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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214화 (214/231)

214화

바르시는 종일 우울해했다. 이베트는 언제나 그렇듯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공적인 자리가 아니고서야 제 아들을 찾지 않았고, 조부인 브리다스는 종일 테이먼의 곁에서 바짝 엎드려 있었다. 그가 조만간 어음을 찾아 북쪽 성전으로 향할 것이란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모친도, 조부님도, 그리고 왕비 전하도 데리고 간다 하였다. 오직 자신, 바르시 코르넬리오만 빼고.

안 그래도 파니릴리가 제 곁에 머무르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풀이 죽었는데, 저 하나만을 두고 모두를 챙겨 성전으로 향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이후 아이는 내내 방 안에만 처박혀 있었다. 어른들의 사정 따윈 모른다. 이해하기도 어렵다. 다만 저 혼자 떨어뜨려 놓으려는 것만은 잘 알았다. 이유가 어쨌든 그것만은 변함없이 사실이었다.

“바르시 님이 영 식사를 하지 않으십니다.”

이베트의 식사를 돕던 여종이 근심스러운 얼굴로 고했다. 이베트는 저며 놓은 어린 송아지 고기를 포크로 뒤적거리며 얕게 미간을 구겼고, 브리다스가 와인 잔을 내려놓으며 딸에게 말했다.

“아직 어려서 그러지. 네가 좀 가서 달래려무나.”

그러자 이베트는 쯧, 하고 혀를 찼다. 못마땅한 티가 역력했다.

“바르시도 벌써 열 살이에요. 게다가 곧 모웨나의 영주가 될 테고요. 언제까지고 어린애처럼 달랠 순 없어요.”

“그래도 어미 노릇은 해야지.”

“투로 밑에서 대체 어떻게 빌어먹고 살았는지, 영 악착같은 면이 없어 큰일이에요. 그래서야 어디 장차 대륙을 호령하는 위인이 될 수나 있을는지.”

엘버그의 왕좌에서 내려온 것은 결코 아이의 책임이나 잘못이 아니건만 이베트는 마치 그 모든 것이 아이의 잘못인 것처럼 이야기했다. 아무튼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롬비는 제 친정이고, 제 가문의 영지임에도 불구하고 테이먼 테르조가 주인인 양 성안을 마음껏 휘젓고 돌아다니는 꼴도 그랬고, 그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제 가문의 처지도 그랬다.

무엇보다 그가 데리고 온 계집이 거슬렸다. 파니릴리 알기어스. 그 새하얀 눈 같은 계집애. 천박한 투로 놈과 뒹굴던 주제에 그 보기 좋은 껍데기로 성안의 사람들을 홀리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베트는 탁, 하고 포크를 접시 위에 내려놓았다.

“테이먼 테르조가 에나가 준 어음을 우리를 위해 쓸 거라고 생각하세요?”

“…….”

“그가 저와 바르시가 모웨나를 찾는 것을 도울 거라 생각하세요?”

“그에게도 세력이 필요하잖아. 테이먼 테르조가 기댈 수 있는 것은 우리뿐이다.”

“하지만 이제 그에겐 에나가 있잖아요.”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놈이야. 당장은 테이먼을 돕겠지만 사태가 진정되고 나면 또 무슨 짓을 꾸밀지 장담할 수 없지. 어쨌든 투로 놈이 세운 작자다. 그런 자를 믿을 수 있겠느냐.”

이베트는 신경질적으로 한숨을 내뱉었다.

“테이먼 테르조가 아주 기고만장해요. 벌써 온 세상이 자신의 발아래에 있는 것처럼 군다고요. 왕좌라도 깔고 앉아 벌써 왕이라도 된 듯이.”

“벌레 놈이 죽었으니….”

“그렇다고 벌써 그가 왕인 것은 아니잖아요. 왕좌를 탈환하지도 못했고, 즉위식도 아직 치르지 못했잖아요.”

하기야. 투로 놈이 즉위식은 치르지 않았어도 확실히 그는 제 손으로 알기어스 왕을 처리했고, 그렇게 그의 왕좌를 차지하고 앉았었다. 하지만 이제 캘던은 불타 사라졌으니 그 왕좌가 무사할 거라고 장담할 수 없다.

아마 성의 다른 것들이 그러하듯이 그 왕좌도 모두 녹아 소실되었을 확률이 훨씬 높았다. 그러면 테이먼은 무엇으로 자신이 왕임을 증명할 텐가. 사실 그는 아직 왕으로서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했다. 제 손으로 카르낙을 죽이지도 못했고, 왕좌를 차지하지도 못했으며 그렇다고 에나에게 정식으로 왕임을 아직 인정받지도 못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였다.

“…파니릴리 알기어스가 있지 않느냐.”

그래.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 이베트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는 파니릴리 알기어스와 부부가 될 수 없어요. 그러니 그 여자에게 취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몸뿐이겠죠.”

그러고 그것은 지배욕을 채워 주는 것 말고는 하등 쓸모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그는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대체 그깟 계집이 뭐라고. 손도 대지 못하고 벌벌 떠는지. 그래 놓고 제 아내와는 각방을 쓰며 내외라니. 이베트는 테이먼이 저를 거부했던 일을 떠올렸다.

한 아이의 어미로서 정숙함을 보이라는 듯 훈계했던 때를. 그때를 떠올리며 그녀는 헛웃음을 켰다. 지 꼴을 보라지. 그렇게 오만방자하고 도도하게 굴더니 결국 원하는 것을 눈앞에 두고도 침만 흘릴 뿐 차지하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테이먼은 붉은 장미 몇 송이를 손에 들고 정원 앞에서 파니릴리를 기다렸다. 그녀는 꽃과 나무를 좋아한다고 들었다. 며칠째 갑갑한 방 안에 갇혀 이루어지지도 않을 꿈을 꾸고 있느니 바람이라도 쐬며 기분을 환기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이 선 탓이었다. 저 멀리 경비병을 대동하고 파니릴리가 나타났다. 낯빛이 좋지 않았다. 아마도 그녀의 곁에서 세일린을 떼어 놓았기 때문이리라.

“자.”

그는 파니릴리에게 장미를 내밀었다. 그러나 파니릴리는 그것을 받지 않았다. 대신 무감한 눈으로 그를 빤히 바라보기만 하였다.

“호의를 베풀면 그것을 받을 줄도 알아야지, 파니릴리.”

어르듯 핀잔을 주는 말에 릴리는 반응하지 않았다.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시선을 허공으로 돌렸다. 목석같은 태도에 그는 길고 불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

그는 장미 다발을 바닥으로 휙 던지고 탁탁, 손을 털었다.

“다시 한번 네 처지를 설명해 줄 테니 잘 들어. 파나릴리 알기어스. 네 남편은 뒈졌어.”

“…….”

“넌 지금 과부 신세란 말이야.”

“…….”

“그뿐만 아니라 내 포로지. 원한다면 너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네게 친절을 베풀고 있어. 정중하고 사려 깊게 대하려 노력하고 있다고.”

“…….”

“너와 세일린을 떼어 놓았다고 이러는 거야?”

테이먼이 물었다. 세일린과 그녀가 가까이 지내 봤자 좋을 것이 없었다. 둘이 붙어 있을수록 그로서는 곤란하고 불편했다. 비록 테이먼이 세일린과 결혼하기도 전에 둘이 죽고 못 사는 사이였더라도 마찬가지였다. 파니릴리가 기댈 곳이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기댈 곳이 있을수록 저에겐 더 각을 세울 테니 아예 그녀의 옆에서 그녀가 잡고 버틸 만한 것은 모조리 제거해야만 했다. 그는 낮게 읊조렸다.

“그녀를 죽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여겨.”

파니릴리가 눈을 홉떴다. 드디어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녀는 당신의 아내예요.”

간신히 내뱉은 첫마디였다. 테이먼은 하하, 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그것도 너 때문이지.”

네가 강요한 결혼. 협박에 못 이겨 굴종한 결혼. 그럼에도 도리를 지키려 노력했다. 그녀를 죽일 기회가 있었음에도 죽이지 않았고, 그녀를 데리고 캘던을 빠져나왔으며 여전히 그녀를 죽이지 않고 있다.

“나와 한방을 쓰길 거부하는 건 그 여자야. 내가 아니라. 그뿐이야? 그 계집은 나를 남편으로 대하지도 않는다고. 그 여자는 언제까지나 네 시녀일 뿐이지 단 한 번도 내 아내인 적이 없어.”

“당신이 한 짓을 생각해요. 그리고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짓은 또 어떻고요.”

테이먼은 씨근덕거리며 마른세수를 했다. 그는 파니릴리의 비난을 납득할 수 없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좋아! 그래! 그렇다 쳐! 지금에 와서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으니까! 네가 아무리 날 비난해도 그딴 건 아무 의미도 없어. 누구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 난 왕이야. 그러니까 모두 내 맘대로 할 수 있어! 허울일 뿐이라도 그 여자와 부부로 지낼 거야! 죽이지도 않을 거고 성전까지 아주 극진히 모셔 가지! 됐어? 그게 네가 원하는 거야? 그래? 그런데 어쩌나? 세일린은 그걸 원하지 않을 텐데 말이야! 그녀는 지금도 그저 네 옆에 붙어 있지 못해 안달이거든! 그리고 그거 알아? 이 모든 비극은 네 손에서부터 시작됐다는 거 말이야!”

“그래요. 내 실수예요.”

파니릴리는 쉽게 그의 말을 수긍했다.

“그땐, 당신을 내 편으로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는 세력을 잃었고 대륙은 더욱 위태로워지니 그에게 먼저 자비를 베풀면 적어도 어느 정도는 보답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에 대해 의심하면서도 그리 멍청한 사내는 아니니, 그렇게 도리를 모르는 사람은 아니니 자신이 베풀어 준 것이 어떤 것인지는 인지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뼈아픈 실수였다. 그에게서 어떤 광기를 보았을 때 차라리 그를 놓아 버렸어야 옳았다. 세일린을 혈연으로 만들어 작위와 영지를 물려주겠다며 얕은 잔꾀를 부리는 대신 차라리 그를 놓아 버렸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지금 자신이 만든 답도 없는 아이러니에 갇혀 고통받지는 않았으리라.

“파니릴리.”

테이먼이 다가가 다정히 그녀의 손을 잡았다. 바라보는 눈은 애정이 가득해 애틋하기까지 했다.

“난 언제나 네 편이야. 언제나 너의 가장 든든한 뒷배가 될 거야.”

그의 낯빛을 보고 있자니 진저리가 났다. 서늘하여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광기가 보였다. 지금까지 느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욕망 따위가 느껴졌다.

“말했지. 네 생존을 안 순간부터 난 단 한 순간도 너 이외의 여자는 떠올려 본 일이 없다고.”

붙잡은 손에 힘이 실렸다.

“내가 원하는 건 너의 애정과 신뢰야. 오직 그거야.”

그에게 붙들린 손을 빼내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몸을 뒤트는데도 그는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강한 악력으로 옥죄었다.

“약속할게. 세일린은 살려 둘게. 그녀와 평생 부부로 지내겠어. 하지만 만약 우리 사이에 아이가 생긴다면… 맹세할게. 그 아이를 내 후계자로 삼겠어.”

…뭐?

“무슨….”

“생각해 봐, 릴리. 나와 너 사이에 태어난 사내아이라면….”

테이먼의 얼굴에 희열이 가득 찼다.

“그 얼마나 고귀한 혈통이겠어.”

널 닮아 눈부신 은발을 반짝거리며 세상 모두를 제 발아래 꿇게 할 마력을 갖췄을 거야. 그 완벽한 외모와 완벽한 혈통으로 엘버그 역사에 다시 없는 제왕이 되겠지.

“모르겠어? 우린 신이 맺어 준 거야. 우리가 함께 성전에서 그 푸른 빛을 보았을 때, 그때 난 깨달았어.”

릴리는 몸을 비틀며 고개를 저었다. 몰라. 난 본 적 없어. 난 그런 것 본 적 없다.

“그때 모든 것이 변했어. 그때 난 전부 알게 된 거야. 너와 나의 운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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