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한 번 잡아 봅시다
시연이 심철우를 만나러 간 같은 날 저녁.
필웅은 주 계장에게 인사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필웅은 주 계장이 뭔가 초조해 보인다고 느꼈지만, 별 일 아니겠지 싶어 서류들을 챙기고는 청사를 나섰다.
그때였다.
“영감님! 저랑 어디 좀 같이 가시죠!”
갑자기 장경이 나타나 필웅의 팔을 잡았다.
“무슨 짓입니까? 이거 놓으세요!”
“어허, 다 일때문에 이러는 겁니다. 설마 제가 미쳐가지고 공적인 업무도 아닌 일에 영감님을 납치, 아니, 동행 요청을 드리겠습니까?”
“이미 미친 것 같은데요!?”
“금방이면 된다니까요.”
장경은 거의 우격다짐으로 자신의 낡은 검은색 에스페로의 조수석에 필웅을 밀어 넣었다. 필웅은 저항했지만 그의 완력을 도무지 당해낼 수가 없었다.
“이거, 당신! 당신 이거 납치야!”
“그럼 나중에 기소하십쇼. 오늘만 따라와 주시면 됩니다.”
필웅을 조수석에 집어넣은(?) 후, 필웅이 탈출해야겠다고 미처 느끼기도 전에 장경은 재빨리 악셀을 밟았다.
“아니, 어딜 가는 건데요?”
“가 보시믄 압니다.”
장경은 수수께끼같은 말을 하며 대답을 회피했다. 필웅은 슬슬 조금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아무 때나 검사실에 찾아와 행패를 부리는 인간이다. 딱히 보신에도 관심이 없는 것 같으니 기분 나쁘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필웅은 의심의 눈초리로 운전석에 앉은 장경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하지만 장경은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묵묵히 운전만 할 뿐이었다.
“다 왔습니다.”
필웅은 한강 둔치에 차를 세우고는 말했다.
장경은 의심의 눈초리로 장경을 바라보다가, 장경이 운전석에서 내리자 조심스럽게 조수석에서 내려서는 물었다.
“저랑 데이트라도 하자는 겁니까?”
“하이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거나 좀 봐주십쇼.”
장경이 종이 몇 장을 내밀었다. 일전에도 본 적 있는 혜진의 일기장 일부였다.
“또 이겁니까? 제가 몇 번을 얘기해야 알아들을 겁니까?”
“당장 기소 안해주셔도 되니까 한번 읽어만 주십쇼. 부탁입니다.”
장경이 한강을 바라보며 말했다. 필웅은 짜증스럽게 혜진의 일기를 읽어 내려갔다.
… 아이들은 나를 괴롭히다 지쳤는지 하나둘씩 떠났다.
나는 한강을 좋아한다. 오늘도 학교 옆에 있는 한강 공원에 가서 몇 시간이고 한강을 보았다.
그렇게 바라보다 보면, 강물이 자기 안으로 들어와 보라고 손짓하는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죽긴 왜 죽어? 나는 아직 하고 싶은 게 많다.
강아지도 키우고 싶고, 대학교도 가고 싶다. 연애도 해 보고 싶다.
필웅은 일기를 다 읽고 문득 한강을 바라보았다.
한강은 석양을 받아 오렌지빛으로 물들어 고고하게 흐르고 있었다.
필웅은 그런 한강을 바라보다가 장경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낀 장경이 물었다.
“뭐 느껴지는 거 없습니까?”
“한강이 예쁘네요.”
“한 군데만 더 갑시다.”
“아니, 장난하는 겁니까? 저 바빠요!”
“약속도 없음서 뭐가 바쁩니까?”
“제가 약속 없는지 어떻게 알아요?”
“약속 있는 분이 그렇게 서류를 한 무더기 들고 집에 갑니까?”
장경이 어이없다는 듯 필웅이 차 안에 두고 내린 서류더미를 가리키며 말했다.
필웅이 그동안 쌓아 놓고 보지 않던 ‘잡범’ 사건들의 파일이었다.
필웅은 최근 괜히 신경이 쓰여서 그동안 들여다보지도 않았던 사건들을 하나씩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여하간 장경의 지적은 사실 타당했고, 실제로 필웅은 별다른 일정이 있지도 않았기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 잠시간의 침묵을 정확히 포착한 장경은 다시 필웅을 조수석으로 밀어 넣었다.
“당신, 진짜 후회할 겁니다.”
“예. 예. 안전벨트나 매십쇼.”
필웅은 궁시렁거리긴 했지만 내심 점점 사건에 대한 궁금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장경은 별말 없이 다시 운전을 시작했다.
* * *
시연의 재심 공판이 시작되었다.
시연은 심철우를 만난 후 이규필 부장을 다시 찾아가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심철우가 뭐라더냐? 역시 허술한 거짓말이지?”
“아뇨.일단 제가 듣기에 진술에는 일관성이 있어 보였습니다.
다른 목격자도 확보한 것 같구요. 전직 경찰이 도와주고 있는 모양이었습니다.”
“그래? 그래서, 정 검은 어떻게 하고 싶은데?”
“딱히 반박할 만한 다른 증거가 없으면, 심철우의 주장을 인정할 생각입니다.”
“뭐? 아니, 검사라는 놈이 범죄자가 주장한다고 그냥 그걸 들어준다고?”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가 사실 범죄자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 답답하구만, 답답해! 알았으니까 나가.”
“예?”
“자네 마음대로 하라고. 나가 봐.”
시연은 한숨을 쉬었다.
왠지 그녀는 이규필 부장이 필웅이 생각하는 것처럼 따르고 모실 만한 사람인지에 대한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정말 이대로 놔둬도 괜찮은 걸까?’
어차피 재심 사건에서 이길 생각이 없었기에 재판이 시작되는 소리를 적당히 흘려들으며 시연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 * *
장경과 필웅이 이번에 도착한 곳은 한 낡은 상가건물.
어찌나 낡았는지 1층의 가게들까지도 거의 다 비어 있었다. 2층에 미술학원이라고 써 있는 간판만 걸려있었다. 간판에도 네온사인이 들어오지 않아서 정말 영업 중이긴 한건지 의심스러운 상황이었다.
“이번엔 또 뭡니까? 저랑 그림이라도 그리자는 건가요?”
“일단 와보세요~”
건물의 2층도 대부분 비어 있었지만 미술학원 쪽에는 불이 들어와 있어 영업 중임을 알수 있었다.
그 때 미술학원에서 한 아이가 문을 열고 빼꼼히 장경과 필웅을 바라보았다.
“누구세요?”
이가 빠졌는지 새는 발음으로 아이가 물었다.
필웅이 이게 뭔 상황인가 하는 눈빛으로 장경을 바라보았고, 장경은 그런 그의 눈빛을 모른 체하며 대답했다.
“응, 아저씨들은 혜진 누나 친구야. 넌 누구니?”
“저는 호진이에요.”
아이가 갑자기 눈을 빛내며 쪼르르 달려왔다.
“혜진 누나는 왜 안와여?”
장경은 무릎을 굽히고 앉아 아이와 눈높이를 맞춘 채로 대답했다.
“호진아, 혜진 누나는 지금 어디 멀리 가서 100밤 자면 올거야. 선생님 계시니?”
“계셰요.”
“그래, 아저씨들은 선생님이랑 이야기해야 되니까 가서 놀고 있을래?”
장경은 남자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아이의 등을 툭 치며 말했다. 아이는 잠시 빤히 둘을 바라보다가 다시 미술학원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장경은 필웅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유치원을 겸하는 미술학원인듯했다. 대여섯살 정도 되어 버리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고 고등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학생이 두어 명 더 있었다.
그 때 안쪽에서 선생인 듯한 여자가 나타났다.
“어, 누구세요?”
여자가 그들을 발견하고는 물감이 묻은 손을 토시에 대강 닦으며 물었다.
“아, 혜진 학생 일 관해서 이야기 좀 듣고 싶은 게 있어서 왔습니다.”
“혜진이요? 실례지만 누구시죠?”
선생이 경계의 눈빛으로 둘을 미심쩍다는 듯 번갈아 살펴보았다. 장경이 경찰 신분증을 꺼내 보여주며 대답했다.
“경찰입니다.”
“아, 잠시만요. 안으로 들어가실래요?”
선생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안쪽의 방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선생이 혼자 쓰는 교무실 같은 공간인 듯했다.
선생은 둘이 모두 방 안에 들어온 것을 확인한 뒤 문을 닫고는 말했다.
“죄송해요. 애들 앞에서 할 이야기는 아닐 것 같아서……. 무슨 일이신가요?”
“혜진이 소식은 아시죠?”
“네, 알죠. 너무 안됐어요.”
장경은 재차 물었다.
“그, 혜진이가 죽기 전에 여기서 아르바이트를 했더라고요.”
“아르바이트라기보단 자원봉사 같은 거였죠.”
“아, 돈을 따로 안 주셨나요?”
“저야 주려고 했죠. 하지만 혜진이는 한사코 싫다고 했어요.”
선생이 작은 냉장고에서 주스를 꺼내 필웅과 장경에게 건네며 말을 이었다.
“있는 게 이것밖에 없어서……. 오면서 보셨겠지만 이 동네 사시는 분들이 경제적으로 그렇게 상황이 좋지는 않아요.
사립유치원 같은 건 꿈도 못꾸고, 저녁에 일하러 다니시는 분도 많고.
사실 그래서 저도 저녁에 애 보기 어려우신 분들 애들이라도 잠깐 봐주고 있어요.”
장경은 주스를 한 모금 마시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필웅도 어느 샌가 자신도 이야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혜진이도 처음에는 그림을 배우려고 찾아왔었어요. 하지만 학원 돌아가는 모습을 보더니, 자기도 애들 보는 거 좋아한다면서 학교가 일찍 끝날 때마다 와서 애들 봐주고 간식도 챙겨주고 했거든요.
그래서 차라리 아르바이트로 일하는 게 어떻겠냐고 했더니 자기는 그냥 좋아서 하는 거라고 싫다고 하더라구요.
그러더니 어느샌가부터는 그림 공부는 뒷전이고 애들 챙기는 걸 더 열심히 했던 거 같아요.”
‘그래서 애들이 다짜고짜 혜진이를 찾았던 거군.’
필웅은 문득 처음 학원에 들어설 때 만난 아이의 행동을 떠올리며 수긍했다.
“그런 애가, 갑자기 자살이라니 너무 안타까워요. 요 몇 달 특히 힘이 없는 것 같기는 했어요. 가끔 그리던 그림도 안 그리고.
참, 그러고 보니 혜진이가 그린 그림들이 몇 장 여기 있는 것 같아요.”
선생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사무실 한 켠에 쌓여 있던 그림 중 하나를 찾아 들고 왔다.
미술에 문외한인 필웅이나 장경이 봐도 혜진이 그림을 그리는 솜씨는 생각보다 뛰어났다.
다만, 선생이 시간순으로 모아둔 것이라며 보여준 혜진의 그림들은 점점 어둡고 비참해져 갔다.
처음 그린 그림은 주황색으로 밝게 빛나는 한강이었다. 그 다음의 그림들은 마치 폐수라도 흐르는 듯 시커멓고 뒤틀려서 정말 강물인지도 알아보기 힘든 형태의 그림들이었다.
혜진의 마지막 그림은 쓰러져 가는 폐건물이었다. 메마르고 갈라진 고목을 연상케 하는 낡아빠진 건물이었다. 건물은 기괴하게 비틀려 마치 이 세계의 것이 아닌 듯했다.
필웅과 장경은 그 기이함에 잠시 할 말을 잊었다. 장경은 왠지 더 놀란 듯했다.
“이건?”
혜진의 그림 속의 건물을 가리키며 필웅이 물었다.
“그건, 이 근처 나현동에 있는 폐공장 같아요. 애초에 왜 이런 그림을 그린 건지는 모르겠어요.”
선생은 슬픈 표정으로 대답했다. 장경이 다급히 물었다.
“이거, 저희가 갖고 가도 됩니까?”
“예, 하지만 살펴보시고 가족한테 돌려 주셔야 돼요.”
“알겠습니다.”
장경은 그림을 받아들어 조심스럽게 둘둘 말고는 한 손에 쥐고 일어서면서 선생에게 인사를 건네고 필웅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장경은 그림들을 조심스럽게 뒷좌석에 놓고 운전석에 앉았다.
필웅도 얌전히 자리에 앉으며 떨떠름하게 물었다.
“그림은 왜 갖고 나온 겁니까?”
장경이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혜진이가 죽은 게, 버려진 폐공장이라고 했습니다. 뭔가 사건과 연관이 있을 것 같아서.”
그리고 나서 한참 침묵이 이어졌다. 갑자기 장경이 입을 열었다.
“그냥 한번 보여 드리고 싶었습니다.”
필웅은 무슨 소리냐는 듯 그를 돌아보았다.
“소년사건 같은 거, 실제로는 보통 형사처벌까지 가지도 않는다는 거 뻔히 압니다.
하지만 나쁜 놈은 벌을 받아야 되는 것이고, 그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당연히 그래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러려면 저 혼자만의 힘으로는 안 됩니다. 좀 도와 주십쇼.”
장경이 흥분해서 사투리를 섞어 가며 말을 이었다. 필웅은 듣고만 있었다.
“저런 되바라진 놈의 쉐끼들이 즈그 나이가 어리다고 자기네는 형사처벌 안 받는다고 주깨고 있더라니까요? 그 쉐끼들 면상을 봤음 영감님도 환장해 부렀을 겁니다.”
“…… 부르세요.”
“예? 뭐라구요? 크게 좀 얘기하십쇼.”
필웅이 목소리를 가다듬고 좀 더 큰 소리로 나직하게 다시 한 번 말했다.
“영감님 말고, 검사님이라고 부르세요.”
장경은 신호에 멈춰서서는 빤히 필웅을 바라보았다.
“네?”
필웅은 뭔가 생각에 잠긴 듯 앞쪽만을 노려보다가 이내 팔짱을 끼고는 천천히 말했다.
“한 번 잡아 봅시다, 이 새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