은 필웅에게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영감님, 불안하시지는 않습니까?”
“뭐가요?”
“지금 영감님과 같이 일하고 있는 사람들 말입니다. 박 형사님은 아까 언뜻 들으니 결혼도 하셨다는 것 같은데, 오늘 보셨듯이 이렇게 피가 튀는 살벌한 현장에 함께 다녀도 괜찮겠냐고 여쭤보는 겁니다. 물론 영감님도 그렇고.”
필웅은 별 소릴 다 듣겠다는 듯 언짢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건 당신이 신경 쓸 바가 아니죠.”
서춘주는 끈질겼다.
“영감님께서는 이런 위험한 일을 즐기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위 동료 분들도 정말 그런가요?”
서춘주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것은 사실 필웅의 오랜 고민이기도 했지만, 필웅은 이미 동료들의 마음을 확인한 지 오래였기에 그의 도발에도 넘어가지 않았다.
그때였다.
그동안 열어 보려고 애를 썼지만 나타나지 않았던 서춘주의 크리미널 아카이브가 떠올랐다.
‘어째서 갑자기?’
크리미널 아카이브는 그 사건이 크고 강력한 사건일수록, 그리고 가까이 다가온 사건일수록 명확하게 나타났다.
어쩌면 그와 관련된 사건이 곧 벌어진다는 의미일 수도 있었다.
필웅은 긴장해서 서춘주가 알아채지 못하게 크리미널 아카이브를 조심스럽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정시연 검사…>
<살해…은닉…>
필웅은 눈앞에 새하얘지는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시연이라고?’
필웅은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시연의 죽음의 실마리가 잡히는 기분이었다.
필웅은 순간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고 와락 서춘주의 멱살을 부여잡았다.
“여, 영감님?”
서춘주가 당황한 목소리로 필웅의 손을 떼어내려 노력했지만, 필웅의 손은 바위처럼 그의 멱살을 부여잡고 있었다.
“입 닥쳐!”
필웅이 사납게 외쳤다. 이미 그 스스로가 더 이상 격정에 휩싸인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었다.
“잘 들어. 만약 네놈들의 그 잘난 사업을 위해 한 사람이라도 더 다치게 만든다면, 그 땐 정말 가만두지 않겠어.”
“무슨 소립니까? 대체? 일단 이것 좀 놓고….”
“닥치라고 했다. 명령은 내가 해.”
필웅이 으르렁거리며 서춘주를 부여잡은 손에 더 힘을 주었다.
목이 졸리자 서춘주는 켁켁거리기 시작했다.
“네놈들이 뭘 꾸미고 있는지는 다 알고 있어. 오늘 개수작 부리지 않고 조용히 협조한다면 목숨 정도는 살려 줄지도 모르지. 하지만 단 한 순간이라도 이상한 짓을 한다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어.”
필웅의 눈에 서린 분노에 완전히 제압당한 서춘주는, 뭐라 대꾸도 하지 못하고 땀을 뻘뻘 흘리며 애처롭게 그의 손만 부여잡고 있을 뿐이었다.
“검사님? 이게 무슨 일입니까? 일단 손 놓으세요!”
녹음기를 가지고 돌아온 장경이 눈앞에 들어온 광경을 보고 기겁을 하더니 필웅과 서춘주를 떼어 놓았다.
장경은 두리번거리며 방에 CCTV가 설치되지는 않았는지 살펴보았다.
CCTV가 한 대 있었지만 다행히 꺼진 상태인 모양이었다.
장경이 이마에 흐른 땀을 닦고 방 구석으로 필웅을 데리고 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검사님, 검사님답지 않게 왜 이러십니까. 요새 강압수사하면 큰일 나는 거 다 아시잖아요! 심문해서 의미 있는 정보를 얻어냈는데 강압수사한 거 걸리면 난리 납니다!”
필웅이 크리미널 아카이브에서 무엇을 봤는지 알 턱이 없는 장경이 노심초사하며 필웅을 타이르자 필웅은 숨을 고르고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장경이 필웅의 눈치를 보더니 헛기침을 한 번 하고 필웅에게 말했다.
“검사님은 잠깐 나가 계시는 게 좋겠습니다. 심문 내용은 따로 말씀 드리겠슴다.”
필웅은 아무 말 없이 방을 나섰다.
순간 치기를 참지 못해 서춘주의 멱살을 잡은 것을 약간 반성했지만, 크게 후회는 하지 않았다. 같은 상황이라면 아마 똑같이 반응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시연이를 교단이 노리고 있는 건 분명해졌다. 하지만 언제? 어떻게?’
필웅은 서춘주로부터 정보를 더 얻어내지 못한 것이 분했지만 그렇다고 다시 들어가 서춘주를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가만, 시연이는 검찰청에서 출발했나?’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그들이 시연과 헤어진 지 꽤 시간이 흐른 후였다. 지금 쯤이면 시연이 자료를 대강 정리해 뒀을 터였다.
‘좋아, 일단 검찰청으로 돌아가 시연이를 만나 보자.’
필웅은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서울남부지방경찰서의 방 안, 장경과 서춘주.
장경은 서춘주에게 물컵을 건넸다. 서춘주는 목이 탔는지 금세 한 컵을 다 비웠다.
장경이 노트를 펴들면서 입을 열었다.
“자, 서춘주 씨.”
장경은 손을 뻗어 녹음기를 켜고는 말을 이었다.
“이제 우리 둘뿐이니, 한 번 다 털어놔 봅시다. 오늘 있었던 사건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