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5화 (6/448)

1권-05화

* * *

노을 보육원의 원장은 젊어서는 제법 날렸던 사업가였다. 하지만 교통사고로 가족을 잃은 후 그는 사업에 대한 의욕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그 길로 자신의 남은 재산을 전부 처분한 원장은 곧장 보육원 하나를 세웠다. 그것이 지금의 노을 보육원이었다.

보육원을 세우자마자 갈 데 없는 고아들을 데려다 키웠고, 그들이 커가는 모습을 통해 가족을 잃은 아픔을 달랬다.

이제 고아들은 그에게 있어 자식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가능한 많은 것을 베풀었고, 덕분에 부족함 없이 성장한 아이들 대부분은 당당한 사회인이 되었다.

하지만 긴 세월이 흐르면서 그 많던 재산도 어느덧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그때부터 먹고 싶은 거 못 먹이고, 입히고 싶은 거 못 입히는 쪼들리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원장도 시간 날 때마다 온갖 부업을 해가면서 보육원 운영자금을 벌었지만, 턱없이 부족한 액수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어렵게나마 겨우 보육원을 꾸려나갈 수 있었던 것은 오래 전에 보육원에서 독립한 원생들이 조금이지만 후원금을 꾸준히 보내왔기 때문이었다. 그리 많지 않은 액수였지만, 이마저도 없었더라면 노을 보육원은 진작 문을 닫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렵게 운영되어왔던 노을 보육원의 사정도 최근 들어 크게 나아졌다. 기존의 낡고 비좁은 건물 대신 세련된 신축 건물로 이전하였고, 그동안 아이들이게 해주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해줄 수 있었다.

이게 다 이진운 덕분이었다. 지금까지 의뢰를 받아 번 돈 중 상당수가 보육원에 사용되었으니까. 심지어 새로 신축한 보육원 건물도 이진운이 댄 자금으로 지은 것이었다.

때문에 원장은 내심 고마워하면서도 한편으론 미안해했다. 이진운이 비록 자신의 손에서 키워지긴 했지만, 키워준 은혜 이상으로 많은 것을 받고 있어서였다.

이번에도 이진운이 아이들에게 선물을 사준 것을 창문으로 목도한 원장은 가볍게 핀잔을 주었다.

“이번엔 또 뭘 이렇게 바리바리 사온 거냐?”

“별 거 아니에요. 이제 연말도 가까워서 아이들한테 선물 좀 나눠줬을 뿐인데요, 뭘.”

“별 거 아니라니. 내가 봐도 거의 수 천 만원어치는 될 것 같은데 말이야.”

“애들 선물 사줄 만큼은 충분히 벌고 있으니까 걱정 마세요. 그리고 제가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게 기껏해야 이런 것뿐인데, 고작 돈 몇 푼 아끼겠다고 그만두는 것도 그렇잖아요.”

대수롭지 않다는 이진운의 그 말에 기가 막혀 혀를 내두르는 원장. 이진운의 돈 씀씀이를 경험할수록 자신의 금전감각까지 이상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적당히 좀 해라.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면 애들 버릇만 나빠져. 너도 알잖느냐. 누군가에게 의존할수록 자립심이 떨어진다는 거.”

“예, 잘 압니다. 지나치지 않을 만큼만 할 테니 너무 걱정 마세요.”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이진운이 그 말대로 할지는 의문이었다. 지난번에도 이렇게 신신당부했지만, 매번 가져오는 선물꾸러미의 양은 점점 더 늘어만 갔다. 그러고도 애들에게 뭘 더 해주지 못해 안달이었다.

잠시 한숨을 내쉰 원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튼 고맙구나. 네 덕분에 올해도 아이들을 부족함 없이 키울 수 있었어.”

“뭘요. 다 제 동생들이나 마찬가진데요.

“이게 다 내가 무능한 탓이다. 너한테 부담만 안겼어.”

원장의 씁쓸한 한탄에 이진운은 오히려 웃으면서 그를 위로했다.

“원장님, 그런 말씀 마세요. 제가 이렇게 성장한 것도 다 원장님 덕분입니다. 원장님이 절 키워주지 않으셨더라면 오늘날처럼 성공하는 일은 없었겠죠. 그러니 너무 부담 갖지 않으셔도 되요.”

그건 조금의 가감도 없는, 엄연한 사실이었다.

제아무리 전생의 기억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거동조차 못하는 갓난아기의 몸으로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만일 원장의 보살핌이 없었더라면 이진운은 보육원 앞에 버려졌던 그날 이미 죽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원장은 자신이 베푼 은혜를 특별하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이진운에게 채무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래도 그동안 네게 너무 많은 것을 받았지. 키워준 것 이상으로 말이야.”

“전 그렇게 생각 안합니다. 원장님은 지금까지 절 비롯한 아이들을 최선을 다해 키워주셨죠. 그 은혜가 이깟 재물과 금전으로 비교가 될까요? 전 오히려 이걸로도 부족하다고 생각하는데요. 게다가 지금까지 지원한 것들 전부 아이들에게 쓰셨잖아요.”

“그거야 당연한 일 아니냐. 애당초 나 쓰라고 준 돈이 아닌데.”

“그 당연한 걸 못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고요. 지원금 보내면 자기가 착복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데요.”

이진운이 아는 한 원장이 보육원에 들어온 지원금을 사적으로 유용한 적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자신에게 쓸 최소한의 돈마저 아끼느라 원장의 차림새는 언제나 늘 낡고 허름했으니까. 오죽했으면 후원자들 중 몇몇은 돈 대신 원장이 입을 의복 같은 것들만 따로 보내오는 경우도 종종 있을 정도였다.

이진운은 원장의 그런 점을 나름 존경했지만, 한편으론 안타깝기도 했다. 지금까지 평생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조금도 돈을 쓰지 않는 원장의 삶이 너무도 고단해 보여서였다.

“앞으론 지금보다 더 넉넉하게 보내 드릴 테니 좀 편히 사세요. 이렇게 아낀다고 괜한 고생하지 마시고요.”

“됐다. 이 늙은 몸이 여기서 더 편해봐야 뭐 하겠니. 게다가 그 돈이 어떤 돈인데 함부로 써? 차라리 애들한테 하나라도 더 사 먹이고 쓰는 게 낫지.”

“이래 뵈도 저, 지금까지 번 돈이 꽤 됩니다. 최근 사업이 잘 돼서 노을 보육원 하나 감당할 정도는 충분히 돼요. 만일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원장님만 궁핍하게 지내신다면 지원금 줄여버립니다?”

“···원, 녀석도. 알았다. 다음부터는 좀 그럴듯하게 꾸미고 사마. 됐냐?”

이진운의 장난스런 협박에, 어이없다는 웃음을 지으며 화답하는 원장.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원장은 평생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돈을 쓰지 않을 사람이니까.

아무튼 이렇게까지 말해뒀으니 원장도 지원금에서 최소한의 금액은 자기 자신에게 사용할 것이다.

“예. 변호사를 통해 처리해뒀으니 앞으로 매달 일정액의 지원금이 통장으로 들어갈 겁니다. 그러니 운영비 걱정 마시고 애들 잘 키워주세요.”

* * *

아이들과 하루를 보낸 이진운은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집에 왔다고 해서 편히 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는 바쁘게 절차를 진행시켰다.

이진운은 작게나마 재단 하나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는 상태였다. 앞으로 노을보육원에 매달 정기적으로 들어갈 지원금도 바로 여기서 지급이 되는 것이다.

굳이 재단을 만든 이유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지원이 끊어지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

물론 외공을 익힌 그의 안위에 무슨 일이나 위험이 닥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했지만, 그래도 끝까지 진행시켰다.

‘인생이란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는 거니까.’

천마에게 죽은 다음 다시 환생해서 이렇게 이진운이란 이름으로 새 삶을 살게 될 줄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러니 사람의 앞날은 그 누구도 감히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나도 내가 이렇게까지 책임감 넘치는 인간일 줄은 몰랐지.’

사실 모른 체 해도 상관없었다. 그가 노을 보육원에서 자랐다곤 하지만, 다른 아이들의 인생까지 책임져야 할 의무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외면할 수가 없었다. 고아인 아이들이 어떤 일을 겪을지 뻔히 다 아는데, 그냥 내팽개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독립한 이후 지금까지 바쁘게 살아왔다. 수련과 의뢰를 반복하고, 틈나는 대로 보육원을 찾아가 아이들을 돌보기를 어언 십여 년.

그렇지만 아직도 부족했다. 앞으로 보육원을 수십 년 간 지탱할 자금은 확보했지만, 그 대신 앞으로 먹고사는 것이 문제였다.

일처리를 다 끝마친 이진운은 한숨을 내쉬며 푸념했다.

“이걸로 이 집하고 유지비 몇 푼을 제외하고는 완전히 거덜 나 버렸군.”

말 그대로 지금까지 번 돈 모두를 재단에 쏟아 부었다. 아직 돈 몇 천이 통장에 남아 있긴 했지만, 그걸로 평생 먹고 산다는 건 사실상 무리였다.

‘지금부터 죽어라 벌어서 30대가 되자마자 은퇴하고 만다!’

그는 내심 각오를 다졌다. 지금처럼 의뢰를 받아 처리한다면 나이 서른 전에는 충분한 자금을 확보할 수 있을 터. 그 돈으로 평생을 먹고 살면서 수련에만 전념할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그게 목표의 전부는 아니었다.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목표가 있었다.

“그래, 이번 생만큼은 반드시 결혼도 해야지. 또 이대로 혼자 살다 죽을 순 없어.”

그에게는 꽤 사무치기까지 한 소망이었다. 수련을 좋아하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생처럼 결혼 한번 못해본 채 후회하다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젠장. 어디서 여자를 만나지?”

문득 떠오른 난제에 그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전생이든 지금이든 연예하고는 담 쌓아온 그에게는 가장 큰 선결과제였다. 그 문제를 두고 고민하던 이진운은 한참을 끙끙거리다 결국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02.-소환]

번뜩 눈을 뜬 순간 가장 먼저 낯선 풍경이 보였다. 화사한 도배지로 덮여 있던 아늑한 천장 대신, 투박하고 단조로운 스틸형 천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뭐지, 여긴!?”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난 이진운은 가장 먼저 사방을 훑어보았다. 자신이 기억하기로는 분명 어젯밤 자택의 침실에서 잠들었었는데, 깨어나 보니 이 낯선 장소에 있었다.

견고한 금속으로 둘러싸인 밀폐된 공간. 내부가 어찌나 넓은지 동대문운동장 같은 거대 체육시설이 수십 개 들어서고도 남을 정도였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것일까?

그의 귓전으로 당황에 찬 사람들의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현재 이곳에 있는 사람은 그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여기가 어디지?”

“나 분명 집에서 자고 있었는데?”

“엄마! 엄마, 어디 있는 거야?”

“날 돌려보내줘! 집으로 돌려보내달라고! 제발!”

당황해하거나 불안해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울부짖는 아이나 여자의 목소리도 들리고 있었다.

국가와 인종을 불문한 수많은 사람들.

이들에게 존재하는 공통점은 단 하나다. 일상생활을 하던 중 영문도 모르고 정체불명의 장소로 끌려왔다는 점이었다.

이런 상황이 닥치자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어졌다. 두려움과 혼란에 빠져 허우적대는 자들과, 일단은 주변부터 냉정하게 살피는 자들이었다.

“설마··· 누가 우릴 납치라도 한 건가?”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이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한꺼번에 납치해? 그건 애당초 말이 안 되잖아.”

“그건 그래.”

비교적 합리적인 사고를 가진 자들은 이번 사태가 단순 납치일 거란 가정을 가장 먼저 제외시켰다.

이 많은 사람들을 납치하는 것도 일이었지만, 그 뒤에 은밀히 실어 옮기는 것도 문제였다. 분쟁지역이라면 모를까, 치안과 질서가 확립된 사회에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을, 그것도 전 세계 각지에서 한꺼번에 납치하려고 하면 당연히 걸려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 일을 단순 납치로 판단하기 어려운 이유는 또 하나 있었다.

“게다가 나, 방금 전까지 집에서 컴퓨터로 게임하고 있었다고. 그런데 눈이 피곤해서 잠시 감았다 떴더니 이곳이었어. 마취되어서 납치된 동안 기억이 단절된 것도 아니고 책상에 앉아있던 자세 그대로 몸만 이곳으로 이동되었다고. 이게 그냥 납치한다고 해서 가능할 것 같아?”

“그럼 설마 우리가 통째로 공간이라도 이동됐다는 거야? 그거야 말로 말이 안 되잖아.”

“또 모르지. 우리가 영화에서 본 것처럼 외계인에게 납치라도 당한 건지 말이야.”

“야, 무서운 소리 마!”

그 이후로도 여러 말들이 오갔지만 그들이 내놓은 결론은 하나였다.

세계 각지에서 살고 있던 사람들을 한순간에 납치해 한 자리에 가둬두는 일은 인간의 능력으론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단 것이었다.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어.’

이진운의 내심도 다른 사람들처럼 혼란스러웠지만 주변에 대한 경계는 조금도 늦추지 않았다.

사람들이 떠드는 것처럼 납치의 가능성도 생각해 봤지만, 그건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결론내린지 오래였다. 그의 감각은 일반인들에 비해 가히 초인적인 수준. 내가무공을 다룰 수 있던 전생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야생의 짐승들과 비교해도 몇 배나 민감할 정도다.

그런 이진운을 자는 사이에 납치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야. 누가 말한 것처럼 정말 외계인이 날 이곳으로 공간이동 시키기라도 한 건가?’

믿기 어렵다는 얼굴로 고심하던 그때, 금속제 벽 너머의 공간으로부터 희미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 기척 속에는 일개 범인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기세가 담겨 있었다.

이제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강렬한 존재감에 이진운의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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