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그건 사실과 좀 다른데
필웅은 장경이 일하는 경찰서에 와 있었다.
장경은 혜진을 괴롭힌 가해자들인 김태현, 박우식, 이영혜를 조사하기 위해 경찰서로 불러들였다. 사실 당장 체포사유가 있지는 않았기에 학생들이 반드시 출석해야 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경찰서에 출석했다. 주눅든 표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당당했다. 그들은 김혜진의 죽음에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는 듯 보였다.
장경은 학생들의 그런 모습에 분노했다. 학생들이 혜진을 죽인게 아니라고 하더라도 최소한의 죄책감은 느꼈어야 했다. 자신들이 왕따시킨 학생이 죽었을 때 최소한 미안한 감정이라도 느꼈어야 했다.
‘그래, 지금은 그 여유를 실컷 즐겨라. 어디까지 웃을 수 있나 지켜보지.’
장경은 혜진이의 억울한 죽음을 반드시 풀어주겠노라 속으로 다짐했다.
김태현, 박우식, 이영혜는 장경 앞에 섰다. 조사받으러 온 아이들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유쾌한 모습이었다.
필웅은 조용히 뒤에 서서 그들을 지켜보다가, 갑자기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이게 뭐지?’
무언가 파노라마처럼 필웅의 눈에 펼쳐지고 있었다. 필웅은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필웅이 지금 보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필웅은 한 번 심호흡을 하고 눈 앞에 펼쳐진 것들을 살펴보았다.
그것은 미래의 기록들이었다.
<누가 한 소녀를 자살로 내몰았나>
<경찰, 타살의 증거 발견 못해… 사건 미궁으로 빠지나>
필웅은 정신없이 그것들을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나서는 힐끔 김태현의 등을 바라보았다.
김태현으로부터 시선을 떼고 눈을 감자, 눈 앞에 떠오르던 것들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이게 다 어떻게 된 거지?’
필웅이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때, 김태현이 입을 열었다.
“아저씨, 저희도 막 조사 받으면 밥 시켜주고 그래요? 나는 국밥 같은 거 싫어하는데~”
김태현이 능글거리며 물었다. 옆의 두 아이도 자기들끼리 뭐가 그리 즐거운 건지 키득키득거렸다. 장경은 별말 없이 의자를 가져와 자리를 권했다.
“길게 조사 안 할 거다. 미안한데 밥은 없다.”
아이들은 다리를 꼬고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로 편안한 자세로 자리에 앉았다.
“무슨 일이신데요?”
“너희들도 아는 혜진이 일 때문이지.”
“저희는 아무 것도 모르는데요?”
“그냥 묻는 말에만 대답하면 된다.”
장경은 퉁명스럽게 태현의 말을 끊고는 먼저 박우식에게 물었다.
“4월 18일. 지난 토요일에 뭐 했냐?”
“학교 갔다가 애들이랑 독서실에서 공부했어요.”
“어떤 애들?”
“얘들 둘이요.”
장경은 태현과 영혜를 차례로 둘러보았다.
“느그들 셋만 갔어?”
“그런데요?”
“혜진이는?”
“걔는 공부 안 해요. 애초에 학교 끝나면 걔랑 볼 일도 없다니까요?”
장경은 서랍에서 혜진이 폐건물을 그린 그림을 꺼내 우식에게 보여줬다.
“여기는 어딘지 알어?”
우식은 약간 눈을 가늘게 뜨고 잠시 그림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장경은 그림을 차례로 태현과 영혜에게 보여줬고 둘 모두 팔짱을 끼고 고개를 흔들었다.
“저기요, 형사님.”
태현이 귀찮다는 표정을 짓고는 나른한 목소리로 장경을 불렀다. 장경은 묵묵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뭐여?”
“혜진이가 왜 죽었는지 알려주는 게 아니라 그런 쓸데없는 거 물어보실 거면 저희 그냥 가봐도 되나요?”
장경의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뭣이여?”
“아니, 그렇잖아요. 저희한테 무슨 설명을 해주시는 것도 아니고. 무슨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면서 다짜고짜 우리를 심문하는 거 같잖아요. 그리고 저 이상한 그림은 또 뭔데요? 이런 시시껄렁한 대화하려면 저희는 그냥 갈래요. 저희 한창 공부해야 하는 학생들이거든요?”
태현은 말하며 뭔가 스스로 뿌듯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대단히 조리 있게 반박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우식과 영혜는 옆에서 그 표정을 훔쳐보고는 고개를 숙이고 키득댔다.
“형사님은 우리가 혜진이를 죽였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참나, 그래요. 백 번 양보해서 저희가 혜진이를 어떻게 했다고 쳐요. 그래봤자 소년원이고 훈방 아니에요? 뭐 이런 일에 이렇게 목숨 걸고 달려드세요?”
장경은 귀를 의심했다. 태현의 발언은 숫제 자기가 죽였다고 해도 네가 어쩔 거냐는 도발이었다.
그렇다고 그 발언을 문제 삼아 죄를 인정했다고 볼 수도 없었다. 장경은 어금니를 꽉 깨물면서 책상 너머의 태현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건 좀 사실과 다른데.”
옆에서 가만히 앉아만 있던 필웅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태현은 비로소 장경의 옆에 앉아 있던 필웅을 보고는 어이없다는 듯이 물었다.
“뭐가 다른데요?”
“일단 너희가 소년원이 무슨 학교 캠프인 줄 아는 것 같은데, 뭐, 물론 소년원의 교도관들이 일반 교도소 교도관들처럼 엄격하지야 않지. 하지만 소년원에 갇힌 소년범들도 그럴까?”
필웅이 손가락으로 책상을 툭툭 치며 말을 이었다. 여유로운 표정이었지만 눈에 날카로움은 살아있었다.
“네 말대로 보통은 훈방을 받는데 소년원에 갈 정도면 죄질이 안 좋은 애들이겠지? 너네 같은 범생이들이 그런 애들 사이에 껴서 자게 되면 어떨까?
모르긴 몰라도 손톱으로 얼굴에 문신 몇 개 정돈 만들어 주고 싶어하지 않을까? 그리고 꼭 자기 손톱이 아니라 네 손톱을 가져다 문신을 그리고 싶어할 지도 모르지.”
떨떠름하게 듣고 있던 태현이 반발하며 말했다.
“무, 무슨! 그런 짓을 하는데 교도관들이 그냥 두고 볼 리가 없잖아요!”
“교도관들이 하루 종일 죄수들 감시하고 있는 줄 아니? 밤에 잘 때에는 아무도 몰라. 다음 날 상처 몇 개 늘어나도 그냥 어디 긁혔다고 하면 그런 줄 알걸? 너희 증거 좋아하잖아? 네 얼굴에 칼자국 몇 개 늘어도 그게 걔네가 한 거라고 증명할 수 있어?”
태현은 뭐라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고는 씩씩거리며 필웅을 쏘아보았다.
이번에는 필웅이 팔짱을 끼고 아이들을 바라보며 느긋하게 말했다.
“그리고 너희 지금 고3이지?”
아이들은 불안하게 서로를 바라보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들이 좋아하는 소년법은 판결을 할 때 19세 미만이어야 적용되는 거거든. 그런데 말이야, 그 판결 시기를 내가 어떻게든 최대한 늦춰 볼거야.
그러면 너희는 빼도 박도 못하게 소년범이 아니라 성인으로 재판을 받게 되겠지.”
필웅은 학생들을 노려보고 씨익 한번 웃고는 말을 이어갔다.
“내가 그렇게 못할 거 같아? 뭐 그런거 같으면 한 번 계속 그딴식으로 해봐.”
우식과 영혜의 눈빛이 다소 흔들렸다. 그들은 자신들의 리더격인 태현을 바라보았다. 태현은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뭔가 불안한 듯 손가락으로 무릎을 두드리고 있었다.
어색한 침묵이 잠시 흐르고 태현이 대답했다.
“법률 수업 잘 들었네요. 저희한테 뭐 물어보실 거 없으면 그만 가봐도 되죠?”
“응, 가봐. 그런데 어디 멀리 가지는 말고. 우리가 또 궁금한 게 있으면 또 부를거야.”
필웅이 일어서서 친근하게 그들을 일으켜 세운 후 등을 두드리며 밖으로 내보냈다.
필웅이 고개를 돌리니 장경이 새삼 달리 보인다는 듯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 뭡니까?”
“아니, 영감님, 아니 검사님도 검사긴 하시군요.”
“무슨 뜻입니까!?”
“아뇨, 그냥 든든하다는 거죠.”
장경이 허허 웃으며 조서에 몇 가지 내용을 기록했다.
“그런데 이렇게 그냥 놔줘도 되는 겁니까?”
필웅이 물었다. 처음 장경과 협의한 대로 일단 아이들을 내보내긴 했지만, 뭔가 좀 더 조사를 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들었던 것이다.
“어차피 체포한 것도 아니니 정말 민감한 문제를 건드리기 시작하면 입을 다물고 괜히 잔뜩 경계만 할 거 같아서, 차라리 뭔가 이 쪽이 쥐고 있는 것처럼 불안하게 만드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그러면 더 허점이 보이지 않을까 합니다.”
이번엔 필웅이 새삼 달리 보인다는 듯 장경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뭡니까?”
“아니, 형사님도 형사긴 하구나 싶어서요.”
장경이 허탈하게 웃고는 필웅에게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근데, 진짭니까?”
“뭐가요?”
“판결을 저 애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미루겠다는 거, 그런 게 정말 가능합니까?”
필웅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론적으로 가능은 한데 그게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죠. 그냥 겁만 줘 본 겁니다.
어쨌든 소년법에 따라 판결을 받더라도 무조건 훈방만 나오는 건 아니에요.”
필웅은 좀 더 심각해진 표정으로 장경을 돌아보며 의미심장하게 덧붙였다.
“이 애들은 제가 반드시 최대한 무겁게 처벌할 겁니다.”
필웅은 지친 몸을 이끌고 사무실로 돌아와 기록들을 정리하고 퇴근을 위해 청사를 나섰다.
그때 누군가가 반갑게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필웅아!”
돌아보니 조필웅 나이 또래의 여자가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영전은 필웅의 기억을 급하게 ‘검색’했다.
필웅의 사법연수원 시절 선배인 윤진이었다.
“아, 선배!”
“오랜만이다! 퇴근하는 길이야?”
“오랜만이네요. 네, 선배도 퇴근하는 길이세요?”
“응, 재판 있어서 법원 왔다가 이제 사무실로 들어가려구~ 잘 지냈어? 어디 아팠다며?”
“예, 지금은 다 나았어요.”
“다행이다. 요 앞 버스정류장까지만 바래다 줄래?”
필웅의 기억에서 묘한 감정이 솟아올랐다.
‘뭐지, 이건?’
필웅, 아니 필웅의 안에 있는 나영전은 뭔가 기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것은 기억에 남아 있던 감정이 다시 솟아오르는 느낌이었다.
기억이란 언제나 감정을 수반한다.
오랜만에 표면으로 떠오른 기억은, 오랜 시간 잊고 있었던 필웅의 감정까지 함께 끌어냈다.
‘짝사랑, 같은 건가?’
윤진은 필웅이 짝사랑하던 선배였다.
필웅은 사법연수원 시절 내내 윤진을 몰래 좋아했다. 여자 앞에서는 영 젬병인 그는 그 감정을 말로 표현은 못했다. 그냥 마음 속에서 끙끙 앓고만 있었다.
그런 그녀를 오랜만에 만난 것이다. 윤진의 얼굴을 보자마자 필웅 가슴 속 깊이 있던 애틋한 감정과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나영전은 필웅의 기억이 자신의 감정과 뒤섞여 혼란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느끼는 짝사랑의 감정. 참 오묘했다. 필웅의 풋풋한 감정이 그대로 전해졌다.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불그레해졌다.
필웅 속의 영전은 그런 감정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이전 삶에서 항상 자유분방하고 누군가를 애타게 사랑해 본 적 없던 자신에게는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조필웅씨. 이렇게 순진한 사람이었군.’
그런 그의 혼란스러운 감정을 알 리가 없는 윤진은 별 생각 없이 그와 보조를 맞추며 걸어가고 있었다.
“표정이 안 좋네? 무슨 일 있었어?”
윤진이 자상하게 물어왔다.
“아, 저, 그게. 소년사건이 하나 있었어요.”
자신(?)의 복잡스런 감정에 취해있던 필웅은 엉겁결에 오늘 내내 고민하던 일에 대해 윤진에게 말했다.
“소년사건? 음, 내가 대리하는 사건 중엔 그런 거 없으니까, 이해관계가 충돌할 리는 없겠지? 얘기해 봐.”
“어떤 학생들이 한 학생을 괴롭혀서 자살에 이르게 했는데, 증거가 없어요.
뭔가 심증은 가는데 증거가 없는 것 같아서요. 이렇게 밀어 붙이는 게 맞는지 사실 잘 모르겠어요.”
윤진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너답지 않네. 너는 원래 믿는 바가 있으면 일단 좌우 돌아보지 않고 직진하는 타입 아니었어?”
“그런가요.”
“글쎄, 다른 사람이면 다시 한 번 신중하게 생각해 보라고 말렸겠지만, 네가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니 너도 모르는 데서 확신을 얻었을 수도 있었을 거라 생각해.
단지 네가 그걸 모르고 있을 뿐이지.”
윤진은 밝게 웃으며 필웅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였다.
윤진은 웃을 때면 눈이 완전히 사라질 정도로 눈웃음을 짓고는 했다. 필웅은 그게 좋았다. 자신도 모르게 그 얼굴에 흠뻑 취해있었다.
‘정신차려! 조필웅!!‘
필웅은 순간 자기도 모르게 떠올려 버린 감정을 애써 부정하며 고개를 휘휘 저었다.
이내 버스가 도착했다.
“그럼 난 먼저 가볼게, 필웅아~ 파이팅!”
“네. 선배”
필웅은 떠나는 그녀를 계속 바라봤다.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 한마디가 머리 속에 맴돌았다.
'내가 모르는 데서 확신을 이미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