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6교시 마지막 수업은 체육이었다. 설마 새 학기 첫날부터 체육이 들어 있을 줄이야. 체육이라는 것은 참으로 귀찮기 그지없는 과목이다. 수업이라는 명목 아래 운동장을 돌아야 하며, 때때로 피구나 축구와 같은 구기 종목으로 강제적인 팀플레이를 강요받기도 한다.
뭐 딱히 운동을 못하거나 하는 건 아니다. 도리어 반대. 전에 말했듯이 중학교 당시엔 체육 선생님이 이쪽으로 나가볼 생각 없냐고 진지하게 물었을 정도였다.
그렇다 해도-
' 내가 팀플레이를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운동은 운동. 팀플레이는 팀플레이다. 달리기 같은 것이야 아무래도 좋지만 피구나 축구 같은 것은 나에게 영 쥐약이었다. 덤으로 오늘은 첫 체육 수업이라는 명목 아래 자유 시간을 가지고 있는지라 남학생들은 모여서 축구를 하고 있었고.
여학생들은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거나 공이나 던지고 주고받는 몇몇 아이들이 보였다.
나야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고 외딴 곳에 떨어져 앉아 있었지만. 이야, 여기 좋네. 바람은 서늘한테 햇빛이 따뜻해서 딱 좋다. 요즈음 날씨가 워낙 변덕스러워서 갑자기 너무 추워지거나 너무 더워질 때가 있는데 오늘은 딱 좋네.
외톨이 최고. 방해하는 사람도 없고, 오늘의 마지막 수업은 이렇게 느긋하게 보내도록 하자.
무심코 축구를 하고 있는 남자애들을 바라보니 어제 처음 만났다는 것이 거짓말처럼 활기차게 공을 주고받으면서 축구를 하고 있다. 벌써부터 상하 관계가 나뉘어져 있는지 공격수를 하는 애들은 수비를 하는 애들에게 이것저것 지시하는 것이 보였고, 뭔가 애매한 애들은 자기가 미드필더라도 되는 듯이 하프라인에서 얼쩡거리며 돌아다녔다.
그중에서도 유독 거동이 이상한 녀석이 보였는데, 당연한 이야기지만 상혁이었다. 오타쿠 답지 않게 수비수의 역할을 열심히 소화하려는 듯, 열심히 상대 공격수를 쫓아 달렸지만 할 수 있는 것은 달리기뿐 이었다.
발은 상당히 빠른 듯 금방금방 쫓아갔지만 공을 빼앗거나, 설령 자신에게 공이 오더라도 어떻게 처분할지 몰라 앞으로 뻥뻥 차는 것 외에는 하는 것이 없었다.
' 뭐-.'
그래도 그 옆에서 허우적거리면서 걸어 다니는 다른 수비수보단 확실히 괜찮아 보였다. 하지만 나로선 그런 상혁의 모습이 그저 이상하게만 느껴졌다. 분명 성격은 소심한 면이 없잖아 있다. 거기에 분명 전생의 나와 비슷한 아웃사이더 오오라가 존재하며 딱히 다른 녀석들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는 외톨이 기질이 다분하다.
하지만 때때로 이렇게, 그런 외톨이적 모습과는 전혀 다른 것을 보면 기묘한 기분이 든다. 윤아의 말로는 상혁이의 사교성은 중학교때 거의 핵 폐기물급 이었다고 하던데, 지금 보면 딱히 그런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도리어 첫날, 그 삐딱한 패거리들이 오타쿠염불을 외우지만 않았다면 벌써 친구가 생기지 않았을까.
내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녀석을 바라보고 있는데 상혁이 또다시 공을 받는게 보였다. 녀석은 공을 받고 어떻게 할까 우왕좌왕하다가 난생처음으로 드리블이라는 고도의 기술을 시도 해보려는 듯 공을 앞으로 살짝 찼고.
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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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단한 기술이네, 체육 수업 첫날부터 발목을 접질려 휴식이라니."
" ....의욕이 앞섰다고 할까, 정신은 메시였는데 몸은 전혀 따라 주지 않았다고 해야 하나."
한 번의 드리블 시도로 깔끔하게 발목을 접질린 상혁은 바로 나의 옆에 앉아 운동장을 구경하고 있었다. 근데 이 녀석은 대체 왜 내 옆에 앉은 거냐. 그냥 저 멀리 따로 외톨이처럼 앉아 있던가, 아니면 교실로 돌아가던가. 양호실이라는 선택지도 있었는데 왜 하필이면.
" 어제부터 친한 척 하는 걸?"
내가 싸늘하게 말하자 상혁은 도리어 이상하다는 듯 한 눈으로 답했다.
" 친한 척이라니. 아까 점심시간에 친구가 됐잖아?"
" ?? "
" '너와는 친구가 된적 없는데?' 라는 시선으로 보지 말아 줘……. 알았으니까."
제대로 이해를 한 모양이라 다행이다.
" 그런데 수연이 너는, 왜 여자아이들이랑 말 안하고 이런 곳에 따로 있는 거야?"
" 어머, 귀찮은 참견이네. 내가 딱히 저기 어울려 꺄꺄후후 떠들 필욘 없잖아?"
앞으로 흘러내린 나의 긴 검은 머리칼을 뒤로 쓸어 올리며 차갑게 이야기하자 상혁은 이젠 놀라기보단 도리어 이상하다는 듯이 물어 왔다.
" 하지만 너는 인기인이기도 하고. 나와는 달리 꺼림직 한 구석도 없으니 사이좋게 지낼 수 있지 않을까?"
" 틀려."
나는 분명 인기는 있을지 모른다. 외모는 아름답고 성적은 학년탑. 운동도 누구에게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말하자면 학생으로서의 나는 너무 완벽하다. 하지만 그것이 사교성과 직결되냐면, 그것은 아니다.
도리어 사교성을 깎아 먹는다. 너무 완벽하면, 다른 사람은 그 존재를 거부하게 된다. 그건 질투인지 또는 공포인지 알 수 없다. 평범한 사람으로선 나와 같은 존재를 보게 되면 앞으로 다가오기 보단 뒤로 물러서게 된다.
전생은 너무나 부족해서 외톨이였다면, 현생은 너무나 뛰어나기에 외톨이다. 하지만 난 그것에 만족하고 딱히 불편을 가진 적이 없었다.
" 여자애들이랑 어울려 봤자 귀찮을 뿐. 난 삼삼오오 몰려다니는 것도 귀찮고. 쓸데없이 스마트폰으로 연락하는 것도 터무니없이 귀찮아."
" ...혹시 여자애들을 싫어해?"
" 싫어하진 않아. 보는 것은 즐겁지."
말을 걸어오지 않는다면야 옆에서 바라보는 건 좋다. 어쨌거나 여학생들이고, 오늘처럼 체육 시간이 있으면 같이 옷을 갈아입을 때 보는 맛이 있기도 하다. 그나저나 우리 반에선 나보다 가슴이 큰 사람이 없었는데, 대체 윤아는 무슨 컵일까. 내가 거의 C컵이니 설마 D컵이라도 되는 걸려나. 핫, 여고생 주제에 D컵이라니 대한민국 사람이 아니잖아.
" -그나저나, 상혁이는 나에 대해서 뭐가 그렇게 궁금하신 걸 까나?"
" 읏-. 아니 그렇기보단 너같이 예쁜 애가 계속 혼자 있으려고 하니까. 궁금했다고."
.....라노벨 주인공이냐? 현실에서 이런 말을 들으니 말못할 오글거림이 느껴졌다. 정신을 차렸을땐 이미 내 손이 돌돌말려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다니 유상혁 무서운 아이!
뭐 그렇다고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하지만 저런 말을 듣고 그냥 넘어간다면 뭔가 지는 것 같고 괜히 신경 쓰는 것 같으니 조금 심술을 부려 보도록 하자. 그렇게 결정한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살짝 요염한 미소를 지었다.
" 흐응, 상혁이는 나를 아무래도 성적 대상으로 보고 있었던 걸까?"
" 말이 어째서 그렇게 되는 건데?!"
" 예쁜 애라고 칭한 것을 보면 아무래도 그렇겠지? 설마 지금 내가 있는 외딴 곳에 온 이유도 날 어떻게 해볼 요량으로 온 것 일려나. 아아, 어떡해. 범해진다~."
" 그런 말을 하기엔 너무 무감정하고 무미건조한 어조아냐...?"
재미없긴.
" 아, 그리고 오늘 수업 끝나고 윤아가 같이 가자고 하던데. 점심시간에 말했던 그 선배를 소개시켜 줄 모양이야."
" 딱히 바란 건 아니지만."
" 아하하..., 그 점은 좀 미안하지만 윤아는 정말 너하고 친해지고 싶어 하니까 좀 어울려 줘."
싸늘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간질였다. 체육 시간도 거의 끝나 가서 축구를 하던 아이들도 마무리를 하는 중이었고 삼삼오오 모여 있던 여자아이들도 슬슬 집합하기 위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어쨌거나 나도 같은 반이었기에 결국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 그래서, 그 선배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지?"
" 뭐라고 해야 하나... 보면 아무리 너도 놀랄 거라고 생각해."
" 흐응~? 갑자기 그리 말하니 신경 쓰이는 걸."
나를 놀라게 할 정도의 선배라니. 얼마나 대단한 선배 이길래. 애니메이션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사람인가? 그나마 나와 가장 많이 대화했다고 할 수 있는 상혁이 그러니 괜히 궁금증이 생겼다. 애초에 남자야 여자야. 여기서 선배까지 여자면 진짜 저 녀석은 라이트 노벨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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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마지막 수업이라고 할 수 있는 체육 수업이 끝나고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는데 여자아이들이 시끌시끌 대화하는 소리가 아련히 들어왔다. 첫날 수업들이 어쨌다느니 누구와 친해져서 다행이라느니 이런 식의 대화가 들려오지만 나로선 아무래도 상관없는 대화다.
그보단 옷을 갈아입는데 가슴이 좀 더 커진 기분인데. 드디어 꽉 찬 C컵이 되는 건가.
나지만 정말 완벽한 몸매네. 고등학생답지 않은 이런 나이스한 몸매라니. 자자, 좀더 감탄해도 좋아.
이번 주 주말에 새로 속옷이라도 사러 갈까- 하고 생각하는데 갑자기 주변 분위기가 이상했다. 샤프트의 화려한 목 꺾기를 선보이며 뒤를 돌아보니 딱 보기에도 나 양아치에요~라는 분위기를 한 여자아이 서넛이 나의 뒤에 서 있었다. 그중, 적갈색으로 염색을 한 것 같은 여자아이는 약간 곱슬거리게 파마한 긴 머리카락을 흔들며 입을 열었다.
" 너, 너무 눈에 띄는 거 아냐?"
보아하니 같은 반인 모양인데 어제 자기소개에서 전혀 인상이 남은 얼굴이 아니다. 이런 애도 있었던 걸까. 나름 뭐 나쁘지 않은 외모인데다가 화장을 하고 있어서 화려한 느낌이다. 고등학생 때부터 화장하기 시작하면 피부에 별로 좋지 않은데.
" 어머, 무슨 일일까. 난 전혀 모르는 얼굴인데?"
상의의 단추를 마저 다 잠군 뒤 검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몸을 돌렸다. 그런 나의 행동에 살짝 움찔한 패거리들. 물론 그 리더로 보이는 곱슬파마긴머리는 고압적인 표정으로 날 노려봤다. 당장이라도 손을 뻗어 내 볼을 후려치고 싶다는 표정이었다.
" 아주 눈에 띄고 싶어서 환장했지? 얼굴 좀 예쁘다고 다 인줄 아나봐?"
" 풋."
" 웃-어...?! 이 건방진 년이!"
틀에 박힐 정도로 완벽한 대사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그런 나의 웃음에 얼굴이 붉게 변한 곱슬파마긴머리는 가차 없이 오른손을 올려 나의 뺨을 향해 휘둘렀다.
탁.
무척 빠른 손놀림이긴 했지만, 그 정도에 가볍게 맞아 줄 내가 아니다. 애초에 나의 신체 스펙은 무척이나 뛰어나기 때문에 일반 여고생하고는 차이는 어마어마하다. 모든 면에서.
" 실례. 너무 한심하게 말해서 무심코 웃어 버렸네."
" 뭐- 이... 이거 안 놔?!
" 갑작스런 폭력에 설명만 할 만큼 이쪽은 관대하지 않아. 빨리 말을 건 이유나 말을 하는 게 좋지 않을까?"
무표정하게.
무감정하게.
무미건조하게.
싸늘하고,
냉정하며.
냉철하게.
차가운 나의 말에 탈이실 안이 단번에 침묵으로 내려앉는다. 곱슬파마긴머리도 그런 나의 말에 당황한 듯 내 손에서 팔을 빼내며 애써 소리쳤다.
" 어제부터 마음에 안 들어 너. '오타쿠가 취향입니다'따위나 지껄이는 년 주제에. 너 그 오타쿠랑 사귀냐? 아까 체육 시간에도 도란도란 잘도 이야기하데? 아무튼 아웃사이더로 보이는 녀석들끼리 잘도 놀고 있더라니까?"
아무래도 이 녀석은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어제 나의 오타쿠발언과 오늘 내가 체육 시간에 상혁이와 도란도란 이야기한 것을 기회라고 생각하고 말한 모양이다. 아마 큰 목적은 없을 것이다. 단지 자신보다 잘난 나의 평가를 바닥으로 추락시키고 반의 여자아이들의 중심에 서고 싶은 것이겠지.
가만히 있어도 눈에 띄는 내가 거슬렸다고 해야 할까. 이런 나이 대의 여자아이들이 다른 사람한테 시비를 거는 것은 굳이 큰 이유가 없다.
단지 마음에 안 들어서.
그 정도의 이유다. 아무래도 이 녀석은 내가 상혁이와 도란도란 이야기하니 도란링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고고하고 다가오기 힘든 분위기의 내가 상혁이라는, 자신들의 입장에선 한없이 찌질하게 보이는 녀석과 대화를 하고 있으니 만만해 보였겠지. 아무래도 나로선 그 생각을 정정해줄 필요성이 느껴졌다.
" 그래서."
" 응?"
"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주어를 모르겠는 걸? 너는 지금 내가 상혁이와 이야기한 것에 질투라도 느끼고 있는 것일까?"
" 무..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미쳤어?!"
아까 나에게 단번에 손을 붙잡힌 탓에 함부로 손을 올리지는 않았지만 버럭버럭 잘도 소리쳤다. 헤에, 괴롭히기 좋은 얼굴이야.
" 그래? 그럼 더더욱 이해가 안 되는데. 내가 딱히 상혁이에게 다간 적이 있던 것도 아니고. 어제도 단지 취향이 뭐냐고 묻기에 좋아하는 타입을 말했을 뿐인 걸? 그런데 나는 나에게 상혁이와 대화했다는 이유로 시비를 걸어왔지. 그렇다는 건 이유는 하나뿐이잖아?"
" 무슨 소릴-."
" 질투하는 걸까나?"
물론 그런 의미로 나와 상혁을 한데 묶어서 이야기한 것은 아닐 것이다. 단지 나라는 녀석을 깎아 내리기 위해서였겠지. 그렇기에 이런 상황이 되면 당황할 것이다.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더라도 이런 상황에서 내가 자신을 놀렸다는 그것이, 마음에 안 들고 분할 것이다.
내가 말한 것은 결코 논리적인 말이 아니다. 내 앞에 있는 곱슬파마긴머리와 마찬가지로 단지 나오는 데로 떠들었을 뿐이다. 말하자면 도발. 그래, 도발이었기에 녀석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 너……. 너너!"
확, 하고 나를 향해 손을 뻗으며 달려든다. 주변의 여자애들은 갑작스런 상황에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지만 나는 전혀 아무렇지도 않았다. 도리어 이런 상황을 반겼다. 이렇게 되면 일을 빠르게 마무리 지을 수 있었으니.
중학교 때 나름 여자아이들 사이에서 놀았던 모양이지만 그뿐이다. 여자들의 싸움은 보통 먼저 머리끄댕이를 잡는 쪽이 유리하니까. 물론 때때로 치고 박고 싸우는 족속도 있는듯하지만 지금의 행동을 보면 아무래도 이 녀석은 전자인 모양이다. 앙칼진 손놀림으로 나의 머리카락을 잡으려고 하는 것을 보면.
물론 잡혀 줄 생각은 나노입자 만큼도 없다.
나는 가벼운 몸놀림으로, 뻗어 온 녀석의 손을 잡고 단번에 꺾었다. 동시에 녀석의 중심을 무너트리기 위해 오른발로 가볍게 곱슬파마긴머리녀의 발을 찼고. 단번에 미끄러져 넘어지는 그녀의 팔을 등 뒤로 꺾어 제압했다.
말하자면, 첫날 상혁이가 나한테 당했던 바로 그 기술이다.
상황은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곱슬파마긴머리는 나의 아래에 깔려 꿈틀거리지만 그것은 단지 덫에 걸린 생쥐의 움직임과 마찬가지일 뿐이다. 주춤주춤 물러서며 나를 바라보는 여자애들에게 요염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천천히 제압되어있는 녀석의 귓가에 고개를 숙여, 나직하게 속삭이듯 말했다.
" -두 번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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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례를 마치고 윤아를 만나기 위해 교문으로 걸어가는데 당연하다는 듯이 따라붙은 상혁이 나를 향해 입을 열어 왔다. 하기야 아까 종례할 때 반에 감돌던 미묘한 공기를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가 없지. 반의 여자아이들이 죄다 나에게 눈치 보는데다가 곱슬파마긴머리는 울기라도 했는지 화장이 엉망이었다.
" 무슨 일 있었어?"
" 별로."
나의 대답에 상혁은 머리를 긁적였지만 더 이상 뭐라 묻거나 하지는 않았다.
" 그래. 하지만 혹시 무슨 일이 있으면 말해 줘. 최선을 다해서 도와줄게."
" 괜한 참견."
진심으로 하는 소린지는 잘 모르겠지만, 진지한 얼굴을 보면 아무래도 그런 모양이다. 특이한 녀석.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픽 웃었다.
" 어? 너 지금 웃었지?"
" 공양미 삼 백석이라도 있는 모양이야?"
" 이런 걸로 갑작스레 봉사로 만들지 말라고."
상혁은 떨떠름하게 답하다가 문득 궁금증이 생겼는지 나를 향해 물어 왔다.
" 그런데 공양미 삼 백석을 요새 시세로 계산하면 얼마 정도 할까?"
" 흐응~. 봉사가 될 각오가 되었나 봐?"
" 아니 그렇기보단 갑자기 네가 공양미 삼 백석을 이야기하니 궁금해서..."
별게 다 궁금한 녀석이구나. 하지만 어차피 교문 앞까지 걸어가며 할 말도 없으니 대충 설명 해주기로 했다.
" 공양미 삼 백석에서 1석은 1섬이지. 1섬은 2가마니이고. 1가마니에 80kg이니 계산하면 쌀 48000kg이야. 요새 쌀이 20kg당 4만원 근처라고 봤을 때 대충 2억에 가까운 돈이 필요하다는 거지."
" ....말하자면 눈도 보이지 않는 봉사한테 스님은 2억을 요구했다는 건가."
요즘으로 치면 그야말로 악독한 사기가 아닐 수 없다. 종교 사기가 먼 곳에 있는 게 아니다. 전래 동화에도 떡하니 존재하고 있으니. 거기다가 심봉사는 공양미 삼 백석 때문에 딸도 잃고 눈도 못 뜨고 뺑덕어멈한테 사기까지 당하니 불쌍하기 그지없다.
" 넌 정말 뭐든지 아는 구나."
" 뭐든지 아는 건 아냐. 아는 것만."
이렇게 네타 발언을 하면 뭔가 기분이 좋아진다. 너 제법이야 이런 식으로 내 기분을 맞춰 주다니. 내가 묘하게 뿌듯해 하는 것을 알았는지 상혁도 작게 웃어 주었다. 그 웃음이 조금 꺼림직 했지만 오늘은 넘어가 주도록 하지.
" 뭐~야, 늦었잖아, 상혁아!"
" 아, 미안, 미안. 종례가 늦게 끝났어."
교문 앞에 가까워지니 윤아가 상혁이를 향해 소리치지만 상혁이는 능숙하게 받아넘긴다. 대단한 녀석, 소꿉친구의 앙탈을 단번에 잠재우다니. 나는 둘의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문득, 교문 앞에 윤아 말고도 누군가가 한명 더 서 있는 것을 발견 할 수 있었다.
' 에...?'
설명하자면 우선 여자였다. 윤아보다 조금 더 큰 키. 스타일이 좋아 보이는 전형적인 미인이었다. 교복 마이에 드러난 몸매를 봤을 때 놀랍게도 윤아보다 커 보이는 물체를 과시하고 있었다. 물론, 내가 놀란 것은 커 보이는 물체 때문이 아니다. ...뭐 그것에도 놀라긴 했지만 정말로 놀란 것은 다른 것 때문이었다.
길게 흘러 내려온 머리카락. 반짝이는 그녀의 눈동자. 그것이 눈부시게 화려한 금발과, 바다같이 파란 눈동자였기 때문에.
즉! 외국인이었다는 것.
그 외국인이 우리 학교 교복을 입고 있다는 것에 놀란 것이다.
" 아, 그렇지."
윤아는 상혁이와 투닥 거리는 것을 멈추고 나를 보았는지 서둘러 다가와 내 손을 잡고 강하게 이끌었다. 방심하던 차에 잡히긴 했지만 무심코 손을 꺾어 버리지 않아서 다행이다. 다행히도 윤아에겐 나의 자동 방어 프로그램이 작동하지 않은 듯싶었다. 아니었다면 윤아가 손을 잡자마자 아까 탈의실과 같은 사태가 일어날 뻔했다.
" 아……."
내 손을 잡아 끈 윤아는 단번에 그 금발의 여학생에게 끌고 갔다. 금발의 여학생은 그런 나를 빙그레 웃으며 바라보더니 천천히 한걸음 앞으로 다가오며 윤아에게 잡혀 있는 나의 오른손을 차분히 자신의 손으로 감쌌다.
" 만나서 반가워. 나는 너희보다 한 학년 선배인 '심 청'이라고 해."
금발의 외국인 주제에 터무니없이 토속적인 이름이었다.
아무래도 아까 상혁이와 대화했던 공양미 삼 백석은 앞으로 있을 일을 예지한 네타 발언이었던 모양이다.
우습게도.
============================ 작품 후기 ============================
오타는 실시간 수정중입니다. 이제 멤버가 한명더 모였네요. 참고로 저 곱슬파마긴머리는 엑스트라가 아니라 앞으로도 자주 나올 예정입니다. 단지 학교에 등교해서 하교하는 시간까지가 한편이 되어버렸군요.
딱히 이렇게 길게 쓸생각은 아닌데 쓰다보면 길어지는 것 같습니다. 우선 다들 평화로운 일상계열 부서를 선호하는 것 같으니 저도 그쪽으로 생각중입니다.
순수 오타쿠계열부서는 내용이 너무 치우친 경향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서 저도 그쪽으로 생각하고 있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