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말을 준비했어. 왕비 전하는 움직일 수 없으니 네가 그녀를 안고 타야 해.”
“…….”
카르낙은 망설였다. 이것이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면 그럼 병사들은? 그들을 방패 삼아 자신은 달아나야 하는가? 세상에 이보다 더 한심한 사내는 없다. 아니, 사내라 하지도 못할 것이다. 투로들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그럴 수 없어.”
“카르낙.”
“그런 비겁한 짓은….”
카르낙은 다시 한번 제 아내를 돌아보았다. 저 연약하고 파리한 꽃을 어떻게 해야 살릴 수 있을까.
“리쿠스가 필요해.”
“대기 중이야.”
“…핀, 네가…”
“난 네놈의 근위대장이야. 어디든, 네가 있는 곳으로 따라갈 거야.”
핀은 단칼에 그의 부탁을 거절했다. 카르낙 발투만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것이 그의 의무이자 도리이며 삶의 목표다.
“네 여자의 목숨을 다른 이에게 맡길 수 있겠어? 엘버그를 통틀어 너보다 더 훌륭한 장수가 어디 있어?”
그래도 네가 가 준다면, 핀. 그럼 조금 안심이 될 것 같은데. 망설이는 왕에게 핀은 덧붙여 이야기했다.
“이건 도망치는 게 아니야. 뒷일을 도모하기 위해 잠시 후퇴하는 것뿐이야.”
“…….”
“너와 왕비가 안전하게 탈출할 시간을 벌고 나면 병사들도 모두 후퇴할 거다. 인명 피해는 있겠지만 현재로선 이것이 최선이야.”
“…….”
“망설일 시간이 없어. 이러다 모두 다 죽어.”
카르낙 발투만은 여전히 혼란스러워 보였다. 릴리는 제 남편이 장부로서의 자존심과 아내와의 도피를 두고 가늠하는 모습을 더는 지켜볼 수가 없었다. 그가 군대를 두고 도망치는 것이 싫듯, 파니릴리 역시 죽을 것이 뻔한 전장 속에 남편을 두고 떠날 수는 없었다.
“난 내 남편 없이는 아무 데도 안 가요.”
릴리의 완강함은 거의 명령조에 가까웠다. 핀은 그녀의 태도에 한시름 놓은 듯 크게 안도하였다. 카르낙은 그런 릴리의 모습에 크게 놀란 것 같았다. 동요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내가 미워 죽을 법도 한데. 차라리 내가 죽어 사라져 버렸으면 할 법도 한데. 그것이 자연스러운 인간의 마음 아니던가. 그런데 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여자. 그렇기에 이토록 네가 애틋한 걸까.
“이 상황을 벗어나면 리오에서 만난다.”
그는 멍하게 중얼거렸다. 핀이 그의 뜻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든 살아서 리오에서 보자고. 알겠지?”
“네, 폐하.”
막사를 지키던 병사들이 힘주어 대답했다. 그제야 카르낙은 이불째로 릴리를 번쩍 안아 들었다. 릴리는 카르낙의 말로는 누가 남고, 누가 떠나는 것인지 분간하지 못했다. 저와 함께 가는 이는 그래서 남편일까, 아니면 저 병사들일까. 그녀는 아직 힘도 제대로 안 들어가는 손끝으로 그의 옷깃을 구겨 쥐었다.
“나 혼자는 안 가요.”
카르낙이 걸음을 뗐다.
“아내를 지키는 것이 남편의 의무잖아요. 남편으로서 의무를 다하세요.”
천막을 가르고 뚜벅뚜벅 걷기만 할 뿐 그에게서 이렇다 할 대답이 없자 릴리는 초조해졌다.
“당신 없이는 아무 데도 가지 않겠어요. 내 말 듣고 있어요?”
대기 중인 검은 말이 보였다. 카르낙은 제 아내를 핀의 품으로 넘겼다. 옷깃을 움켜쥐었던 손이 맥없이 풀렸다. 릴리는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달리는 말에서 뛰어내릴 거예요. 고꾸라질 거라고요. 지금 내 옆엔 로로도, 에이가도, 세일린도 없는데 나 혼자는 못 살아남아요! 난 지금 큰 짐 덩어리나 다름이 없단 말이에요!”
카르낙 없이 혼자 살아남는 것은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그가 없이 저 혼자 뚝 떨어져 낯선 곳을 방황할 자신이 없었다. 언제나 누군가에게 속해 있던 여자였다. 그 덕에 분에 넘치는 보호를 받고 자유를 누렸다.
아는 이 없는 낯선 엘버그의 땅. 아직 문화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이 생경한 땅 한가운데에 내팽개쳐진다 생각하면 눈앞이 깜깜했다. 릴리는 자신이 이토록 겁이 많고, 보호를 필요로 한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게다가 지금 같은 상황엔 더욱더 간절하였다. 절박한 마음에 릴리는 눈을 질끈 감고 악을 썼다.
“칼!”
동시에 그녀의 몸이 부드럽게 들려 익숙한 품 안에 안착하였다. 릴리는 힐끗 눈을 떴다. 자신은 카르낙의 품에 있었다. 정확히는 말 위에 앉은 카르낙의 품이었다. 혹여나 말에서 떨어지지 않게 핀은 릴리의 허리와 가슴에 가죽끈을 두르고, 카르낙의 등 뒤에서 바짝 조였다. 기분이 아주 이상했다. 꼭 갓난아이라도 된 것 같았다. 언뜻 올라의 품이 떠오르기도 했다. 릴리는 단단한 가슴팍에서 고개를 들어 남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서글픈 색의 눈동자가 참으로 단단했다.
“그 짐 덩어리가 누군가에겐 삶의 전부이기도 해. 릴리.”
카르낙은 망토를 깊이 눌러쓰고 오코의 옆구리를 힘껏 찼다. 두 사람의 무게를 견디며 오랫동안 전력 질주를 할 수 있는 군마는 오직 오코뿐. 이 정력적인 수말이 아니고서야 누구의 등에 태우더라도 파니릴리의 생명은 장담할 수가 없다. 설사 자존심이 처참히 무너져 내리더라도, 자신의 병사와 전우를 등진 채 도망친 왕이라는 오욕을 얻게 되더라도 하는 수 없었다. 당장은 파니릴리가 더 소중하니까.
“서둘러!”
핀이 말고삐를 바짝 쥐며 명령했다. 핀의 백마는 쏜살같이 오코의 뒤를 따랐다. 그다음으로 리쿠스, 리쿠스의 뒤로 근위대원 두 명이 더 따랐다.
처음엔 수월할 것 같았다. 수풀이 우거진 들판을 지나 숲으로 들어갔을 때 이젠 살았구나, 릴리는 잠시 마음을 놓았었다.
“놈들이야!”
핀의 외침에 뒤를 돌아보았던 카르낙이 말고삐를 더욱 단단히 쥐었다. 흑마는 더 속도를 붙였다. 곧 제 옆으로 쉬이익, 하는 소리를 내며 무언가가 빠르게 지나가 나무에 박혔다. 화살! 릴리는 카르낙의 등 너머를 주시했다.
수풀이 우거져 형체를 정확하기 분간하기는 어려웠으나 날카로운 칼과 창들이 부딪히며 일으키는 불꽃들이 보였다. 카르낙을 추격하는 이들은 사방에서 나타났다 사라졌다. 전부 다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서 꼭 분신술이라도 쓰는 듯했다.
뒤따르던 병사 둘이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한 명의 가슴엔 기다란 창이 꽂힌 채였다. 안 돼! 릴리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그다음은 리쿠스였다. 그는… 그는 치료사이지 무기를 다루는 법도 알지 못하는 자인데. 핀이 말의 속도를 늦추고 검을 빼 들었다. 하늘을 뚫고 비가 내리듯 화살들이 새까맣게 몰아닥치고 있었다. 핀이 검을 휘둘러 리쿠스를 그로부터 보호했다. 칼날에 부러진 활들은 사방으로 튀었고, 빗나간 것들은 퍽, 퍽 소리를 내며 바닥과 나무에 박혀 들었다.
갑자기 리쿠스를 태우고 있던 말이 히히힝, 하는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리쿠스는 어쩔 겨를도 없이 앞으로 고꾸라져 바닥에 처박혔다. 말의 뒷발이 화살에 관통당하고 만 것이다.
“리쿠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비명을 지르는 것뿐, 시야에서 그는 점점 더 멀어져 갔다. 핀이 달리는 것을 멈추고 말 머리를 반대로 돌리는 것이 보였다. 그는 시간을 벌기 위해 추격자들과 정면 대결을 할 셈인 것이다. 안 돼. 안 돼. 죽을 거야. 모두 다 죽고 말 거야.
“…칼! 피, 핀이!”
“리오에서 만난다! 모두 다! 우린 리오에서 만날 거야!”
분명 그렇게 약속했다. 그러니 전부 살아서 리오에서 볼 것이다. 핀도, 리쿠스도 모두 살아서. 그러니 지금은 어떻게든 살아남는 수밖에 없다. 살아서 어떻게든 리오로 입성하는 수밖에 없다.
한 차례 위기가 넘어가고 나면, 어쩌면 핀이 병사들을 다시 소집하여 먼저 저를 찾으러 올 수도 있었다. 그게 아니면 캘던성에 소식이 전해져 루이스가 군대를 이끌고 올지도 몰랐다.
살아 있기만 하면, 어떻게든 뒷일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반드시 살아야 한다. 카르낙은 이를 까득 갈았다. 테이먼 테르조에 대한 분노가 솟구쳤다. 그러다가 그 분노의 화살은 다시 고프리와 코르넬리오에게 향했다. 그러다가 그들을 탈출시켜 준 릴리에게, 그러다 릴리와 반목만을 하던 자기 자신에게.
어디까지 뛰었을까. 밤은 깊었고, 오코가 거친 숨을 내뱉은 지는 오래되었으며 점점 더 녀석의 걸음은 느려졌다. 카르낙은 제 흑마의 등을 몇 번이고 두드리며 얼렀으나 그리 멀리 가지는 못할 것 같았다. 무엇보다 오랜 시간 달리는 말에 묶여 있던 릴리의 낯빛이 창백하였다.
잠이 든 것인지, 아니면 다시 정신을 잃은 것인지 걱정되어 카르낙은 한시라도 빨리 쉴 수 있는 곳을 찾아야만 했다.
칠흑 같은 밤, 가까운 곳에서 불빛이 보였다. 하늘 위로 계속해서 치솟는 연기를 보니 대장간이 틀림없었다. 대장간이 있다는 것은 분명 근처에 마을이 있다는 뜻이었다. 카르낙은 멀루아와 리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작은 마을이 있었는지 떠올려 보았다.
여러 영토를 정복하러 다닌 덕에 그의 지도는 세밀한 부분까지 정밀하게 묘사되어 있었으나 두 도시 사이의 작은 마을에 대해서는 기록한 적이 없었다. 게다가 이렇게 깊은 숲속의 마을이라면 발견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카르낙은 마을에 들어가기에 앞서 릴리를 안은 채 말에서 내렸다. 꽉 묶었던 가죽끈을 풀고, 평평한 바닥에 그녀를 내려놓고는 절그럭거리는 판금 흉갑부터 풀었다. 군인처럼 보여서는 안 된다. 이런 작은 마을의 사람들은 외부인에게 지극히 폐쇄적이다.
하물며 군인이라면 더욱더 그럴 것이다. 적이라 생각하여 장정들이 무장을 하고 덤빌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처럼 모두가 지쳐 있는 상태에서 그런 상황에 맞닥뜨릴 순 없었다. 위험했다.
그러니 어쩔 수 없어, 릴리.