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리쿠스는 더듬거렸다. 손가락을 자꾸만 매만지는 모양새가 불안했다.
“전하께서는 비밀로 해 달라 하셨지만… 어쩐지 돌아가는 모양새가….”
에이가는 머리를 짚었다. 그러니까 파니릴리가 독약을 손에 쥐고 캘던을 떠났단 말인가?
“세… 세일린….”
세바스텐이 중얼거렸다. 리쿠스는 반색하며 몸을 돌려 그에게 다가갔다.
“세바스탠! 자네 정신이 드는 건가?”
“테이먼… 테이먼이… 세일린을….”
“테이먼이 세일린을 데리고 떠났단 말입니까?”
에이가가 끼어들어 묻자 세바스탠은 힘겹게 고개를 몇 번 끄덕이며 마른 입술을 축였다.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간신히 쥐어짰다.
“…찾… 찾아야 해요….”
“혹시 그들이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어요?”
“차… 찾아야…”
“세바스탠, 테이먼이 어디로 향했는지 압니까?”
“…찾아야 해요….”
세바스탠은 열에 들떠 같은 소리를 반복했다. 리쿠스가 말라붙은 그의 입술을 젖은 수건으로 닦아 주었다. 리쿠스는 그를 위해 더 많은 아편 분말을 태워 댔고, 그 바람에 에이가는 방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곧바로 왕의 침실로 향했다. 그곳에 핀과 로로, 자할과 자파가 모여 있었다. 여전히 심각하고 심란한 상태였다.
“테이먼이 세일린을 납치해 달아났대요.”
에이가의 말에 핀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에겐 그다지 쓸모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어차피 부부 사이잖아. 납치했는지, 같이 도망갔는지 어떻게 알아.”
“세일린은 그럴 아이가 아닙니다. 납치된 것이 분명해요. 다른 이야기가 또 있어요.”
에이가는 숨을 고르고 뜸 들이던 이야기를 꺼냈다.
“왕비 전하께서 캘던을 빠져나갈 당시 오피움 물약을 가지고 가셨대요.”
“오피움 물약?”
자할이 되물었다. 듣고 있던 로로의 안면이 굳었다. 그는 그 약물의 정체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듯했다.
“비 전하가, 오피움 물약을 가지고 가셨다고요?”
“네.”
“…….”
로로가 그악스러운 눈길로 카르낙을 바라보았다. 그는 말했다.
“마취제예요. 소량으로도 감각을 마비시키는 약입니다. 전하께서 그 약을 얼마나 가지고 가셨답니까?”
“…치사량이라 합디다.”
“…….”
멍하던 카르낙의 눈빛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정신을 차리다 못해 갑자기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경련이라도 일으킬 모양새였다.
“…뭐라고?”
“치사량을 가지고 가셨대요. 리쿠스에게는 비밀로 해 달라고 하시면서.”
“…….”
그에게 기이한 기운이 감돌았다. 행여 분노한 그가 리쿠스를 어떻게 할까 봐 에이가는 냉큼 덧붙였다.
“전하의 명이니, 리쿠스는 들어 드릴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게다가 평소 왕비 전하는 약초나 물약에 박식하셨으니 더 의심하지 않았겠지요. 게다가, 게다가 그조차도 설마 왕비님께서 말없이 성을 떠날 거라 생각하지 못했을 테고요.”
핀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었다. 일은 급박하게 돌아가는데 너무 모르는 것이 많았다.
“이봐, 카르낙. 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너와 비 전하 사이에 말이야.”
그러자 모두의 눈이 그에게로 향했다. 카르낙은 눈을 질끈 감은 채 마른세수를 했다. 그러고는 곧 머리를 털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파니릴리가 성전에서 아주 오래된 에나의 기록을 발견했어. 알기어스 왕과 투로들에 대한 이야기였어.”
“투로?”
자할이 되물었다.
“에나의 기록에 우리 이야기가 쓰여 있단 말이야?”
“그래. 알기어스 왕이 장자를 낳으면 그 아이를 신에게 바쳐야 한대. 그렇지 않으면 ‘검은 사람’이 나타난다더군.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니 알기어스는 오랫동안 장자를 바치지 않았고 결국….”
“왕위를 빼앗겼군. 검은 사람에게.”
자파가 이어 그의 말을 끝맺었다. 카르낙이 다시 입을 열었다.
“검은 사람이 나타나면 불길이 거세지고, 거세진 불길은 무엇으로도 막을 수가 없어. 알기어스의 장자를 제외한다면 그 무엇으로도 말이야.”
자할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알기어스는 모두 다 뒈졌잖아. 장자고 나발이고 네가 사내새끼들의 씨를 말렸잖아.”
“…….”
답하는 대신 두려움에 사로잡혀 버린 카르낙을 대신해 핀이 답했다.
“한 사람이 남았잖아.”
“…….”
“파니릴리 알기어스.”
에이가가 말했다.
“그래서로군요. 비 전하께서 오피움 물약을 갖고 캘던성을 떠나신 것.”
소름이 끼쳤다.
“그럼, 그분은 죽으려고….”
안 돼. 그건 안 돼.
“안 돼요.”
에이가는 발작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둘 순 없어요! 절대로!”
울음을 터트리며 펄쩍거리는 에이가의 어깨를 로로가 다정하게 어루만지며 달랬다. 에이가는 흐느끼며 신음했다.
“아시잖아요! 저에게, 저에게 비 전하는 곧 이 세상이에요! 그분이 바로 엘버그시라고요! 저는, 저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요! 그분은, 그분은 알기어스예요! 신의 아이예요!”
대체 무슨 이유로, 신은 제 아이가 불에 타 죽기를 원한단 말인가. 어째서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생명을 그렇게 바스러트린단 말인가.
“저는 믿을 수 없습니다! 사랑과 자비의 아마네스 여신께서 어떻게 그토록 끔찍한, 어떻게 그런… 그럴 리 없어요. 무언가 잘못된 겁니다!”
“에이가.”
“다 거짓이에요! 에나의 기록도! 그 망할 놈의 성전도! 베오르토도! 게드릭도 전부! 전부 썩어 빠진 이교도들이야!!”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무너진 믿음의 잔해 속에서 무엇인가를 찾으려는 듯 그녀는 바닥을 더듬거렸다. 전부 다 허상일 뿐임에도 꼭 무엇인가를 쥐어보려는 듯했다.
“그냥, 그냥 정말로 이재민들과 먼저 북쪽으로 가려는 것일 수도 있잖아.”
자할은 어떻게든 상황을 낙관적으로 정의 내려보려 노력했다.
“오피움 물약인가 뭔가는 만약을 위해 그냥 가지고 있는 거고, 정말 그냥. 그러니까, 카르낙 네놈이 그녀를 멀리 보내려고 하니까, 네 말대로 그 상황을 피하려고 말이야.”
그러나 핀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아는 한. 파니릴리 발투만은 겨우 그 정도의 명분을 가지고 움직일 여자가 아니야.”
“…….”
“더욱이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불길은 멎지 않는다는 것. 앞으로 더욱더 커질 거라는 것.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저 도망가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믿고 있는 와중에 파니릴리가 손에 쥔 것은 이 상황을 끝낼 수 있는 단 하나뿐인 단서였다.
그녀라면, 파니릴리 알기어스라면 만일, 그것이 거짓이라 해도 필사적으로 그 단서에 매달릴 것이다. 그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 따위 기꺼이 바치고도 남을 여자다. 모두가 그토록 귀하게 여기는 생명을 오직 그녀 자신만이 하찮게 여긴다. 그마저도 참으로 파니릴리 알기어스답지 않은가. 어처구니없게도 말이다.
“로로.”
카르낙이 조용히 그의 늙은 투로를 불렀다. 파리한 눈동자를 떨며 노인은 제 자식과 다름없는 왕을 바라보았다. 다시 어릴 때의 그를 보는 것 같았다. 커다란 덩치를 하고 늘 깨질 듯 불안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손을 대면 금방이라도 균열할 듯. 그러면서도 악착같이 저를 지키려는 독기 따위가 묻어 있는.
“에이가를 도와 캘던 시민들을 북쪽으로 데리고 가 줄 수 있겠어?”
로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카르낙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과거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핀.”
“싫어.”
카르낙이 말하기도 전에 그는 거절했다.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달린 일이야. 루이스 하나만으로는 부족해. 로로와 에이가의 곁엔 너 역시 필요하다.”
“그럼 넌? 잊었어? 난 발투만 왕가의 근위대장이야. 네가 임명했잖아. 이 망할 투로 놈아.”
“자할과 자파가 나와 함께 갈 거야.”
그래. 같은 벌레 놈들끼리 거하게 회포를 푸시겠다?
“언제는, 멋대로 카스티 제도로 떠나라고 했다가, 이젠 또 북쪽으로 도망이나 가라니. 대체 날 뭐라고 여기는 거야?”
“겨우 릴리 한 사람을 찾는 것뿐이야. 귀한 인력을 그런 일에 낭비할 순 없어.”
귀한 인력. 정말이지 말은 잘하지. 핀은 콧방귀를 뀌었다. 네가 나 따위를 지키기 위해 이런다고 생각하지 않을 거다. 왜냐하면 넌 그런 낯간지러운 짓을 할 놈이 아니고, 나 역시 그런 낯간지러운 배려를 받을 놈이 아니니까. 망할 투로 놈이 사람 성질 한번 더럽게 돋구네.
“넌 말이야. 정말이지, 정말이지 왕의 재목은 아니야. 왕을 해 처먹기에 넌 너무 멍청하거든.”
“…….”
“내 말 듣고 있냐, 멍청한 투로 놈아?”
“에이가와 로로를 잘 부탁해. 내겐 내 목숨보다 귀한 사람들이다.”
입 닥쳐. 벌레 새끼야. 네 목숨보다 귀한 생명이 벌써 몇 개야. 뭐 얼마나 같이 살았다고 벌써 파니릴리를 닮아 가는 거냐.
왕의 재목은 아니라 했지만, 그래도 그는 자신의 왕이었다. 그러니 그가 하는 명령은 설령 그것이 목숨을 앗아 가는 일일지언정 거부할 수 없었다. 아. 내 신세야. 이 보기에만 요란한 감투 따위, 조만간 내려놓고 말리라. 더러워서 못 해 먹겠으니 진짜 이 짓 관두고 칼 하나 챙겨서 암살자 따위나 하며 살 거다. 그럼 이 병신의 명령 따위는 듣지 않아도 되겠지. 차라리 그게 속 편하다.
“베오르토 놈은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야?”
네가 안 딸 거면 내가 놈의 멱을 따련다. 핀은 벌써 성전에 도착한 이후의 문제를 생각했다. 투덜거리면서도 이미 마음은 성전에 도착해 있었다.
“베오르토 하나만의 문제는 아니야. 적당한 때를 봐서 모두 죽여.”
“…….”
“베오르토와 그를 따르는 사제들 전부.”
“좋아.”
핀은 흔쾌히 답했다. 이제야 기꺼이 성전으로 향할 의욕이 샘솟는다.
“에이가.”
카르낙은 뚜벅뚜벅 그녀에게 다가갔다. 몸을 굽히고 다리가 풀려 자리에 주저앉은 채 망연자실해 있는 그녀의 주름진 뺨을 그는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걱정 마. 당신의 소중한 왕비님은 내가 꼭 구해 낼게.”
그의 말에 에이가는 더 흐느꼈다. 이제는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사제도, 에나도, 심지어 언제나 삶의 등불이었던 아마네스 여신조차도. 오직 카르낙 발투만뿐이다. 출신을 알 수 없는 이국의 전사들, 그리고 여신의 저주를 받은 투로들뿐이었다.
태어나 자라고, 늙고, 병들어 가는 동안 보고 듣고 느껴 온 이후 남은 것은 그것들이었다. 한때는 절대 그녀의 인생에 들어오리라 여기지 않았던 것들. 죽음에 이를수록 본연의 신앙과 신념은 강해진다고 하건만, 어째 저의 삶은 그것과는 정반대였다.
어쩌면 이것이 진리인가. 사실은 추하다 여겼던 것들에 아름다움이 숨어 있고, 비루하다 여겼던 것들에 고귀함이 있던가. 삶의 끝자락에 다다라서야 에이가는 자신이 변해 가고 있음을 느꼈다. 이전의 삶은 송두리째 내팽개칠 만큼 모든 것들이 뒤집어져 버리고 말았다.
“우리뿐이에요. 폐하.”
에이가가 그의 손을 꼭 잡았다. 검버섯이 핀 그녀의 하얀 손이 시리도록 차가웠다.
“이제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은 오로지, 오로지 우리뿐이에요.”
알아. 카르낙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랬다. 그는 이미 아주 오래전에 그것을 알고 있었다. 한때 에이가가 그를 보며 저열하고 옹졸하다 여겼던 것들이었다. 그래. 그랬었지. 당신이 지키고 싶은 것들은 오직, 오직 우리들뿐이었지. 에이가는 고개를 숙여 그의 손등에 이마를 대었다. 왕이었다. 에이가는 이제야 그것을 분명히 볼 수 있었다. 비천할지라도 분명 그는 우리들의 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