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PC방 살인사건(1)
“조검, 이 사건 한 번 해봐.”
이규필 부장이 필웅의 사무실에 찾아와 기록을 한 무더기 내려놓았다.
“제가 가지러 가도 되는데.”
“그냥 오는 길에 들러서 갖고 왔어. 원래 정검이 하던 건인데 요새 너무 바쁜 것 같아서. 어차피 수사지휘 끝났다고 하니까 공판만 좀 맡아줘.”
“예, 알겠습니다.”
이 부장이 떠나고 필웅은 사건 파일을 열어 보았다.
‘PC방 살인사건’이었다.
필웅은 사건 파일을 덮고 이마에 손을 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하필 왜 이 사건이 내게?’
어제 시연의 사무실에서 본 그 사건이었다. 사실 그는 이 사건은 자기가 맡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영전의 기억 속에서는 가해자가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못한 걸로 인지하고 있었다. 그만큼 쉽지 않은 사건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피해자의 누나는 어제 본 서다혜 기자였다. 괜히 사건을 맡았다가 제대로 된 결과를 내지 못하면 다시 서 기자를 볼 면목이 없었다.
필웅은 어제 살인 사건에 대해 묻던 서 기자의 표정이 생각났다. 답답한 마음에 기자라는 신분을 이용해서라도 사건에 대해서 물어보고 싶었던 듯했다.
필웅은 나영전이 기억하는 역사에서 이 사건이 어떻게 진행됐는지 명확히 기억나지 못한 게 아쉬웠다.
애초에 나영전은 형사사건을 전문으로 하는 변호사는 아니었다. 그에 따라 열심히 공부했던 형사사건 판례 등을 많이 잊어버린 상황이었던 것이다.
‘사건에 대해서 제대로 공부했다면 대응 전략을 짜는 데 도움이 됐을텐데.’
필웅은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지.’
필웅은 기억나지 않는 것을 억지로 떠올리려고 노력하는 대신 다시 한 번 증거자료를 살펴보기로 했다.
사건은 어제 살펴본 대로 간단했다.
한 남자가 다른 남자를 죽였다. 그 과정에서 그의 동생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가 다소 불분명하긴 하지만 적어도 서다운을 직접 칼로 찌른 남자가 주범임은 분명했다.
용의자의 이름은 심기원이었다.
생각해 보면 간단한 사건이다. 어떻게 보면 쉽게 풀릴 수도 있겠다고 필웅은 생각했다. 게다가 이 사건은 이규필 부장이 직접 맡긴 사건이었다.
‘이건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겠어.’
이 사건만 잘 처리하면 이규필 부장의 눈에 들 수 있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조필웅은 갑자기 조금 긴장이 됐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위기는 기회일 뿐! 좋아, 완벽하게 처리해서 콩밥을 먹여주지.’
필웅의 눈에 의지가 불타올랐다.
“계장님, 공소장 양식 정리됐으면 넘겨주세요.”
“예, 여기 있습니다, 검사님.”
필웅은 서둘러 심기원을 기소할 준비를 마쳤다.
속전속결이다. 어차피 간단한 사건이라면 신속하게 처리해 버리는 편이 좀 더 깊은 인상을 남길 것이었다.
그는 한편으로 궁금하기도 했다. 자신이 개입함으로서 원래 역사의 결과를 뒤집을 수 있는지에 대해.
그 순간 그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가만, 나영전의 역사 속에서는 조필웅이 이 사건을 담당했을 리가 없는데?’
그랬다. 조필웅은 이미 1998년에 지병으로 죽었을 것이므로, 그가 이 사건을 담당했을 리가 없었다.
필웅은 자신감이 생겼다.
‘그러면 나영전이 알고 있던 사건의 결말이 반드시 그 결말이 아닐 수도 있는 거잖아? 기존 결과를 충분히 뒤집을 수 있을 거 같은데?’
그리고 그에게 또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조필웅 본인과 상관없는 사건들은 기존 역사랑 똑같겠지? 그럼 사건의 사실관계 자체는 같을 거야, 분명!’
나영전이 알고 있는 PC방 살인사건에서 쟁점이 된 부분은 여전히 이 사건에서도 쟁점이 된다는 얘기였다.
‘결국 사건의 결말이 아니라 어떻게 그 결말으로 향했는지가 중요하다는 얘긴데.’
제1회 공판 기일이 잡힐 때까지의 며칠 동안 필웅은 끊임없이 기억을 되살려 보려고 애썼다.
‘이 사건이 유명해진 이유가 분명히 있다!’
만일 단순한 살인사건이라면 법률 교과서에까지 이 사건이 실릴 이유가 없었다.
필웅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기 시작했다.
그 때 필웅의 눈에 책상에 펼쳐 놓은 법전의 한 조문이 눈에 들어왔다.
형법의 한 조문이었다.
그 순간 필웅의 머릿속에 무엇인가가 번뜩 스쳐지나갔다.
* * *
공판기일 날이었다.
피고인의 인상은 참 고약했다. 피고인은 뭔가 짜증난 듯한 표정으로 피고인석에 착석했다.
이미 들어와 착석해 있던 필웅은 피고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필웅은 직접 피고인 조사를 하면서 처음 그와 대면한 적이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 도수가 높아 보이는 안경, 왜소한 체격, 그 무엇 하나도 비정한 살인범에게 통상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인상은 아니었다.
‘역시 사람은 겉만 보고는 모른다는 거지.’
“재판장님 들어오십니다.”
법원 경위가 재판장의 입장을 알렸다.
‘저게 그 3C인가?’
조필웅은 깐깐해 보이는 재판장의 모습을 훔쳐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3C. 이름은 최창칠. 공판 검사들 사이에서는 악명이 높은 판사였다.
무척이나 깐깐하고 검사의 말을 무시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그가 지적하는 내용이 원칙적으로는 대개 맞는 내용이어서 반박하기도 상당히 곤란하다는 것도 문제였다.
머리가 벗겨지기 시작한 최창칠 판사는 그 명성에 걸맞게 무언가 엄격하고 딱딱한 인상의 남자였다.
최창칠은 판사석에 앉아 매섭게 피고인과 조필웅을 한 번씩 둘러보았다. 이내 못마땅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검사측, 공소사실 요지에 추가 진술할 것 있습니까?”
필웅은 양복 상의의 매무새를 다듬고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열었다.
“검사측 공소사실의 요지 진술하겠습니다. 피고인은 29세의 남성으로서…….”
“아니, 공소장에 써 있는 그대로가 맞아요? 아니면 뭘 또 추가로 진술할 거에요?”
“예? 그게 저…….”
“공소장에 다 써 있는 거면 읽어줄 필요 없습니다. 나도 글 알아요.”
최창칠이 신경질적으로 말하며 조필웅에게 앉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역시 쉽지 않은 사람이군.’
필웅은 다소 당황하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내가 검사측에 묻고 싶습니다. 목격자들을 증인으로 신청 안하고 전부 진술서면으로만 증언을 대체한 이유가 있습니까?”
“증인들이 재판에 나오는 걸 께름칙해해서 부득이하게 진술서면으로 대체했습니다.”
최창칠은 못마땅하다는 듯이 짧게 탁자를 탁 내리쳤다.
“지금 실체적 진실을 가리는게 중요한 거 아닌가요? 증인들의 사정만 봐주고 검사가 그냥 증인을 놔주는 게 말이 됩니까? 증인이 법정에서 직접 선서하지 않으면 위증죄가 성립하지 않는 거 몰라요? 위증죄 피하려고 진술서만 내겠다고 한 것일지 누가 압니까?”
“재판장님, 증인들의 진술서를 보시면 잘 아시겠지만 모두 피해자나 피고인과 일면식도 없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뭐하러 목격담을 꾸며내서 진술하겠습니까? 정 필요하시다면 추가로 증인 신청하겠지만, 증언 내용이 달라질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필웅이 바로 맞받아치자 최판사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필웅도 담담히 그러나 도전적으로 그의 시선을 응시했다.
‘노려보면 어쩔건데?’
필웅은 다소 떨리기는 했지만 기싸움에서 지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최창칠도 그 후로도 잠시 그를 노려보다 고개를 돌려 변호인에게 질문을 던졌다.
“피고인은 공소장 받아 보았지요? 반박할 사실 있습니까?”
피고인 측의 변호인이 느긋하게 일어나 말했다.
“사실관계는 인정합니다.”
필웅은 씩 웃었다. 애초에 피고인이나 피해자와 아무 관계가 없는 제3의 목격자가 여러 명 존재하는 상황이었다. 피고인이 사실관계를 다툴 여지는 없는 것이다.
즉, 피고인이 피해자를 불러내 여러 차례 고의로 칼로 찌른 사실이 명백한 이상 살인행위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최창칠은 도수가 높아 보이는 안경 너머로 빤히 변호인을 바라보다가, 다시 조필웅과 변호인을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피고인과 검사측 추가로 제출할 증거 있습니까?”
“있습니다.”
변호인이 손을 들고 자신 있게 말했다. 재판을 종결할 준비를 하던 최창칠은 귀찮다는 듯이 그를 다시 바라보았다.
“뭡니까?”
“피고인의 일기와 피고인 어머니의 진술서입니다.”
“변호인, 피고인 본인과 피고인 가족의 탄원서는 유죄 여부를 가리는 증거가 되기 어렵습니다.”
“탄원서가 아닙니다. 피고인이 평소에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다는 내용의 사실을 진술한 서류입니다!”
변호인이 극적으로 들고 있던 서류를 꺼내 들어보였다. 몇 안되는 방청객들 사이에서 술렁거림이 퍼져나갔다.
최창칠 판사는 한숨을 쉬고는 서 있던 사무관에게 자료를 받아오라고 턱짓으로 지시했다.
최 판사는 진술서를 죽 읽어 보다가 내려 놓고 물었다.
“피고인의 자필이 맞는 것 같긴 하군요. 피고인이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다구요?”
변호인은 자신만만하게 검사측을 쳐다보았다. 필웅은 가만히 앉아 입술을 씹기 시작했다.
“그렇습니다. 피고인 측은 심신장애에 따른 무죄를 주장하는 바입니다!”
방청석의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최창칠 판사는 흥미롭다는 듯 다시 한 번 변호인이 제출한 서류들을 넘겨보기 시작했다.
“형법 제10조에 따라 사물을 변별할 능력이 없는 자의 범죄는 처벌하지 않도록 되어 있지요. 피고인 측에서 제출한 증거들을 보면, 피고인에게는 하루에도 몇 번씩 발작 증세가 일어나 가족들에게도 행패를 부리거나 가출을 하는 사실이 있다고 하더군요.”
최창칠 판사는 서류를 내려놓고는 말을 이었다.
“결국 변호인의 주장은 사건 당시에도 피고인이 사실상 정신을 잃었고, 그래서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이지요?”
“맞습니다. 사실 상식적으로만 생각해 봐도,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설령 가게 점원이 자신에게 조금 불손하게 대했다고 해서 불구대천의 원수를 대하듯 칼로 수십 차례를 찔러 살해해야겠다고 의도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오히려 이런 잔인한 수법이야말로 피고인이 그 당시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점을 증명할 강력한 증거가 될 것입니다.”
변호인은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필웅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문득 피고인석에 앉아 있는 심기원을 바라보았다.
심기원은 눈썹을 찌푸리면서도 입으로는 기괴하게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저 죽일 놈!’
필웅은 처음으로 피고인에게 분노를 느꼈다.
평소에 그가 사건을 처리할 때에도, 피고인의 행위가 이해가 가지 않거나 가끔 짜증을 유발하는 경우는 있었다.
그러나 이렇도록 직접적으로 그에게 한 인간에 대한 분노를 느끼게 한 경우는 드물었다.
사람을 의도적으로 죽여 놓고도 그 때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며 증거를 조작하는 인간들. 그리고 그런 개돼지만도 못한 인간을 위해 다시 진술을 꾸며내는 인간들.
나영전은 조필웅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자신의 이익과는 상관없이 이 세상에는 반드시 처단해야 하는 인간이 있다는 것을 절절하게 깨달았다.
“검사측? 할 말 있습니까?”
최창칠 판사는 묘하게 신나 보이는 모습으로 필웅을 다그쳤다. 조필웅은 땀이 흐르는 주먹을 꽉 쥐었다.
“검사님!”
그 때 누군가가 외치며 재판정의 문을 열고 등장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채 쏠리기도 전에 문을 연 누군가는 헐레벌떡 필웅에게 다가와 서류봉투를 건넸다. 주 계장이었다.
필웅은 서류봉투를 꺼내어 안에 든 것을 읽어보고 피고인과 변호인을 돌아보며 천진난만한 미소를 짓고는 말했다.
“검사 측, 추가 증거 제출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