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사로 개과천선-26화 (26/151)

26화 오늘은 삼겹살 파티다

진우현에 대한 구속영장이 발부되었다.

시연은 필웅으로부터 녹취록을 전달 받자마자 바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다행히 긴급체포 시한이 끝나기 1분 전 영장을 받아들 수 있었다.

덕분에 시연과 필웅은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후, 그래도 정말 다행이다.”

오전 내내 뛰어 다닌 시연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으로 훔치며 말했다.

“그러게.”

“그래도 아직 끝난 게 아닌 건 알지? 이제 구속했을 뿐이야. 유죄 입증하려면 그래도 김진범이 있어야 될 것 같아.”

“그건 그렇지.”

시연은 쪽잠을 자고 있던 필웅을 깨워 간단히 요기를 하러 청사 앞의 토스트 가게에 온 참이었다.

주인 아주머니가 필웅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어이구, 영감님! 오랜만에 오셨네요!”

“어휴, 영감님 소리 좀 그만하세요. 그냥 필웅 씨라고 부르셔도 되요.”

“에이, 영감님 이름을 어떻게 막 불러요? 뭐 드릴까?”

필웅은 웃으며 햄계란 토스트를 주문했고, 시연은 주스를 주문했다.

“뭐 안 먹어?”

노릇노릇한 반숙 계란이 끼워진 햄계란 토스트를 집어들고 바로 한 입 먹으려다가 필웅이 물었다.

“아, 응. 다이어트 중이야.”

“갑자기 웬 다이어트야?”

“요새 살찐 것 같아서. 나 좀 찐 것 같지?”

시연이 갑자기 풀죽은 눈빛으로 필웅을 돌아보며 물었다.

필웅은 위아래로 그녀를 훑어 보며 대답했다.

“아니?”

“뭐야, 그 눈빛은?”

“자세히 확인하고 말해줘야지. 거짓말할 순 없잖아?”

“그래서, 자세히 확인해 보니 괜찮은 것 같다?”

“응.”

시연은 만족해야 되는 건지 잘 모르겠다는 듯 아리송한 표정을 짓고는 주스를 받아 들고 쭉 빨았다. 필웅도 토스트만 베어물고 우물우물 씹고 있었다.

“참, 이따 뭐해?”

“저녁에? 별 일 없는데.”

“너네 집에서 삼겹살 파티 하자! 박 형사님이랑 서 기자님도 부르고!”

“너 방금 분명 다이어트를 한다고…….”

“너는 그런 사소한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신경 쓰는 게 문제야.”

필웅은 뭐라 대꾸할 생각도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말했다.

“갑자기 웬 삼겹살이야?”

시연이 만족스럽게 주스를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어려운 사건인데 다같이 힘을 모아서 첫 발 힘겹게 내딛었잖아! 자축하는 의미의 파티인 거지!”

“그런데 왜 그걸 우리 집에서…….”

“날씨도 좋고, 너네 집 옥상이라 탁 트여서 좋잖아? 삼겹살 먹자아, 응?”

시연은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필웅의 팔에 매달렸다.

“아, 알았어! 징그러우니까 좀 떨어져.”

“에헤헤, 그럼 이따 삼겹살 파티하는 거다? 아, 박 형사님이랑 서 기자님도 부르자! 다들 너무 고생 많으셨으니까!”

“마음대로 해.”

시연은 주스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빨아마실 기새로 빨대를 빨고는 콧노래를 부르며 다시 사무실로 향했다.

필웅은 그런 그녀를 뒤에서 바라보며 고개를 젓다가, 문득 청사로 향하는 길에 푸르게 서 있는 가로수들을 올려다 보았다.

어느덧 이제 곧 초여름에 접어들듯 신록이 우거지기 시작했다.

* * *

“검사님~ 제가 고기 사왔어요!”

“저는 상추!”

다혜와 장경이 먼저 필웅의 집에 도착했다.

필웅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 물었다.

“아니, 잠깐. 박 형사님. 상추만요? 정말 상추만 사왔다구요?”

“다 하나씩 맡아서 사오기로 한거 아님까?”

“하나씩 맡으라는 뜻은…! 됐습니다. 수저랑 접시 챙기는 거나 도와주세요.”

필웅은 뭔가 한 마디 하려다가 포기하고는 장경에게 일회용 접시와 수저들을 건넸다.

마침 시연의 부모님 집에 불판이 있다고 해서 시연은 불판을 갖고 오기로 했다. 집을 제공한 필웅은 집에서 굴러 다니던 휴대용 가스레인지도 준비하기로 했다.

장경은 신나게 평상 위에 접시를 놓고 접시와 상추들을 꺼내어 이것 저것 펼쳐 놓기 시작했다.

다혜도 날씨가 좋다고 재잘거리며 가져온 고기들을 꺼내 놓았다.

“짠! 불판 가져왔어!”

시연이 처음 필웅이 된 영전을 만나던 날 그랬던 것처럼 계단에서 뛰어 올라오며 쾌활하게 외쳤다. 장경이 뛰어나가 불판을 받아 왔다.

필웅은 휴대용 가스레인지를 꺼내 불판을 위에 올렸다.

“자, 불판은 중앙에 놓고, 형사님은 상추 씻어 와요. 고기는 불판의 오른쪽에! 나머지 반찬들은 이렇게…”

시연이 뭔가 신난 표정으로 가지런히 평상 위에 불판과 음식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필웅은 익히 시연의 정리벽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리저리 음식들을 정리하면서 희번득거리는 시연의 눈빛을 보고는 가끔 시연이 무서워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마실 것들이며 먹을 것들을 펼쳐 놓고 넷이 평상에 걸터 앉았다. 필웅은 왠지 평상이 좁아 보인다고 느꼈다.

‘처음 깨어난 날은 이 평상이 정말 넓어 보인다고 생각했었는데’

필웅, 아니 영전은 처음 필웅으로 깨어난 날을 떠올렸다.

깨어났을 때의 당혹감, 놀라움, 두려움, 그리고 사무치는 외로움까지.

그 날만 해도 필웅은 이 시대에 그저 던져진 낯선 이방인이었다. 그가 가진 유일한 평상은 그에게 너무 넓었다.

그런 그의 세상이, 마치 이 평상처럼 점차 누군가로 그리고 무언가로 채워지고 있었다.

필웅은 왠지 비어 있는 자신이 차오르는 것 같은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을 느꼈다.

그가 오로지 출세만 아는 나영전이었을 때는 일찍이 느껴본 적도 없는 감정이었다.

“뭐해? 배고파. 멍때리지 말고 빨리 고기 구워. 아 참, 두 분은 오늘 초면이신 거 아니에요?”

시연이 생각에 빠진 필웅을 툭 치며 핀잔을 주고는 다혜와 장경에게 말했다.

장경이 쑥스러워하며 대답했다.

“아, 저희 구면입니다.”

“에에? 그래요? 언제 만나셨어요?”

“그게, 뭐, 일하다가 만나게 됐습니다.”

“아.”

시연은 그런가 하는 표정으로 짧게 감탄사를 뱉고는 다혜를 돌아보며 말을 붙였다.

“아, 이번에 진우현 후속 기사는 정말 좋았어요! 그 때 주신 자료도 도움 많이 됐구요.”

“뭘요. 다들 너무 열심히 해주셔서 잘 된 거죠~”

다혜는 부끄러운 듯 손사래를 치며 소주를 꺼내 장경의 잔에 따랐다.

“저도 주세요!”

시연이 잔을 내밀었다.

필웅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쯧쯧 혀를 차며 말했다.

“야, 너는 작작 마셔라.”

“웃으라고 한 말이지? 또 전설의 회식 썰 풀어줘?”

“하지마라…….”

“다혜 씨, 얘가 우리 회식할 때 어땠는지 알아요?”

“오! 뭡니까? 저도 듣고 싶슴다!”

“흐즈믈르그.(하지말라고.)”

“고기 탄다!”

시연은 겉면이 타기 시작하는 삼겹살을 가리키며 필웅의 주의를 돌리고는 소근소근 말을 이었다.

“얘가 부장님한테요~”

“아! 좀!”

티격태격하는 시연과 필웅의 모습이 재밌었는지 장경이 껄껄거리며 웃었다. 다혜도 입을 가리며 킬킬댔다.

필웅은 조금 창피해서 아무 말 없이 고기를 뒤집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도 씰룩씰룩 미소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왠지 나쁘지 않은 기분인걸.’

필웅은 생각했다.

“아, 조금 취하네요~”

다혜가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감싸쥐며 부끄러운 듯 말했다.

장경은 옆에서 그런 그녀를 홀린 듯 바라보고 있었다.

“어, 기자님. 너무 많이 드신 거 아닙니까?”

“그렇죠~? 오늘은 그만 일어나야겠네요~”

다혜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장경은 겨우겨우 그녀를 간신히 부축했다.

다혜는 가볍게 목례하며 감사를 표했다.

“이번 사건 끝까지 잘해봐요! 저도 뭔가 더 알게 되는대로 알려 드릴게요~”

술을 마셔서 그런지 말 끝을 길게 끄는 다혜의 특이한 말투가 더 도드라져 보였다. 필웅은 웃으며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시연을 돌아보았다.

시연은 이미 아까부터 필웅의 무용담(?)을 늘어놓으며 신나게 떠들다가 먼저 평상에 엎어져 잠들어 있었다.

필웅은 못 말린다는 듯 끌끌대고는 혀를 찼다.

장경은 걸음을 옮기려는 다혜를 부축하며 필웅에게 먼저 가 보겠다고 인사했다.

“검사님, 오늘 재밌었슴다! 진우현이 유죄 받고 한 잔 더 하시죠!”

“예, 조심히 들어가세요. 다혜 씨도 잘 데려다 드리구요.”

“걱정마십쇼!”

장경은 씩씩하게 대답하고는 다혜를 부축하며 조심조심 계단을 내려갔다.

필웅은 평상에 거의 널부러진 시연을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야, 잘거면 들어가서 자.”

“어, 뭐야? 다 어디갔어?”

시연이 입가에 흐른 침을 닦으며 부시시하게 일어났다.

“다들 집에 갔어. 피곤하면 우리 집에서 자고 가.”

멍하니 앉아있던 시연이 갑자기 흠칫 놀라며 자신의 몸을 감싸안았다.

“무, 무슨 뜻이야?”

필웅은 그녀가 뭘 오해했는지 다 알겠다는 듯 접시들을 치우며 대답했다.

“네가 기대하는 상황 아니니까 걱정 마라. 너 여기서 재우고 나는 사무실 가서 잘거야.”

“무무무무뭘 기대했다는 거야 내가! 웃기네 정말!”

시연은 소리치고는 창피한지 눈을 꽉 감았다.

‘아, 왜 꼭 이럴 때만 말을 더듬는 거야 바보처럼.’

필웅은 아무 말 없이 접시들을 치우고 쓰레기들을 모았다. 시연은 웅크리듯 앉아 무릎을 두 팔로 감싸쥐고 있었다.

한참 혼자 접시와 먹고 남은 음식들을 치우던 필웅이 그녀에게 물었다.

“너 다 깼으면 좀 도와주는 게 어때?”

“어? 어! 아, 미안.”

시연도 황급히 일어나 필웅을 거들어 평상을 치우기 시작했다.

둘이 치우기 시작하니 금방 일이 마무리됐다.

"후우~"

필웅은 개운한 한숨을 내쉬고는 평상에 걸터앉았다. 시연도 그 옆에 따라 앉았다.

둘은 잠시 말없이 낮은 옥상 난간 너머로 보이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이미 해는 졌고, 불빛들이 바닷가의 모래처럼 무수히 어둠 속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대단한 광경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 때 필웅은 다시 한 번 필웅으로서 깨어난 날을 떠올렸다.

이제 막 봄이 시작되려는 쌀쌀한 날씨. 어색하게 앉아 있던 시연과 필웅.

북적북적 붙어서 제 멋대로 불빛을 발하는 수많은 집들을 보며, 필웅은 입을 열었다.

“우리가 지켜 줄 사람들이네.”

시연이 필웅을 돌아보았다.

필웅도 그녀를 돌아보았다. 시연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필웅은 쿡쿡 웃으며 말했다.

“네가 한 말이잖아.”

“그랬지, 참.”

시연은 씩 웃으며 쭉 뻗은 다리를 좌우로 까딱까딱 흔들었다.

“내가 한 말도 다 적어두고 다니는 줄은 몰랐네.”

“뭐래, 나는 어록 같은 건 안 만들거든.

"하핫.”

시연이 살포시 웃었다.

둘은 또 아무 말도 없었다.

시연이 조용히 필웅의 어깨에 기댔다.

필웅은 잠시 흠칫했지만, 이내 가만히 시연이 편하도록 어깨를 좀 더 그녀 쪽으로 내밀었다.

시연은 그의 팔을 잡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그의 어깨에 파묻었다.

잠시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필웅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맥주 마실래?”

“맥주 좋지.”

시연과 필웅은 맥주 캔을 들어 가볍게 부딪혔다.

필웅은 맥주 캔을 기울이며, 자연스럽게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 날 1998년의 밤 하늘에는, 왠지 모르게 2020년의 밤 하늘보다도 무수히 많은 별들이 올올히 빛나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