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그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길게 호흡했다. 이놈의 도발에 말려들어선 안 된다. 조용히 열쇠만 받아 서둘러 이곳을 떠나야 한다. 한시라도 빨리.
“순순히 열쇠를 건넨다면, 후에 내가 왕좌에 올랐을 때 네 지위와 목숨은 보장해 주겠다. 내 식솔도 모두 건사할 수 있게 해주지.”
“천만에.”
세바스탠은 코웃음을 쳤다.
“네놈이 왕좌에 오를 일은 없어. 누구도 너를 왕으로 여기지 않을 거다. 너는 기껏해야 오늘 사람을 죽이고 달아나려다 잡힌 포로로 목이 잘려 성벽에 걸릴 테니까.”
하는 수 없었다. 테이먼은 검을 고쳐 쥐고 그를 노려보았다. 이곳을 빠져나가고야 말겠다는 집념과 더불어 저를 모욕한 자에 대한 분노 역시 함께 어려 있었다.
고작해야 손에 단검 하나 쥔 자를 상대해야 한다니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기도 했다. 이 대장간의 잡종 놈은 무슨 자신감으로 어려서부터 검술 훈련을 받고 자라 전투로 다져진 저에게 맨손으로 덤벼드는 것일까 기가 막혔다.
그리하여 테이먼은 놈을 죽이더라도 아주 처참히 죽여야겠노라 다짐한 바, 칼을 휘두르는 동작은 잔인하고 거침이 없었다. 살육이 넘실거리는 그 칼날을 세바스탠은 요리조리 잘도 피했다. 공간이 나무가 우거진 숲이란 것이 한몫했다.
칼을 휘두를 때마다 그 끝이 나무 기둥에 박혔고 그럴 때마다 속도와 체력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몇 번이고 같은 행위를 반복하자 테이먼은 독이 바짝 올랐다. 어금니를 사리문 채로 ‘으으’ 하고 끓는 신음이 비어져 나왔다.
그는 침착하게 정신을 모았다. 놈은 죽기 전까진 절대 열쇠를 내놓지 않을 거다. 그러니 반드시 그를 죽여야 한다. 시간을 지체할수록 제 처지는 더 위험해진다. 이 순간 가장 필요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쫓기고 있다는 조바심을 버리는 것이었다. 그는 다만 눈앞의 대상에 집중했다. 손에 익지 않은 검, 눈에 익지 않은 장소, 그럼에도 가야 할 길은 분명했다. 이곳을 탈출해야 한다.
조용히 숨을 죽였다가 그는 세바스탠의 움직임을 예측해 검을 휘둘렀다. 칼 끝이 아슬아슬하게 세바스탠의 단단한 팔뚝을 베어 냈다.
아악, 하고 비명을 지르며 세바스탠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순간 덫에 걸린 쥐를 발견한 듯, 테이먼의 눈동자에 기이한 이채가 어렸다. 그는 검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린 뒤 그대로 바닥으로 내리찍었고 스탠은 몸을 굴려 그의 검을 피했다. 쩡,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이 바닥에 내리꽃히자 테이먼은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이 빌어먹을 대장간의 잡종 놈!”
세바스탠은 피가 철철 흐르는 어깨를 부여잡은 채 지지 않고 그를 노려보았다. 죽이겠어. 반드시 그를 죽이고 말겠어. 무슨 수를 쓰더라도, 설사 같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제 스승이자 아버지와 다름없는 스코크를 죽인 놈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죽어서도 용서할 수 없으리라. 세바스탠은 제 단도를 두 손으로 고쳐잡고 그가 다시 장검을 치켜들기만을 기다렸다. 놈이 그렇게 제 앞가슴을 노출할 때 그에게 달려들어 명치에 단도를 찔러 넣을 작정이었다. 거머리처럼 들러붙어 그의 장검에 제 몸이 난도질당한다 해도 몇 번이고 계속해서 그렇게 달려들 각오를 했다.
드디어, 테이먼이 다시금 칼을 치켜들었다. 세바스탠은 이를 악물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짧은 단도가 그의 뱃가죽을 뚫기도 전에 테이먼의 장검이 그의 어깨에 다시금 파고들었다. 아아아악, 하고 비명을 지르며 세바스탠은 앞으로 꼬꾸라졌다. 그러며 테이먼도 함께 뒤로 넘어졌다.
세바스탠의 어깨에서부터 흘러나오는 피로 가슴팍이 뜨듯해졌고 테이먼은 무거운 그의 몸을 힘껏 밀어내고 그의 아래에서 빠져나왔다. 세바스탠은 고통에 이기지 못해 몸을 말고 짐승 같은 신음을 흘렸다. 테이먼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바닥에 나동그라진 장검을 다시 손에 쥐었다.
“못 배운 놈치고 제법 오래 버텼다. 대장장이. 너의 그 근성만은 인정해 주지.”
세바스탠은 괴로움에 몸부림치면서도 그를 향해 눈을 치떴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완전히 죽여야 했다. 그것이 놈에게도 좋을 것이다. 지옥 같은 고통에서 벗어날 방법 또한 죽음뿐일 테니.
테이먼은 끝이 아래로 향하도록 검을 바꿔 쥐었다. 놈을 완전히 해치우고 그의 품에서 열쇠를 꺼내 어서 이 지긋지긋한 캘던성을 탈출하리라. 이곳을 탈출하여 롬비로 향하리라.
“안 돼!!!”
멀리서 누군가 달려와 쏜살같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테이먼은 음영을 살피고 무게를 실었던 검의 칼끝을 바로 했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세바스탠을 필사적으로 보호하는 것이 자신의 아내인 탓이었다. 그녀는 숨을 헐떡거리며 벌벌 떨었다. 마음이 여리고 착한 여인답게 크고 깊은 눈망울에는 눈물이 어려 있었다.
“세일린.”
테이먼은 신음하듯 제 아내의 이름을 내뱉었다.
“비켜. 지금 죽이는 게 그놈을 위해서도 좋아. 그 정도 상처라면 어차피 고통받다 뒈질 게 뻔하거든.”
“안 돼요!”
세일린은 단호하게 소리쳤다. 누가 보면 그녀가 자신의 아내가 아니라 세바스탠의 아내라 착각할 지경이었다.
“비켜, 세일린. 널 죽이고 싶지 않다.”
“그럴 순 없어요. 그는, 그는 왕비 전하께서 아끼는 친우예요. 그마저 당신 손에, 당신 손에 죽게 둘 순 없어요!”
“넌 내 아내야!”
테이먼은 그녀에게 고함을 질렀다. 넌 내 아내야. 비록 서로가 원해 맺어진 사이는 아니라지만 엘버그의 전통을 따라 정식으로 혼인을 맺은 부부야. 그러니 너는 내게 순종해야 한다. 엘버그의 모든 아내가 남편에게 그리하듯이.
“당신은, 당신은 캘던을 벗어나기 위해 나를 버려 놓고 내게 아내의 본분을 들먹이는 건가요?”
말문이 막힌. 테이먼은 노기 띤 눈으로 날카롭게 숨을 들이켰다.
“너는 나를 끔찍하게 여기니 네게는 좋은 일이 아닌가, 세일린. 그러니 비켜. 놈이 소각로의 열쇠를 가졌다. 내겐 그게 필요해.”
세일린은 완강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이 빌어먹을 계집이. 테이먼이 분노로 어금니를 물었다. 금방이라도 그녀를 베어 낼 듯 검을 치켜들었다가 눈을 꼭 감은 채로, 그럼에도 세바스탠의 앞에서 비켜나지 못하는 세일린을 죽일 듯 노려보다가 이내 칼을 내리고 그녀의 곁으로 저벅저벅 다가갔다. 정확히는 세바스탠을 향해서였다.
“안 돼요! 안….”
발작하듯 비명을 질러 대는 세일린의 뺨을 후려치자 그녀의 몸뚱이는 나부끼는 낙엽처럼 옆으로 떨어졌다. 안 돼, 안 돼, 정신을 잃어 가는 가운데에도 저항하는 세바스탠의 몸을 마구잡이로 뒤져 그는 드디어 열쇠를 발견했고 세일린이 다시 달려들었다. 테이먼은 다시 한번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염병할!”
세일린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뺨을 후려치는 제 손조차 얼얼할 정도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태어나 평생 여자를 때린 적이 없건만. 그것도 아내를 제 손으로 두 번이나, 더하여 기절할 정도로 때리다니.
어째서 이토록 사람을 저열하게 만들어. 주인을 닮아서인지 너란 계집도 참으로 답이 없다. 쓰러진 세일린의 앞에서 초조한 듯 욕을 짓씹다가 그는 결심했다. 아내를 데리고 가기로.
세바스탠은 세일린을 들쳐 안는 테이먼을 향해 부질없이 손을 뻗었다. 아무것도 잡을 수 없는 손끝이 경련으로 파랗게 질려있었다. 테이먼은 의식을 잃어 가는 그를 벌레 보듯 내려다보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소각장으로 향했다.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이 가물가물했다. 세바스탠은 그대로 정신을 놓았고 얼마 후 다행히, 근위대에게 발견되어 리쿠스의 진료실로 옮겨졌다. 이미 테이먼 테르조는 캘던성에서 달아나 도시마저 빠져나간 뒤였다.
에이가는 상황에 환멸을 느꼈다. 에나도, 사제도 모두 싫어 신앙심마저 꺾일 지경이었다. 리쿠스는 찢긴 세바스탠의 살점을 추슬러 고약을 바르고 고통을 멎게 하기 위해 아편 분말을 태워 그가 흡연토록 했다.
에이가는 혹시라도 연기를 들이마시지 않기 위해 손수건으로 제 코를 막았다. 노인의 얼굴은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성안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태들을 보자면 그런 얼굴을 하는 것이 당연했다. 리쿠스가 마른 수건으로 피를 닦아 내며 말했다.
“상처가 심하지만… 괜찮아질 겁니다.”
에이가에게 말한다기보다,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진실보다는 바람에 더 가까운 어조라는 걸 에이가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살려야 해요. 스코크를 잃은 마당에 훌륭한 숙련공을 또 잃을 순 없어요.”
심각한 전력 손실이다. 선대왕때부터 대장간을 책임지던 스코크가 한순간 비명횡사를 한 마당에 세바스탠까지 목숨을 잃는다면 성에는 믿을 만한 숙련공이 단 한 명도 남아있지 않는 셈이었다.
엘버그의 수도인 이 캘던에, 그것도 가장 중요한 왕국의 요지에 제대로 된 대장장이 하나 없게 된다니.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숙련된 대장장이와 그들의 손끝에서 피어나는 뛰어난 무기들이 절실히 필요한 때임에도.
아아. 어쩌다 일이 이 지경이 되었을까. 왕비 전하가 아직 이곳에 계셨다면, 그랬다면 누구 하나는 살릴 수 있었을까. 스코크, 세바스탠. 그 둘도 아니라면 세일린만은 지킬 수 있었을까. 정말이지 무심한 분. 너무도 무심한 분 같으니.
“어떻게….”
에이가는 말문이 막혀 몇 번이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모두를 버리고 가실 수가 있는지.”
다 알고 계시지 않은가. 카르낙 발투만은 당신이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것을. 그가 당신을 목숨보다 더 사랑한다는 것을.
그뿐인가. 저도, 세일린도, 스코크도, 세바스탠도 모두, 모두 그녀를 사랑한다. 목숨보다 더 아낀다. 그녀를 아끼고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는 이들은 모두 이곳에 있는데. 어째서 이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셨는가. 단지 그라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고작 그런 이유로.
“에이가 님.”
리쿠스가 저를 부르자 그녀는 상념에서 깨어나 그를 바라보았다. 리쿠스는 걱정스러운 낯빛으로 머뭇거리며 말했다.
“실은… 며칠 전에 왕비 전하께서 저를 찾아오셔서 약을 하나 구해 가셨습니다.”
“약이요?”
파니릴리는 본디 약초에 관해 관심도 많고 알고 있는 것도 많았으니 그녀가 리쿠스를 찾아와 약초를 받아 간다 한들, 별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에이가도 아는 것을 리쿠스가 모를 리 없고 다만 약을 받아 갔다는 사실을 가지고 운을 떼지도 않았으리라 그녀는 생각했다.
“무슨 약 말씀이세요?”
“오피움 물약입니다.”
오피움 물약? 에이가는 눈을 굴리며 그 물약에 대해 떠올리려 해보았으나 그녀가 아는 것은 없었다.
“그게 무슨 약인데요?”
“독약입니다.”
“예?”
에이가는 경악해 되물었다.
“독약? 독약이라고요?”
“본디 이 아편과 같이 감각과 신경을 마비시키고, 더하여 환각을 보게도 하고 더하여 더 많은 양을 복용하면…. 예. 죽습니다,”
“…….”
“제가 드린 것은 분명 치사량입니다. 한 번에 다 들이켜시면 분명… 분명 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