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화. 나방 컷!
“모두 비켜라!”
수많은 요정들을 재치고 앞으로 나온 요정왕이 다급히 궁수를 막아섰다.
“왕치고는 너무 어린데?”
모습을 드러낸 요정왕은 훤칠한 모습의 성인이었다.
초록빛 머리칼을 가진 그는 요정족 왕족의 옷인지는 몰라도 초록빛 갑주를 입고 있었다.
[뭐야 남자네.]
[야 궁수야 그냥 죽여라.]
[거 요정왕이 남자인건 선넘었지.]
[장난 그만치고 빨리 우리 요정 누나 내놓으라고.]
ㄴ 존나 요정에 진심이네ㅋㅋㅋㅋ
ㄴ 로망인갑제 ㅋㅋㅋㅋㅋㅋㅋㅋㅋ
“후우….”
그는 자연스럽게 허공에서 자신의 검을 꺼내들며 궁수에게 검을 치켜들었다.
“나 요정왕 알브헤임 2세가 대장전을 신청한다.”
“허? 대장전?”
마치 자신이 고고한 영웅왕이라도 되는 양 그는 검을 들고 궁수를 노려보았다.
“이계의 전사여.”
“….”
“침묵인가, 뭐 상관없겠지.”
스으으으윽
그는 왼손으로 검면을 자연스럽게 쓸었다. 검 위에 푸른 검기가 새겨지며 예기가 눈에 띄게 높아졌다.
“만약, 이번 결투에서 내가 지더라도, 죄 없는 병사들은 살려주게.”
“…허?”
[죄가 없단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남의 땅 침략하고 무죄 이 지랄 ㅋㅋㅋㅋㅋ]
ㄴ 아직 안 했는데 ㅋㅋㅋㅋㅋㅋㅋ
ㄴ 섬으로 왔잖음ㅋㅋㅋㅋ
ㄴ 어엌 항공모함이었네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안되겠다, 궁수야 그냥 다 족치자.]
[대가리에 꽃밭만 가득찼나, 상도덕이 없네.]
[완전무장하고 영토 침범했지만 죄는 없다구요!]
ㄴ 어맛! 어째서 이런 곳에 K2가!
[수류탄이 아니라 악세사리라구요! 악세사리!]
ㄴ 님 머리가요?
ㄴ 제 머리는 안 터지는데요?
ㄴ 머리는 그냥 돌인 듯.
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놈의 당당한 태도에 어이가 가출한 궁수는 순간 자신이 잘못들었는지 채팅창을 볼 정도였다.
그러나 채팅창에서도 저 싹수없는 놈들에게 쌍욕을 퍼붓고 있었다.
상남자 나궁수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분쇄자를 들었다.
“좋다! 말이 통하는 사내로군!”
궁수의 대답을 확인한 그는 곧바로 검을 치켜들고 마력을 일으켰다.
“간다!”
마력을 쩌렁쩌렁 울리며 기합을 넣은 그는 궁수를 향해 돌격했다.
그러나 궁수는 아무것도하지 않고 덤덤하게 그 자리에 서있을 뿐이었다.
“하! 전사여! 설마 겁먹어 얼어붙은 거냐!”
적의 우롱에도 궁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 자리를 지켰다.
“편히 보내주마!”
화아아아아악!
투명한 열 두 개의 날개를 펼친 그는 전속력으로 궁수를 향해 돌진했다.
적의 칼날이 궁수의 가슴을 꿰뚫기 직전.
“진짜 대가리에 꽃만 가득 찼네.”
궁수는 가뿐하게 땅을 박차고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뭣!?”
“셈!”
“보고 있었네!”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미리 대기하고 있던 셈이 알브헤임을 향해 요새화를 사용했다.
원래는 아군을 감싸고 보호하는 스킬이지만 궁수의 파티에서는 편리한 감옥일 뿐이었다.
알브헤임을 가둔 궁수는 화살에 바람을 채워 넣었다.
역방향으로 회전하는 바람이 흉흉한 소리를 내며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위에는 붉은 빛을 머금은 익스플로전 애로우까지 더했다.
“야!”
쐐애애애애액!
궁수의 손아귀를 떠나간 화살이 적진의 정중앙에 꽂혔다.
쿠콰콰콰콰콰!
역방향으로 회전하는 바람은 무시무시한 기세로 적들을 빨아들였다.
세 자릿수가 넘는 적이 궁수의 화살에 빨려 들어갔다.
먹음직스러운 경험치들에 궁수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너네 병사들 쩔드라!”
콰아아아아아앙!
빨려들 요정들이 궁수의 익스플로전 애로우에 터져나가며 순살 당하고 말았다.
“느헤헤헤헿!”
궁수의 공격에도 피해가 막심한데 심지어 그 뒤에서는 법사가 캐스팅을 완료한 상태였다.
궁수가 재난이라면 법사는 재앙이었다.
“느헤헤헤헿!”
먼저 적들의 아래에 빙결의 기운을 머금은 마법진이 쫘악 깔렸다.
반응할 틈도 없이 차오른 냉기는 그대로 적들의 움직임을 얼려버렸다.
그러나 법사의 마법은 이제 막 시작일 뿐이었다. 이번에는 적들의 머리 위에서 붉은빛의 마법진이 등장했다.
“설마 메테오?”
머리 위의 거대한 붉은 마법진. 당연히 법사의 전매특허인 메테오가 먼저 떠올랐으나 이번에는 달랐다.
“철컹철컹!”
법사의 화염에서는 적들을 둘러싸는 불기둥이 한 개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 이거….”
궁수의 기억 속에서 전에 상대했던 드래곤이 떠올랐다. 헌터들을 통째로 가둬버린 감옥.
계속해서 주변을 조여 오며 수많은 헌터들의 목숨을 위협했던 그 감옥!
당장에 그 정도의 어마어마한 강제력을 낼 수는 없었지만 법사의 불기둥도 크게 뒤지지는 않았다.
주변에 박힌 수십 개의 불기둥은 서서히 요정들을 조여 오기 시작했다.
“사, 살려줘!”
“뭐야! 이런 마법사가 어째서!”
“마법은 후진국이라며!”
적들의 애처로운 비명이 들려왔으나 법사는 눈 하나도 깜빡하지 않고 마법을 컨트롤했다.
오히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서슬 퍼런 병장기와 살벌한 스킬들을 들이민 주제에 이제와 자비를 구하다니.
적어도 법사의 머릿속은 그렇게까지 꽃밭이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꽃으로 가득 차 정상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는 것 일지도 모른다.
그러던 말던 법사는 계속해서 마법을 조종하며 적들의 목을 죄여왔다.
쾅! 콰아아아앙!
“오? 저거 나왔다.”
“뭐 뭣!? 이게 무슨!”
적들이 모두 목숨을 잃기 직전 요새를 부수고 나온 알브헤임은 화들짝 놀라 동료들에게 달려갔다.
그러나 고작 그 혼자서 방대한 법사의 스킬을 막아내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끄아아아아아악!”
“살려! 살려…!”
“뜨거워! 뜨겁다고! 히이이이익!”
결국 요정들은 법사의 마법에 모두 통구이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왜 우리가 나쁜 놈 같냐.]
[꼬우면 덤비질 말던가.]
[응징 딱대 ㅋㅋㅋㅋㅋㅋㅋ]
[소총 한발 발사했더니 응징으로 핵이 떨어짐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기적의 가성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선빵 맞았으니 아무튼 정당방위임ㅋㅋㅋㅋㅋㅋ]
요정 병사들은 한 마리도 남김없이 법사의 경험치가 되어 사라졌다.
“크흐으으윽…. 어째서…!”
오직 그들의 왕인 알브헤임만이 통곡하며 울부짖을 뿐이었다.
너무나도 뻔뻔한 그의 태도에 궁수는 어이가 없어하며 다가갔다.
오른손의 분쇄자를 휭휭 휘두르며 궁수는 놈 앞에 섰다.
“들어오자마자 쏴재낀 놈이 누군데?”
화르르륵!
궁수의 분쇄자에 불이 붙었다. 감정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서늘한 눈빛으로 궁수가 입을 열었다.
“걱정마, 너도 곧 보내줄게.”
후우우웅!
놈의 머리통을 터트려버리기 위해 휘두른 궁수의 분쇄자는.
카앙!
알브헤임의 검에 의해 간단히 막히고 말았다.
순식간에 검을 들고 일어선 그는 낮게 혀를 차며 궁수를 노려보았다.
“그 놈 말을 듣는 게 아니었는데….”
“뭐?”
“죽어라!”
궁수는 혹여나 게이트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잠깐 공격을 멈췄으나, 적은 궁수와 말할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동료들이 죽어나갔다는 절망감에 그는 피눈물을 흘리며 궁수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카아아앙!
“그 놈이 누군데!”
“네 놈이 알 것 없다!”
서늘한 칼날이 궁수의 머리칼을 스쳤다. 검 위로 둘러진 흉흉한 기운에 궁수의 머리카락이 조금 잘려나갔다.
“크흐으윽!”
잘린 것은 궁수의 머리카락인데 어째서인지 셈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었다.
“죽어! 죽어!”
“아니 그래서 그놈이 누구냐고!”
“알 것 없다!”
적의 칼날이 유연하게 검로를 바꿔 궁수의 머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죽어라!”
수직으로 내려치는 검을 분쇄자로 있는 힘껏 처낸 궁수는 자세가 무너진 놈의 복부에 깊숙이 무릎을 꽂아 넣었다.
“크허어어억!”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니킥에 놈은 피를 토하며 쭈욱 뒤로 밀려났다.
“퉤!”
피를 토해내는 그 모습마저 고결해 보이는 요정왕은 이를 악물고 다시 한번 궁수를 향해 도약했다.
완전한 상태에서도 상대가 되지 못하는데 저렇게 온 몸이 상처 입은 상태로 궁수와 싸우려 한들 전투가 성립될 리 없었다.
“흐으으으윽!”
화아아아아악
“…어?”
마치 다이아몬드처럼 아름답게 빛나던 놈의 날개가 갑자기 새빨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면….”
으드득.
상당히 고통스러운 듯 알브헤임은 이를 악물었다.
검을 바닥에 처박고 거친 숨을 몰아쉬는 그 모습은 연민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나궁수.
“B급 신파극은 그쯤 하시고.”
놈이 무슨 짓을 벌이는지는 모르겠으나 궁수는 순순히 기다려줄 마음이 없었다.
변신과 각성할 때 하는 공격만큼 짜릿한 것이 없다고 궁수는 땅을 박차고 알브헤임에게 돌진했다.
“죽어라 나방!”
콰아아아아앙!
마력을 듬뿍 담은 일격은 얼마나 강력했는지 순간 주변의 흙먼지가 확 일어날 정도였다.
‘손맛이 없다.’
무언가 돌덩이처럼 딱딱한 것을 때리는 느낌마저 들었다.
“날…개?”
궁수의 공격을 막은 것은 다름 아닌 놈의 날개였다.
- 피해라!
“이런!”
궁수가 순간 놈의 날개에 신경을 빼앗긴 사이 알브헤임이 거칠게 검을 휘둘렀다.
적을 벤다는 것이 아닌 살기에 미쳐 검을 후려친다는 느낌이었다.
콰아아아앙!
“크허어어억!”
어찌어찌 분쇄자로 막아내긴 하였으나 궁수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허.”
오죽하면 궁수의 손목이 저려올 지경이었다.
“죽어라!”
흐름을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적은 회복할 틈도 주지 않고 궁수를 몰아붙였다.
그러나 이 전투는 일 대 일 전투가 아니다.
다른 멤버들은 궁수가 충분히 혼자 끝낼 수 있을 것 같았기에 내버려 뒀을 뿐, 이런 위험 상황에서는 방관하지 않았다.
쿠우우우웅!
적의 공격을 가뿐히 막아낸 셈은 방패에 어깨를 대고 알브헤임을 밀어내었다.
“은우!”
“알고 있습니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다는 듯 이은우가 적의 목을 노리고 검을 휘둘렀다.
은우 특유의 초고속 검술이 작렬하며 종이 한 장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목을 비껴나갔다.
“칫!”
“계속 몰아붙이게! 어차피 시간은 우리편이야!”
놈도 저 상태를 무한정 유지할 수 있지는 않을 터 버티면서 힘을 빼기만 하더라도 이득이었다.
“블레싱! 프로텍트 가디언! 디택티브 스킨!”
힐의 다중 버프가 은우를 향해 쏟아졌다.
“후우…!”
얼마나 빠른지 은우의 발아래에서 스파크가 튈 지경이었다.
뇌속성 스킬을 사용하는 은우는 베기보다는 찌르기를 이용한 공격으로 집요하게 적을 공략해나갔다.
파지지직!
푸른 전류를 튀기며 호쾌하게 검을 휘두르는 은우는 유리하게 전투를 이어나갔다.
그러나 적의 방어력도 보통이 아닌지 놈의 날개는 꾸준히 은우의 공격을 받아내고 있었다.
치열한 공방이 이어졌다. 돌격한 은우가 곧바로 방향을 틀었다.
마침 위치도 너무나도 절묘했다.
셈 - 알브헤임 - 은우.
“죽어라!”
일직선으로 만들어진 포메이션에 은우는 앞 뒤 생각하지 않고 최대한 빠르게 검을 꽂아 넣었다.
그러나 12개의 날개를 활용하여 놈은 아슬아슬하게 은우의 공격을 피해내었다.
은우는 곧바로 셈의 방패를 밟고 다시 한번 적에게 돌진했다.
“크흐으윽!?”
그러나 적도 은우가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검을 들고 반격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속도냐 방어력이냐.
실력이 모든 것을 판정 짓는 전장에서 알브헤임의 검이 은우의 목을 노리고 휘둘러졌다.
카캉!
“뭣이!?”
그러나 알브헤임의 공격은 뒤에서 날아온 궁수의 화살에 의해 저지당하고 말았다.
휘둘러지는 검을 맞추어 공격을 비틀다니.
말도 안되는 묘기, 아니 신기였으나 정작 당사자는 덤덤했다.
궁수는 컴파운드 보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아, 이 묵직하고도 서늘한 감각.”
트루 스나이핑을 활성화시킨 궁수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신궁』 나궁수로 돌아갈 때다.”
마치 각성이라도 한 듯한 궁수의 반응에 이은우는.
“님 원래 궁수인데요….”
어이없는 나머지 멍하니 궁수를 바라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