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사로 개과천선-18화 (18/151)

18화 생각보다 좀생이는 아니네

방청석이 크게 술렁였다.

최창칠 판사는 신경질적으로 재판봉을 여러 차례 두드렸다.

“조용, 조용!”

최 판사는 좌중을 조용히 시키고 필웅과 변호인을 가까이 불러 말했다.

“검사 측, 변호인 측, 피고인 신문은 이쯤에서 마치죠.”

필웅은 강하게 반발했다.

“예? 재판장님, 이제 피고인의 결정적인 진술이 나올 수 있는 상태인데!”

“이 공판에서 사실관계가 너무 많이 바뀌었어요. 피고인들을 기존에 신문한 조서들도 다 무용지물이 되었고, 변호인도 다시 사실관계 정리할 시간이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하지만 피고인들은 현재 구속 상태도 아닌데 정리할 시간을 준다는 건 증거를 인멸할 시간을 주는 거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인멸할 증거가 있다면 이미 인멸했겠지요. 며칠 더 준다고 해서 달라질 게 있겠습니까? 다음 기일은 최대한 빨리 잡아줄 테니 제 말대로 하시죠.”

최 판사의 딱딱하게 깍지 낀 두 손이 반대를 허용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알겠습니다.”

“좋습니다. 금일 변론은 종결합니다.”

최 판사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재판을 종결했다.

필웅은 공판이 끝나고 바로 장경을 불러 본드 통에 대한 지문감식 결과를 물었다.

역시 감식결과 김태현의 지문이 묻어 있었다고 했다. 이것으로 김태현이 거짓말을 했다는 것은 분명해졌다.

다만 필웅으로서는 얼른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본드와 폐건물, 김혜진의 죽음 간에 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지였다. 필웅이 본 미래의 기록들에서는 별다른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니 미래의 기록들에 본드에 관한 내용들이 있을 리도 없었다.

필웅은 고민 끝에 장경에게 피고인들의 거짓말탐지기 조사를 진행해 달라고 요청했다.

“거짓말 탐지기요?”

“공판에서 안 나온 얘기들을 좀 물어봐야 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뭘 물어보면 될까요?”

필웅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본드를 불어 봤는지, 불어 봤다면 어디에서 불었는지, 누구와 불었는지 대답하라고 하세요.”

“그거면 됩니까?”

“그거면 됩니다.”

장경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러갔다.

다음 공판기일이 되었다.

필웅은 장경이 전달해 준 거짓말탐지기 조사 결과를 떠올렸다.

‘본드를 불어 본 적이 없다,라.’

장경은 필웅이 지시한 대로 김태현, 박우식, 이영혜 모두에게 거짓말 탐지기를 사용했다.

그런데 그 결과 셋 모두 본드를 흡입해 본 사실이 없다고 대답했다. 그 대답이 모두 진실로 판정됐다.

‘그렇다면 본드는 왜 거기에 놓여 있었던 것이지?’

하지만 이미 공판기일이 되었고 더 이상 갈팡질팡할 수는 없었다.

필웅은 자리에서 일어나 최 판사에게 말했다.

“재판장님, 피고인 신문을 이어 진행하겠습니다.”

“또요?”

“지난 번 피고인 신문이 완결되지 못한 상태로 변론이 종결되었기 때문에 피고인 신문을 계속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좋습니다.”

필웅은 가볍게 감사의 뜻으로 목례를 한 후 피고인들 쪽으로 다가갔다.

“이영혜 피고인.”

이영혜가 흠칫 놀라며 떨기 시작했다. 박우식과 김태현이 그녀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지난 번 그 둘이 거짓말을 했다고 지목한 앙금이 아직 남은 모양이었다.

“이영혜 피고인. 다른 두 피고인이 피고인을 노려보고 있군요.”

필웅이 일부러 그녀의 앞에서 천천히 위협적으로 왔다갔다 하면서 넌지시 말을 건넸다.

이영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잘 생각해 보길 바랍니다. 과연 침묵을 지키거나 거짓말로 이 자리에서 벗어난다고 해서, 저 둘이 김혜진 양에게 했던 것처럼 이영혜 피고인을 앞으로 괴롭히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습니까?

이미, 이영혜 피고인이, 두 사람을 거짓말쟁이라고 지목했는데?”

필웅은 일부러 마지막 문장을 천천히 끊어서 강조했다.

“재판장님! 검사가 피고인을 협박하고 있습니다!”

“검사 측, 피고인을 불필요하게 자극하는 발언은 삼가 해 주세요.”

최 판사가 언짢은 듯 짜증스럽게 필웅을 제지했다.

필웅은 약간 뒤로 물러서며 말을 이었다.

“좋습니다. 아시다시피 검사 측은 추가 증거로 현장에서 발견한 김태현 피고인의 지문이 묻어 있는 본드 통을 제출한 바 있습니다.”

최 판사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건 저도 봤습니다. 그런데 다른 추가 증거인 거짓말 탐지기 측정 결과를 보니 피고인들은 본드를 입에도 대지 않았다면서요? 그럼 도대체 이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겁니까?”

“피고인.”

필웅은 피고인석으로 다가가 책상을 짚고 비스듬하게 섰다.

그리고 나서는 똑바로 이영혜를 바라보며 물었다.

“피고인들이 김혜진 양에게 강제로 본드를 흡입하게 한 것이 맞지요?”

이영혜는 이제 보기 딱할 정도로 떨고 있었다.

“아니에요. 저는 그러지 않았어요.”

“그러면?”

“쟤들 둘이 한 거라구요! 저는 그 날 따라가기만 했다가 애들이 너무 이상한 짓을 하길래 먼저 나왔단 말이에요!”

“야, 이 년아!”

박우식이 거칠게 소리치며 이영혜에게 달려들려다가 변호인에 의해 간신히 제지당했다.

김태현은 옆에서 여전히 조용히 그러나 싸늘하게 이영혜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렇군요. 피고인은 다른 두 피고인이 김혜진 양에게 본드를 흡입시키려는 것을 목격했습니까?”

“네. 그래서 저는, 이건 좀 아닌 것 같다고…….”

이영혜는 말하며 금방이라도 울음을 쏟을 듯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그녀가 무릎에 올린 손을 꽉 쥐었다.

“이건 좀 너무 위험한 것 같다고 했는데, 들은 척도 안하길래 다른 핑계 대면서 먼저 도망쳤어요. 그 다음은 진짜로 몰라요.”

이영혜는 말을 맺고 기어코 눈물을 떨어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필웅은 그 눈물이 결코 참회의 눈물이 아닌 두려움의 눈물에 가까울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별로 동정심을 느끼지 않았다.

“자, 그러면.”

필웅은 몸을 돌려 김태현과 박우식 쪽을 향했다.

“두 피고인 중 어느 피고인이 혜진 양에게 본드를 흡입하게 한 겁니까?”

박우식과 김태현은 불안하게 서로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우물쭈물하고 있던 박우식이 갑자기 체념한 듯 먼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태현이가, 그랬어요.”

김태현이 눈을 홉뜨고 박우식을 노려보았다.

“너?”

“애초에 본드 통에도 태현이 지문만 있잖아요. 저는 솔직히 옆에서 구경만 했어요.”

박우식이 다 포기했다는 듯 거침없이 내뱉기 시작했다.

그제야 사태가 돌아가는 것을 따라잡지 못해 거의 옆에 멍하니 서있던 변호인이 나서서 말했다.

“잠깐, 잠시만요! 재판장님, 본드 흡입 여부와 살인은 아무 상관이 없지 않습니까? 애초에 피해자가 본드로 살해당한 것도 아닌데 살인죄가 어떻게 성립할 수 있습니까?!”

최 판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턱 끝으로 오만하게 필웅을 가리켰다. 어디 한 번 대답해 보라는 듯한 제스처였다.

“재판장님, 변호인 말대로, 피고인들이 직접 피해자에게 손을 대지는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은 살인사건일 수밖에 없습니다.”

최 판사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책상을 두어 번 탕탕 두드렸다.

“검사 측, 무슨 소립니까? 손도 대지 않았는데 살인이라니, 피고인들이 초능력자라도 된다는 말이에요?”

필웅은 최 판사와 변호인을 번갈아 쳐다보며 여유 있는 미소를 지었다.

“박우식 피고인, 김태현 피고인이 피해자에게 본드를 흡입하도록 한 후 무슨 행동을 했죠?”

박우식은 잠시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필웅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고는 대답했다.

“애가 정신을 못차리니까 재미 있는 거 한 번 해보자고 하고는 칼 쥐어주고 김혜진한테 뭐라고 속삭였어요.

무슨 말을 했는지까지는 몰라요. 그러고 나서 갑자기 김혜진이 한참동안 킬킬대며 웃고 헛소리를 하더니 자기 손목을 그어버린 거에요.”

최 판사는 이게 무슨 소리냐고 묻는 듯이 의아한 표정으로 잠시 필웅을 쳐다보다가, 이내 무엇인가를 깨달은 듯 눈을 치켜떴다.

“설마?”

필웅은 극적으로 돌아서서 피고인들, 보다 정확하게는 김태현을 가리키며 말했다.

“검사 측은, 피고인들이 살인죄의 간접정범이라고 주장하는 바입니다!”

간접정범.

일반인들에게는 잘 와닿지 않는 개념이었다. 하지만 간접정범은 법조인들이 처음 형법을 배울 때 가장 먼저 배우는 개념 중의 하나였다.

간접정범은 직접 범죄를 저지르는 직접정범, 즉 일반적인 범인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간접정범은 ‘다른 사람을 도구처럼 사용하여’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에 성립한다.

즉, 어떤 행동이 범죄인지를 제대로 판단할 수 없는 아주 어린 아이나 정신지체자에게 물건을 훔쳐 오라고 시킨다면 그 어린 아이나 정신지체자들을 처벌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를 시킨 사람은 여전히 처벌할 필요성이 생기기 때문에 간접정범이라는 개념이 탄생한 것이다.

‘그렇다면 사물을 제대로 분별할 수 없는 사람에게 자기 자신을 죽이라고 시킨다면?’

간접정범은 사리를 판별할 수 없는 사람을 도구처럼 사용할 경우 성립하는 범죄이다.

그렇다면, 약에 취해 사실상 판단능력을 잃어버린 사람, ‘피해자 자기 자신’을 도구로 사용하는 경우에도 여전히 간접정범이 성립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약에 취한 사람이 스스로를 죽이도록 유도했다고 입증할 수 있다면 이는 더 이상 단순한 자살방조 따위가 아니라 살인죄의 간접정범이 될 것이었다.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김혜진이 죽던 날에도 여전히 김태현, 박우식, 이영혜는 김혜진을 인적이 드문 나현동의 폐공장으로 불러내어 괴롭히고 있었다.

그러던 중 김태현이 갑자기 본드를 들어 보이며 제안했다.

“이거 들이마시면 엄청 기분 좋아진다는데 해 볼 사람?”

하지만 박우식과 이영혜가 난색을 표하자 김태현은 김혜진에게 시켜보자고 제안했다. 이 순간 이영혜는 무서워서 자리를 떴다.

김태현은 먼저 김혜진에게 본드를 들이마시게 한 후, 김혜진의 상태가 이상해진 것을 보고 문득 이 상태에서 어느 정도까지 그녀의 행동을 유도할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먼저 몇 가지 간단한 것들을 시켜보던 김태현은 곧이어 ‘이런 극단적인 것도 할 수 있을까’하는 강렬한 호기심에 사로잡혔고, 그녀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여기 이 칼로 네 손목을 그어봐.’

그리고 환각 상태였던 김혜진은 그렇게 망설임없이 칼로 자신의 손목을 그었다. 김태현과 박우식은 놀라 자리에서 도망치면서 본드를 바닥에 떨어트리고 말았다.

자신이 추리해낸 사건의 진행경과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필웅은 팔짱을 꼈다.

‘자신이 본드를 흡입하지도 않았는데 본드통이 바닥에 떨어져 있다면 누군가가 대신 흡입을 했을 수밖에. 자살방조 따위로 벗어나게 해줄 수는 없지.’

변호인은 아무 말도 못하고 아까처럼 멍하니 서서 최창칠 판사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피고인들, 더 할 말 없습니까?”

최 판사는 흥미를 잃은 듯 나른하게 물었다. 이미 딱히 피고인이나 변호인이 할 말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김태현은 계속해서 박우식과 이영혜를 노려보았다. 박우식은 ‘어쩌라고?’하고 묻는 듯한 표정으로 그의 시선을 맞받아치고 있었고, 이영혜는 아예 고개를 처박고 울고 있었다.

변호인 역시 이미 피고인들끼리 서로를 지적하며 폭로해댄 탓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우울하게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좋습니다. 선고하겠습니다. 피고인 김태현, 박우식, 이영혜에 대하여 각 징역 20년을 선고한다.”

“뭐야!? 난 소년범이라고!”

“말도 안돼! 뭐가 잘못된 거 아니에요?!”

김태현과 박우식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울부짖었다.

필웅이 그들에게 천천히 다가가 말했다.

“나이가 어린 게 무슨 전가의 보도인 것처럼 생각하지 마라, 꼬맹이들아. 이렇게 어른한테 혼나는 수가 있으니까.”

김태현이 핏발이 선 눈으로 소리를 지르며 그에게 달려들었지만, 법정 경위에 의해 제지당했다.

“으아아아!”

김태현이 제 분에 못 이겨 날뛰는 소리를 음악처럼 들으며 필웅은 법정을 나섰다.

* * *

“검사님, 잘 봤습니다.”

필웅이 기록을 챙겨 재판정을 나오자 어디선가 장경이 나타나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뭡니까, 그 미소는? 나이차이도 별로 안 나면서 마치 다 큰 자식 쳐다보듯 쳐다보지 마시죠.”

“진짜로 감탄해서 그러는 겁니다. 기껏해야 자살방조일 줄 알았는데 살인죄라니, 크으! 그놈들 망연자실한 표정 보셨습니까? 재판정에서 나오는 걸 봤는데 완전히 넋을 잃었더라구요.”

“기분 좋아보이시네요.”

그러자 장경이 갑자기 웃음을 거두고 건조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게 말임다. 분명 좋기는 합니다. 마땅히 벌받을 사람에게 벌을 준다는 게. 그런데 한 편으론, 누구도 벌을 받을 짓을 하기 전에 막을 수 있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뭐, 그런 건 신만 할 수 있는 거 아닐까요.”

갑자기 바뀐 장경의 분위기에 필웅은 어색해하며 대꾸했다.

장경은 씩 웃고는 말했다.

“그렇죠, 저희는 사람이니까, 사람이 해야만 하는 일과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죠.

저도 이런 말 자랑스럽게 할 처지는 아니지만. 그렇게 할 수 있게 노력은 해 봐야죠.”

장경이 잠시 말을 끊고는 주저하다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검사님이 생각보다 좀생이는 아닌 것 같습니다.”

“뭐라구요?”

“하하, 다음에 또 보시죠!”

장경은 말하고는 경쾌하게 복도를 넘어 사라졌다.

‘사람이 해야만 하는 일과 할 수 있는 일이라. 그렇다면 사람인데도 사람같지 않은 일을 반복하는 이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필웅은 왠지 모르게 기억에 남은 장경의 한 마디를 되새기며, 기록들을 끌어안고 사무실로 발걸음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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