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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172화 (172/231)

172화

릴리의 머리가 한쪽으로 기울었다. 그녀는 카르낙의 말을 계속해서 경청했다.

“단지 불길이 닿은 곳에 상처를 없애 주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재생이었어. 완전히 새것 같았어.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하고 주름 하나 없이 탱탱하며 아이의 것처럼 매끈하지.”

“…….”

릴리는 눈동자를 좌우로 굴리며 머릿속에 하나씩 자신이 보고 듣고 배운 것들을 떠올려 보았다. 엘버그 사람들은 투로를 저주받은 존재라고 믿지. 불에서 태어난 존재라고. 그렇다면….

“그렇다면 정말로…”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야. 내 눈으로 수많은 투로들이 불에 타죽는 걸 보았어. 그들은 불길 속에 집어넣어도 다시 살아나지 못했어.”

“…길란은….”

“그는 사막에 대해 잘 몰라.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그조차 알지 못해. 하지만 분명한 건 그는 불길에 재생한다는 거야. 그게 길란 포드가 대장장이가 된 이유인지도 몰라. 엘버그에서 유일하게 불길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일 테니.”

“그분도 칼, 당신 같은 눈동자 색을 가졌지요.”

칼을 처음 보는 순간부터 그의 눈은 특별하다 생각했다. 분명 그는 다른 투로들과는 달랐다. 릴리는 그것이 그의 잔인함과 압도적인 권력에서 나오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비범함은. 그리고 말리는 분명, 분명 왕에게 힘이 있다고 했다. 그에게는 힘이 있다고.

“말리가 내 몸을 불로 지졌다고 말했을 때 깨달았어. 내게도 같은 힘이 있구나.”

“그렇군요.”

놀라운 능력이다. 그래서였구나. 말리가 그는 더 강해질 거라고 했던 것은. 카르낙의 말대로라면 그의 살과 뼈를 붙여 놓은 불꽃은 그것들을 완전히 재생시켜 놓았으리라. 처음의 것처럼 흠 없이 말끔하게.

“내가 정말로 저주를 받은 투로라면… 아니, 이미 증명되었는지도 모르지만….”

“…….”

카르낙이 깊게 호흡했다.

“당신은 릴리. 당신은 신의 아이잖아. 신의 피조물들과 교류할 수 있는… 고귀한.”

“…….”

“그렇다면 대체 우리는.”

대체 우리는 무엇일까. 난 당신을 만났고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는데 이제야 당신을 갖게 되었다고 아이처럼 좋아하고 있는데. 하지만 만약 우리가 그런 존재들이라면 우리는 만나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 아닌가. 우린 서로에게 적이고, 서로에게 죽음이고, 서로에게… 서로에게 절망일 뿐이다.

아마네스 여신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그녀는 대체 무엇을 바라는 걸까. 신화의 내용처럼, 그녀가 나를 죽이고 그 위에 왕국을 세우기를 원하는가. 그것이 그녀가 원하는 새로운 엘버그일까?

만일 그렇다면, 지금껏 자신이 지켜온 투로들은? 그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가? 진실로 투로가 저주받은 존재인 것이 이렇게 입증된다면 그렇다면 그들도 모두 다 저와 같이 죽어야 하는가?

카르낙은 최근에 일어나는 일들을 떠올렸다. 모래폭풍, 가뭄, 더위, 비옥한 대륙의 사막화. 모든 것이 불과 연결되어 있었다. 재앙…. 전설 속 이야기처럼 투로는 재앙을 불러오는 존재가 맞는가. 벗어나려 아무리 발악을 해 보아도 정해진 운명엔 도리가 없는 걸까.

릴리, 내가 네 손에 죽는다면, 네가 나의 파멸이라면 나에겐 정말로 영광일 거야. 하지만 그 외의 투로들은…? 그저 살아보고자,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답게 살아보고자 절박하게 지금껏 투쟁해 온 나의 형제들은…?

“난 믿지 않아요.”

릴리는 카르낙의 손을 강하게 쥐며 말했다.

“세상에 그런 의미로 태어나는 존재는 없어요. 꽃도, 풀도, 나무도, 심지어 벌레도, 그 어떤 것도 저주받고 태어나는 것도 없고요. 신이 있다면, 다만 저주하기 위한 생명 같은 것을 세상에 탄생시킬 리가 없어요, 아름답고 소중하고 의미 있는 것들로 다 채워도 모자란 것이 이 세상인데.”

“…….”

“신이 저주한 존재가 있다면 그건 투로가 아니라 바로 알기어스예요.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도 바로 알기어스예요. 세상에서 가장 타락한 것이 있다면 그 역시도 알기어스고요. 잊었어요? 칼? 당신이 왜 왕이 되려 했는지.”

살기 위해서였지. 단지 그뿐이었다. 죽고 싶지 않았을 뿐 그 외에 달리 어떤 이유가 있겠는가. 세상을 구하겠다느니, 왕의 타락을 단죄하겠다느니 그런 고귀한 명목이나 신념 따위는 없었어.

“당신은 그런 존재예요. 신의 아이들을 엄벌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 말이에요. 타성에 젖은 엘버그의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워 주고 다시 신의 뜻을 깨우치게 하기 위해서요.”

카르낙은 제 아내를 보며 웃었다. 어떻게든 자신에게 당위성을 부여하여 위로하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모습이 그를 미소 짓게 만들었다.

“릴리, 언젠가 당신이 나를 죽여야 하는 때가 온다면, 그땐 반드시 망설이지 말고 날 죽여 줘.”

“정말 못되셨네요! 기껏 살려 놓았더니!!”

릴리가 그를 향해 눈을 치켜떴다. 카르낙은 그마저도 사랑스러워 웃으며 아내를 품에 끌어안았다. 릴리는 못 이기는 척 그의 품에 안겨 가슴팍에 얼굴을 비볐다. 그녀는 말했다.

“무슨 기분을 느끼는지 잘 알아요. 스스로의 존재가 혹 모든 이들에게 재앙이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그것은 늘 릴리가 느껴왔던 기분이었다. 알기어스의 만행을 알 때마다, 그의 미친 짓거리를 들을 때마다 그랬다. 저도 그를 닮아 한순간에 미쳐 버릴까 봐, 그래서 부친의 행적을 그대로 따라갈까 항상 두려웠다.

카르낙은 자신과 같은 것을 바라고 있었다. 내가 파멸이라면, 그렇다면 차라리 나를 죽여 달라는 소망. 그러나 죽여 달라는 그 말은 결국 절대로 그렇게 되고 싶지 않다는, 그렇게 될까 두렵다는 의미였다.

“만일 우리가 함께하는 데에 어떤 뜻이 있다면, 그건 결코 서로를 해치기 위해서는 아닐 거예요. 설령 그렇다 해도 난 그 뜻에 따르지 않을 거고요.”

“창조주를 반하겠다는 거야, 파니릴리 발투만? 아마네스 여신이 알면 노하겠어.”

그녀의 사자인 하얀 늑대를 죽였으니 이미 노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에게도 카르낙에게도 세상의 이치로는 설명할 수 없는 힘이 있다는 것은 안다. 남들과 다르다는 것도, 분명 그 힘이 주어진 이유가 있을 거라는 것도 안다.

“그녀가 나를 이곳에 이끌었다면요, 칼. 그녀는 자신의 아이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거예요.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당신을 등지는 일이 없을 거라는 걸요. 만일 그녀가 그것을 원한다면, 내가 그녀를 설득해 볼게요.”

카르낙은 또 웃었다. 신의 뜻이라면 늘 덮어놓고 따라야 하는 것이 엘버그인들의 의무이자 도리이거늘.

“릴리, 당신은 확실히 엘버그인보다는 투로에 더 잘 맞아.”

그게 바로 내가 너를 사랑하는 이유이다. 그래서 네게는 목숨을 잃어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카르낙은 그녀의 반듯한 이마에 입을 맞추고 아내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마치 엄마의 품에 안긴 아이처럼 그는 릴리의 숨소리를 조금 듣다 곧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동안 릴리는 카르낙을 대신해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염없이.

***

매짐은 로리아나에게서 얻어 온 사과 하나를 오코의 입에 밀어 넣고 놈이 그것을 씹어먹을 동안 흑마의 윤기 나는 몸의 윤곽을 눈으로 훑어보았다.

“넌 왜 이렇게 몸이 좋냐?”

대답도 못하는 짐승에게 묻는 매짐의 얼굴은 진지했다. 정말. 타고나길 이렇게 훌륭하게 타고난 걸까? 하긴. 왕을 태우고 전장을 누비며 그의 즉위를 도운 놈이니 보통의 말들과는 분명 다르리라. 길고 단단한 다리 하며, 날렵한 몸통 하며. 윤기가 좔좔 흐르는 털까지.

“이런 귀한 것들을 맨날 주니까 그렇지?”

역시 놈은 말이 없었다. 입에 든 싱싱한 사과를 우적우적 씹느라 바빠 그의 존재조차 잊어버린 것 같았다. 말에게까지 무시당하는가 싶지만 저는 맛도 보지 못한 사과를 놈은 먹고 있으니 확실히 저보다는 상전이었다.

“매짐!”

멀리서 카르낙이 그를 불렀다. 왕이 출발할 준비를 마친 것이다.

“예!”

매짐은 얼른 오코의 말고삐를 잡아끌었다. 왕은 왕이 아니었던 때에도, 아니 왕이 아닌 적은 없었지만 왕이 아닌 척했던 때도 당신은 종자 따윈 키우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가 저를 어떻게 생각하든 매짐은 순전히 자의로 그의 종자 노릇을 착실히 수행했다. 왕의 말을 돌보고 늘 윤기가 나도록 빗겨 주고 귀하고 값나가는 것을 누구보다 먼저 챙겨 먹이며 늘 왕에게 필요한 것은 없나 주위를 맴돌았다.

아쉽게도 지금껏 왕에게 필요한 것은 없어 보였다. 말을 돌보는 것 역시 그랬다. 시키지도 않은 짓을 부러 하며 그에게 젖은 낙엽처럼 딱 붙어 있으려 했다. 그러면 훌륭한 기사는 물론이오, 뛰어난 전사와 뛰어난 지배자가 되는 법까지 어깨너머로 보고 익힐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영광스러운 자리가 어디 있겠는가.

매짐은 자신에게 들이닥친 이 믿지 못할 영광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러며 더 큰 꿈을 꾸었다. 언젠가 왕의 오른팔이 되는 것.

카르낙 발투만은 인재를 등용할 때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제 마음에 드는 이를 고른다고 하였으니 있는 힘껏 수련한다면 못할 것도 없었다.

시골 대장간의 철부지 외아들에서 엘버그 왕의 둘도 없는 오른팔이 된다면 그보다 더한 금의환향이 없을 것이다. 부모님은 또 얼마나 대견해 하실까. 왕의 기사가 된 저를 본다면. 더하여 귀하고 어여쁜 여인을 얻어 후손을 볼 것이다. 그렇게 포드 가문은 매짐의 손에 의해 엘버그 왕국의 고귀한 명문가가 되는 것이다. 사내로서 이룰 수 있는 가장 큰 업적이었다.

“황순이는 어쩌고?”

카르낙은 매짐에게 오코의 말고삐를 건네받으며 대뜸 물었다. 눈을 치뜨다가 매짐은 꾹 참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모릅니다. 그 조랑말에 대해서는.”

“부모님께서 가진 재산을 다 팔아….”

“더 필요하신 것은 없으실까요, 폐하?”

“그래도 한동안의 네놈을 태우고 열심히 그 짧은 다리로 움직여….”

“고만하시죠, 거!”

기사의 꿈을 꾸며 점잖을 떨던 매짐이 촌뜨기처럼 발끈해 말을 이어갔다.

“저에겐 따로 말이 생겼다고요! 폐하께서는 제가 땅딸보 조랑말이나 타고 다니셨으면 좋겠습니까? 세상에 조랑말을 탄 기사가 어디 있어요!”

농담을 했으면 웃던가, 웃질 않을 거면 농담이었다고 이야길 하던가, 카르낙은 낯빛 하나 안 바꾸고 그를 쳐다보며 눈을 깜빡였다. 무심하고 무표정하기 그지없는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도리어 저가 울고 싶어져 매짐은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매짐 좀 그만 괴롭히세요.”

릴리가 끼어들자 카르낙의 망토를 잡아끌었다.

“미안해요, 매짐. 폐하께서 원래 농담을 진담처럼 하시고 진담을 농담처럼 하시고 그러세요. 매짐의 반응이 재미있으니 계속 놀리시는 거고요.”

황순이를 타고 싶어 탔나! 황순이를 갖고 싶어 가졌나! 틈만 나면 그걸로 못 놀려먹어 안달이면서 진담처럼 뻔뻔하게 농담을 던지니, 원 참. 차라리 그가 여느 귀족기사들 같은 치였다면 되는 대로 무어라 질러나 보았으라. 그러나 그는 제국의 왕. 그것도 그냥 왕도 아닌 카르낙 발투만, 투로들의 왕이며 가장 잔인한 전사가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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