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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213화 (213/231)

213화

카르낙은 마을을 찾아 평야를 헤맸다. 다 스러져 가는 몇 가구의 집을 발견했지만 대부분 폐가였다. 분명 사람이 살던 흔적이 남아 있음에도 사람은 없었다. 처음엔 당황했다가 몇 번이고 더 그런 일을 마주하자 이내 평온해졌다. 아니, 낙담하여 절망에 순응했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불에 타 없어진 것은 캘던이건만 엘버그의 다른 땅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카르낙, 무리야.”

자할이 고개를 저었다.

“전부 떠났어. 봐. 도움을 구할 곳이 아무 데도 없다고.”

이곳에 살던 이들은 생존을 위해 어디로 떠났을까. 휑하고 말라비틀어진 잎사귀만 바늘처럼 솟은 밭, 바닥을 드러낸 지 한참이 된 우물, 미라처럼 껍데기만 남은 가축의 사체들.

내가 이렇게 만들었나. 내 분노가 세상을 이렇게 만들었나. 나 따위의 벌레는 감히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열망조차 품어선 안 되었던가. 이런 끔찍한 곳에 파니릴리를 살게 하려 했나. 이미 전부 망쳐 버린 곳에. 모두가 다 망가진 곳에.

그녀를 데려오지 말걸. 그라타의 대자연에 파묻혀 근심 걱정 없이 살도록 둘걸. 그녀가 이 땅에 없다면 설사 모든 것이 망가진다 한들 이토록 두렵지는 않았을 거다. 어떻게 하면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릴리, 너를 살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대체 어떻게 하면.

“돌아가자.”

이대로 돌아가면 매짐은 죽는다. 아니 어쩌면 벌써, 벌써 죽었을지도 모른다.

“폐하!”

멀리서 높고 히스테릭한 여자의 음성이 들렸다. 카르낙은 어느 폐가 앞에서 넋을 놓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요란한 복장, 요란한 말의 장신구, 요란한 마차. 로리아나였다. 그녀가 창밖으로 고개를 빼고 카르낙을 불렀다가 이내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카르낙은 멍한 얼굴로 그녀를 맞이했다.

“어떻게….”

“말리가 서쪽으로 가야 한대서요.”

로리아나의 뒤로 등이 굽은 노파 말리가 보였다. 그녀를 보는 순간 카르낙은 ‘아’ 하고 신음했다.

“말리?”

자할이 한쪽 눈썹을 추켜올렸다. 로리아나가 그를 보았다. 저와 똑같은 투로였다. 커다란 덩치에 털이 잔뜩 난. 누가 봐도 험악하고 투박한 사내였다.

“말리가 뭐야?”

“그건….”

사람이지 뭐긴 뭐야. 여기서 지인 소개나 하고 앉아 있을 때는 아닌 것 같은데. 그럼에도 말리에 대해 그에게 알려 줘야 하나 망설이던 때에 카르낙이 더듬거리며 입을 뗐다.

“캘던은….”

캘던을 담는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로리아나가 서둘러 말했다.

“모두 무사해요.”

“…….”

“에이가도, 로로도, 핀과 루이스도 리쿠스도. 그리고 세바스탠도 모두 무사해요. 때를 놓치지 않고 모두 화마를 피했어요.”

그러자 카르낙은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감정을 추슬러 삼키는 그의 가슴이 몇 번이고 크게 부풀어 들썩였다. 손을 들어 그의 떨리는 등을 어루만져 주고 싶은 것을 로리아나는 간신히 참아 냈다. 그는 감히 제가 위로해 줄 만한 사내가 아니었으므로.

말리가 구부정한 등을 손으로 짚고 느리게 다가왔다.

“서쪽으로 가야 한댔어. 서쪽으로.”

“…….”

그 흐리고 심술궂은 눈을 바라보는데 그렇게 마음이 놓일 수가 없었다. 카르낙은 짐짓 웃고 싶은 기분마저 느꼈다.

“환자가 있어. 칼에 복부가 관통당했어.”

“…설마.”

로리아나가 파리하게 질려 물었다. 아니야, 하고 카르낙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그녀는 찾지 못했어,”

다행이다, 하고 로리아나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말리가 다시 몸을 돌려 절뚝이며 마차에 올랐다. 그러고는 앙칼진 목소리로 꽥 소리쳤다.

“뭐 해! 다들 굼떠서는. 서둘러!”

“뭐야? 저 노인네는?”

자할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로리아나가 침착하게 답했다.

“말리예요. 치료사고요.”

“저 노인네도 투로야?”

“아니요.”

“그럼 뭔데?”

“…몰라요.”

아무도 말리에 대해서는 모른다. 그녀가 어디서 왔는지 어떤 과거를 지녔는지. 다만 흐르다 흐르다 사창가에 고인 다른 계집들과 마찬가지라 생각했다. 꼬치꼬치 캐내선 안 될 과거를 지닌 이들이라고.

마차만 아니면 더 빨리 달릴 수 있었다. 적어도 시간을 반의반 정도는 단축할 수 있었을 거다. 숲길이 좁아지자 더는 마차가 움직일 수 없었고 덕분에 자할은 제 등에 노인을 업고 뛰어야 했다. 말리가 말을 타기 싫어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이유라고 생각했는데 카르낙이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니 군말 없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자할이 뜀박질을 할 때마다 말리의 허리에서 잘그락 소리가 났다. 관절도 안 좋다는 양반이 뭘 그리 주렁주렁 달았는지. 하여간 여러모로 거슬려 참을 수가 없었다.

그가 자파와 매짐의 곁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말을 달린 카르낙과 로리아나가 그곳에 당도하고도 한참이 지난 후였다. 그는 헉헉대며 노인을 내려놓았고 말리는 고맙단 인사도 없이 쌩하니 그를 지나쳐 얼굴이 푸르게 질린 매짐의 앞으로 향했다.

자파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로리아나에게 넋을 잃고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고목 같은 노인을 위아래로 살폈다. 갈라진 나무 기둥처럼 주름이 팼고, 눈은 세상 빛에 퇴색하여 흐렸으나 그 안광만은 제법 선명하였다. 한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자태에 그는 이 노인이 치료사라는 걸 눈치챘다.

“어때, 늙은이? 이미 늦은 것 아니야?”

매짐은 눈을 뜨고 있었지만 초점은 없었다. 격통에 감각을 상실했거나 혹은 이미 의지를 잃고 넋을 놓아 버린 것일 수도 있었다.

“늦었지. 많이 늦었어.”

노인은 그의 말에 수긍하며 제 허리춤을 뒤졌다. 로리아나는 그녀의 뒤에서 마른침을 삼켰다. 자파는 멀찍이 서서 여전히 헐떡이는 자할의 곁으로 가 소곤댔다.

“뭐야? 평범한 여자 같지는 않은데.”

분명 근방의 마을을 뒤져 데려온 여자는 아닌 거 같았다. 자할은 헥헥대며 그의 허리를 툭툭 쳤다.

“무, 물 좀 줘 봐. 물.”

“물은 없고. 자.”

자파는 미지근한 에일이 담긴 제 물통을 그에게 건넸다. 미지근한 것에서는 비린 맛이 났다. 그러나 자할은 거리끼지 않고 그것을 꿀떡꿀떡 삼켰다.

“야. 누구냐니까?”

“몰라.”

한참 만에 자할이 답했다.

“카르낙과 아는 사이 같아.”

“저 여자도?”

자파가 턱짓하는 곳에 로리아나가 있었다. 자할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 새끼는 왕이라 그런가 주변에 예쁜 여자들이 하여간 넘쳐 난다 싶었다.

말리는 약병 두 개를 꺼냈다.

“거기!”

그러더니 대뜸 아무나 불렀다. 자할과 자파는 서로를 쳐다보며 망설였다.

“와서 이거 좀 섞어!”

“…그러니까, 누구….”

“아무나! 빨리!!”

자할이 힘들다며 자파의 등을 떠밀었다. 염병할, 욕을 지껄이며 억지로 말리의 곁으로 다가가자 그녀가 약병 두 개를 내밀었다. 하나는 검붉은 가루가 들어 있었고, 다른 하나는 미끈한 액체가 들어 있었다.

“이것 좀 섞어.”

건네는 그녀의 손길이 떨렸다.

“귀한 거니까 흘리지 말고.”

손이 떨리니 시키는 건 알겠는데…. 아니 근데 어디서 봤다고 다짜고짜 명령일까.

“제가 할게요.”

로리아나가 나섰다. 투박한 사내보다 아무래도 잘 영근 제 손길이 물약을 섞기엔 더 알맞았다. 향긋한 내음이 가까워지자 자파는 눈을 가늘게 뜨고 코를 벌름거렸다. 창녀일 거다. 분명 그럴 거야. 그렇지 않고는 이렇게 화려한 차림새에 이렇게 아름다운 외모의 투로가 있을 리 없다.

뒤끝이 씁쓸했다. 모두 알기어스의 치세. 구시대의 유물이길 바라는 관습이었다. 아름답기 때문에 창녀가 될 수밖에 없는 투로 따위는. 분명 우리는 더 멀리, 더 높이 갈 수 있어. 더는 계집이란 이유만으로 웃음과 향기를 팔지 않아도 돼.

하지만 그때가 과연 언제일까. 이미 매듭지어진 운명이 있고 여전히 그 길이 익숙한 이들이 있고 그렇다면, 좀 더 많은 시간이 흘러야 모든 것은 제가, 카르낙이 원하던 대로 될 것 같았다. 좀 더 먼 미래에. 어쩌면 까마득히 먼 미래일지도 모른다.

로리아나는 침착하게 가루와 물약을 섞어 말리에게 다시 건넸다. 자파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게 뭐요? 그걸로 이 작자를 살릴 순 있어?”

겨우 물약으로? 복부를 관통한 자상이다. 피를 쏟을까 봐 어쩌지도 못하고 눕혀 놓은 환자였다. 대체 칼이 어디까지 뚫었는지, 그 안의 장기는 멀쩡한지 무엇도 장담할 수 없을 만큼 위급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겨우? 그까짓 한 모금도 안 되는 물약?

“이건 하얀 늑대의 혀야.”

“뭐?”

자파가 미간을 구겼다. 하얀 늑대가 뭔데? 늑대의 혀는 또 뭐고?

“이걸로 왕도 살렸어.”

말리는 뾰로통하게 말하며 매짐의 입 안에 물약을 흘려 넣었다. 자파가 카르낙을 보았다. 그는 잠자코 지켜보다가 그때의 상황이 떠올라 말리에게 물었다.

“혹시, 피도 필요해?”

“아니. 그건 필요 없어.”

말리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무한테나 통하는 방법이 아니야. 너니까 가능했던 거야, 또 그 여자니까 가능했던 거고.”

“…….”

“이 남자는 감당 못 해. 죽을 거야.”

영문도 모르는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자할과 자파는 그저 상황이 돌아가는 걸 불만스럽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말리는 툭툭, 제 허리를 치며 몸을 일으켰다.

“이틀 정도는 움직이면 안 돼. 환부를 지질 불도 필요해. 그리고 붙일 고약도. 마실 물도 필요하고, 먹을 음식도 필요해.”

늙은이가 원하는 것도 많네. 자파가 투덜거리며 카르낙에게 물었다.

“어쩔 거야?”

카르낙이 선뜻 대답하지 못하자 로리아나가 나섰다.

“여긴 말리와 제가 있을게요. 마차에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실려 있어요. 짐꾼들을 시켜 작게 천막을 치면 그럭저럭 이틀 동안 매짐을 돌보며 지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가세요. 왕비 전하를 찾으러 가시는 거잖아요.”

꼭 그녀를 찾아야 한다. 그녀를 찾아 데려와야 한다. 카르낙을 위해서도 그리고 저를 위해서도, 비천하고 불쌍하고 아둔하지만 선량한 다른 엘버그인들을 위해서도 꼭 그래야만 했다.

“그를 잘 부탁해.”

“네.”

로리아나는 기꺼이 답했고 카르낙은 오코의 등에 올랐다. 자할과 자파가 그의 뒤를 따랐다.

“몸조심하세요.”

로리아나가 마지막으로 작별의 인사를 했다.

같은 피부, 같은 머리색을 가진 흑진주 같은 여자는 최초에는 동족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참으로 지긋지긋하게, 너절하게 그러나 치열하게 너도 네가 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에 도달했구나, 하는 유쾌함.

매만지면 짚이는 거라고는 뼈와 연한 살뿐이어서 힘을 쓸 수도, 제대로 칼을 쥐고 휘두를 수도 없는 계집.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 탐스러운 육체로 사내를 홀리고 그것을 밟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여긴 이가 그 몸으로 참으로 많은 것을 도왔다. 그러니 너는 나보다 강한 것이다. 그러므로 단지 너에게 감사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너는 내 동지이고 전우이며 또한 친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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