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평상시라면 시끄럽게 떠들며, 간혹 뇌없는 행동을 하는 아이들마저 껴있는 남자 아이들이 고요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학생 주임이나 담임의 시선을 피해 최대한 민첩하게 루트를 확보하고 미리 진영을 다지고 있었다.
온천 입장시간까지 앞으로 5분.
들어가는 여성을 체크하는 정찰조는 핸드폰이 이용이 불가능하기에 무전기를 통해서 시간마다 사령부에 보고를 하고 있었다. 어째서 무전기를 가지고 있냐면, 혹시 이런일이 있을까봐 삐둘이 리더 창호가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고 밖에 설명할 방법이 없다.
바보라고 해야할지, 용의주도하다고 해야할지는 모르겠지만 어찌됐든 현 상황에서 도움이 되고있는 것은 사실이다.
복도의 구석에서 각종 장식품을 엄폐물로 삼아 숨어서 망을 보던 남학생이 맞은편 복도에서 걸어오는 여자아이들을 발견하고는 급히 사령부(삐뚤이들이 있는 곳)으로 무전을 보냈다. 드디어 작전의 시작인 것이다.
" 대장! 전방에 여왕과 그 패거리가 출몰했습니다."
'여왕'- 즉, 곱슬이와 그 패거리가 1반 여성들중 가장 먼저 온천에 나타났다. 남자들 입장에서 가장 요주의해야할 인물을 꼽자면 두말 할 것없이 '여왕'이다. 중학시절부터 근처에 명성이 자자했으며, 유연 고등학교에 온 이후론 그야말로 천하무적. 여성 최대의 세력을 지니고 있고, 남자 일진짱이든 뭐든 감히 여왕에게는 덤빌 생각을 하지 못했다.
무섭다는 선배들조차 여왕의 앞에선 그저 쉬쉬할 뿐이다. 명실공히 유연 고등학교의 '여왕'.
' 들키면 죽는다...!'
남학생은 비장한 얼굴로 엄폐물에 바싹 붙었다. 자신이 왜 이런 곳에 숨어있냐고 물어본다면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당행히 곱슬이는 그런 남학생을 발견하지 못하고 들뜬 얼굴로 온천으로 들어갔다.
일본에서 온천이라. 나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피부가 좀 꺼칠꺼칠해진 기분을 받았는데 여기 온천은 피부 미용에도 효과가 좋다고 하니 상당히 기대하고 있었다.
' 여자는 피부가 생명이니까.'
상혁이를 어떻게 해볼려면 우선 관리를 해줘야하는 법이다. 패거리를 이끌고 기분좋게 콧노래를 부르며 곱슬이가 온천으로 들어가자 숨어있던 남학생은 작게 한숨을 쉬며 '여왕이 온천으로 들어갔다.'라고 보고 했다.
사령부(라지만 특별한 장소가 있는 것은 아니고 삐뚤이들 그 자체.)는 그 보고를 듣고 자신의 뒤를 따르는 반 남학생들을 뒤로 돌아보았다. 몇몇 반란 분자와 유상혁이 빠져있지만 대부분의 반 남학생들이 삐뚤이 리더, 창호를 따르고 있었다.
이수연과 가장친한 남학생인 '유상혁'도 지금 자신의 손에 있었다. 어째서 상혁이 자신들을 따른다고 했음에도 데려오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배신하고 이수연을 도울지도 모르는 스파이가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수연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이번 작전의 열쇠다보니 우리쪽으로 포섭해야 했기에 우선 말은 걸어본 것이다.
물론 거절하든 승낙하든 숙소에 처박아두고 건수와 명호에게 감시할 생각이었다. 다만 다른 점은 거절하면 그냥 애물단지처럼 처박아두는 것과 달리 승낙했을시엔 무전으로 여러가지 정보를 얻어볼 생각이었다. 물론 거짓말일 확률이 있으니 어느 정도만.
" 자, 지금부터 시작이다. 여왕이 온천에 있으니 차근차근 밑작업을 진행하도록 한다. 여자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으니 조금있으면 다른 여자애들도 오겠지. 그속에는 우리반의 여자아이들, 즉 '이수연'도 오게 될거야!"
" 오오오오--!!"
들킬 확률이 있으므로 조그만 목소릴로 환호하며 자신들의 리더, 창호의 뒤를 따랐다. 자신의 반 여자애들은 솔직히 큰 관심은 없었다. 최우선 목표는 이수연. 그리고 그 다음이 '여왕'. 수연이 만큼은 아니어도 여왕인 곱슬이도 상당히 예쁜 외모였기에 남자아이들중에 좋아하는 녀석들도 상당수 있었다.
망을 보고 있는 남학생에게 엄지를 추켜 올려준 창호는 비장한 얼굴로 복도를 지나 '남'이이라고 쓰여있는 입구에 천천히 발걸음을 내딛었다. 최대한 조용하고 은밀하게, 아직 남학생들이 오지 않은 것처럼 조용하게 옷을 벗은 남학생들은 일본에서 흔히 보듯 하반신을 수건으로 가린 뒤에 온천에 입장했다.
크기는 상당했다. 그리고 미리 알아둔 정보처럼 옆에는 나무로 높게 칸막이를 세워두고 있었지만 분명 맨 위는 뚫려있었다. 온천의 귀퉁이에 있는 나무와 뿌연 습기로 몸을 가린다면 충분히 여탕을 볼 수 있을 것같앗다. 나무가 좀더 튼튼하고 올라탈 수 있으면 좋았겠지만 그런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인지 가지도 별로 없고 타고 올라가기엔 그리 튼튼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저 나무는 그저 저 무성한 잎사귀로 자신들을 가려주기만 하면 되는 것을. 그렇다면 어떻게해서 저 뻥 뚫려잇는 위까지 올라갈 것인가? 그것은 간단하다, 오직 그 일을 위해서 반의 남학생들을 잔뜩 끌고 온 것이었으니 말이다.
" 그럼...작전을 시작한다."
이름하여 작전의 이름은 '쿠푸왕의 피라미드'. 이집트에서도 손 꼽히는 그 거대한 피라미드를 이 일본의 온천에서 재현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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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천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 무렵, 상혁은 현제 상황에서 탈출하기 위해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건수와 명호였던가. 반에서 이야기 해본적이 없던 아이들이지만 대충은 알고 있었다. 입학 첫날 오타쿠 도장찍고 아웃사이더가 된 뒤에, 수연이와 곱슬이 덕에 누구도 건드리지 않는 순수 아웃사이더가 되었던 상혁과는 달리 건수와 명호는 반에서 명백히 '까이는' 축이 아이들이었다.
남자들은 여자들처럼 딱히 이 세력 저 세력 만들거나 하지는 않지만(가끔 패거리가 있기는 한다. 일진이라던지) 분명 무시하거나 얕잡아보는 경향이 분명 잇다. 얕잡아 보이는 것에 심해지면 결국 괴롭힘으로 발전하지만 명호와 건수는 그 정도는 아니고, 단지 어느정도 '약한' 아이들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니 대부분 온천에 갔을 때도 이렇게 자신이나 관리하고 있지.
어서 온천에가서 삐뚤이들의 행동을 막아야 되는데... 상혁이 초조한 얼굴로 무슨 방법이 없을까 고민해보앗지만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딱히 손이 묵여있다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무작정 이곳에서 도망치기엔 두명을 뿌리치고 가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한명이라면 어떻게 하겠지만 두명이라면 솔직히 무리였다.
' ...어떻게 한다.'
명호나 건수 둘다 자신의 옆에 딱 붙어 책을 보며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화장실이라도 가면 좋을텐데 그런 낌세는 안보였다. 둘을 떨어트려 두던지, 아니면 자신을 막지 못하게 해야할텐데.
아무리 고민해도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꼬셔볼까? 하지만 그런다고 먹히려나. 믿져야 본전이다. 어차피 이대로 계속 있어봐야 시간 낭비일 뿐이니 우선 말이라도 해봐야지. 그렇게 결론을 내린 상혁은 옆에서 책을 읽고 있는 건수에게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 야, 너희는 수연이 보고 싶지 않냐?"
" 어차피 나중에 사진으로 돌린뎄어."
이 범죄자 놈들. 그냥 경찰에 신고를 해버릴까보다. 아무래도 좋은 말로 구슬려봐야 먹힐 것같지 않았다. 건수나 명호같은 아이들은 어설프게 구슬리기 보다는 협박하는 쪽이 역시 좋겠지?
" 너희 그건 알고 이런 짓하는거야?"
" ...?"
상혁이 의미심장하게 이야기하자 책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명호와 건수가 슬쩍 상혁이를 향해 눈길을 돌린다. 그런 둘의 모습에 상혁이는 속으로 이름을 팔게 될 곱슬이에게 사과하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 온천엔 수연이만 있는게 아니야. 곱슬... 이 아니라 '여왕'도 온천에 있다고? 이런 일 하는거 그녀석에게 들키면 어찌될 줄알고 이런짓을 하는거냐?"
흠칫. 하고 '여왕'이라는 이름이나오자 건수와 명호가 알기 쉽게 놀랐다. 하기야 그럴만도 했다. 유연 고등학교에서 감히 건드릴 수 없는 최흉의 일진의 이름이니까. 두명을 이곳에서 상혁이를 감시하라고 이야기했던 삐뚤이들과는 급이 다르다.
최흉의 일진인 것도 그렇고, 여자아이들 중 가장 세력이 크기 때문에 곱슬이에게 거슬린다면 분명 다른 여자아이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 그런 녀석이 있는 상황에서 사진을 찍는다고? 분명 우리반 남학생 전부 초토화될걸? 아마 너희는 회생할 방도도 없을걸."
'여왕'이라는 곱슬이의 또다른 명칭이 이렇게 도움이 될줄은 몰랐다. 건수와 명호는 통통하고 마른 얼굴에 근심이 가득한 표정을 짓더니 점차 책으로 시선을 떨궜다.
이것도 안통한 건가? 상혁이가 초조한 마음을 감추고 둘을 빤히 쳐다보고 있으려나 건수의 입에서 옅은 음성이 나왔다.
" 우, 우린 너를 잡지만 않으면 이번 일에 가담이고 뭐고 한 것도 아니라고."
" 온천에 직접가지도 않았고..."
즉, 가던지 말던지 마음대로 하라 이거지? 역시 곱슬이가 정답이었던 듯 싶었다. 반에서 비교적 약자인 건수와 명호로선 삐뚤이보다 곱슬이 쪽이 무서운 존재였기 때분이다.
" 그래? 그럼 나 가도 잡지 않는거지?"
" 우리가 무슨 상관이야."
방금전과는 말이 다르잖아 어이. 벌써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 이라고 연기하고 있는거냐. 곱슬이가 무섭긴 무서운가보구만. 그러고보니 자신이 곱슬이와 친하다보니 그 말이 가슴에 와닿았던 모양이다.
" 그거 고맙네."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두명은 반응이 없었다. 정말로 곱슬이에게 혼난다! 이 말한마디에 포기해버린 모양이다. 상혁이로선 편하니 좋긴 하지만. 나중에 삐뚤이한텐 뭐라고 하려고?
' 물론 삐뚤이가 오늘 사건에서 무사히 살아남았을 때의 이야기지만.'
녀석들은 수연이를 너무 얕보고 있다. 건너편에서 몰래 넘어가서 사진을 찍는다고? 상혁이 생각에 수연이는 건너편에 남자아이들이 몇 명이 있는지 발자국 소리로 추측할 정도의 인간이다. 그런 수연이에게 건너편으로 '몰래' 넘어간다고? 수연이를 잘아는 상혁이로선 무식하기 그지없는 소리다. 그러니 굳이 상혁이 가지 않아도 수연이에게 제압될 확률이 높았지만...
상혁이가 생각하는 것은 '만약'.
만약에 수연이가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있어서 그것을 알지 못한다면?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사진에 찍히게 될 테고, 그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그거 범죄라고 진짜! 양쪽 모두에게 좋지 않은 것이라니까. 괜히 기세를 타가지곤 이런 무시무시한 범죄를 기획하다니.
' 아직 넘어가진 않았겠지?'
시간을 보니 1반이 온천에 입장하기 시작한지도 15분정도가 흘렀다. 넘어갔다면 충분히 넘어갔을지도 모를 시간이다. 제발 늦지 않기를! 상혁이는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온천을 향해서 나아갔다.
' ...뭘까, 왜 나를 따라오는거지.'
한편 수연은 상혁이가 '만약'이라고 생각한 것처럼 다른 것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방에서 나와 온천에 도착할 때까지 자신의 뒤를 네명의 여자아이들이 쫓아왔기 때문이다. 물론 최근에는 자신의 뒤를 곱슬이나 윤아가 자주 쫓아와서 익숙하기는 했지만 지금 자신의 뒤를 쫓아온 것은 결코 그런 친한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아이들이 아니다.
바로 방금 전까지 숙소에서 어색하게 떨어져 있던 같은 반 여자아이들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하나같이 수연이와는 말도 섞어보지 않은 여자아이들이었기에 수연이도 딱히 신경쓰지 않았고 그쪽도 그런 듯 싶었다. 그리고 온천에 갈 시간이 되서 대충 준비해서 밖으로 나가려했더니 갑자기 네명이 한꺼번에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자신의 뒤를 졸졸 쫓아온 것이다.
그냥 시간이 되서 가는가보다 싶었는데 '여'라고 쓰여있는 곳에 들어가서 옷을 다 벗고 자신이 들어가길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아 명백히 자신의 뒤를 졸졸 쫓아온 모양이었다.
'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네.'
무슨 내기라도 하는건가. 수연이로선 알도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물어보기엔 귀찮았기에 근처에 준비된 바구니 같은 곳에 옷을 벗어 둔 다음, 애니에서 보던 것처럼 커다란 수건을 몸에 감고 온천의 문을 열었다.
뒤에서 졸졸 쫓아다니는 것이 신경쓰이긴 했지만 계속 애니로만 보던 일본 온천에 직접 들어간다는 것에 내심 무척 기대하고 있었기에 애써 그것을 머릿속에서 지워냈다.
" 어? 수연이 왔네! 여기야!"
여기가 온천이구나. 확실히 한국의 목욕탕이나 찔질방과는 분위기가 좀 달랐다. 신기한 마음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수연이는 익숙한 적갈색 머리가 자신을 보며 손을 흔들어오자 그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뒤에선 여전히 숙소의 여자아이들이 쫓아오고 있었기에 기왕이면 익숙한 곱슬이 옆에 앉는게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곱슬이가 반갑게 느껴질 정도였다.
" 헤? 왠일이냐, 당연히 떨어져서 다른 곳에 앉을 줄알았더니만."
곱슬이로선 그런 수연이의 행동이 의외였던 듯, 고양이같은 눈을 부드럽게 휘며 킥킥 웃었다.
" 시끄럽긴."
매섭게 노려봐줬지만 곱슬이는 여전히 당당하게 웃고있었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기는 했지만 딱히 다른 곳에 앉기도 뭐했기에 수연은 온천의 물 온도를 대충 손을 넣어 체크한 뒤 천천히 발을 담궜다.
" 그냥 한번에 확 들어와. 뭘 발부터 넣어."
정말 시끄러운 녀석이다. 수연이도 몸을 담그고 싶었지만 피부가 예민하다보니 한번에 몸을 넣기에는 좀 뜨겁게 느껴졌다.
' 응?'
그렇게 발을 담군 체 몸이 뜨거운 온천물에 익숙해지길 기다리던 수연은 자신의 옆에 누군가가 앉자 고개를 돌렸다. 곱슬이를 따라다니는 패거리는 모두 그 오른쪽에 앉아있었기에 자신의 옆에 앉을 만한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 아-, 따뜻하다."
국어책이라도 읽는 것처럼 어색한 말투로 자신의 옆에 앉아 발을 담구는 것은 계속 자신의 뒤를 졸졸 쫓아온 지은이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 지연, 정아, 예은까지 나란히 조르륵 앉고 있었다.
대체 뭐지.
수연이 의문이 담긴 시선으로 네 명을 빤히 바라보았지만 그 네 명은 본인들끼리 즐겁게 떠들고 있을 뿐이다. 먼저 말을 걸어서 물어보기엔 성격에도 안맞으니 그저 왜 자신의 옆에 앉았나 하는 의문만이 머리속에 맴돌았다.
' 하아, 모르겠다.'
그냥 옆에 앉았다고 생각하면 되겠지. 딱히 옆에 앉아서 자신에게 신경쓰이는 짓을 하는 것도 아니니 무시하면 그만이다.
" ...뜨거워."
그런 것보단 슬슬 온도에 익숙해져서 몸을 온천물에 집어넣으니 얼굴에 그 뜨거운 열기가 확확 올라왔다. 몇 도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뜨거워서 오래있기는 힘들 것 같았다. 몰랐는데 아무래도 자신은 뜨거운 물에 약한 것같았다. 몸에 힘도 빠지고 정신이 몽롱한게 오래 있으면 만화에서나 보던 것처럼 뜨거운 물 때문에 기절해버릴 것같았다.
" 응? 근데 수연이 너..."
나름 피로가 풀리는 것같아 느긋하게 뜨거운 온천물을 만끽하고 있는 수연이에게 곱슬이가 뭐라고 이야기했지만 이제 반응하기도 귀찮기도 해서 그냥 무시하고 온천 천장만 멍하니 응시하고 있는데.
콱!
" 가슴이 무슨 컵이냐. 이거 장난 아니네. 윤아나 청이 선배야 알고 있기는 했지만 너도 보통이 아닌데?"
뭔가가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는게 느껴졌다.
" ...?!"
무, 뭐야! 화들짝 놀란 수연이는 순간적으로 몸의 균형을 잃고 온천물에 머리를 푹 담궜다가 황급히 고개를 들고 곱슬이를 노려보았다.
" 무, 무슨 짓이니!"
" 뭐야, 너 설마 부끄러워하는거야? 헤에, 의외인데. 너 지금 평소랑 얼굴이 다른걸."
설마 자신의 무표정이 깨졌다는 말인가? 솔직히 좀 동요한 것은 사실이다. 태어나서 누가 자신의 가슴을 만진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곱슬이는 그런 수연이의 얼굴을 즐겁다는 듯이 바라보며.
" 너 C컵은 되지? 고등학생 맞냐. 하긴 윤아만 해도 D컵인가. 이상하게 상혁이 근처에는 가슴이 큰 여자들이 많다는 말이야. 물론 여자의 가치는 가슴이 정하는게 아니지만."
곱슬이는 간신히 B컵에 턱걸이하는 자신의 가슴을 보며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간신히 B컵에 턱걸이 하고 있기는 하지만 동년배의 여고생중에서는 결코 작은 가슴이 아니다. 애초에 여고생이 C컵이나 D컵인게 상식적으로 이상한 것이다.
" 너, 너란 녀석은 정말..."
수연이가 그런 곱슬이에게 가슴을 가리고 뭐라고 이야기하려는 순간, 이때를 기다렸다는 것처럼 수연이의 옆에 앉아있던 지은이가 황급히 둘 사이를 끼어들 듯이 입을 열었다.
" 그러게 항상 생각했는데 수연이는 몸매가 정말 좋은 것같아. 가슴도 그렇지만 허리가 무척이나 가녀리달까... 무슨 관리라도 하는 거야?"
끼어든 사람은 자신의 바로 옆에 앉아있던 지은이었다. 이녀석이 갑자기 왜 여기서 끼어들지? 어떻게 대답해줘야할지 순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곱슬이가 가슴을 만져서 머리도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 ...아침마다 조깅정도만 하고 있어."
딱히 다른 말은 하지 않고 솔직하게 대답해주자, 지은이는 이것이 기회라고 생각했는듯 계속해서 이야기를 해왔다.
" 아침마다 조깅? 와, 부지런하네! 그래서 이렇게 날씬한건가."
그렇게 이야기한 지은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수연이의 허리를 매만졌다. 여자끼리 할 수 있는 스킨십이었지만 애초에 누군가가 자신의 몸을 만진다는 것에 면역이 없는 수연이로선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남자였다면 언제나처럼 그대로 제압해버렸을테고 설령 여자라도 평상시라면 손을 쳐내던지 거칠게 거절했을게 분명한데 이상하게 지금은 그렇게 행동할 수가 없었다.
전신을 뜨거운 물에 담그고 있다보니 정신이 몽롱하기 때문인걸까.
" 그럼 한번 제대로 봐보실까!"
" 그, 그만해."
지은이가 옆에서 하는 행동에 괜시리 곱슬까지 기세를 탔는지 수연이가 몸을 가리고 있던 수건을 꽉 붙잡았다. 사실 수연이의 몸에 관심이 있다기보단 언제나 무표정하고 여유롭던 수연이가 당황하는 모습이 재밌었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지윤이에게 당한 것이 워낙에 많다보니 이런 수연이를 가만히 두고 넘어갈 수가 없었다.
' 대체 뭐하는 거야 이 녀석들은!'
곱슬이도 곱슬이지만 옆에 지은이라는 녀석은 제대로 말도 해본 적없는 사이면서 왜 갑자기 스킨십을 하는거냐고. 아까도 언급했지만 수연이는 무척이나 몸이 민감하다보니 곱슬이와 지은이 계속 허리나 가슴을 만지는 통해 뭔가 미묘한 기분마저 들었다.
' 아니, 그. 그만, 그만하라니....까...!'
주물 주물.
수연이가 그렇게 소리없는 비명을 지르고 있을 때.
지은도 딱히 이렇게 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스킨십=친목이라는 묘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보니 곱슬이와 함께 기세를 타고 있었다. 결국 둘의 거친 행동에 수연이의 몸을 감고 있던 수건은 천천히 풀려 온천에 두둥실 떠올랐지만 수연이는 그것을 미처 인지할 수가 없었다.
" 진짜 분홍... 큼! 아무튼 진짜 깨끗하네 이녀석."
주물주물.
먹을 풀어놓은 듯 흑단같이 아름다운 긴 생머리. 온천의 물에 의해 달아오른 붉은 피부. 뜨거운 물에 묘하게 풀려있는 눈이며 평상시와 다른 모습들이 곱슬이에게 묘한 기분을 느끼게 만들었다. 확실히 수연이는 같은 여자가 보기에도 아름다웠다. 어떻게 관리했는지 가는 허리와 쭉 뻗은 긴 다리는 그야말로 고등학생이라고 보기엔 너무나 완벽한 비율을 이루고 있었다.
오타쿠라는 것과 사교성이 없다는 것만 빼면 정말 대단한 녀석인데 말이야. 물론 오타쿠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성인 게임정도는 참아줬으면 하는 것이 곱슬이의 생각이었다.
물론 지금은 곱슬이가 성인게임에서나 나올 법한 짓을 저지르고 있었지만.
" ......."
수연이가 결국 푹, 퍼져버리자 지은이는 급히 손을 멈췄다. 뭔가 자신이 계획하던 것보다 과하게 스킨십을 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히 퍼득 들었기 때문이다. 분명 멀쩡하게 온천에 들어왔던 수연이가 자신들이 이리저리 매만지고 정신을 되찾았을 땐 거의 반쯤 기절한 듯 돌에 기대어 누워있었다. 거기다가 수건도 어디론가 사라져서 겉모습만 보면 무슨 야한 영화나 만화에서나 보던 그런 모습이었다.
" 지은이가 그런 애인줄 몰랐어.."
" 너무 심한 것아니야?"
" 수연이가 신고하지 않을까."
천천히 고개를 돌려 뒤를 보니 예은이와 지연이는 물론 수연이를 싫어하던 정아까지 자신의 앞에 퍼져버린 수연이를 보며 저마다 한마디씩 이야기했다. 지은이도 설마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기에 자신과 '공범'이라고 할 수 있는 곱슬이를 가만히 바라보자 곱슬이는 언제나와 같은 얼굴이지만 살짝 당황한 음성으로.
" 여, 여자끼린데 뭐 어때. 수연이가 뜨거운 물에 정신을 못차리나보다 빨리 물에서 꺼내야겠는걸. 너는 저기 좀 흘러간 곳에 떠있는 수연이의 수건좀 가져다 주겠어?"
" 그래, 아, 알았어."
사실 곱슬이와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대화해본 적은 처음이었기에 내심 긴장한 음성으로 지은이가 답했다. 누가 뭐라고 해도 곱슬이는 유연 고등학교 여자아이들의 '여왕'인 것이다.
' 어쩌다가 이렇게 되버린거야, 아 진짜...'
원래 이렇게 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냥 조금 친근한 스킨십을 하고 대화를 해볼 생각이었는데 만지다보니 수연이가 정신을 못차리고 꿈틀거려서 자신도 과하게 나갔던 것같다. 평상시 그토록 도도한 수연이가 자신의 손아래에서 꿈틀거리는 모습에. 숙소에서도 자신들 무시하고 외면하던 수연이가 당황하는 모습에 묘한 쾌감마저 느꼈다. 아마 말은 하지 않아도 수연이에게 맺힌 것이 있기는 했던 모양이다.
' 하아, 어쩌지.'
나중에 수연이가 제정신으로 돌아온다면... 아니 나중에 숙소에서 수연이를 무슨 얼굴로 봐야할지 모르겠다.
" 내가 미쳤지..."
괜히 수연이와 어떻게 다리를 나보겠다고 생각한 것부터가 잘못된 것같았다. 한숨을 쉬며 물위에 둥실둥실 떠있는 수연이의 수건을 오른손을 뻗어 잡는 순간.
삐걱, 삐걱.
" ....응?"
" 뭐지?"
여탕과 남탕의 경계를 나누는 나무 칸막이가 이상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뭔가 흔들흔들 거리고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거친 소리를 내는 것이.
" 뭔가 이상한데. 칸막이에서 조금 떨어지는게 좋을 것같아."
곱슬이가 앉아있던 여자애들을 칸막이에서 멀찍히 떨어지게 앉게하고는 칸막이를 빤히 응시했다. 귀를 기울여보니 자세히는 아니어도 남자들이 있는 온천쪽에서 뭔가 시끌거리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 이상하게 조용하더니만 뭔가 있는건가.'
분명 남자들이 있는 온천이라면 시끄러운 소리가 들릴 것이라 예상했지만 너무나 조용하던게 이상하긴 했다. 이런 칸막이로 가려져 있다면 분명 여탕쪽으로 소리치는 녀석이 있을 법도 한데 그런 녀석이 한명도 없어서 그저 좋다고 생각했는데...
삐걱. 삐걱. 삐걱.
칸막이가 거칠게 흔들렸다. 곱슬이가 반쯤 퍼져있는 수연이의 뺨을 탁탁 두드리며.
" 야, 이수연 정신좀 차려봐. 온천에서 나가야할 것같다니까."
" ....으."
곱슬이가 뺨을 두드린게 효과가 있었는지 멍한 수연이의 눈이 점차 생기가 돌아오는 순간.
" 뭔가 칸막이가 기울어지는 것같지 않아?"
멍하니 예은이 그것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물론 칸막이가 넘어진다고 해도 한참 떨어져있는 이곳까지 닿지는 않겠지만 설마 넘어질까- 하고 지켜보는데.
끼기기기기긱!! 콰아아앙!!
설마, 라는 말을 비웃는 것처럼 단번에 기울어져 바닥으로 쓰려졌다. 벽에 마찰하여 천천히 쓰러진 탓에 파편이 휘날리거나, 큰 사고가 나지는 않았지만 진짜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 우아아악!"
" 살려줘!"
기울어져 쓰러진 칸막이를 타고 사방에 알몸의 남성들이 굴러 떨어진 것이다. 무슨 짓을 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마치 높은 곳에서 떨어진 것처럼 사방팔방 굴러다니고 있었다.
" 꺄아아악!"
" 뭐야! 씷어! 꺄아아~!"
갑작스럽게 난입한 남자들의 모습에 여자들은 저마다 비명을 지르며 여탕 밖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고, 그것은 비단 곱슬이도 마찬가지여서 단숨에 달려서 여탕 밖으로 뛰쳐나갔다. 갑자기 쓰러져 안에 들어온 남자들에게 뭐라하는 것은 나중에 해도 상관없지만 우선 자신의 몸을 가리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수건으로 몸을 가리고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자들 앞에 당당히 설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 뭐야 정말... 갑자기."
휴, 하고 한숨 돌리며 시끌시끌한 여탕안을 지그시 노려보던 곱슬이는 뭔가를 놓고나온 듯한 찜찜함이 느껴지자 고개를 갸웃했다. 뭐지, 온천에 뭘가지고 들어간 것도 없었고 몸을 가리던 수건도 제대로 감고 나왔고. 누군가에게 알몸을 보여준 것도 아닌데.
곰곰이 자신이 왜 찜찜한 것인가 고민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곱슬이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 뭐야 지금 뭐좀 생각하고 있는데.
" ...저기."
어깨를 두드린 사람은 다름아닌 방금 전까지 자신과 수연이의 몸을 스킨십했던 지은이었다. 그녀는 방금전 뜨거운 온천물에 들어왔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창백한 얼굴로 천천히 입을 열어왔다.
" -수연이 데리고 나왔어?"
" 아차."
뜨거운 물과 스킨십에 의해서 푹 퍼져버린 수연이를 떠오르자 곱슬이가 그제야 머리에 맴돌던 찜찜함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급하게 뛰쳐나오는 바람에 멍하니 있던 수연이를 두고 나와버린 것을.
============================ 작품 후기 ============================
오늘 온천편을 끝장내려고 했는데 결국 실패. 남자쪽 시점을 쓸수가 없었네요. 그다지 길지는 않으니 다음편에 끝내고 이어서 디즈니 랜드편을 써야겠습니다. 명환이도 아마 개인 시점으로 한번 나올 것같군요. 명환이와 수연이가 언제 만나냐고 묻는 분들이 많으신데 천천히 기다려주세요! 아마 디즈니랜드편이 끝나는 동시에 만날 것같습니다. 그리고 멘붕편 돌입.
아참, 덤으로 설마 수연이 덩그라니 놓고 왔다고 모두에게 수연이의 알몸을 보일리가 없죠. 물론 모두에 유산혀크는 포함되지 않습니다만.
그리고 드크 엘프 99에 이어 소서도 내일이면 99를 찍을 것같습니다. 엘프는 한참걸렸는데 소서는 금방찍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