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그렇게 하고 계시니 정말로 사내 아이 같으십니다.”
로리아나가 릴리의 차림새를 보며 빙긋 웃었다. 여종으로 분장을 시키려 했지만 더디게 자라난 반삭발의 머리가 마음에 걸렸다. 어쨋든 엘버그의 여자들에게 머리카락은 생명이 아니던가. 무채색의 터번을 씌우고 짧고 단출한 튜닉에 허름한 바지를 입힌 것은 그런 이유였다. 사내의 복장을 하고 나니 릴리는 여인이라기보다 아직 사춘기에도 접어들지 못한 어린 소년처럼 생경하게 느껴졌다.
“그런가요?”
릴리는 그 복장이 더없이 마음에 들었다. 편안하고 아주 잘 맞았으며 무엇보다 움직이기에 쉬웠다. 그라타에서는 늘 짧은 윗옷에 반바지, 혹은 아랫단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여밈 바지를 입었었다. 그래서일까, 이제야 자신에게 맞는 옷을 입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런 복장으로라면 어디든 마음껏 날아다닐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릴리는 정말로 펄쩍펄쩍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릴리, 그러다 넘어져.”
카르낙이 오코에 오르며 훈계했으나 릴리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저 오랜만에 자유를 실컷 만끽할 뿐이었다.
“영 분위기기가 다르시네요.”
매짐이 카르낙의 뒤를 따라 자신의 새 말에 오르며 릴리 대신 대꾸했다. 카르낙은 아주 잠깐 고개를 그쪽으로 돌렸다가 이내 릴리를 따랐다.
“원래부터 엘버그의 복식을 별로 안 좋아했어서 말이야. 왕비를 위해서라면 뜯어고쳐야 할 것들이 아주 많지.”
예법도, 복장도, 규율도, 제도도 모두 다. 그녀를 행복하게 해 주려면 확실히 모든 것들을 개혁해 놓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릴리가 엘버그에 남기로 한 이상 카르낙은 그것들을 모두 이룰 생각이었다. 그것도 아주 쉽고 빠르게.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 왕국을 통일하는 것이 중요했다. 하루빨리 테르조 진영을 장악하지 않으면….
“칼!”
릴리가 펄쩍 뛰며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카르낙이 오코의 고삐를 바짝 쥐며 은색 눈동자를 반짝이는 제 아내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흥분으로 발갛게 물든 볼을 한 채 외쳤다.
“저 좀 태워 주세요! 저도 같이 타고 갈래요!”
“오코에 말이야?”
“네!”
카르낙은 로리아나의 안락하고 화려한 마차를 바라보았다. 원래대로라면 로리아나와 함께 마차에 올라야 했다. 엘버그의 정숙한 귀부인들이 그러하듯이 릴리 역시 안전하고 편안한 마차로 목적지까지 모셔져야 맞았다.
하지만 엘버그의 전통 따위. 이제 막 아기 새가 날갯짓하듯 펄쩍거리며 뛰어다니는 파니릴리의 앞에서 무엇이 그렇게 중요하겠는가.
“좋아.”
무엇이든 릴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면 그것으로 되었다. 그것 외에는 무엇도 중요하지 않았다. 카르낙은 자신이 오코에서 내려 그녀를 올리고 뒤를 이어 자신도 오를 작정이었다. 그러나 릴리는 그 순서를 기다리지 않고 그의 소매 깃을 잡고 말등자 위 카르낙의 발등을 밟았다. 그대로 카르낙을 붙잡고 저 혼자 오를 작정이었다.
카르낙은 당황하여 얼른 그녀의 팔뚝을 잡았다.
“릴리!”
한차례 고함을 치며 간신히 균형을 잡자, 벌써 그녀가 저의 등 뒤에 올라앉아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릴리는 헤실헤실 웃으며 그의 허리를 꽉 껴안았다.
“됐어요. 이제.”
등 뒤에 아내의 말캉한 가슴이 바짝 닿았다. 느낌이 아주 이상했다. 한 번도 릴리를 제 등에 매달고 달린 적이 없는데. 늘 지니고 다니는 목걸이처럼 제 가슴팍에 담아 두어야 마음이 놓였었다. 그런데 릴리는 마음대로 그의 등 뒤에 자리 잡았다. 그러다 떨어지면? 제 허리를 감은 손이 풀려서 꼬꾸라지면? 혹시라도 달리다가 전력 질주라도 하게 되면?
“이제 가요! 어서요!”
릴리가 그를 흔들며 재촉했다. 바지를 입은 게 저리 신나는 일인가? 자신은 평생 치마를 입어 본 적이 없으니 그녀가 얼마나 해방감을 느끼는지 알 길이 없었다. 로리아나는 릴리가 말에 오르는 것을 확인한 후 마차에 올랐고 선두에 선 길잡이가 출발 신호를 보냈다. 하는 수 없지.
“꽉 잡아.”
“네!”
릴리가 카르낙의 허리를 더 힘껏 안았다. 조여 오는 느낌이 그리 나쁘진 않았다. 어쩌면 썩 좋은 것인지도. 창녀촌의 감시꾼과 몸종이라. 이것이 위장이 아니라 현실이어도 썩 안 될 조합은 아니지.
어쩌면 지금보다 신분은 더 미천했을지 몰라도 더 사는 것이 즐거웠을지도 모른다. 그녀에게도, 저에게도 지금보다 자신들을 옥죄는 속박 같은 것은 덜했을 테니. 지켜야 되는 것이 많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절제하고 참아야 하는 지금보다는 더 나은 처지가 되었으리라. 어쩌면 릴리가 신이 난 이유는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벗어 던진 여인의 의복처럼 엘버그의 여인이자 왕가의 일원으로서 그녀가 지녔어야 할 중압감에서 해방되어 버린 건지도.
부나비의 일행은 긴 행렬을 만들었다. 그들은 해가 떠서 질 때까지 계속해서 이동했고 해가 완전히 진 뒤에 짐을 펴고 휴식을 취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주변은 점점 더 사막으로 변했다. 로리아나의 말로는 리오에 다다를 때쯤에야 제대로 된 나무와 물을 만날 수 있다고 했다. 불과 일이 년 전까지만 해도 대륙이 이토록 가물지는 않았었는데 불과 그 짧은 사이에 아무것도 살 수 없는 죽은 땅이 되어 버렸다.
호사스러운 왕국의 생활에 적응된 탓인지, 아니면 오로지 왕위 찬탈을 위해 이곳에 방문했을 때에는 맹목적이었기 때문에 느끼지 못했던 것인지 평범한 인간으로서 이 긴 갈증과 뜨거움을 견디기엔 무척 힘이 들었다. 아마 로리아나를 만나지 못했다면 매짐과 릴리 그리고 저 셋이서 과연 이 뜨겁고 거친 사막을 견뎌 낼 수 있었을까 장담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카르낙은 국왕 내외를 위해 마련된 작은 천막에 앉아 짧은 밤하늘을 즐겼다. 단둘만의 잠자리를 만들고 나면 작은 촛대 하나 놓아둘 만한 자리가 간신히 남을 정도의 단출한 크기였다.
그는 휘장을 걷어 놓고 포도주를 홀짝이며 곧 태양 빛에 사라질 별들을 바라보았다. 잊고 있던 친구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을 그리워하다가 또 어떤 추억 속에서는 그 고통에 함께 매몰되었다가 또 다른 기억을 끄집어내어 헤맸다. 기억해야 할 것들도 생각해야 할 것들도 아주 많았다.
옆에서 뒤척이던 릴리가 어느새 깨어나 카르낙의 허벅지 위에 손을 얹었다. 기척을 느낀 카르낙이 고개를 돌려 누워 있는 아내를 보며 따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깼어?”
릴리가 눈을 들어 남편이 보던 밤하늘에 시선을 주었다. 무수히 많은 별들이 쏟아질 듯 하늘 위에 맺혀 있었다. 자신은 그러한 장면을 낭만적이라 생각하지만 과연 카르낙 역시 그러할까. 그는 밤하늘의 별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궁금했다.
“그냥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 가만히 앉아 있으면 온갖 잡생각을 하게 되어서.”
마치 그녀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그가 먼저 대답했다.
“그리고 당신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있었지.”
카르낙의 말에 릴리가 눈을 깜빡였다. 나에 대해? 그녀는 물었다.
“무엇을요?”
“당신이 나를 살려 낸 기적에 대해서 말이야.”
릴리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으며 피식 웃었다. 벗어 놓은 터번 아래 까끌거리는 은색 머리카락이 눈처럼 달빛에 반짝거렸다.
“그건 내가 아니라 말리가 일으킨 기적이에요. 난 그저 그녀가 시키는 대로 했는걸요.”
“당신이 하얀 늑대를 죽였잖아. 나도 죽이지 못한 그 거대한 녀석을.”
릴리는 그저 어깨를 으쓱했다. 그 일에 대해 무어라 답해야 할지 아직 자신도 정리하지 못했다. 다만 그냥 그런 일이 일어나 버렸다.
“아직 저도 잘 몰라요. 하지만 내가 죽인 건 아니에요.”
그래. 죽인 것이 아니다. 그냥… 그 늑대가 제 몸을 내어 준 것이다. 후회할 거라며. 하지만 언제가 되어도 후회하진 않을 것 같았다. 그 덕에 카르낙을 살렸고 무슨 일이 있어도 그를 살린 것만은 후회하지 않으리라.
“전 어릴 때부터 동물들과 무척 잘 지냈어요. 가축들과도 그랬고 들짐승들과도 그랬어요. 사슴이나 다람쥐나 토끼 따위도 절 보면 그다지 피하지 않았거든요. 사나운 맹수들은 별로 만나 보지 못했고요.”
카르낙은 손을 들어 릴리의 까슬거리는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내아이 같은 모습의 릴리도 예쁘고 사랑스럽다고 생각되었다. 그녀는 도톰한 입술을 오물거리며 무언가를 잠깐 생각하다가 다시 커다란 눈망울을 들어 그를 보았다.
“미리 이야기하지 못해 미안해요. 만일 알았다면 폐하께서 늑대에게 달려드는 일은 없었을 텐데요.”
“알았어도 달려들었을 거야.”
그라타에 사는 그런 작고 연약한 날짐승과 하얀 늑대는 비교조차 되지 못한다. 그러니 같은 상황이 되풀이된다 한들 카르낙은 망설이지 않고 놈에게 달려들었을 것이다. 놈을 죽이지 못하고 역으로 죽을 지경까지 간 것은 정신을 놓아 버린 까닭이었다.
두려움이 그의 평정을 앗아 갔고 그것이 그를 나약하게 만들었다. 릴리를 만나 처음 가져 보는 두려움이었다. 카르낙은 자신이 그것을 통제하지 못하는 것이 무서웠다. 그녀가 옆에 있으므로 해서 자꾸만 자신이 나약해지는 것이 무서웠다.
그러다가 그녀를 잃게 될까 봐 두려웠다. 그리고 그 두려움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도돌이표처럼 반복되었다. 그 고리를 끊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파니릴리를 영원히 제 곁에 붙잡아 둘 순 없다. 또 붙잡아둘 수 있다 해도 그녀를 행복하게 해 줄 수가 없었다.
네가 곁에 있다면 아무것도 바랄 것이 없다고만 생각했는데. 이젠 역으로 뺏기고 싶지 않아 두려운 것이 많아졌다. 이래서야 핀의 말처럼 되는 꼴이다. 그놈의 말대로는 곧 죽어도 되고 싶지 않은데 말이다.
어깨에 릴리의 손길이 느껴졌다. 보드라운 감촉에 카르낙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눈을 빛냈다.
“신기해요. 어떻게 이렇게 감쪽같이 나을 수 있을까요? 엘버그의 그 어떤 치료사도 말리처럼 완벽하게 폐하를 고쳐 놓진 못할 거예요. 그녀야말로 아마네스의 축복을 받고 태어난 사람이 아닐까요?”
카르낙은 작고 따듯한 아내의 손 위에 저의 단단한 손을 겹쳤다.
“말리의 마술이 아니야.”
“네?”
“그건….”
카르낙은 말을 고른 후 다시 입을 열었다.
“길란 포드가 내게 보여 준 것이 있어. 릴리. 그는 내게 불이 그의 몸에 어떤 작용을 하는지 보여 줬어. 뜨겁게 달군 숯이 닿은 곳은 금방 새살이 돋아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