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04화
* * *
이진운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우선 저녁식사부터 마쳤다. 저녁을 먹기엔 조금 이른 시간이었지만 의뢰를 마치느라 점심까지 걸렀기 때문이었다.
조촐하게 저녁을 마친 뒤 그는 마당으로 나왔다.
그의 집은 한적한 동네의 단독주택이었는데 그 규모는 꽤 아담한 편이었다.
하지만 집 짓는 데 돈이 부족했던 건 아니다. 단지 혼자 사는 집을 굳이 크게 지을 필요가 없어서였다.
그렇지만 집 크기에 비해 마당만큼은 무척이나 넓었다. 동네의 작은 놀이터 정도 되는 면적이었다.
마당 한가운데에 선 그는 천천히 동작을 취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천축유가의 기법까지 더해 창안한 일종의 기공체조였다. 타인과 싸우기 위한 수법은 조금도 담겨 있지 않지만, 꾸준히 수련할 경우 전신을 고루 발달시키고 유연성과 신체회복력을 키워주는 효과가 있었다.
일단 기공체조로 몸을 푼 그는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본격적인 단련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쿵!
묵직하게 내딛는 진각과 함께 그의 좌수와 우수가 허공을 때렸다. 무게감 넘치면서도 결코 끊어지지 않는 유장한 투로!
그가 수련하고 있는 외가무공의 이름은 만로연강공(萬路鍊鋼功).
점창파에 존재하고 있던 다수의 외가무공들을 통합하여 새롭게 정립시킨 외가무공이었다.
기초무공이긴 하지만 꾸준히 수련할수록 근골을 최적의 형태로 단련시켜주며, 궁극에 이르러서는 전설상의 금강불괴에 이르는 길을 열어준다.
다만 단점은 효과를 보기까지 꽤 오랜 세월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적어도 5년 이상을 수련해야 하며, 그 이후에도 꾸준히 수련해야 겨우 외공다운 효과를 볼 수 있다.
게다가 수련 과정도 무척이나 고통스러워서 어지간한 인내심이 아니고선 연성 자체가 불가능한 외공이었다.
그렇지만 이진운은 이 무공을 선택했고, 혼자서 두 발로 뛰어다니기 시작한 시절부터 지금까지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계속해 왔다.
‘솔직히 말해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 내가무공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나마 효과를 볼 수 있는 건 이 만로연강공 밖에 없었으니까.’
아기로 태어나자마자 자신의 몸뚱이를 확인한 뒤 이진운이 느낀 감정은 망연자실 그 자체였다. 육체의 근골은 수준 이하인데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내공심법은 아예 운용조차 할 수 없었으니까.
그래서 두 발로 걷고 뛰어다닐 수 있을 때부터 수련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저질스런 육체를 그럭저럭 쓸모 있는 수준으로 뜯어고치려면 고된 수련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으니까.
그나마 다행이라면 내가무공을 사용할 수 없는 이곳에서도 외가무공은 어느 정도 효과를 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외가무공도 깊게 파고들다 보면 진기의 운용이 필요할 수밖에 없게 되지만, 이진운은 거기까진 언강생심 바라지도 않았다.
자신의 저질스러운 몸뚱이만 어느 정도 정상 궤도로 올려놓을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그때부터 혹독한 수련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 과정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외공을 일정 수준까지 체득하기 위해선 말 그대로 육체의 한계를 시험하는, 고문에 가까운 수련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그가 수련하는 모습은 절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어린 아이가 마치 자기 자신을 일부러 학대하는 것 같아서였다. 때문에 그 문제로 몇 차례 곤혹스러운 일을 당하기도 했다.
게다가 외공의 경지가 높아질수록 미치는 여파가 커지는 것도 문제였다. 진각만 밟아도 땅거죽이 꺼지고, 아스팔트나 콘크리트 바닥이 으스러져 내려앉을 지경이니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이후로 이진운은 산속이나 인적이 드문 외진 장소를 찾아다니게 되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수련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해서였다.
하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다. 자기 집 마당만큼 남들 눈치 보지 않을 수 있는 장소가 또 어디 있겠는가. 그가 집 크기에 비해 유독 마당만 더 크게 만들었던 것도 바로
지금처럼 연무장으로 쓰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게다가 이곳은 한적한 외곽 지역. 수련하면서 조금 소란스러워져도 주민들이 항의해올 일도 없었다.
“후우······.”
마지막 투로를 끝마친 이진운은 입으로 깊게 숨을 내뱉었다.
하지만 수련을 다 끝내고도 여전히 개운치가 않았다. 이젠 성취가 정체 상태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만로연강공은 어지간한 상승무공에 못지않은 외공이지만, 지금은 기껏해야 도검불침이 한계.
이건 무공의 한계라기보다는 기(氣) 자체를 축적하고 다룰 수 없는 이 세상의 특수성이 문제라고 봐야 했다.
‘외공을 통해 미약하게나마 외기(外氣)의 흐름을 탈 수 있는 것만 봐도 그래. 기는 분명 이 세상에도 존재하고 있어. 하지만 어째서지? 왜 이걸 다룰 수는 없는 거야?’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문제였다. 어중간한 자라면 모르겠지만, 이진운은 전생에 지고한 경지라는 현경의 끝에 이르러 그 너머의 경지까지 엿본 몸이다.
기의 통제에 대해서는 가히 극한에 이르렀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외부의 기운을 거의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은 결코 정상적일 수가 없었다.
‘분명 이유가 있다. 어떤 섭리나 초월적인 존재에 의해 기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것을 원천적으로 금제하고 있는 거겠지.’
예전이라면 몰랐겠지만 이제는 그도 알고 있었다. 인간을 아니 필멸자의 굴레를 초월한 신적 존재들이 정말로 실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흔히 민간에서는 오래 전부터 신선이나 신으로 불렸던 존재들이었다.
전생의 마지막 순간 현경의 다음 경지에 살짝 발을 들이지 못했었다면 아마 지금까지도 그들의 존재를 믿지 못했을 것이다.
‘그 작자들이 무슨 이유로 이런 금제를 걸어뒀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이번 생에서는 고작해야 삼류 무인 행세를 하는 게 전부겠어.’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기운을 내부에 축적하는 것은 불가능해도 외부의 기운을 미약하게나마 간접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가 두꺼운 철창을 휘고 김덕수의 권총탄까지 맨손으로 잡아낼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런 연유에서였다.
하지만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소총탄까지는 그럭저럭 막아낼 수 있지만, 대물저격총부터는 어느 정도 부상을 각오해야 했다.
그렇지만 이 이상은 바라지도 않았고, 그럴 필요조차 없었다. 국가를 상대로 전쟁이라도 벌일 생각이 아닌 이상, 자기 한 몸 건사하는 건 지금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그럼에도 그가 아쉬움을 느낀 이유는 다름 아닌 무인으로서의 향상심 때문이었다. 게다가 전생의 마지막 순간에 깨달았던 그때의 여운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았다.
“···지금도 손을 뻗으면 어떻게든 닿을 것만 같은데 말이지.”
그는 자신의 그러한 갈망이 전부 덧없다는 듯 쓰게 웃고 말았다.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과 같은 조건과 상황에서는 당시의 깨달음을 체현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 다음에도 생이 있다면, 아무런 제약도 없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또 모르지.’
하지만 그런 천운이 다시 찾아오기 힘들다는 것은 그 누구보다도 이진운 본인이 더 잘 알았다. 이번 생도 꿈만 같은데 이런 행운이 또 한 번 우연처럼 반복되길 바란다면, 그거야말로 염치도 없는 도둑놈 심보라 해야 할 것이다.
만로연강공의 수련을 마친 이진운은 마당 한편의 수납대에서 가검을 꺼내들었다. 만로연강공은 어디까지나 육체를 완성하기 위한 단련이었을 뿐, 본격적인 수련은 지금부터였다.
핑! 피피핑
공기를 가르는 파공성과 함께 날이 서지 않은 가검이 현란한 궤적을 그려냈다.
그것은 말 그대로 한 자루 검으로 만들어내는 천변만화.
부드럽다가도 사나웠고, 가볍다가 무거워졌으며, 느린 듯 하다가도 어느 순간 빛살처럼 변해 허공을 꿰뚫었다.
그가 전생에 체득했던 점창 무공의 정화였다.
내가의 공부를 다룰 수 없는 지금 수련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형(形) 뿐이었지만, 이진운은 그 모든 것을 자신의 육체에 확실하게 새겨두었다.
필요하다면 언제 어느 때라도 최적의 형태로 발휘할 수 있도록.
내공 없이는 예전과 같은 본연의 위력은 낼 수 없겠지만, 그는 이를 쓸데없는 짓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무공은 자신의 지난 삶을 대변하는 모든 것이었고, 또한 과거와 현재, 전생과 현생을 이어주는 유일한 매개이기도 했다.
그러니 어찌 등한시 하겠는가. 당장 쓸모가 있든 없든, 무공의 수련을 게을리 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검술은 어느 순간부터 도법이 되었다. 그의 수련은 애당초 검술 하나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점창의 무학은 상상 이상으로 폭넓었으며, 검 외에도 궁, 창, 도, 편 등 다방면에 걸쳐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아우르고 있기에 이진운이 점창과 중원무림이 인정한 일대종사인 것이다.
벌써 몇 시간이 흘러갔을까? 그럼에도 뜨거운 열기는 식지 않고 이어졌다. 얼굴과 전신에서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지만, 그의 움직임은 조금도 지치거나 쇠한 기색이 없이 오히려 격렬함을 더해가고 있었다.
밤이 깊어지는 가운데, 그의 수련은 끝날 줄 모르고 계속되었다.
* * *
다음날 아침. 이진운은 일찍부터 일어나 외출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받은 의뢰는 없었지만 외출해야 할 개인적인 용무가 있어서였다.
차를 몰고 시내로 나간 그는 백화점과 마트 등 몇몇 매장을 들러 다양한 물건들을 쓸어 담듯 사들였다. 노트북이나 게임기 같은 전자제품부터 시작해서 킥보드나 자전거 혹은 아이들이 가지고 놀 법한 장난감 같은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거기에 다양한 먹을거리까지 잔뜩 더하니 금액으로만 쳐도 거의 수천만 원이나 되었다.
뒷좌석과 트렁크까지 짐으로 꽉꽉 채운 그는 차를 몰아 목적지로 향했다. 목적지는 노을 보육원. 부모 없이 자라온 그가 유일하게 고향처럼 생각하는 장소였다.
지어진지 얼마 안 되는 세련된 5층 건물이 가시권에 들어왔다. 그곳이 바로 노을보육원이었다.
“와, 아저씨 차다!”
“진운 아저씨!”
이진운의 차가 보육원 입구 안으로 들어서자 보육원 건물 안에 있던 아이들이 환호성을 터뜨리며 우르르 몰려나왔다. 다들 그가 오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저씨라니, 내 나이가 몇인데 벌써 아저씨야? 지난번에 형이라고 부르랬잖아.”
차에서 내린 이진운이 먼저 아이들에게 핀잔을 주었다. 그렇지만 아이들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에이, 저희하고 나이 차이가 몇 살인데 어떻게 형이에요? 차라리 삼촌이라고 부르면 모를까.”
“나중에 재민이 형한테나 그렇게 불러 달라고 하세요. 아저씨 그 형하고는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겠네.”
“아저씨 그보단 선물이요, 선물! 이번엔 또 뭐 갖고 오셨어요?”
능청스러운 애들의 반응에 이진운은 결국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이 녀석들의 머릿속에 자신의 이미지는 완전히 아저씨로 굳어진 모양이었다.
그는 아이들의 요구대로 일단 선물보따리부터 풀었다. 자동차 뒷좌석과 트렁크에 꽉꽉 채워두었던 장난감이나 학용품, 게임기 등을 주섬주섬 꺼내놓자 아이들이 하나같이 환호성을 터뜨렸다.
“와, 선물이다!”
“게임기도 있어!”
“자자, 줄부터 서. 줄을 안서는 녀석한테는 선물도 없어.”
당장이라도 선물을 향해 달려들 것만 같은 아이들을 멈춰 세운 이진운은 차례대로 선물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전부터 이 로봇 갖고 싶다고 노래를 했었지? 망가뜨리지 말고 잘 갖고 놀아.”
“와, 진짜다! 감사합니다.”
“자, 용환이는 노트북이다. 앞으로 소설 열심히 써 봐라. 이걸로 게임만 하지 말고.”
“예! 정말 열심히 할게요.”
장래희망이 작가인 용환이에게는 워드프로세서용 노트북을 선물해 주었다. 다른 아이들의 것에 비해 좀 비싼 선물이긴 했지만, 본인들이 가장 원하거나 필요해하던 것들만 선물해 줬으니 큰 불만은 없을 것이다.
아이들에게 선물 대부분을 나눠준 이진운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이제 막 스무 살 즘 되어 보이는 앳된 청년이 다가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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