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전에도 해 본 적이 있으니 괜찮을 거야. 설사 원망하더라도 하는 수 없지. 지금은 이것이 최선이니까. 그는 아내의 하얀 뺨을 한 번 쓸어 보았다.
“릴리.”
“…….”
아내는 대답이 없었다. 코 아래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자 따듯한 숨결이 안정적으로 뿜어져 나왔다.
“자를게.”
아내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어차피 기다려도 듣지 못할 것이 뻔하니 자신의 결심대로 해야 했다. 그는 허리춤에서 작은 단검을 꺼내 릴리의 머리카락을 거침없이 잘라 내기 시작했다.
에이가가 매일매일 공들여 빗어 넘겼던, 하얗고 눈부신 은발이 사정없이 잘려 나갔다. 그녀의 은발을 너무나도 사랑하지만 이런 때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가 파니릴리라는 사실을 알려 은신을 어렵게 만들 뿐이다.
듬성듬성 잘려 엉망인 머리 위로 그는 제 망토 한 귀퉁이를 찢어 둘둘 감았다. 나중에 에이가가 이 꼴을 보면 비명을 지르며 졸도하겠지. 아니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먼저 졸도할지도 모를 일이다.
듬성듬성 나 있는 솜털 위에는 젖은 흙을 집어 발랐다. 깨끗하고 말간 얼굴 위도 빼놓지 않았다. 최대한 지저분하게 바르는 것이 핵심이었다. 아내의 위장을 다 마친 이후 카르낙은 제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모았다. 성인이 된 후 한 번도 자른 적이 없었다.
그의 검고 긴 머리카락은 그 자체로 투로의 상징이었고, 또한 카르낙 발투만의 상징이었다. 그는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왕좌에 앉은 자신의 모습이 좋았다. 전장에 나설 때도 늘 산발을 한 채로 검을 들었다. 한낱 짐승만도 못한 투로에게 무릎 꿇고 처참하게 죽어 가고 있음을 뼈저리게 느끼게 하고 싶어서였다. 어떻게 보면 자부심이었다. 새삼스레 그것에 이름을 붙이자면 그랬다.
카르낙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제 머리카락도 단번에 잘라 냈다. 치렁치렁하고 무거운 것이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동시에 앞으로 우르르 쏟아진 머리카락을 그는 어색하게 쓸어 넘겼다. 낯설지만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 들었다.
카르낙은 그 위에 다시 망토를 눌러쓰고 오코를 향해 ‘쯔쯔쯔’ 가볍게 혀를 찼다. 그러자 오코는 주인의 명령을 알아듣고 무릎을 굽혀 몸을 낮췄다. 카르낙은 칭찬의 표시로 그의 코를 몇 번 두드린 후 모포로 꼼꼼히 덮은 아내를 안고 오코의 안장에 올라탔다. 다시금 등을 몇 번 두드리니 오코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며 투레질을 했다. 카르낙은 어르듯 그의 갈퀴를 쓰다듬어 주었다.
“미안해, 오코. 조금만 더 힘내 다오.”
***
매짐 포드는 대장장이 길란의 하나뿐인 아들이자 하나뿐인 제자였다. 뜨거운 낮에 불을 만지는 것이 싫어 그는 주로 해가 지고 나서야 쇠망치를 잡았다. 그런 아들을 양친은 ‘밤도깨비’라 부르며 싫어했다. 늦은 밤에 망치 소리를 내는 것은 마을 이웃에게도 폐를 끼치는 것이라며 매일 잔소리를 했으나 매짐은 듣지 않았다.
주민들에게 폐를 끼치기에 마을과 대장간은 제법 거리가 있었다. 불이 싫고 무섭다는 이유로 그들은 제집 주변에 대장간이 있는 것이 싫다 했다. 아버지는 그것이 엘버그의 오랜 전통이고 문화라 하였다.
푸줏간의 아들도 이보단 더 나은 대우를 받을 거라며 허구한 날 투덜거렸으나 아버지는 이 일에 자부심을 가지라 하였다. 푸줏간 없이는 살 수 있어도 대장간 없이 살 수 있는 이는 없다며 말이다. 그러나 아직 그러한 사실을 느껴 본 적은 없으니 그에게는 뜬구름 같은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그러한 연유로 다소 화가 많은 청춘기에 들어선 매짐의 쇠망치에는 약간 과한 힘이 들어가 있었다. 쾅! 쾅! 한 번씩 망치를 내려칠 때마다 한 구절씩 씹어 뱉어 냈다.
“빌어먹을! 포드 가문! 왜! 하필! 포드가에서! 태어나서! 내! 팔자야!”
그러고는 힘껏 두드린 날붙이를 물에 담갔다. 치이이이이익, 하는 소리를 내며 연기가 피어오르자 조금은 기분이 개운해졌다. 성질이 더러워지는 것은 다 이 망치질 탓이다. 아버지는 네 성질이 더러워 포드가에서 태어났다고 하지만 천만에! 망치질을 해서 성격이 더러워진 것뿐이다!
식은 날붙이를 다시 화로에 집어넣고, 달아오른 쇳덩이 하나를 막 집어낼 때였다. 따그닥따그닥 생경한 소리가 들렸다. 매짐은 눈을 가늘게 뜨고 완만하게 이루어진 언덕 아래를 바라보았다.
실루엣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서 나타났다. 대장간 기둥의 횃불에 흑마의 새까만 갈퀴와 기골이 장대한 사내의 면부가 비쳤다. 더러운 모래와 흙에 엉망이 된 추레한 외형도 사내의 위압감을 감추지는 못했다. 그것은 흑마 역시 마찬가지였다. 놈은 마을에서 밭일에 쓰는 말들과는 다르게 길고 단단한 다리를 갖고 있었다.
“…….”
외부인, 분명 외부인이다. 외부인을 보는 것은 처음이어서 매짐은 사내와 눈을 마주치고도 계속 입만 벌리고 있었다.
“도움이 필요합니다.”
도움을 구하는 사람치고 딱딱하기 그지없는 어투. 한눈에 보기에도 위험한 분위기를 지닌 사람. 그러나 매짐은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첫눈에 이 장골의 남자에게 반해 버렸다. 딱 자신이 되고 싶은 이상의 모습이었다.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정확히 자신이 꿈꾸던 그대로였다. 거기다 아내까지 있다니 더 완벽하지 않은가!
매짐은 망치와 두꺼운 가죽 장갑을 벗어 던지고 재빠르게 사내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기꺼이 두 손을 벌리며 말했다.
“아내분부터 내려 주십시오. 제가 안겠습니다.”
“…….”
그러나 사내는 성급히 행동하지 않았다. 그는 주위를 한 번 둘러본 후 물었다.
“이곳엔 당신 혼자 삽니까?”
매짐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양친과 함께 삽니다. 이 대장간은 아버지의 것이거든요. 뒤쪽의 집으로 모시겠습니다. 누추하지만 두 분이 잠시 머무르시기엔 괜찮을 겁니다.”
그러자 사내는 매짐의 품에 조심스레 아내를 내려 주었다. 모포에 누에고치처럼 싸인 여자는 어린아이처럼 가벼웠다. 모레와 흙을 덮어쓰고도 면부가 백지장처럼 새하얀 것을 보니 많이 쇠약한 것이 틀림없었다.
매짐은 괜스레 마음이 조급해져 꿀꺽 침을 삼켰다. 일단 따듯한 곳에 눕히고 뭐라도 먹여야 할 것이다. 매짐이 여자의 얼굴을 살피는 동안 사내가 훌쩍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보다 머리통 하나가 더 크고도 남았다. 제 정수리가 간신히 그의 어깨에 닿을까 말까. 생각보다 더 큰 사내의 키에 매짐은 잠시 당황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남자는 스물까지 큰다고 했으니까. 아직 가능성은 남아 있다.
사내가 성큼 다가와 매짐의 손에서 다시 여자를 안아 들었다. 가벼운 짐짝을 들듯 쉽고 날랜 움직임이었다. 매짐은 흘깃 곁눈질하여 사내가 허리에 찬 장검을 보았다. 장검치고도 제법 크고 무거워 보였다. 뭐 하는 사람인지는 몰라도 검을 쓰는 자인 것은 분명했다. 심장이 널을 뛰었다. 나고 자라기를 열여덟 해. 드디어 운명의 사내를 만나고 말았다!
매짐은 오코의 말고삐를 꽉 움켜쥐었다. 다시는 놓지 않을 듯한 기세였다.
“따, 따라오십시오, 기사님!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이스바.”
“예?”
“그냥 이스바라 부르면 됩니다.”
“…이… 이스바 경.”
“…….”
카르낙은 더 대꾸하지 않았다. 어차피 제멋대로 부를 것이 뻔한 듯하니.
“저, 저는 매짐이라고 합니다. 매짐 포드. 이 대장간을 아버지와 함께 운영 중이죠!”
주근깨가 가득한 갈색 머리의 청년. 언뜻 핀과 닮은 듯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눈동자는 초록색이라기보다 푸른색에 가까웠다. 어두워 식별이 잘 되지 않지만 아마도.
“어머니! 아버지!”
매짐이 반복해서 외쳤다.
“어머니! 아버지! 어서 나와 보세요! 빨리요! 어서요! 빨리!”
아들의 독촉에 못 이겨 포드 내외가 촛불 하나를 들고 문밖으로 나왔다. 겉옷도 제대로 챙겨 입지 못한 흐트러진 행색이었다.
“아니 한밤중에 대체… 웬….”
포드 부인은 아들에게 잔소리를 하려다 흑마를 보고 말을 멈추었고, 그 뒤로 나타난 건장한 사내를 보고는 남편의 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길란 포드가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아들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이쪽은 이스바 경과 그의 아내분이세요.”
“…….”
매짐의 소개에 길란 포드가 눈을 가늘게 떴다. 희미하게 사내가 안은 다갈색 모포 뭉치가 보였다. 그러니까 저것이 짐 덩이가 아니라 사람이란 건가.
“그냥 이스바입니다.”
카르낙이 제 가명을 정정하고 덧붙여 말했다.
“아내가 몸이 좋지 않습니다.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매짐에게 했듯 딱딱한 어투였다. 그러나 그의 품에 안겨 있는 작고 가녀린 실루엣을 무시할 수가 없어 길란은 촛불을 들고 그에게 다가갔다. 남편의 뒤에 달라붙어 힐끔 고개를 내밀어 본 포드 부인은 신음 소리 같은 것을 흘렸다.
“얼굴이 백지장이네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아내가 며칠 전 유산을 했습니다.”
“…세상에!”
포드 부인이 비명처럼 고함을 질렀다. 포드 부인은 자신의 과거를 떠올렸다. 매짐을 낳기 전에 아이 넷을 유산했다. 산파는 그녀에게 다시는 임신할 수 없을 것이라 하였지만 아마네스 여신의 가호 덕에 매짐을 낳을 수 있었다.
하여 포드 부인은 여인의 유산에 대해서는 잘 안다. 그것이 얼마나 힘들고 허망하며, 여인의 몸을 갉아먹어 죽음의 문턱에 이르게 하는지 말이다.
“안으로 들어오세요! 어서요!”
그러니 더 망설일 것도 없었다. 포드 부인은 대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러고는 부부의 침실을 선뜻 내어 주었다.
“여기에 눕히세요.”
카르낙은 포드 부인이 가리키는 곳에 릴리를 똑바로 눕혔다.
“여보. 대장간에 가서 숯덩이 몇 개를 좀 가져와요. 장작도요. 난로를 떼야겠어요. 그리고 물도 부탁해요. 화로에 물을 데워야 하니까요.”
길란은 무어라 참견을 하기도 전에 아내의 명령에 넋을 잃고 말았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하고 있으니 포드 부인이 제 팔을 걷어붙이며 말했다.
“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